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내의 잠버릇.2021.05.23.
대답도 하기 전에 강준이 바지를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태령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해 못 해요!”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는데도 이미 봐버린 남편의 몸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고르던 숨결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남자의 벗은 상체를 이렇게 가까이, 그것도 이토록 훌륭한 피지컬을, 눈앞에서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도저히…… 못 보겠다구요.”
그런데 남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벌써 바지를 벗은 건 아니겠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순간, 남편이 담담히 물었다.
“눈까지 가리고 도저히 못 볼 만큼, 내 몸이 징그럽나 봐요.”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인 것도 같아 하는 수 없이 태령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바지를 입고 있는 남편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태령을 보고 있었다.
“징그러운 게 아니라 사실은…….”
말을 멈춘 태령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타협할 수 있을까. 그 잠깐을 못 기다리고 남편이 집요하게 물었다.
“사실은, 뭡니까?”
옅은 한숨을 내쉰 태령은 살포시 시선을 내렸다. 손길을 부를 만큼 근사한 상체를 징그럽다고 말해봤자 믿지도 않을 것이다. 연숙의 말대로 지 잘난 맛에 사는 서 씨 남자가 맞다면. 그럼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방법일지도 몰랐다.
“강준 씨 몸, 완벽하게 제 취향이에요.”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태령은 아차, 했다. 완벽하게란 말은 하지 말걸. 후회와 함께 뒤늦은 깨달음도 얻었다. 남편의 얼굴과 몸, 그리고 특유의 분위기. 하다못해 커다란 손과 길고 단단한 손가락까지. 남편의 모든 게 자신의 완벽한 취향이라는 걸, 하필 지금 말이다.
“그래서 자꾸 시선이 가서, 최대한 안 보려고 한 거예요.”
매끄럽게 말도 잘하는 남자가 지금 이 순간은 미묘한 침묵을 유지했다. 괜히 민망해진 태령은 얼른 말을 이었다.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강준 씨 몸을 더 보고 싶어 하거나 만질 일은…….”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말을 자르며 느긋하게 물어왔다.
“내 몸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습니까?”
태령의 눈이 조금 앙큼하게 올라갔다. 남편이 또 놀리는 것도 같아서.
“남자만 본능 있으라는 법 있어요? 여자도 본능이란 게 있어요. 마음에 드는 걸 보면 더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태령은 대답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몸을 한번 확 만져줘야 정신 차리고 옷을 갖춰 입을까 하는.
“그러니까 조금 불편해도 위아래 옷은 갖춰 입어주세요.”
“…….”
“그리고 전 잠버릇이 무척 얌전한데, 강준 씨도 그렇다고 믿어도 될까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든 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튼 남편의 얼굴이 조금은 붉어진 것도 같았다.
“잠버릇은 얌전합니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저 남자가 왜.
“하지만 위아래 다 입고 자면 불편해서 못 자요. 그러니 바지만 입고 잘게요.”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강준은 이미 불을 끈 후 침대에 누운 후였다. 하는 수 없이 태령도 침대 왼쪽 끝에 아슬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반박했다가 남편이 바지마저 벗는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 강준은 알람이 필요 없었다. 원하는 시간을 머리에 입력 후 잠이 들면 다음 날 그 시간에 칼같이 눈이 떠졌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이 떠져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언제 잠들었더라. 바로 옆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쌔근거리는 숨과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한 침대에 누운 아내의 존재가 거슬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때 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형체가 존재감을 알려왔다. 무심코 시선을 내린 강준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이 든 아내가 맨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강준을 꽉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더 기가 막힌 건 그런 아내를 당연하다는 듯 끌어안고 있는 자신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서로를 끌어안고 잔 걸까.
“부인, 잠버릇 얌전하다면서요.”
하여간 말이라도 못 하면. 그런데 끌어안은 손은 왜 가만두질 못하는 건지. 잠결에도 부산히 움직이는 작은 손 때문에 아침부터 곤욕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어루만지는 느낌이 좋은 건지, 따뜻한 온기가 좋은 건지. 머릿속은 새하얘지는데 몸은 이상하게 뜨겁다. 누군가와 같이 잔 적도 없지만, 이런 상황도, 이런 느낌도 처음이었다. 이 잠버릇 때문에 옷을 입어달라 한 건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기엔 잠이 든 아내의 표정은 너무 순진무구하고. 설마 이것도 연기인가 의심이 드는 순간, 아내의 손이 좀 더 내려갔다.
“……미치겠네.”
정말 아슬한 타이밍으로 강준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이 여자가 진짜 사람 미치는 꼴 보려고 하는 건지. 그 와중에도 아내는 용케도 강준의 허리를 팔로 휘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는 척 연기하는 것 같진 않은데. 그런 아내가 기막히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웃음도 나고.
“이걸 말해 줘, 말아.”
잠시 고민하던 강준은 상체를 기울여 아내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이봐요, 유태령 씨.”
“…….”
“방금 당신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알기나 해요?”
“…….”
“봉인된 짐승을 깨울 뻔했단 말입니다.”
그 짐승이 얼마나 위험한데. 경고를 해주어도 깊이 잠이 든 아내는 미동조차 없다. 설마 하는 마음에 검지로 앙증맞은 코끝을 톡톡 두드려 보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번엔 보드라운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보았다. 그건 느껴지는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아내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귀가 예민하기는.”
찌푸린 표정과 다르게 아내를 향해 투덜거리는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강준은 잠이 든 말간 얼굴 위로 남성편력이 심했던 여자를 오버랩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 재미를 하루만 볼 수는 없지.”
놀릴 거리 하나 찾아냈으니 이제 완전범죄를 저질러야 할 차례였다. 강준은 아내를 원래의 자리에 조심히 눕힌 후 시트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잘 자요, 부인.”
아내는 절대 모르는 완전범죄를 위해선, 오늘부터 출근 시간을 달리해야 하니까. ***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태령은 가장 먼저 자신의 위치와 자세부터 확인했다. 예상대로 왼쪽 침대 끝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것도 가슴까지 시트를 끌어올린 채로.
“휴, 다행이다.”
역시 난 잠버릇이 얌전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태령은 그제야 비어 있는 옆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귀가 예민한 편인데 어젯밤 편히 잔 걸 보면 남편도 잠버릇이 얌전한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개운하게 잘 잤어.”
근데 혼자 자는 것보다 남편과 같이 자서 더 잘 잤다는 게 좀 이상하다. 태령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아침이라고 생각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 따뜻해서일 거야.”
몸에 열이 없는 편인 태령은 잘 때 특히 추위를 많이 탔다. 방을 아무리 훈훈하게 해도 추위 때문에 잠을 설쳤다. 전기매트나 온수매트도 써보았지만, 다음날 이유 없이 몸이 아파서 포기했다. 그런데 어젯밤은 한 번도 깨지 않고 따뜻하게 푹 잘 잔 것 같다.
“이래서 메인 침실이구나.”
서브 침실과 메인 침실이 크기 차이만 있는 건 아닌 듯싶었다. 설계상의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만 일어난 태령은 출근 준비를 했다. 잠도 푹 잤고, 같이 산 이후 아침마다 마주쳤던 남편도 없고. 오늘 아침 태령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 오전 일정을 매끄럽게 소화한 태령은 직접 차를 몰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 외곽의 요양병원. 병원이라기보다는 잘 꾸며진 리조트 같은 곳이었다.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는 VIP 병실 앞에 태령이 도착한 순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딴 것도 음식이라고 가져와!”
신경질적인 비명 소리와 그릇들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태령이 놀란 기색 없이 노크 후 문을 열자 침대 위 씩씩거리며 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야위고 창백한 얼굴은 청순했지만 표독스러운 눈빛과 표정 때문에 인상이 사나운. 침대에서 일어난 여자는 태령을 쌩하니 지나쳐 나갔다. 그러자 태령도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뒤를 따라 나갔다. 카페처럼 잘 꾸며져 있는 휴게실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여자가 태령을 노려보았다.
“싫은 척은 다 하더니, 얼굴이 활짝 폈네. 엄마 말대로 내 흉내 내는 데 재미라도 들렸나 보지?”
눈앞의 여자가 조 여사의 진짜 딸이었다.
“난 이렇게 죽지 못해 살고 있는데.”
눈빛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그녀의 눈빛이 그러했다. 그러든 말든, 태령은 차분하게 안부를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러자 조 여사의 딸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재수 없으니 가식 떨지 마. 내 걱정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주제에.”
서강준과 맞선을 보았을 즈음, 조 여사의 딸은 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성사될 수 없었던 결혼을 대타까지 세우는 사기극으로 밀어붙인 건 조 여사였다. 이노의 유 회장과 남편을 설득한 조 여사는 마음 넓고 가련한 현모양처 흉내까지 냈다. 자신의 남편과 쌍둥이 여동생 사이에서 낳은, 보는 것도 끔찍스러운 사생아에게 제 딸 노릇을 맡겼으니까. 오로지 이노를 위한 희생이라는 명목하에 말이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이거구나? 나 열 받게 해서 내 회복 더디게 하려고, 그래서 이 자리 어떻게든 더 지켜보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언니. 남편이…… 흣!”
“어디서 남편이야! 나 대신 결혼식장에 섰더니 네가 진짜 아내라도 된 것 같아!”
벌떡 일어난 조 여사의 딸이 태령의 머리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내 남자고 내 남편이야! 내가 그 남자를 얻으려고 뭘 포기했는지 네가 알기나 해?”
앙상한 손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태령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신음을 삼켰다.
“엄마 말 들으니까 내 남편이 그렇게 매너 있고 다정하고 완벽하다며? 그래서 반하기라도 했어? 탐이 나?”
“서강준 씨가 저한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결혼식 때도 느꼈지만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요.”
머리채를 잡힌 상태에서도 태령은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혹시 두 분 사이에 제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나 물어보려고 온 거예요. 그래야 저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계속 씨부려 봐, 그럼 내가 탐스러운 이 머리칼을 싹 다 뽑아줄게. 응?”
조 여사의 딸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또 다른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터라 태령의 변명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그 이름을 언급하기 전까지는.
“혹시 허경수라고 알아요, 언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가 태령을 재촉한다. 계속 말해보라고.
“서강준 씨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라고 말하면서 분명 저한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 같았어요.”
“…….”
“그래서 나중에 꼭 봤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더니 강준 씨가 그랬어요. 그 동생은 죽어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머리채를 잡고 있던 앙상한 손이 툭 떨어졌다.
“허경수가 죽었다고?”
“네.”
독기 어린 핏발 선 눈동자에 언뜻 물기가 차오르는 것도 같았다.
“내 눈앞에서 꺼져.”
태령이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조 여사의 딸은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태령은 오후의 햇살이 나른한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날씨 좋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짓밟힐수록 악착같이 고개 들고 싶어 하는 잡초의 본성을. 지키려고 하면 더 뺏고 싶어지는 인간의 잔인한 본능을.
“서강준은 계획에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