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키스라도 바라는 것처럼. (17/110)

17. 키스라도 바라는 것처럼.2021.05.30.

16564541009595.jpg[부인이 나 챙겨가면, 대리운전 기사 노릇 해줄 의향은 있는데.]

연숙에게 들어서일까. 남편의 메시지에 서 씨 집안 남자의 자존심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 자존심을 지금만큼은 받아주고 싶어졌다. 같이 있을 땐 사생활보다는 늘 자신을 먼저 배려해줬던 남편이니까.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바에서 사장이 작업했을 때도, 태산 창립 뒤풀이 행사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태령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했다.

165645410096.jpg[12시 되려면 3시간이나 남았으니, 더 놀다 오세요.]

괜히 튕기고 싶은 마음 반, 사생활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마음 반으로.

16564541009595.jpg[남편 외박 관리 안 합니까? 내가 오늘 밤 망각의 동물이 되면 어쩌려고.]

어떻게 답장해야 하나 망설이는 그때, 다시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16564541009595.jpg[술 취하면 나도 모르게 본가로 갈 수도 있는데.]

이젠 대놓고 협박까지.

165645410096.jpg“서강준 씨, 그냥 같이 들어가자고 말하면 되잖아요.”

사랑한다는 말도 아닌데. 그게 뭐 어려워서 돌리고 돌리냐구요, 서 씨 집안 남편님.

165645410096.jpg[지하 1층 B-14로 와요.]

메시지로 위치를 알려준 태령은 차체에 몸을 기댄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 남편이 이렇게 편해진 걸까. 요구르트를 좋아한다고 남편이 거짓말했을 때가 시작인 것 같다. 비상계단에 같이 앉아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요구르트를 마셨던 그 날. 그때부터 남편은 다정해졌고 태령은 경계심을 조금씩 푼 것 같다.

165645410096.jpg“범인이 요구르트였네.”

이 모든 발단의 원인을 알게 되어 피식 웃는 순간, 남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유의 우아한 걸음으로 여유롭게 다가와 태령의 앞에 섰다. 이렇게 마주 설 때면 새삼 느낀다. 신고 있는 9센티 하이힐이 무색할 만큼, 이 남자가 얼마나 크고 자신은 터무니없이 작은지.

165645410096.jpg“누구 차로 이동……!”

남편이 허리를 기울인 순간, 태령은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16564541009595.jpg“와인을 많이 마셨나 봐요.”

드러난 목덜미에 부드러운 숨결이 와 닿아서. 그 숨결이 번지는 여린 살갗의 감각이 야릇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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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4541009595.jpg“태령 씨한테 내가 좋아하는 향기가 나요.”

태령의 체취가 좋다는 건지, 알지도 못할 와인 향이 좋다는 건지. 이유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태령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165645410096.jpg“너무 가까운 거 같으니 좀 떨어져 줄래요.”

16564541009595.jpg“왜요, 너무 가까워서 심장이라도 두근거립니까?”

남편이 정말 얄밉게도 물어왔다.

165645410096.jpg“……절대 아니거든요.”

16564541009595.jpg“그럼 뭘 눈까지 감으실까.”

165645410096.jpg“……!”

16564541009595.jpg“키스라도 바라는 것처럼.”

이 남자가 정말! 발끈한 태령이 눈을 뜨고 앙칼지게 노려보자 남편은 실실 웃는다.

16564541009595.jpg“진정해요, 농담도 못 합니까.”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왜 이 남잔 날 자꾸 헷갈리게 할까. 그렇게 웃어주고 행동하고 챙겨주면, 정말 내가 착각할지 모르는데. 당신이 조금은 날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어쩌면 처음부터 내게 마음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내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연기일 뿐이라고. 그래서 결국은 항상 나한테 와주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지게. 태령이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제야 강준도 미소를 지운다.

16564541009595.jpg“내 차 타고 갑시다.”

태령이 차에 타자 강준이 음료수를 내밀었다.

16564541009595.jpg“효과 좋은 숙취해소제라고 하길래, 경진이 것 뺏어왔어요.”

차마 받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남편은 음료수를 태령의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한데, 재킷까지 벗어서 다리 위에 덮어주었다. 대체 왜 이러냐고 눈으로 묻자 남편이 짙은 눈동자를 부딪쳐왔다.

16564541009595.jpg“치마는 짧고, 태령 씨 다리는 시선이 갈 만큼 예쁘고.”

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16564541009595.jpg“하지만 나는 안전운전을 해야 하고, 부인은 편한 자세로 갔으면 하고.”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16564541009595.jpg“그래서라고 합시다.”

태령은 황망한 시선을 창밖으로 틀었다. 이유 없이 새빨개진 얼굴만큼은 들키기 싫어서. *** 집에 도착했다. 현관 로비를 지난 태령은 조금 낯선 눈빛으로 거실을 훑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삭막하고 휑하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왜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의아해하던 태령의 시선이 남편에게 향했다. 커다란 체격에 맞지 않게 움직임이 조용한 남편이다. 하지만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차가웠던 공기에 온기가 어리고 메마른 집안에 남편의 체향이 서서히 번진다. 둘이 함께 채우는 이 공간이 외롭고 삭막하지 않도록. 이래서 결혼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태령은 쓴웃음을 삼켰다. 6개월 후면 떠날 건데 그걸 알아서 뭐 해.

165645410096.jpg“저는 샤워할게요.”

암묵적으로 정해진 규칙이었다. 강준은 1층 침실 욕실, 태령은 2층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건. 샤워를 끝낸 후 침실에 가자 오늘도 강준은 상의를 탈의한 상태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벗은 건 남편인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일까.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도, 집에 같이 들어오는 것도,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것 같은데 남편의 벗은 몸만큼은 적응이 안 된다. 뺨이 달아오르는 걸 들키기 싫어 태령은 얼른 침대 왼쪽에 누웠다.

16564541009595.jpg“태령 씬 잘 때도 화장을 합니까?”

남편의 질문에 태령은 당황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이 말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고개를 틀자 침대 오른쪽에 누운 남편이 몸을 옆으로 돌린 채 태령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165645410096.jpg“엄마가 그랬어요. 여자는 관에 들어갈 때까지 화장해야 한다구요, 특히 남편 앞에서는.”

16564541009595.jpg“…….”

165645410096.jpg“강준 씨가 옷을, 그러니까 상의라도 벗고 자야 하는 잠버릇처럼, 이것도 제 잠버릇 중 하나로 존중해주면 좋겠어요.”

당신은 상의 탈의, 난 화장.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16564541009595.jpg“유태령 씨 말은, 남편인 나에게 예뻐 보이고 싶다는 뜻입니까?”

느닷없는 기습 질문에 태령은 순간 벙쪄 버렸다. 그 말이 그렇게 되나. 무슨 핑계라도 대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반박을 한다는 건 곧 화장을 안 하겠다는 의미니까. 차라리 오해를 받더라도 침묵하려는 태령에게 남편은 집요하게도 물어왔다.

16564541009595.jpg“맞아요?”

165645410096.jpg“…….”

16564541009595.jpg“맞네.”

165645410096.jpg“…….”

16564541009595.jpg“나한테 예뻐 보이고 싶은 거.”

태령이 끝내 묵비권을 행사하자 남편은 뭐가 그리 좋은지 또 실실 웃는다. 이 남잔 왜 이렇게 얄궂게 구는 걸까. 아니, 요즘 태령을 놀리는 데 재미가 붙은 것도 같았다.

165645410096.jpg“잘 자요.”

결국 태령은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몸을 홱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남편이 웃고 있다고 느껴지는 게 제발 착각이기를 바라며. *** 다음 날 저녁. 백제 호텔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마친 삼총사는 오늘도 라운지 카페에 둘러앉았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강준의 분위기에 경진과 재우는 관찰 모드에 들어갔다.

1656454109259.jpg“재우야, 저 녀석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왜 저렇게 실실 쪼개지?”

1656454109259.jpg“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냐?”

무표정이 분명한데 좀 부드러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 있고. 운동 내내 그러더니 지금도 저 꼴이었다.

1656454109259.jpg“서강준, 같이 좀 웃자? 슬픈 일은 나누면 반이고 기쁜 일은 나누면 두 배라는데.”

16564541009595.jpg“…….”

1656454109259.jpg“자꾸 이러면 섭섭해서 우리가 계획에 협조하겠나, 친구.”

요즘 서강준 때문에 24시간이 지루한 두 남자였다. 건강한 삶은 좋지만, 하도 건전하게 놀다 보니 하루의 낙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1656454109259.jpg“확 태령 씨 찾아가서 까발려버릴까 보다. 네가 질투심 유발하려고……!”

매섭게 노려보는 싸늘한 눈빛에 경진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강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16564541009595.jpg“잘해주는 작전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강준이 아내에게 잘해주겠다고 선언한 게 일주일 겨우 넘은 것 같다. 그런데 벌써 효과가 있다고?

16564541009595.jpg“나한테 마음을 조금 연 것도 같고.”

경진과 재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란 존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특히 아내가 유태령 같은 사람일 땐 더더욱.

1656454109259.jpg“어떻게 효과가 있는지 말해 봐.”

16564541009595.jpg“우선 나한테 잘 웃어줘, 그것도 아주 예쁘게.”

설마, 예의상 웃어준 거겠지. 두 남자는 동시에 생각했다.

16564541009595.jpg“저녁도 한 번 차려줬어. 그것도 같이 산 지 한 달도 안되었는데.”

1656454109259.jpg“그건 아내로서 당연한 게 아닐까?”

경진의 말에 강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16564541009595.jpg“그게 왜 당연한 거지? 내 어머니와 할머니는 평생 식사 한 끼 차린 적 없는데.”

1656454109259.jpg“그거야…….”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워낙 유별난 성격이시고. 살림에 손도 못 대게 할 만큼 아내를 아주 유별나게 사랑도 하시고. 그런데 몸만 고생 안 시키면 뭐 하냐고, 마음고생은 그렇게 시켰는데. 차마 그렇게 말은 못 하니 두 남자는 딴청을 부렸다.

16564541009595.jpg“내 몸이 완벽하게 자기 취향이라고 했어.”

두 남자는 맙소사를 외쳤다. 잘해준다고 한 이후로 운동을 더 격렬히 한다고 했더니.

16564541009595.jpg“그래서인지 나한테 예뻐 보이고 싶어 하더라고.”

재수 없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 세상 진지하다.

16564541009595.jpg“잘 때도 화장을 꼭 해야겠대.”

이 자식아, 그건 아내가 아직도 널 불편해한다는 뜻이라고!

16564541009595.jpg“그래서 어떻게 더 잘해줄까 고민 중이야.”

하지만 이번에도 두 남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16564541009595.jpg“아내가 나한테 더 자주 웃어주고 마음을 더 열도록.”

그때 강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16564541009595.jpg“일정 때문에 나 먼저 간다.”

강준이 사라지자마자 두 남자는 참았던 웃음을 동시에 터뜨렸다.

1656454109259.jpg“푸하하하하!”

1656454109259.jpg“으하하하, 배 아파!”

그 여자의 마음을 열고 싶고, 그 여자의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고. 서강준이라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경진이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656454109259.jpg“유태령 씬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었어.”

1656454109259.jpg“로봇 같은 녀석을 저렇게까지 만들다니, 인정.”

강준에게 접근했던 여자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래서 스타일도 다양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던 녀석이다. 그러던 녀석이, 저렇게 바보처럼 구는 걸 보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노래를 열창했다.

1656454109259.jpg“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와 내 가슴을 떨리게 만들죠~.”

서강준 때문에 잃어버린 밤의 재미 대신 또 다른 재밌는 볼거리가 생긴 꼴이니까. *** 스케줄만 비서를 통해 공유할 뿐, 이외의 사적인 연락은 두 사람이 직접 주고받았다.

16564541009595.jpg[오늘은 일 때문에 많이 늦으니 먼저 자요.]

16564541009595.jpg[새벽에라도 들어갈 테니 외박할까 걱정은 말고.]

남편의 메시지를 받는 순간, 태령은 오늘 일찍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처럼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집에 도착한 태령은 샤워도 느긋하게 하고 테라스에서 여유롭게 위스키까지 마셨다. 할 것 다 했는데도 자정이 안 된 시간에 옅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165645410096.jpg“너무 빨리 퇴근했나 봐.”

즐겨본 사람이 즐길 줄 안다는 말이 맞았다. 어릴 적부터 늘 바쁘게 살아와서 지금의 이 여유가 태령은 버거웠으니까.

165645410096.jpg“그냥 빨리 자자.”

그런데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침대 오른쪽에 닿았다. 항상 남편이 가득 채웠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는 자리.

165645410096.jpg“오늘은 편히 자는 거야.”

누구 때문에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얼굴 붉히게 만드는 벗은 몸도 안 봐도 되고. 평소처럼 침대 왼쪽에 누워 잠을 청해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따라 침실은 또 왜 이렇게 추운 건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도 손발이 곱아들 만큼 춥다.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태령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메인 침실이라서 따뜻했던 게 아니라 남편 때문에 이 공간이 따스하게 차올랐다는 걸.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문득 남편이 그리워진다. 정확히는 이 공간을 따스하게 채워주는 남편의 온기가.

165645410096.jpg“잠정이라도 든 걸까.”

생각해보니 그와 한 침대를 쓴 후 위스키 없이도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잠들기 전엔 긴장을 놓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빠르게 잠이 들었고 눈을 뜨면 아침이었다. 그것도 무척 상쾌한 기분으로. 다른 점은 또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새우처럼 웅크린 채 눈을 떴는데. 요즘은 따뜻하게 자서인지 눈을 뜨면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한 사람의 온기가 이토록 영향을 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165645410096.jpg“강준 씨가 열이 좀 많긴 했어.”

태령은 남편에게 안겼을 때를 떠올렸다. 그의 품은 늘 아늑했고 단단한 몸은 따뜻했다. 결국 자는 걸 포기한 태령은 침실을 나왔다. 대추 청을 따뜻하게 한 잔 탄 후 책을 들고 담요를 챙겼다.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남편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요즘 들어 남편이 꽤 잘해주었으니까, 그래서 태령도 조금은 잘해주고 싶어서.

165645410096.jpg“늦은 남편을 기다리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러니까 절대 남편이 보고 싶어서는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일러주면서. 태령은 담요를 다리에 덮고 대추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다가 책을 들고 있던 손이 소파로 툭, 떨어졌다. 작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태령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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