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괴롭히고 싶어서, 잘해주고 싶어서.2021.05.13.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김 비서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시선을 내린 태령은 업무에 집중했다. 매끈한 손가락이 결재안을 확인하고 넘길 때마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참 후에야 김 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할 시간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제야 태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 비서를 바라보았다.
“우리 모녀 사이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김 비서도 눈치챘을 것 같은데.”
김 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이유가 있어서 몸을 사리는 것도?”
“……네.”
“그럼 알겠네요. 몸 사릴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거. 그런데도 거기까진 보고를 안 올렸고.”
지금까지 김 비서를 믿고 곁에 둔 이유이기도 했다. 예전에 몇 번 테스트 차원으로 김 비서에게 흘린 별 볼 일 없는 정보를 조 여사는 끝까지 알지 못했으니까.
“사모님께서 정말 별것 아닌 걸 물어보시고 부탁하셔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업무에 대해 물어봤다면 절대 대답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이걸 배신했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미 김 비서를 어떻게 할지 결정했지만 태령은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내 사람으로 제대로 움켜쥐려면, 다신 그러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놔야 했으니까.
“김 비서가 보고한 게 정말 별거 아니긴 했으니 책임은 묻지 않을게요. 그간 날 잘 케어해준 것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주고.”
“…….”
“지금 당장 깨끗하게 관둔다면.”
말을 끝맺자마자 김 비서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장님, 저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정말 사장님을 오래오래 모시고 싶어요.”
김 비서도 알 것이다. 태령 같은 상사를 만날 수도 없고, 어디에서도 이만큼 인정받기 힘들다는걸. 이쯤 해도 될 것 같아 태령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엄마가 좀 무섭긴 하죠? 똑똑한 분이기도 하고.”
조 여사를 당해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데 김 비서, 내가 엄마보다 더 젊고 똑똑하고 독해요.”
모든 걸 다 손에 쥔 조 여사는 결정적으로 사람 부리는 법을 몰랐다. 무섭게 협박하고 돈으로 회유만 할 줄 알지. 하지만 태령은 아니었다.
“엄마와 다르게 내 사람도 아낄 줄 알고.”
김 비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모시는 보스가 얼마나 치밀하고 상황판단력이 빠른 기회주의자인지. 차가운 겉모습처럼 갑질하는 대신 인간으로서 정 있게 대해준 게, 수도 없이 떠올라서.
“그러니 나 믿고 진짜 내 사람이 되어줄래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 비서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저녁 6시, 백제 호텔 피트니스 클럽. 헬스 또는 스포츠로 격렬하게 채우는 한 시간. 운동 후 호텔 라운지 카페에서 갖는 30분의 티타임. 급한 스케줄이 없는 한 강준이 귀국 후 매일같이 반복되는 삼총사의 패턴이었다. 오늘도 지정석에 앉은 삼총사 주위의 테이블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시끄러운 것도, 사람 많은 것도 질색해하는 강준 때문이었다.
“재우야, 남자끼리 카페 오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냐?”
서강준이 돌아와서 삼총사가 완전체가 되었다는 기쁨은 잠시 스치는 봄바람이었다. 강준이 돌아오기 전까지 운동은 생각나면 가끔. 운동이 끝나면 시원한 맥주를 한잔하거나 초저녁부터 신나게 달렸다. 그런데 클럽 대신 카페라니, 혀에 감기는 맛이 일품인 술 대신 쌉싸름한 찻물이라니. 가장 큰 불만은 멘탈 내려놓고 놀았던 파티에서도 정신 줄 잡고 적당히 놀아야 한다는 거였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법 없이도 살아갈 바른 생활 사나이 서강준이었다.
“혼자 바른 생활을 즐길 것이지 왜 우리까지 끌어들이냐고. 우린 아직 한창이고 달리고 싶고 즐기고 싶은데.”
“나처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경진이 네가 저 녀석한테 따져보든지.”
이 상황을 이미 받아들인 재우가 피식 웃자 경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니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아침마다 가장 곤욕이었다. 그런데 강준이 돌아와서 20대의 생활 패턴으로 다시 접어들고 있었다. 숙취에 시달리지 않는 아침을 얻게 되자 경진은 회의 때 졸지 않게 되었고, 업무 효율성도 높아졌다. 격렬한 운동을 즐기는 강준에게 맞추다 보면 쌍욕이 목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하고 나면 근육이 툭툭 돋아나고 또는 푹푹 파이고. 내 몸이 조각상처럼 느껴지면서 컨디션도 좋은 게, 다시 20대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이길 수 없다면 깔끔하게 포기해라. 그것도 남자다운 방법이지.”
거창하게 포장하는 경진의 말에 재우가 큭큭거리는 그때. 차가운 음성이 낮게 스며들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있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 무슨 뜻이지?”
지금까지 방관자처럼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강준의 말에 경진이 먼저 대답했다.
“뭐기는, 남편한테 관심 없단 뜻이지.”
“같이 있는데 남편에게 대시하는 여자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는 건?”
분명 서강준 본인 이야기다. 그걸 캐치한 경진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기는, 남편을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 취급하는 거지.”
모든 게 완벽한 서강준의 유일한 빈틈이 여, 알, 못이란 점이었다. 그런 친구에게 하는 나름의 소심한 복수였다. 청첩장을 못 받은 것도 기가 막힌데 결혼한 사실을 3년 만에 알린 것에 대한.
“쓰레기라.”
그 말을 곱씹는 강준의 검은 눈동자에 예리한 날이 섰다.
‘강준 씬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제가 간섭해주길 원하는 건가요?’
그날 아내가 왜 그 질문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왜 굳이 간섭해야 하냐고. 관심도 없는 쓰레기 같은 남편을 다른 여자가 주워가면 고마울 일인데. 그러니 강준이 뭘 해도 무감하게 바라보며 외면했던 거고.
‘하지만 미워할 것 같아요.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이.’
그런 남편이 관심을 요구하고 귀찮게 구니 얼마나 끔찍하게 싫었을까. 이제야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졌다. 자신이 아내를 경멸하는 만큼, 아내는 자신을 싫어하고 있었다. 본모습을 숨기고 연기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어쩌면 결혼식 때부터일지도. 결론을 내자면 지금 강준이 뭘 해도 아내를 아프게 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오히려 아내에게 흔들리고 동요하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강준이 뿜어내는 어두우면서도 스산한 분위기에 흠칫한 경진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서강준, 너 설마 내가 농담으로 한…….”
“어떻게 해야 하지?”
고개를 든 강준이 날이 선 눈동자로 경진의 말을 잘랐다.
“뭐를?”
“쓰레기 같은 남편을 아내가 다시 줍고 싶게 만들려면.”
“잘해주면 되지.”
“그러니까 어떻게.”
강준은 여자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태령 씨는 감이 좀 안 잡힌다. 그런 스타일은 딱 질색이라 만나본 적이 없거든.”
“내 아내가 어때서.”
불쑥 튀어나온 낮은 음성이 살벌했다.
“워워. 과민 반응 보이지 말고 진정해. 태령 씨 욕한 건 아니니까. 난 가벼운 연애를 즐기는데, 태령 씨는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야 할 것 같은 스타일이라서. 연애보단 결혼해야 할 여자. 뭐 그런 의미였다고.”
사실 강준도 자신이 왜 과민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를 욕하는 것 같아서, 그게 듣기 거슬려서, 그냥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도 내 아내인데. BAR 사장에게 아내가 제 편을 들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였을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와인 안주 말해 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강준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낮게 말했다.
“그건 왜?”
이번엔 재우가 흥미를 보였다.
“오늘 집에서 술 마시자고 했어.”
“막무가내로 질투 작전 밀고 나가더니 후퇴 후 작전 변경한 거야?”
“어.”
강준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자신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그럼 작전이 뭔지 말해 봐. 그래야 거기에 맞게 알려주지.”
“우선.”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느릿하게 커피잔을 어루만지던 길쭉한 손가락이 멈추었다.
“오늘부터 잘해주려고.”
뭐가 잘못된 건지 강준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주르륵 어긋날 수밖에. 아내도 당연히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 착각했다. 모든 여성이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강준만의 지독한 오만이었다. *** 퇴근길이 이렇게 암울한 적은 처음이었다. 집이 아니라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초록색 요구르트가 먹고 싶어졌다. 주차장에서 내린 태령은 옆 동 2층에 있는 대형 마트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요구르트를 사니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디서 먹지?”
결국 태령은 비상계단을 택했다. 계단에 앉아 포장도 뜯지 않은 첫 번째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뭐라고 맘대로 먹지를 못해.”
집을 드나드는 고용인조차 조 여사가 보내온 사람이었다. 집의 내부 관리도, 하다못해 냉장고를 채우는 음식들까지. 모두 조 여사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별것 아닌 것조차 조 여사에게 낱낱이 보고가 되었다. 그렇게라도 태령의 숨통을 조이며 괴롭히고 싶은 조 여사의 패악이었다.
“계약만 끝나 봐. 이 요구르트도 왕창 사 먹어줄 거야.”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빨대를 입에 물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돌아본 태령은 화들짝 놀라 다시 돌아보았다.
“……!”
반쯤 열린 비상구 문을 막고 서 있는 건 분명 서강준이었다. 아니, 그가 왜 비상구에 들어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게 문제였다. 진짜 조 여사의 딸이라면 입에도 안 댈, 보는 것조차 싫어할 요구르트가. 문 쪽을 등지고 한참 아래에 앉아 있으니 조용히 도망치면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힐을 벗어 손에 든 태령은 짜증이 치밀었다. 이 남자는 왜 항상 도망가게 만드는 걸까. 한 손엔 요구르트를, 다른 한 손엔 힐을 든 채 태령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계단을 내려오는 남편의 구두 굽 소리가 비상구를 울렸다. 진짜 미쳤어, 따라오긴 왜 따라와! 걸음을 서두르는 태령과 달리 계단을 내려오는 남편의 걸음은 여유로웠다. 근데 왜 구두 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리는 것 같지. 불안함에 뒤를 돌아본 태령은 가까운 거리에서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악!”
너무 놀란 나머지 발을 헛디뎌 버렸다. 앞으로 확 쏠리는 태령의 몸을 커다란 손이 날렵하게 낚아챘다.
“도망가는 취미라도 있어요?”
거칠게 날 선 뜨거운 숨결이 뺨을 스쳤다.
“나도 붙잡고 싶은 취미 생기게.”
고요한 정적 속, 밀착된 몸을 통해 서로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엇박자로 강렬하게 뛰고 있지만 이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두 개의 심장 모두 터질 것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있다는걸.
“요구르트 좋아하나 봐요.”
떨리는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뜨자, 바닥에 나뒹구는 요구르트가 보였다.
“근데 나 때문에 떨어뜨렸고.”
갈비찜도 그렇고, 요구르트도 그렇고. 왜 꼭 이 남자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그것도 구차하게 먹을 걸로.
“내가 다시 사줘야겠네.”
조금은 부드러워진 음성에 이상하게 맥이 탁 풀렸다. 저번엔 갈비찜을 사주더니, 이젠 요구르트도 사주겠다는 남편 때문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 요구르트 안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왠지 서글퍼질 것 같았다.
“너무 싫어해서, 그래서 다이어트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번씩 먹는 거예요. 입맛 버리라고.”
“…….”
“믿어줘요.”
그래서 구차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믿을게요. 식사 때처럼 이 남자가 건성이라도 또 그렇게 말해줬으면 바라면서.
“믿을게요.”
그런데 거짓말처럼 남편이 또 그렇게 말해주었다. 도대체 왜.
“그래도 요구르트는 사줄게요.”
“……안 좋아한다니까요.”
태령이 작게 속삭이는 순간, 남편이 품에서 놓아주었다. 가만히 돌아서자 미묘한 빛을 품은 검은 눈동자가 태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칩시다.”
“…….”
“그러니까 이자까지 쳐서 많이 사요.”
태령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말이 마치 날 방패로 쓰라는 말처럼 들려와서.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복잡한 마음으로 태령은 차분히 물었다. 이 말이 이젠 남편에게 늘 하는 멘트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냥.”
피식 웃은 남편이 천천히 손을 뻗어 태령의 손에 들린 힐을 가져갔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굽힌 후 신기 좋게 앞에 놓아주었다.
“쓰레기 남편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아서라고 해두죠.”
올려다보는 남편의 눈동자에서 태령이 본 건 양면성이었다. 괴롭히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도, 잘해주고 싶어서 또 몸이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