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부인이 나 좀 챙겨가요.2021.05.09.
저녁 9시. 태산 홈쇼핑 창립 18주년 뒤풀이 행사가 열린 디어 호텔 연회장.
“여기는 도라 쇼핑몰 대표 김진경 씨. 그리고 여기는 이노패션 유태령 사장.”
태산 홈쇼핑 김 전무의 소개에 두 여자는 서로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유 사장이 애슐레저 회사 인수에 관심 있대서 내가 소개해주는 거야. 그러니 두 사람 대화 잘 나눠보라고.”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준 김 전무가 간 후, 두 여자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잠시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건 태령이었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요청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요.”
파티장 왼쪽이 인적이 드물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통창 너머를 응시하는 두 여자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미친 쭈, 잘 지냈어? 네 걱정 엄청 했는데.”
진경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작게 인사를 건네왔다.
“걱정을 왜 해, 사막에 버려놔도 살아남는 게 난데.”
미친 쭈, 오랜만에 듣는 별명이었다. 3년 만에 보는 친구를 바라보는 태령의 눈가도 촉촉했다. 꼭 원하던 순간에, 필요한 자리에서, 치밀한 계획이 맞물려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도록 사업적인 파트너로서.
“잘 지낸다더니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마귀할멈이 겁나 괴롭혀?”
“잘해주지도 않지만 괴롭히는 것도 없어.”
걱정을 시키긴 싫어 태령은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하긴, 우리 쭈가 보통 독해? 도라도 몰래 관리하면서 망한 회사까지 살려낸 능력잔데. 나도 주디스 매니아 됐는데 내 친구지만 너 좀 대단한 것 같아.”
진경이 장난스럽게 엄지 척을 해보이자 태령은 담담한 표정으로 지난날을 떠올렸다. 매각 위기에 놓여 있던 이노패션을 회생시키기 위해 걸었던 승부수.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대신 내세운 건 이노와 계약 만료를 2년 앞둔 스위스의 라이선스 브랜드 주디스였다. 브랜드 리주브네이션 전략을 앞세워 파격적인 컬러감과 실용성 있는 착용감으로 새롭게 선보인 주디스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매출이 500% 이상 성장했고 주디스와는 라이선스 계약 연장까지 한 상태. 새롭게 선보일 주디스 키즈 라인은 홈쇼핑 업체 1위인 태산에서 첫선을 보일 예정이었다. 이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냈다.
“안 봐도 훤하다. 잠도 안 자고 잘 먹지도 않았을 미친 쭈가.”
장난 반 걱정 반으로 바라보는 진경에게 태령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할머니는 봤어?”
“너도 못 보는데 할머니를 어떻게 봐.”
그래도 진경을 보니 태령은 숨통이 그나마 트이는 기분이었다.
“근데 진짜 이노에서 도라 인수할 거야?”
“응. 조만간 연락 갈 테니까 넌 밀당하는 척 제스처만 취해 줘.”
태령의 마지막 목표였다. 도라를 흡수한 이노를 통째로 꿀꺽해서 진짜 자신의 이름으로 사장이 되는 것.
“맞다, 진우 오빠가 너 본 것 같다고 나를 자꾸 쪼고 있어.”
“오빠가?”
“울 오빠 모델하는데 완전 잘 나가잖아. 설마, 몰랐어?”
“광고는 봤어.”
“어디 파티에서 너 본 것 같다는데 용케도 알아봤다니까, 둔탱이 리트리버 주제에.”
늘 웃는 인상의 진우를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대형견인 골든 리트리버가 연상되었다. 마주칠 때마다 농담처럼 사랑 고백을 하던, 진경처럼 밝고 정 많은 친구 오빠.
“우리 오빠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단세포인 거 알지? 널 보는 순간 네 이름 부르면서 졸졸 쫓아다닐 거 뻔하니 혹시 보게 되면 잘 피하고.”
“그럴게.”
대답과 달리 태령은 진우가 보고 싶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하게 만드는 남편과 달리 진우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만드는 부드러운 미소도. 분위기가 전혀 다른 두 남자를 비교하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진우가 덩치 큰 하룻강아지라면 남편은 범인 것 같아서. 남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돼서일까, 갑자기 주위 시선이 신경 쓰였다.
“진경아, 우리 이만…….”
이만 몸을 틀던 태령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서강준이 미녀와 함께 파티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헛것이길 바라며 천천히 눈을 깜빡여보지만 사라지긴커녕 점점 더 또렷해졌다. 조용한 태령이 이상했는지 그 시선을 따라간 진경이 싱긋, 웃었다.
“오올, 우리 쭈가 그래도 보는 눈은 있네. 근데 어쩌니? 임자 있는 걸 떠나서 저 남잔 넘볼 레벨이 다른데.”
“저 남잘 알아?”
“몰라, 근데 후광이 다르잖아. 그리고 저기서 내려왔으면 말 끝난 거지.”
“저기가 어딘데?”
“넌 이쪽 세계에 3년이나 있었으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 안 들키고 버틴 게 신기하네.”
진경이 기가 막힌 표정을 한 채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유 사장님, 저 위쪽에 숨겨진 공간이 VVIP 명단들만 모시는 곳이랍니다. 이 세계도 엄연히 서열이 있으니까 끼리끼리 노는 거지.”
그제야 태령의 눈에도 보였다. 연회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2층 한쪽에 마련된 프라이버시한 공간이. 때마침 고개를 튼 남편과 태령은 시선이 마주쳤다. 그렇게 잠시 시선이 엉킨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에게 남편이 내어준 팔을 무감하게 보는 걸 마지막으로, 먼저 시선을 거둔 건 태령이었지만. *** 진경과 몇 번을 더 마주쳤지만 말은 섞지 않았다. 그런데도 진경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태령에겐 위안이 되었다.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남편은 일부러 등을 지고 시선 안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11시, 집에 돌아갈 시간. 입구로 향한 태령은 직원에게 코트와 브리프 케이스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3층 주차장 입구에서 기다려요.”
귓가를 스치는 나직한 저음에 시선을 돌리니 남인 척 옆에 서 있는 남편이 보였다. 무심히 내리깐 시선, 너른 어깨, 단단한 팔, 쭉 뻗은 긴 다리까지.
“전 먼저 들어갈 테니 더 있다 들어오세요.”
태령 또한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게 말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던데.”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내가 깜빡하고 외박할 수도 있으니 부인이 나 좀 챙겨가요.”
능청스러운 대답에 휙 고개를 돌리던 태령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손바닥 안을 길게 훑어내린 것도 모자라 남편이 새끼손가락을 은밀히 걸어온 것이다. 얽힌 손가락을 어떻게든 빼보려고 했다. 하지만 태령이 힘을 준 만큼 남편도 딱 그만큼 힘을 주어 쉽게 방어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편의 커다란 손에 들린 재킷이 이어진 손을 교묘히 가려주었다.
때마침 직원이 나타났고 아슬한 타이밍으로 강준이 손을 놓아주었다.
“고마워요.”
식은땀이 난 손으로 직원이 내미는 코트와 브리프 케이스를 받은 태령은 움찔했다. 남편이 순식간에 자신의 손을 다시 잡았다 놓았다. 마지못해 눈을 들자 이번엔 시선을 엉켜오며 남편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거린다. 3층 주차장. *** 주차장에 남편이 나타나자마자 태령은 다짜고짜 물었다. 오늘은 일행도 아니고 남남처럼 있었는데.
“도대체 왜 그래요?”
뭐를. 무심히 눈빛으로 되묻는 남편에게 태령은 다시 말해주었다.
“같이 들어가자고 하는 것까진 이해할게요. 그런데 손은 왜 잡은 거냐구요.”
“또 도망갈까 봐.”
황당한 대답에 태령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태령 씨 주특기잖아요.”
활강하듯 내려온 검은 눈동자가 태령에게 고정되었다.
“제가 왜요, 죄지은 것도 없는데.”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정말 없어요?”
그런데 남편이 다시 되물어왔다. 무섭도록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로, 머릿속을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며.
“……!”
그대로 얼어붙은 태령을 보며 강준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얇은 눈꺼풀에 반쯤 잠긴 눈동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감했다.
“없으면 말고.”
경진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강준은 디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약속이 있었다. 중간에 빠질 수 있는 자리여서 연회장 2층 룸에 와서 아내를 지켜보았다. 한결같이 단정한 자태로 남자들을 적당히 경계하는 아내는 트집 잡을 게 없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을 보고도, 저 단정한 얼굴을 유지할지.
“태령 씬 약속을 참 잘 지켜.”
경진의 사촌 여동생을 끌고 내려왔지만 아내는 동요하지 않았다. 무감한 눈빛, 단정한 얼굴. 그리고 철저한 외면.
“물론 나도 잘 지키고.”
그렇게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지려는 아내를 잡아챈 건 강준이었다. 보는 눈도 있겠다, 그걸 구실 삼아 맘 편히 사라지려고. 아내의 손끝에 손가락을 건 것도 그런 이유였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서로의 손목에 채우는 수갑 같은 의미.
“외박에 관해선 내 넥타이를 끌고 와도 내가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에요.”
담담히 말을 이으며 강준은 왼손을 들어 보였다. 정확히는 결혼반지를 낀 약지를.
“일일이 말로 하기 귀찮아서.”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당신도 노력해야지. 아내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꼼지락거렸다.
“그러니까 외박은 태령 씨가 관리 좀 해줘요.”
조심히 강준을 올려다보는 아내의 눈동자에서 번지는 감정은 혼란이었다. 묻고 싶겠지, 어떻게 관리하면 되느냐고.
“타요.”
하지만 강준은 차 문을 열어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까지 말해주면 안 되지. 그러니 관리하는 방법은 알아서 고민 좀 해보시길. *** 집에 도착할 때까지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강준은 운전에 집중했고 태령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신호가 걸렸고 비스듬히 튼 시야에 아내가 보였다. 강렬한 메이크업은 더이상 눈속임이 안되는 듯 새벽에 보았던 그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그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 때쯤, 신호가 바뀌었다.
“잠깐 기다려주실래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드레스룸으로 향한 아내가 잠옷을 가지고 나왔다. 작은 손 위에 놓인 잠옷을 강준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번은 안 당해요, 그러니 잠옷 핑계로 2층엔 올라오지 마세요. 마치 그런 경고를 받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어서.
“그럼 잘 자요, 강준 씨.”
잠옷을 받아들자 기다렸다는 듯 이층으로 올라가는 아내를 강준은 굳이 잡지 않았다. 이틀 남은 자유를 아내가 마음껏 누리길 바라며. ***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태령은 엘리베이터에서 강준과 마주쳤다. 변함없이 집을 나온 건 태령이니 출근 시간을 바꾼 건 남편일 것이다. 이번엔 또 왜.
“아침부터 태령 씨 얼굴 보니 좋네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태령은 살그머니 집어삼켰다. 맞네,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게. 주차장에 도착하니 윤 실장과 김 비서가 각자의 차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령이 고개를 숙이자 강준도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자리 잡은 둘만의 작별 인사 방식이었다.
“유태령 씨.”
그런데 그가 태령을 다시 불러세웠다.
“오늘은 몇 시에 들어와요?”
남편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귓가에 모래알처럼 걸려든다.
“제가 오늘 일찍 들어와야 할까요?”
속내 파악하기를 포기한 태령이 조심스럽게 되묻자 그가 말했다.
“9시 정도 어때요?”
긴 손가락으로 나른하게 턱을 매만지고.
“테라스 분위기가 좋던데.”
집요하면서도 고요하게 눈을 맞춰오며.
“부부끼리 술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아서.”
마지막엔 부드럽고 짧게, 웃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다정한 부부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간 맞춰 들어올게요.”
기어이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강준은 차로 향했다. 커다란 몸이 차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돌아선 태령은 김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김 비서가 출근 시간에 마중을 나왔을까. *** 이노 패션 사옥 사장 집무실. 김 비서의 스케줄 브리핑이 끝나자 태령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했다.
“저녁 8시 일정 캔슬 가능한지 확인해줘요. 이유는 김 비서도 알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남편분과 좋은 시간 보내시려는 건데, 제 능력을 200% 발휘해서 스케줄 조정해놓을게요!”
싹싹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김 비서를 태령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는 27살, 학력은 고졸, 이렇다 할 자격증 하나 없는 평범한 여성을 직접 채용했다. 악착같이 살아온 각박한 삶이, 야무지다 못해 독기 품은 눈동자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이 오버랩되어서. 다행스럽게도 김 비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훌륭한 비서가 되어주었다.
“김 비서 눈엔 나와 남편이 사이가 좋아보였나 봐요.”
책상 위에 쌓인 결재안들을 무심한 손길로 매만지며 태령이 말했다.
“사이도 좋아 보이지만 두 분 다 선남선녀신걸요. 함께 서 계시면 보는 사람이 즐거워요.”
“그래서…….”
말을 멈춘 태령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들었다.
“이번엔 뭐라고 엄마에게 보고할 건가요?”
“……?”
“오늘도 우리 부부 사이는 좋아 보이고 집에서 술 약속까지 했다고 보고할 건가요?”
흔들림 없는 잔잔한 눈동자로,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담담히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김 비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이번엔 태령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