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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잠을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18/110)

18. 잠을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2021.06.03.

강준이 집에 도착한 건 새벽 2시가 좀 넘어서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아내가 일찍 퇴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 잔뜩 신이 났을 것이다. 모처럼 갖게 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느라 남편은 까맣게 잊었을 테고. 잠자리에도 편히 들었을 테고. 하루 정도는 아내를 그렇게 풀어주고 싶었고 편히 잤으면 했다. 동시에 단 하루라도 풀어주기 싫은 마음과 오늘만큼은 아내가 춥게 잤으면 했다. 그럼 남편이란 존재를 한 번 정도는 떠올릴 것도 같아서. 현관 로비를 지나 거실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소파에 웅크린 채 잠이 든 작은 형체가 그의 시선을 붙든다. 당연히 침대에서 편히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내였다. 강준의 시선이 아내의 옆으로 느릿하게 흘러갔다. 물이 다 식은 머그잔, 펼쳐진 책, 소파 밑으로 흘러내린 담요. 당연히.

16564541254505.jpg“날 기다린 건 아닐 테고.”

소파로 다가간 강준은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했다. 유난히 긴 속눈썹이 내려앉은 여린 눈가. 가는 숨을 흘리는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 부드러운 머리칼에 반쯤 가려진 작고 갸름한 얼굴. 화장을 했는데도 잠이 든 아내의 모습은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살며시 뺨에 손을 대자 느껴지는 온기에 이상하게 한숨이 나온다. 이대로 둘까. 깨울까. 안아서 옮겨줄까.

16564541254505.jpg“잘해주기로 했으니까.”

고민이란 걸 하기도 전에 이미 강준은 아내를 안고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제 품에서 잠이 든 아내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무방비해서야. *** 샤워를 하고 나온 강준은 잠이 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선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추위를 어지간히도 타는 듯했다. 침대에 누웠지만 강준은 잠이 오지 않았다. 뭔가 빠진 허전한 기분인데 뭔질 모르겠으니 답답하다. 그때 강준의 다리 밑으로 무언가가 꼬물꼬물 파고든다.

16564541254505.jpg“…….”

고개를 틀자 원래의 자리에서 사선으로 누워 있는 아내가 보였다. 이제 뭘 어떻게 할까 싶어 강준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같이 잔 첫날 밤부터 지금까지 안고 잤다. 하지만 아내가 품에 안겨드는 걸 목격한 적은 처음이니까. 발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내는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아늑한 품을 찾아, 따스한 온기에 홀린 것처럼, 잠이 든 채로. 아내가 품을 파고든 순간 강준은 깨달았다. 허전한 건 제 품이었고, 빠진 건 아내였다는 걸.

16564541254505.jpg“이거였네.”

체념 어린 중얼거림을 흘리며 강준은 아내를 품에 끌어안았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고 몸정은 더 무섭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준은 또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16564541254505.jpg“…….”

이번엔 아내의 입술이 문제였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안고 있으니 맨 가슴에 닿는 아내의 숨결이 너무 적나라했다. 도대체 잠을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는 수 없이 강준은 아내를 조심히 흔들었다.

16564541254505.jpg“이봐요, 유태령 씨.”

일어나라고 흔들었더니, 품을 파고든 아내는 이제 말랑한 입술까지 비벼 댄다. 가슴에서 발열된 열기가 온몸으로 번지며 하체로 밀집되는 기분이었다. 더이상은 위험할 것 같아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자 잠결에도 아내는 허리를 감은 손에 깍지까지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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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4541254505.jpg“무슨 삼성동 논개도 아니고.”

결국 강준은 탈출을 포기했다. 이것도 잘해주는 방법 중 하나라면 이 한 몸 기꺼이 내주는 수밖에. 하지만 잠이 든 아내에게 경고는 해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16564541254505.jpg“진도는 여기까지만.”

귓가에 속삭여주며 강준은 아내를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16564541254505.jpg“우리 순수하게 잠만 잡시다.”

기다렸다는 듯 더 파고드는 아내 때문에 한숨은 나오는데. 온몸으로 번지는 폭발적인 열기 때문에 잠은 점점 더 달아나는데. 지금 이 순간이 싫지만은 않다. 몸은 괴롭지만 텅 비었던 가슴으로 포근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 같아서. 자신의 품에서 편히 잠이 든 아내를 보는 게 이상할 만큼 기분이 좋아서. *** 터엉-! 텅! 터어어엉! 새벽부터 벽을 묵직하게 울리는 공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실내 테니스장을 가득 메웠다. 벌써 한 시간째였다.

16564541254505.jpg“하아, 하아, 하아.”

하지만 강준은 일정하게 숨을 끊어내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파워풀한 샷을 휘둘렀다. 터질 것 같은 에너지를 몸 안에 내재하고 있기 힘들어서였다. 격렬한 운동으로 발산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쏟아내야 했다. 날렵한 얼굴선을 타고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여전히 강준의 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차올라 있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올 때까지 강준을 잠 못 들게 한 아내가.

16564541254505.jpg“제발.”

라켓을 휘두르는 손아귀의 힘이 폭발적이다.

16564541254505.jpg“좀.”

테니스장 안을 날아다니는 공과 거친 숨소리는 더 빠르고 격렬해졌다.

16564541254505.jpg“사라져.”

내 머릿속에서. 하지만 잊으려 할수록 아내는 더욱더 비집고 들어와 뇌를 좀먹고 있었다. 라켓마저 벽에 내던진 강준은 폐의 통증을 호소하며 허리를 굽혔다.

16564541254505.jpg“빌어먹을.”

새벽 내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다. 아내가 알리샤 바튼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널 안았을 테니까. 그때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우웅 울렸다. 천천히 허리를 편 강준은 발신인을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

16564541254505.jpg“보고하세요.”

아내의 뒷조사를 맡긴 유능한 사설 탐정이었다.

16564541282749.jpg[알리샤 바튼이 만났던 남자들을 찾아가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윤 실장이 올린 알리샤 바튼에 관한 보고서는 객관적인 루트로 조사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사설 탐정에게는 주관적인 루트로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16564541282749.jpg[남성 편력이 굉장한 이유가 있더군요. 그녀는 연기자라 해도 될 만큼 팔색조 매력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만났던 남자들마다 모두 그녀를 다르게 기억해서 설명만 들으면 동일 인물이 아닌 줄 알았으니까요.]

이건 보고서에 없는 내용이다. 알리샤 바튼을 만났던 남자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16564541282749.jpg[알리샤 바튼은 화끈한 성격에 잘 놀고, 지적이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납니다. 대화도 잘 통하고 잘 웃고 감정에 솔직합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모두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늘 선불폰을 쓰고 자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사설 탐정의 열띤 보고를 강준은 더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16564541282749.jpg‘연기자라 해도 될 만큼 팔색조 매력을 가진 여성분이었습니다.’

그 말만이 끊임없이 귓가에서 메아리 칠뿐. 통화를 끝낸 강준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16564541254505.jpg“그랬단 말이지.”

자꾸만 헛웃음이 나오려 한다. 아내의 연기를 이노의 압력 때문이라고 착각했다는 게 우스워서. 아내는 그저 자신의 안에 있는 수많은 모습 중 하나를 태연히 드러냈을 뿐인데. 구미호가 아홉 개의 여우 꼬리 중 하나를 흔드는 것처럼. 강준은 윤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64541254505.jpg“아내 일정에 맞게 이번 주말에 1박 2일 제주도 출장 잡아줘요.”

의심은 걷히고 깊게 가라앉아 있던 진실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제 거리낄 것도 없고 망설일 이유도 없다. 원래 결혼의 목적을 떠올리고, 계획대로 하면 된다. 고민할 필요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왜.

16564541254505.jpg“기분이 더럽지.”

느릿하게 눈을 감자 또다시 아내가 떠올랐다. 말랑한 눈동자, 예쁜 미소, 시선을 사로잡는 정적인 자태. 자신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을 뒤집어 놓는다. *** 성황리에 주말 오픈을 마무리한 제주 HK 쇼핑몰. 제주 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뒤풀이 행사엔 쇼핑몰 관련 핵심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다. 그중 한 명인 태령은 현진 기업의 안주인이자 아트센터 선의 관장인 강인혜와 함께였다.

16564541282749.jpg“여기는 이노패션 유태령 사장. 모두 나한테 들어서 알죠? 쓰레기 될 뻔한 내 주식들을 대박 터뜨려준 능력자.”

지인들에게 태령을 소개하는 강 관장은 조 여사 다음으로 이노패션의 주식을 많이 소유한 대주주였다. 태령의 결혼을 알고 있을 만큼 조 여사와 가장 막역한 사이기도 했고. 하지만 폭락 직전의 이노패션 주식을 조 여사가 혼자 처분하려다 걸린 후 사이가 틀어졌다. 그 틈을 교묘하게 파고든 태령에게 강 관장은 지금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강 관장이 태령에게 팔짱을 끼며 귓가에 속삭여왔다.

16564541282749.jpg“태령 씨, 저기 키가 훤칠한 남자 혹시 자기 남편 아니야?”

무심히 고개를 틀자 먼 거리에도 남편임이 분명한 남자가 보였다.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우뚝 솟은 단순하지 않은 신체 사이즈. 꽤 먼 거리임에도 몰라볼 수 없는 또렷한 이목구비.

16564541282749.jpg“파트너까지 데려왔는데?”

강 관장의 말대로 남편은 파트너가 있었다. 뛰어난 미모에 연기력까지 인정받은 톱 배우이자 HK 쇼핑몰의 홍보모델 한사라. 이 상황, 이 만남, 절대 우연은 아닐 텐데. 태령은 최근의 남편을 떠올려보았다. 다정하고 착실하고 매너 있고 사생활도 조용했고. 그야말로 완벽한 남편의 정석이었다. 그런데 무슨 심경의 바람이 불었기에 또다시 이러는 걸까. 재킷 안주머니에서 남편이 무언가를 꺼내자 한사라는 수줍게 웃었다.

16564541282749.jpg“세상에, 저거 객실 카드키 아니야?”

당황한 강 관장과 달리 태령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때 남편과 시선이 부딪쳤다. 태령을 빤히 응시하는 남편의 눈빛이 강렬하다. 결혼식 때보다, 공항에서 재회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태령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남편이 내어준 왼팔에 한사라가 냉큼 팔짱을 꼈다. 저 팔은 참 가볍기도 해라.

16564541309842.jpg“관장님, 제가 남편에게 관장님 좀 팔아도 될까요?”

때마침 남편과 한사라는 다정한 연인처럼 연회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16564541282749.jpg“그럼, 얼마든지 팔아먹어.”

강 관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있는데도 무심하다 못해 냉소적이기까지 한 태령이.

16564541282749.jpg“태령 씨는 폭풍전야 같아. 조용히 몸 사리고 있다가 순식간에 몰아쳐서 집어삼키잖아. 남편한테도 그럴 생각일 테고. 그렇지?”

대답 대신 조용히 웃으면서 일어난 태령은 생각했다. 몰아칠 것도 없고 집어삼킬 것도 없다고. 태령을 움직인 건 남편의 눈이었다. 강렬한 검은 눈동자가 드러낸 의도. 적당히 잘해줬으니 태령이 적당히 상처받길 원하는. 처음엔 당혹스러우면서도 이유가 궁금했다. 갑자기 남편이 또 왜 이러는 걸까. 지금도 이유는 모르지만 남편의 목적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아예 대놓고 이러는 건 자신의 반응을 보려는 거였다. 지금까지 잘해줬으니 예전과 다르게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거라면 이를 앙다물고서라도 보여줘야 했다. 여전히 매끄럽고 단정한 가면을 쓴, 남편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아내 유태령을. 바닥을 울리는 스틸레토 힐 소리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태령을 보았다. 하지만 태령은 남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한사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16564541309842.jpg“안녕하세요, 한사라 씨.”

16564541282749.jpg“무슨 일이죠?”

16564541309842.jpg“물어볼 게 있어서요. 사라 씨가 지금 이 남자분과 가는 곳이 혹시 호텔 객실인가요?”

16564541282749.jpg“기가 막혀서.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정곡을 찔렸는지 한사라는 꽤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16564541309842.jpg“저 남자분과 내가 상관이 좀 있어요. 그래서 확인만 하려는 거예요.”

태령은 싸울 의도가 없다는 걸 드러냈다. 그런데도 한사라는 앙칼진 눈빛으로 태령의 위아래를 훑었다.

16564541282749.jpg“딱 보니 재벌가 어느 집 딸 같은데. 뭐 재벌가 딸이면 남의 남자를 새치기해도 된다는 건가요?”

16564541309842.jpg“한사라 씨 남자가 아닐 텐데.”

16564541282749.jpg“이봐요!”

16564541309842.jpg“오해를 하는 것 같으니 그냥 대놓고 묻죠. 한사라 씬 이 남자가 유부남인 걸 알고 있나요?”

그제야 한사라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태령은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16564541309842.jpg“이 사람이 내게 약속했거든요. 스치는 하룻밤 상대라도 결혼 여부는 꼭 밝히기로. 그게 저와 상대 여자분에 대한 예의니까요.”

이제 내가 아내인 것도 알았겠지. 그걸 증명하듯 크게 뜬 한사라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남편에게 유부남인 걸 밝혀달라고 요구했던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6564541309842.jpg“방해하러 온 건 아니니 안심해요.”

그게 퍽 재밌어 태령은 싱긋 웃으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16564541309842.jpg“즐기는 건 좋지만, 상대가 유부남이라면 이목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이미지 관리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태령은 시선은 이제 한사라에서 남편에게 옮겨갔다. 지금부터 하는 건 남편에게 보내는 경고니까.

16564541309842.jpg“그것만 지켜주면 난 남편의 사생활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존중해주려 해요. 그렇죠, 여보?”

난생처음 듣는 여보라는 말에 지금껏 무표정하게 있던 강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든 말든, 태령은 살짝 발꿈치를 든 후 남편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16564541309842.jpg“현진 강 관장님이랑 같이 있었어요.”

우리 결혼을 알고 있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예요. 태령은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면서 손을 천천히 뻗었다. 검지 끝으로 남편의 가슴부터 배까지 가볍게 쓸어내리자 단단한 근육이 움찔거린다. 별 볼 일 없는 행동 같지만 내포된 의미는 다분했다. 한사라에게 하는 선전포고이자 남편을 향한 당당한 소유욕. 이 남잔 내 남편이고 내가 너그럽게 하루 빌려주는 거니 건방 떨지 말라고 말이다.

16564541309842.jpg“그럼 두 분 즐밤 보내요.”

상냥하게 인사까지 건넨 태령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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