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하늘이 무너져도 부부는 한 침대에서. (16/110)

16. 하늘이 무너져도 부부는 한 침대에서.2021.05.27.

집으로 직접 운전을 하고 가면서 강준은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떠올렸다.

16564540789638.jpg[저 오늘 일찍 퇴근해요. 집에서 저녁 같이 먹고 싶은데, 강준 씨 스케줄은 어때요?]

아내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갑자기 잘해주는 것 같으면, 기쁜 마음보다 의심이란 감정이 더 앞서는. 날 방심하게 해서 뭘 얻어내려고. 주차장에 도착하자 이제 막 차에서 내리는 아내가 보였다. 뭘 그렇게 샀는지 양손에 봉투가 한가득이었다.

16564540789648.jpg“뭘 이렇게 잔뜩 샀습니까?”

차에서 내린 강준이 아내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봉투를 뺏은 건 거의 본능이었다.

16564540789638.jpg“강준 씨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이것저것 손 가는 대로 샀어요.”

그렇게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오른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 입구에 놓인 신발 한 켤레를 본 태령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16564540789638.jpg“강준 씨, 삼 분 후에 들어와줄 수 있을까요?”

짧은 순간, 강준의 가슴에서 아내를 향한 실낱같은 의심이 혓바늘처럼 돋아났다. 제3자의 등장이 과연 우연일까. 지금 이 상황을 아내는 피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내게 보여주고 싶은 걸까. 강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내는 조금 다급한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두 여자의 대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강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여유롭게. 거리가 좁혀질수록 강준의 귀에 대화 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16564540789638.jpg“냉장고 정리는 제가 좀 이따 할게요. 그런데 아주머니, 오늘 일찍 가도 된다는 연락 못 받으셨어요?”

16564540789671.jpg“기가 막혀서, 나라고 뭐 일찍 퇴근하기 싫은 줄 알아요? 그리고 이렇게 음식에 손도 안 대면 내가 뭐가 돼. 이사장님껜 또 뭐라 보고하고!”

주방에 도착하자 고개 숙인 아내에게 사나운 표정으로 삿대질하는 중년의 여자가 보였다.

16564540789671.jpg“이사장님은 딸이라고 모든 음식들에, 하다못해 재료에도 브랜드를 정해줘요. 그것도 아주 최고급으로. 그 재료로 난 정성스럽게 요리를 하고!”

강준은 이제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

16564540789671.jpg“근데 이 아까운 걸 손도 안 대는 건 이사장님 성의를 무시하고 나를 개고생시키는 거지!”

아내는 강준의 손을 대신 빌려 쳐내고 싶은 게 분명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어머니의 스파이를.

16564540789671.jpg“내가 마지막으로 말하는……!”

16564540789648.jpg“그 마지막 말은 내가 하는 걸로 하죠.”

그런데도 강준은 망설이지 않고 차갑게 말을 자르며 주방에 들어섰다.

16564540789648.jpg“당신은 지금부터 해고입니다.”

자신을 방패로 세우려는 아내의 계획에 기꺼이 이용당해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16564540789671.jpg“사장님, 제 말도 좀 들어주세요. 사모님이 글쎄…….”

16564540789648.jpg“말귀 못 알아듣습니까? 마지막 말이라고 했을 텐데.”

강준에게 아내는 마지막이란 말이 소용없는 여자였다. 이렇게 매번 감탄하게 만드니 말이다. 이 판을 짰다는 건, 자신의 성격을 아내가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의미니까. 강준의 단호함에 도우미가 만만한 태령을 다시 타깃으로 삼았다.

16564540789671.jpg“저 해고되면 사모님도 곤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사장님께 말씀 좀 해주세요, 네?”

하지만 도우미의 손을 살포시 잡은 태령은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16564540789638.jpg“아주머니, 죄송해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러게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럴 일 없잖아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도우미가 집을 나간 후, 강준은 기다렸다는 듯 태령에게 물었다.

16564540789648.jpg“내가 방패 역할 잘해준 것 맞습니까?”

태령은 단정한 눈빛으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조 여사가 보낸 도우미는 늘 일찍 퇴근했다. 하지만 일찍 퇴근하라고 하면 악착같이 남아서 태령을 보고 간다. 그래야 태령을 잔뜩 무시하며 괴롭힌 후 조 여사에게 뿌듯하게 보고를 올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스스로를 낮추었다. 이 모습을 도우미가 조 여사에게 보고하길 바라며. 조 여사의 고용인에게도 찍소리 못하는 애가 설마 자신에게 무슨 딴 맘을 먹겠냐 싶을 테니까.

16564540789638.jpg“알고 있으면서 왜 해줬어요. 무시해도 되는 건데.”

태령이 담담히 인정하자, 강준의 얼굴이 굳었다. 아내가 끝까지 아니라고 발뺌해주길 바랐으니까. 그럼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여자라고 치부했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쉽게 인정하는 아내는 자포자기한 것도 같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 도움을 바랐을까 싶을 만큼.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16564540789648.jpg“내가 그냥 해주고 싶어서.”

훗날, 내가 당신을 아프게 할 때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고 싶어서. 그래서 강준은 차라리 아내가 자신을 마음껏 이용해줬으면 했다.

16564540789648.jpg“그러니까 나 좀 실컷 이용해줘요.”

피식 웃는 남편의 미소가 자조적이어서 태령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애써 무시한 채 대화 주제를 틀었다.

16564540789638.jpg“8시까지 나올래요? 맛있는 저녁 차려줄게요.”

태령의 말이 의외라는 듯 남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런 강준에게 태령은 싱긋 웃으며 눈으로 봉투를 가리켰다. 요구르트만 잔뜩 산 게 아니라구요. *** 식탁 위의 음식들은 모두 포장만 뜯어서 조리만 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태령은 요리를 잘했지만, 조 여사의 딸은 아니었으니까.

16564540789638.jpg“직접 요리 못 해줘서 미안해요.”

태령의 사과에 강준이 묘한 눈빛으로 태령을 바라보았다.

16564540789648.jpg“나와 결혼한 이상 살림은 하지 마요. 그게 요리든 뭐든.”

16564540789638.jpg“……왜요?”

16564540789648.jpg“할머니도 어머니도 요리는 안 했습니다. 아, 살림을 아예 안 했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별일 아니라는 듯 강준은 천천히 수저를 들며 말을 이었다.

16564540789648.jpg“살림하는 걸 좋아하는 거라면 굳이 말리진 않겠지만.”

그러곤 정갈한 젓가락질로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같이 치운 두 사람은 다시 침실에서 만났다. 상체를 헐벗은 남편을 똑바로 보는 게 힘들어 태령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16564540789638.jpg“같이 자는 거 말이에요, 다른 방법을 고려해보는 게 어떨까요? 침실에 침대를 두 개 놓거나 아니면 격일로 같이 자는 것도 괜찮구요.”

전자든 후자든. 한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16564540789648.jpg“서 씨 집안 남자들이 꼭 지키는 부부간의 도리가 뭔지 알아요?”

느닷없는 남편의 질문에 태령은 조금 당황했다. 그건 연숙에게 들은 게 없어서.

16564540789648.jpg“하늘이 무너져도 부부는 한 침대에서 자는 겁니다. 그게 이혼 안 당하는 서 씨 집안 남자들의 비결이라나 뭐라나.”

태령은 뚫어지게 응시해오는 남편의 눈을 피해버렸다. 연숙이 속삭였던, 부부싸움을 해도 꼭 같이 자려는 서 씨 남자들이 떠올라서.

16564540789648.jpg“할아버지한테 그 약속 한 후에 태령 씨와 결혼 허락받은 거예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는 순간, 남편이 의미심장하게 물어왔다.

16564540789648.jpg“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려줄까요?”

알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알려주지 마요.

16564540789648.jpg“안 맞으면 이혼한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태령 씨는 쉽게 결혼을 결정했겠죠. 하지만 난 아니에요.”

검은 칼날 같은 눈빛이 태령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각인을 새긴다.

16564540789648.jpg“우리가 이혼할 일은 절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넌 죽을 때까지 내 아내일 거라고. 하지만 태령은 흔들림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16564540789638.jpg“이 결혼을 안일하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혼은 더더욱 생각한 적 없구요.”

어차피 난 6개월만 버티면 되니까.

16564540789638.jpg“하지만 따로 자는 건 고려해줘요. 어른들에겐 비밀을 지킬…….”

그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16564540789648.jpg“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남발하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태령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을 휘감은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져 있어서.

16564540789648.jpg“잘 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편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16564540874032.jpg

  *** 3일 후.

16564540789648.jpg“그러니까 장모님 말씀의 요점은, 예전의 도우미를 다시 쓰라는 거군요.”

우아한 가면을 쓴 채 매끄럽게 대답하는 사위를 조 여사는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16564540874039.jpg“그래 주면 나도 그렇고 우리 태령이도 고맙지. 그만큼 일 잘하는 도우미 찾기 참 힘들어. 까다로운 내 요구도 다 들어주고 태령이도 딸처럼 챙기고.”

16564540789648.jpg“확실히 일은 잘하시는 것 같더군요.”

사위가 담담히 동의를 하자 그제야 조 여사는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3일 전 도우미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사위와 처음 마주친 날 바로 해고를 당했다고. 조 여사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도우미가 없으면 그 집안의 상황을, 특히 부부간의 일을 알 수가 없으니. 그 간사한 것을 마냥 믿고 있자니 뭔가 불안하고. 그래서 조 여사는 사위의 속내도 떠볼 겸 한신 자동차 본사를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문전박대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사위는 회의 중간에 나와서 맞이할 만큼 조 여사를 깍듯하게 대했다.

16564540874039.jpg“자네는 엄마의 마음이 어떤지 모를 거야. 최고급 재료만 이용해서 음식을 해놔도 손을 대지 않으니 오죽 걱정이 될까. 도우미도 태령일 딸처럼 생각해서 말이 좀 거칠게 나온 거고. 잔소리랑 간섭은 뭐 아무나 하는지 아나?”

16564540789648.jpg“장모님처럼 말이죠.”

느긋하게 흘러나온 사위의 대답에 조 여사의 눈꼬리가 파들거렸다. 비꼬는 것 같은데, 사위가 너무 깍듯하고 정중하니 분간이 되질 않는다.

16564540874039.jpg“그럼 내 청을 들어준 거라 생각해도 되겠나?”

16564540789648.jpg“제 아내를 향한 장모님의 애틋한 모성애를 당연히 존중해드려야죠.”

그러니까 그 도우미를 다시 쓰겠다고 안 쓰겠다고! 꽥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앞의 사위는 한신의 후계자였다.

16564540874039.jpg“고맙네.”

그래서 조 여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예의 바른 사위는 엘리베이터까지 마중해주었지만, 그것마저 불편했다. 이렇게 속내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은 조 여사도 처음이라서. 그런데도 귀신같은 본능이 촉을 세웠다. 얼른 자신의 딸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조 여사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하강하자 윤 실장이 조심히 물었다.

16564540789671.jpg“새로 채용한 도우미는 그만 나오라고 할까요?”

16564540789648.jpg“계속 출근하라고 해요.”

16564540789671.jpg“예? 하지만 조 여사님께…….”

16564540789648.jpg“윤 실장님.”

강준의 차가운 음성에 윤 실장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16564540789648.jpg“개 짖은 소리는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집무실로 돌아와 통창 아래 깔린 도심을 내려다보는 강준의 얼굴에 짜증이 다분했다. 뭐가 그리 불안해서 딸 집에 스파이를 못 들여 안달인지. 조 여사와 아내의 관계는 흠잡을 데 없는 것 같으면서도 오류가 존재했다. 그게 뭘까. 자꾸만 거슬리고 신경 쓰이는 그 무언가가. 생각을 반복할수록 뭔가를 놓친 기분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무심히 스쳤던 것들을 훑었다. 그러다 어느 기억에서 멈추었다.

16564540789671.jpg‘그 외모 썩히는 거 죄인 거 몰라요? 그러니 형도 제발 연애 좀 해요.’

16564540789671.jpg‘나의 알리샤라면 형도 사랑에 빠질 텐데.’

16564540789671.jpg‘알리샤한테 비슷한 또래의 여자 친척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한번 물어봐야겠어요.’

만약, 지금의 아내가 조 여사의 진짜 딸이 아니라면? 욕이 절로 나왔다.

16564540789648.jpg“……미친.”

말도 안 되지,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한참 후 강준은 윤 실장을 호출했다.

16564540789648.jpg“유능한 사설 탐정 좀 알아봐줘요. 최대한 빨리.”

이유는 하나였다. 제 가슴 안에서 조금씩 번지는, 아내가 알리샤 바튼이 아니기를 바라는. 터무니없는 이 바람을 확실히 잘라내고 싶어서. *** 저녁 8시, 제냐 호텔 컨벤션에서 사회적 경제 여성 리더십 포럼이 끝났다. 재능 기부 차원으로 참석한 거였기에 개최 측에서 출연자들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그렇게 향한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 창가 너머의 전망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식사 중에도 이어진 열 띤 토론이 좋아서일까. 태령은 음식보다는 와인을 많이 마신 것 같다. 포럼 개최자인 경제 지원 센터 사무국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64540789671.jpg“태령 씨 얼굴이 너무 빨간 것 같은데, 괜찮아요?”

16564540789638.jpg“제가 와인에 좀 약해서요. 먼저 일어날게요.”

태령도 지금 안 사실이었다. 양주와 소주는 주량이 무한대지만, 와인엔 약하다는 걸. 입구에 도착하자 이제 막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삼총사와 마주쳤다. 태연한 건 태령과 강준이었고 당황한 건 경진과 재우였다. 그런데 경진에게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으니 태산 홈쇼핑 뒤풀이에서 남편과 같이 있던 여자다. 근데 왜 지금은 경진의 팔짱을 끼고 있는 걸까. 희미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태령은 늘 그렇듯 무심하게 삼총사를 지나쳤다. 그게 맞는 거니까. 태령은 마지막 일정이 길어지면 늘 김 비서와 운전기사를 먼저 퇴근시켰다. 그래서 대리운전을 부를까 주차장에서 고민하는 그때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16564540789648.jpg[얼굴이 빨갛던데, 술 많이 마셨어요?]

괜찮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와인을 많이 마셔서일까. 호기심이 태령을 충동질했다. 두 번이나 동행한 걸 보면, 경진과도 친할 정도면, 여자는 남편과 꽤 깊은 사이라는 건데. 오늘도 남편은 그때처럼 그 여자를 두고 아내인 내게 와줄까. 밑져야 본전이니 도전해 봐?

16564540789638.jpg[와인을 많이 마셨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대리운전 부르려구요.]

기어이 손가락은 제멋대로 움직였고 남편에게선 바로 답장이 왔다. 그걸 본 순간 태령은 풋, 웃어버렸다.  

1656454092991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