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어나 야관문, 절대 금지.2021.05.20.
“언제까지 안겨 있을 겁니까?”
머리 위로 내려앉는 묵직한 저음에 태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내리깐 시선 끝에 남편의 허리에 꽁꽁 두르고 있는 자신의 팔이 보였다. 맙소사, 대체 내가 무슨 짓을.
“내 몸값 꽤 비싼데,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놀리는 게 다분한 남편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란 태령은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남편을 봐야 하는데, 부끄럽고 민망해서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최악으로 흐트러진 상황에 남편이 나타났고 제정신으로 안긴 게 아니었으니까.
“허락도 안 했는데 제멋대로 안겨서 미안해요.”
그래서 태령은 사과부터 했다. 남편에게 동의를 구하긴 했지만 대답도 듣기 전에 품에 안겨든 것 같아서.
“기분 나빴을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해야 강준 씨 기분이 풀릴까요?”
당연히 기분 나빴을 것이다. 경멸하는 아내가, 그것도 찌든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허락도 안 했는데 안겼으니.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힘없이 내리깐 시야에 남편이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핸드폰 번호 알려줘요. 그걸로 퉁 칩시다.”
“번호는 그냥 알려줄 수도 있는 건데요.”
우리 부부잖아요. 핸드폰을 받아들며 태령이 중얼거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그게 뭐 어렵다고 내가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슨 소리냐는 듯 태령이 눈을 들자 강준이 눈짓했다. 번호 먼저. 지은 죄가 있는지라 얼른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는 아내의 손에 강준은 시선을 고정했다. 액정을 두드리는 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부드럽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몸도 나긋나긋한데, 손도 그렇고 손짓도 그렇고.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 끈다.
“부재중 전화 갔을 테니 번호 저장해주세요.”
핸드폰을 건네는 작은 손을 보니 제 허리를 끌어안았던 손길이 떠올랐다. 아내는 기분이 나빴냐고 물었지만 사실 강준은 꽤 좋았다. 저 작은 몸이 자신의 품에 딱 맞아떨어지는 나긋나긋한 그 감촉이.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 건가. 한 번 의식하니 자꾸만 의식이 된다. 아내라는 여자가, 내 안의 남자가.
“해장하러 갑시다.”
그런 아내를 외면하듯 강준은 등을 돌렸다.
*** 밤 10시가 넘은 시각. 아내가 선택한 가게는 근처 작은 골목에 위치한 콩나물국밥집이었다. 다이어트를 이유로 밥은 주지 말라고 한 아내는 국물 먼저 집중공략 했다. 조금씩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국물을 반쯤 비운 후에야 콩나물을 말끔하게 건져 먹었다. 아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강준은 지켜보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에 혈색이 돌고 퍼석했던 눈동자에 이채가 도는 걸. 살 것 같은 얼굴로 물을 마시는 아내에게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 비서도 모자라 운전기사까지 퇴근시키고,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안부를 묻는 별 의미 없는 연락, 서프라이즈처럼 데리러 가는 것. 유부남인 윤 실장이 추천해준 잘해주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결혼까지 골인했다나 뭐라나. 한정판 명품을 사주거나, 장소를 통째로 빌리거나, 화려한 이벤트를 해주거나. 틀에 박힌 친구들의 조언보단 확실히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부부인데도 서로의 핸드폰 번호조차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아내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걸 핑계로 아내를 데리러 온 거였다.
“대리운전 있잖아요.”
하여간 대답이라도 못하면.
“창백한 얼굴에 몸까지 못 가눴으면서, 대리 기사를 부르겠다고?”
사실 강준은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망설였었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했다가 아내가 더 경계하고 의심할 것 같아서. 하지만 바람 한 점 없는데도 휘청거리는 아내를 본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데리러 오길 잘했다고. 물론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하면서 악착같이 괜찮은 척하는 아내에게 조금 화도 났다. 왜 매번 이런 모습을 보여서 못된 마음은커녕 더 잘해주고 싶게 만드는지.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침묵하는 아내에게 강준은 조금은 짓궂게 말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미안하다는 말은 잘도 하면서, 왜 고맙다는 말은 못 하냐고.
“아니면, 내가 어렵나.”
끝까지 침묵하는 아내에게 이만 시선을 거두며 강준은 일어났다.
“피곤할 테니 이만 집에 가요.”
그런데 옷이 잡아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강준이 고갤 내리니 재킷 끝자락을 소심하게 쥐고 있는 작은 손이 보인다.
“……고마워요.”
모기만 한 음성으로, 강준이 좋아하는 말랑말랑한 눈으로, 어색하게 고마움을 전하는 아내도. *** 월요일 저녁 7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좌식 룸엔 연숙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바쁠 텐데 내가 괜히 저녁 사준다고 한 건 아니지?”
강준에게 외박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하자 연숙이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 3년간 며느리에게 간섭 한번 안 한 시어머니의 부탁을 태령으로선 거절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사주신다는데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죠.”
그런데 푸짐한 음식이 잔뜩 차려진 상을 바라보던 태령의 눈빛이 묘해졌다. 메인요리가 소갈비 전복찜이었다.
“갈비찜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날 연숙에게도 보였던 걸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태령이 망설이자 연숙이 싱긋 웃었다.
“내 앞에선 편히 먹어도 된단다. 네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조 여사도 참. 많이 먹으렴.”
가장 큼지막한 갈비찜을 접시에 덜어주고선, 이것저것 반찬까지 밀어준다. 그걸 지켜보던 태령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닌 참 따뜻하고 좋은 분 같으세요.”
“태령이 너도 좋은 아이고 예쁜 며느리란다.”
그렇게 말을 하는 연숙의 눈빛은 진실되고 따뜻했다.
“태령아, 강준이도 돌아왔으니 우리 이제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랑 제가요?”
“그럼! 며느리랑 시어머니는 뭐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는 법 있니? 내가 딸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데. 난 이참에 딸 하나 생긴 셈 칠 거다. 그래도 되지?”
너무도 간절한 연숙의 눈빛에 태령은 웃으면서 ‘네’라고 했다.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듯 연숙이 해맑게 웃었다.
“음식 식으니 얼른 먹으렴. 먹고 나서 우리 실컷 수다 떨자.”
짧은 시간이지만 대화를 나누고 나니 연숙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재벌가 사모님답지 않게 소탈한 데다 정도 많고 마음도 따뜻하고. 소녀처럼 해맑고 순수한 분이었다. 식사를 끝내자 향긋한 국화차와 아기자기한 다과가 마련되었다.
“2세 계획은 강준이랑 대화 좀 해봤니? 어른들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고. 난 너희들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어서 묻는 거니 부담은 갖지 마렴.”
“아직 대화 안 해봤어요. 정략결혼인 만큼 서로가 불편하고 어색해서, 가까워지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6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적당히 댄 핑계였다. 그런데 연숙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태령아, 내 아들이 참 일을 잘해. 28살에 재계를 이끄는 영향력 있는 최연소 경영인 3위에 돈 굴리는 재주도 타고났어. 12살 때부터 주식을 시작해서 지금 보유한 해외 주식에 부동산까지 합치면 아버님보다 더 부자일지도 몰라.”
갑자기 그 말을 왜 하는지 알 수 없어 태령이 가만히 바라보자 연숙이 말을 이었다.
“그런 녀석이 비혼주의까지 깨면서 맞선 볼 상대로 널 지목하고 결혼까지 한다고 했어. 자기가 한국에 없는 동안 너 귀찮게 하지 말라고 못까지 박았고.”
“…….”
“넌 정략결혼이겠지만, 강준이는 네가 좋아서 한 결혼이라는 뜻이야.”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연숙까지 오해하니 답답했다. 그래서 태령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자 연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우리 강준이가 못되게 구니?”
“그런 건 아니구요.”
태령이 적당히 한 대답에 연숙이 발끈했다.
“망할 서 씨 집안 유전자 같으니라고! 아니, 왜 좋아하는 여자한테 표현을 못 해! 안 봐도 훤하다! 너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을지!”
서 씨 집안 유전자라는 말이 또 나오자 태령은 못 참고 물었다.
“어머니, 서 씨 집안 남자들 유전자가 유별나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연숙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별나다기보다는 그놈의 서 씨 남자들이 너무 잘나서 문제라는 게 맞겠구나.”
여전히 풍채가 좋은 서 회장과 인물이 훤한 강준을 떠올리면 잘난 건 맞는데, 그게 왜.
“생각해보렴. 금수저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인물 좋고 풍채 좋고 똑똑해. 그럼 어떻겠니?”
솔직히 태령은 모르겠다. 남편 말고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자존심 세고 고집 세고 지 잘난 맛에 살아. 모든 사람은 당연히 자기한테 맞춰줘야 하고 여자들은 다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고.”
연숙이 분한 듯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는 존중해주고 그 마음을 표현해줘야지! 무슨 애도 아니고 괴롭혀서 관심 끌고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고. 그뿐이니? 여자가 먼저 사랑 고백을 해주길 원한다니까?”
이후 연숙이 하는 말들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아내의 관심을 끌려고 다른 여자들을 끌어들인 서 회장. 전 국무총리의 외동딸로 태어나 천성이 밝고 누구에게나 상냥한 연숙에게 비틀린 사랑을 보여준 서 부회장. 하나뿐인 손주이자 자식에게 보여준 건 살벌한 부부싸움에 늘 살얼음판이었던 집안.
“젊은 나이에 폐암 말기 판정받은 후에야 강준이 아빠가 고백하더구나. 날 너무 사랑한다고. 그런데 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두렵고 화가 났다고.”
“…….”
“나도 그 사람 따라 죽고 싶었어. 이승에서 못 한 사랑 저승에서라도 하려고. 그런데 강준이 때문에 버틴 거야.”
“…….”
“그 사람 그렇게 가고 어머니까지 쓰러지시니 그제야 아버님도 당신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펑펑 우시면서 무릎 꿇으셨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연숙에게 태령은 조심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러자 얼른 눈물을 훔친 연숙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머님이랑 내가 버릇처럼 한 말이 뭔지 아니? 망할 서 씨 집안 유전자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말이야.”
“…….”
“결론을 말하자면 서 씨 집안 남자들은 사랑에 참 서툴러. 그 고생은 당연히 아내 몫이고.”
서 씨 집안 유전자라는 말을 태령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숙이 조심히 태령의 손을 잡았다.
“부부 사이엔 믿음이 있어야 해. 그 믿음을 쌓으려면 대화를 해야 해. 어머니와 난 소통을 못 해서 이 사달이 났지만 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연숙에게 약속을 해 줄 자격이 태령에겐 없었다. 부부, 믿음, 대화. 이 모든 것들은 조 여사의 딸과 서강준이 쌓아야 할 것들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연숙이 태령의 옆으로 오더니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해왔다.
“특히……는 꼭 대화를 해서 타협을 하렴.”
서 회장도 그렇고, 고 서 부회장도 그렇고. 살벌한 부부싸움 뒤에도 왜 아내와 굳이 한 침대에서 자려고 고집하는 이유.
“어머니랑 내가 생각하기엔 ……도 물려받은 유전자가 분명하거든.”
그것 때문에도 참 많이 싸웠단다. 연숙의 속삭임이 길어질수록 태령도 점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장어나 야관문 이런 건 절대 금지야, 알았지?”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연숙이 한 마지막 당부였다.
***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차창 밖을 바라보는 태령의 심장은 이유 없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연숙 탓이었다. 마지막 속삭임은 굳이 안 해줘도 되는 거였는데. 집에 도착한 태령은 2층에서 샤워 후 가볍게 메이크업을 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침실 문을 연 태령은 욕실에서 나오는 남편과 맞닥뜨렸다. 느슨하게 걸친 가운 사이로 보이는 아찔한 흉근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몸이 좋아서 노출하는 것도 좋아하는 걸까.
“노크 없이 들어와서 미안해요. 강준 씨가 11시에 들어온다고 해서, 그래서 당연히 없을 줄 알고.”
“같이 쓰는 침실인데 노크를 왜 해요.”
수건으로 머리칼의 물기를 털며 강준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도……!”
노크는 하기로 해요. 그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든 태령은 입술이 굳어버렸다. 젖어 있는 검은 눈동자를 보자 또다시 연숙의 속삭임이 떠올라서였다. 미쳤어, 정말!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시선을 내린 태령은 남편을 빠르게 지나쳤다.
“제가 왼쪽에서 잘게요.”
빨리 눕고 빨리 잠들자, 그럼 돼. 침대라도 넓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잡던 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운은 왜 벗어요?”
“잠버릇인데.”
“……!”
“벗고 자는 거.”
침대 오른쪽에 선 남편이 가운을 벗으며 비스듬히 몸을 튼 순간, 태령은 머릿속이 암전되었다. 그럼 그때 잠옷은 왜 찾으러 올라왔냐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태령 씨 때문에 바지는 예의상 입은 거고.”
두 번째 보는 건데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몸이었다. 쫙쫙 갈라진 근육의 형태가 지독하게 선명했다. 하필 바지는 왜 골반에 비스듬히 걸쳤고 손가락은 왜 바지 허리 부분을 잡고 있는지.
“태령 씨가 이해해주면.”
나직하게 흘러나온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령은 떨리는 눈동자를 들었다. 그녀와 다르게 지독히도 여유로운 눈빛이 활강하듯 와 닿았다.
“바지도 벗고 자고 싶은데.”
맙소사, 이제야 알았다. 그가 바지 허리춤에 손가락을 걸고 있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