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품 한 번만 빌려줄래요.2021.05.16.
강준은 생각했다. 왜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요구르트를 손에 들고 불결한 비상계단에 앉아 있는지. 모든 발단은 카페에서 두 친구가 해준 조언이었다.
‘정성보단 비주얼이니 백제 호텔 BAR에서 안주 그냥 공수해.’
‘1%의 정성까지 보여주면 감탄에 감동까지 있으니 가볍게 하나 만들어도 좋고.’
그래서 추천받은 게 핑거푸드인 카나페였다. 요리할 필요 없이 그냥 재료만 올리면 된다나 뭐라나.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고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걸음한 곳에서 아내를 본 것이다. 이건 분명 우연이었다, 절대 의도적으로 연출할 수 없는.
“숨 좀 쉬면서 마셔요.”
빨대로 요구르트를 쪽쪽 빨아 먹으며 아내가 강준을 바라보았다. 저 숨 잘 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랑말랑한 눈으로. 입에 뭘 물려줘야 보여주는 저 눈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아내에게 자신이 음식보다 못한 존재 같아서. 아, 난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 남편이었지.
“요구르트 안 좋아한다더니.”
그렇게 좋아하는 거면 냉장고에 쌓아놓고 실컷 먹든지. 숨어서 먹기는 왜 숨어서 먹냐고. 사람 신경 쓰이게.
“저 안 좋아하는데요.”
조금은 뾰로통하게 대답한 아내는 입조차 안 댄 강준의 요구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강준 씨는 요구르트 좋아한다면서요.”
안 좋아해요. 아니, 싫어한다고. 사실 강준은 새콤하고 달달한 맛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빤히 바라보자 하는 수 없이 요구르트를 입에 가져갔다. 성격에 안 맞는 바람둥이 흉내보다는 요구르트를 마시는 게 낫다는 합리화를 하면서. 딱 질색인 맛이 입안에서 번지자 절로 눈썹이 올라섰다. 대체 이게 뭐 맛있다고 숨어서 먹는지 알 수 없어서 강준은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조용히 웃음을 참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나 요구르트 좋아합니다.”
왜 웃는지 알 것 같아 강준은 힘주어 말했다.
“믿을게요, 요구르트 좋아한다는 그 말.”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는 아내의 눈동자에 희미한 웃음기가 번진다. 요구르트를 좋아하지 않은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런데도 자신을 위해 거짓말해줘서 고맙다는 것처럼.
“…….”
“…….”
이상한 기류가 감돌자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회피했다. 다시 요구르트를 쪽쪽 빠는 태령의 고막이 쿵쿵 울린다.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지. 이건 남편 때문이 아니라 요구르트 때문에 행복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게 치부한 태령은 이제 남편이 잘해주려는 이유를 궁리했다. 아무리 봐도 동정심밖에 없었다. 갈비찜은 그렇다 치고. 비상계단에 앉아 요구르트를 마시는 모습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긴커녕 그 동정심을 조 여사에게 방패로 써먹을 궁리를 하게 된다. 진짜 유태령도 아닌데 뭐 어때. 그때 남편이 일어나서 태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만 집에 갑시다.”
근데 손은 왜 내미는 건가요. 태령이 눈빛으로 묻자 남편이 조심히 물었다.
“혹시 나랑 손잡는 것도 싫어요?”
비상계단에 앉아서 요구르트도 같이 마셔줬는데.
“…….”
내가 이 손을 잡아도 될까. 태령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남편을 방패로 이용할 거라면, 이 남자에게 조금은 잘해줘도 될 것 같았다. 태령이 손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남편이 제 손안에 작은 손을 가두었다. 손이 커서 온기도 잘 가두는 걸까. 남편의 손에서 번지는 따뜻한 온기에 차가운 손끝이 간지러웠다.
*** 강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주문해놓은 와인과 안주가 도착했다. 호텔 직원들이 거실에 있는 테이블을 테라스로 옮긴 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세팅을 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직원들이 나간 후 강준은 꽉 채워진 테이블을 눈으로 훑었다. 화려한 비주얼의 안주들을 보고 있으니 굳이 카나페는 없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 그것까지 하는 건 미친 짓이지. 작게 중얼거리는 그때 한 줄기 불어온 바람에 은은한 향이 묻어난다. 무심코 돌아서자 이제 막 테라스로 들어서는 아내가 보였다. 샤워 후에도 메이크업을 한 아내를 보니 옅은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맨얼굴이 훨씬 낫다니까, 말도 참 안 들어.
“오늘 무슨 날인가요?”
사뿐히 다가선 아내에게선 바람에 묻어 있던 냄새보다 더 짙은 향기가 났다. 문득 아내와 가까이 있을 때마다 이 향을 맡았던 게 떠올랐다.
“태령 씬 무슨 향수 씁니까?”
불쑥 묻는 말에 아내가 강준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도 샤워가 가능한 건지, 유달리 눈동자가 더 맑고 깨끗했다.
“아로마 냄새일 거예요. 제가 좀 예민해서 아로마 스프레이를 자주 뿌리거든요. 혹시…….”
조금 긴장한 눈빛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강준은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태령 씨한테 좋은 냄새가 나서 물어본 거예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강준이 와인을 따는 동안 아내는 테라스 너머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테라스 아래 깔린 야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래서 아내가 여기를 아끼는 건지도. 고급스럽고 화려한 신혼집에서 테라스만이 아기자기한 건 아내의 손을 탔다는 의미니까.
“오늘은 내 취향대로 준비했는데, 괜찮죠?”
“네, 와인도 좋아해요.”
매끄럽게 대답한 태령의 시선이 화려하고 푸짐한 안주로 향했다.
“근데 강준 씬 손이 커서 그런지 통도 크나 봐요.”
“설마 손만 클까요.”
붉은 액체를 채운 잔을 내밀며 강준이 한 말에 아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상상을 했길래 얼굴까지 새빨개지셨을까. 놀리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강준은 얄미울 만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키도 크고 발도 크고.”
민망했는지 와인 향을 맡으며 한 모금 마신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이거 정말 맛있어요.”
강준의 시선이 아내의 입술에 닿았다. 와인에 젖은 입술이 촉촉해서일까. 미묘하게 움직이는 입술이 말랑해 보여서일까. 입안에서 향긋하게 번지는 와인보다 아내의 입술이 더 달 것 같았다. 감촉도 분명 부드럽겠지. 홀리듯이 시선을 빼앗긴 강준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천천히 뻗은 손으로 아내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강준 씨?”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얼어붙은 아내가 보였다. 강준은 살며시 미간을 구기며 손을 내렸다.
“미안해요, 입술이 젖어 있길래.”
미친놈. 스스로에게 욕이 나왔다. 동요하는 마음도 모자라 몸까지 동하는 것 같아서. 잘해주자고 마음먹은 게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이거 되게 비쌀 것 같은데.”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아내가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싸진 않아요.”
방금 마신 로마네 꽁띠의 가격을 알려주면 놀랄 것 같아 무심히 대답했다. 자꾸만 입술로 향하는 시선을 끌어올리며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동생처럼 여기던 녀석이 하나 있었어요.”
경수를 떠올리면 마음이 다시 단단해질 줄 알았는데. 예전처럼 눈앞의 아내가 경멸스럽지 않다. 도대체 왜, 뭐가 변해서.
“독일까지 데려갈 만큼 크게 키워주고 싶었어요.”
“…….”
“내 말엔 죽는시늉까지 할 만큼 바보같이 착했지만 워낙 똑똑했으니까.”
강준이 오늘 술자리를 제안한 목적이었다. 아내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 녀석 이름은…….”
그 이름을 들은 아내의 반응을.
“허경수라고 해요.”
강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와인 잔을 들어 다시 입술로 가져가는 동작이 느리고 섬세했다. 마치 생각할 시간을 끄는 것처럼. 가느다란 목으로 와인을 넘긴 태령은 차분히 대답했다.
“기억할게요. 강준 씨가 그렇게 아끼는 동생이라면 조만간 볼지 모르니까요.”
남편이 원하는 반응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뭔지 태령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친동생처럼 아꼈다는 말에 최선의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차갑게 웃었다.
“태령 씨가 볼 일은 없을 겁니다.”
“……?”
“그 녀석은 죽었으니까.”
아끼는 동생의 죽음을 말하는 남편은 지독히도 담담했다. 그런데 왜 난 그가 슬퍼하는 것 같지. 그 담담함이 상처 같지. 태령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와인이나 마십시다.”
대화 주제를 틀며 잔을 들어올리는 강준도 머릿속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다. 허경수란 이름에도 반응이 없는 아내의 모습이 연기가 아니었으면 해서. 차라리 아내가 그 녀석의 알리샤가 아니었으면 해서. 그런 이율배반적인 바람이 자꾸만 거슬려서. *** 남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으로 끝끝내 아무 말도 안 했다. 다정해지고 싶어 안달 난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고 넘어오지 않았다. 왜 날 그런 눈으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을까. 결국 잠을 설친 태령은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김 비서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스케줄을 소화했다. 일에 집중할 때만큼은 잡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서강준이 그만 제 머릿속에서 나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독하게 버티던 태령이 무너진 건 마지막 스케줄이었다. 밤 9시, 강남의 FOXY BAR. VIP 밀실의 육중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뿌옇게 새어 나오는 연기와 함께 태령이 꼿꼿한 자태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어지러워.”
저 안에는 실내금연이라는 말이 먹히지 않는 꼰대들이 있었다. 덕분에 태령은 평생 맡을 담배 연기를 폐가 썩어들어갈 것처럼 흡입했다. 하지만 눈 한번 찡그리지 않고 목을 타고 올라오는 기침까지 참아냈다. 늘 그렇듯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즐기기 위해 오는 공간. 하지만 태령에게는 원하는 거래를 좀 더 쉽게 거머쥘 수 있는 또 다른 일터였다.
“뭐 그래도 원하는 건 얻어냈으니까.”
오늘의 타깃은 태산 홈쇼핑 전무였다. 태산과의 독점 론칭을 앞세워 태령이 수수료율을 물고 늘어졌고 원하는 걸 쟁취했다. 수수료율은 5% 낮추었고 생각보다 빨리 술자리가 끝이 났다. 아마 저 안은 이제 시작이겠지만.
“찬바람을 쐐야겠어.”
태령은 비틀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지독한 담배 냄새와 주량을 넘어선 알코올이 몸 안에서 독처럼 번져나갔다. 김 비서를 괜히 먼저 보냈다는 후회가 밀려들 때쯤, 주차장 입구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하필이면 남편 서강준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말을 이을 힘조차 없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김 비서한테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왜요. 태령이 힘없이 눈으로 대신 묻자 그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내 연락처를 비서에게 물어보기엔 자존심이 상해서라고 합시다.”
새삼스럽게 연락처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는 대신, 태령은 질끈 눈을 감았다. 뭣 같은 타이밍이었다. 먹을 걸로 동정심 받는 것도 모자라서. 쓰러지기 직전에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난 게 또 남편이라니. 참 가지가지 한다, 유태령. 애꿎은 원망스러움에 태령은 힘없는 손으로 남편의 가슴을 밀었다. 제발 좀 사라져 줄래요. 하지만 밀린 건 남편이 아닌 태령이었다.
“얼굴이 창백한데 괜찮아요?”
남편의 나직한 음성에 어린 걱정이 거슬린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병 주고 약 주고. 변덕이 들끓는 당신 때문인데! 왜 갑자기 잘해줘서는! 좋아하지도 않는 요구르트는 비상계단에 왜 같이 앉아서 마셔줘서는! 와인을 마실 땐 왜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어서는!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건데. 분하고 억울하고 창피했다. 왜 가장 힘들어하고 아파할 때 이 사람이 있는 건지.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선 이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 건지. 눈시울이 뜨거워진 태령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었다.
“열은 없는데.”
그런데 맙소사, 뜨끈한 이마로 스며드는 서늘한 감촉이 말도 못 하게 좋다. 이 남자 손은 왜 이럴까. 태령이 차가울 땐 따뜻하고, 뜨거울 땐 차갑고. 남편의 품에서 나는 시원하면서도 강렬한 체취마저 좋았다. 코끝에 지독하게 맴도는 담배 냄새를 몰아내는 것 같아서.
“서강준 씨, 무슨 향수 써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다.
“미안한데.”
서늘한 손이 좀 더 이마를 만져줬으면 해서, 남편의 체취가 담배 냄새를 지워줬으면 해서, 몸을 기댈 단단한 품이 필요해서. 그저 살고자 하는 본능에 이끌려서.
“적선하는 셈 치고 품 한 번만 빌려줄래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태령은 여린 어깨를 움츠리며 남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중에 갚을 테니까.”
단단한 근육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하아.”
심장 박동이 거세게 느껴지는 가슴에 뺨을 대고 두 팔로 남편의 허리를 꼭 감았다.
“이제 좀 살 것 같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