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워할 것 같아요.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이.2021.05.06.
“그러니까 왜요.”
발끈하듯 눈동자를 파르르 떠는 아내를 보며 강준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사실 강준도 아내와 한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결혼 허락을 받기 전, 서 회장과 약속한 게 있어서 사정설명 후 적당한 합의점을 찾을 생각이었다. 같이 자자는 한 마디에 아내가 이렇게 치를 떨기 전까진.
“태령 씬 나랑 한 침대에서 자는 게 싫나 봐요.”
“……싫다면요?”
“왜 싫을까요. 따로 자면 내가 외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확인하려고.”
이쯤에서 멈춰야 하는 걸 강준도 알고 있다. 자기 전까지 괴롭히는 건 정말 최악이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아내가 꽁꽁 숨겨놓은 모습을 드러낼 것도 같았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요? 약속 하나는 끝내주게 잘 지키는 강준 씬데.”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 아내의 여유도 강준을 도발했다.
“태령 씨도 약속은 잘 지키죠.”
남편이 짧게 웃으면서 한 말에 태령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은은한 빛을 머금고 반들거리는 강준의 눈동자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싫어하는 기색을 적당히 숨기지 그랬냐고.
“대신 다음 주부터 같이 자는 걸로 해요.”
결국 태령은 체념하듯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들어 올린 손끝, 그 손끝이 쓸어올리는 머리칼, 마지막엔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얼굴로, 천천히 옮겨가는 남편의 집요한 눈빛을.
“태령 씬 맨얼굴이 훨씬 낫네요.”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태령은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미쳤다고 맨얼굴을.
“보지 마세요!”
조 여사의 딸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커버하던 메이크업이었다.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아 지운 거였는데. 고개를 틀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남편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어쩌죠, 보지 말라면 더 보고 싶어지는데.”
청개구리도 그런 청개구리가 없다는, 연숙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결국 태령은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이 제발 좀 꺼져줬으면, 간절히 바라면서.
“유태령 씨, 나 좀 봐요.”
며칠 전 술자리에서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했던 거 취소. 정말 최악이야, 이 남자.
“아니면, 이대로 밤샐까요.”
정말 지독한 남자라고 생각하며 태령은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이미 보인 얼굴, 가려봤자 궁금증만 더 유발할 게 뻔해서.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고 있던 남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못 본 큰 점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예쁘기만 하네.”
어떻게 보면 남편도 이 결혼의 피해자라고, 태령은 생각했었다. 그래서 서로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도록. 달리는 차창 너머로 의미 없이 스치는 반복적인 풍경처럼.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다가 사라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태령 씬 내가 무서워요?”
담담히 물어오는 남편을 바라보는 태령의 눈동자는 더 이상 무감하지 않았다.
“아니면, 끔찍하게 싫나.”
지금 이 순간 넘실거리게 차오르는 감정을 두 눈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난 당신이 무섭지 않고 끔찍하게 싫지도 않아요.”
매번 제멋대로 경계선을 넘나드는 건 남편이었다. 남보다 못한 부부 사이라며 밀어냈다가,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라고 다시 끌어당기고. 궁지에 몰아넣고선 괴롭히면서 유유히 반응을 즐기고. 태령도 사람이었기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워할 것 같아요.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이.”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솔직한 심정을 말해주고 싶었다. 정말 당신을 미워할지도 모르니 그만 좀 괴롭히라고. 그런데 흐트러짐 없던 남편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번졌다. 조금 씁쓸해하는 것도 같고, 상처받은 것도 같은.
“기대할게요.”
하지만 남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태령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 대답을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 강준은 잠을 설쳤다.
‘하지만 미워할 것 같아요.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이.’
오늘 새벽 처음으로 아내가 속내를 드러냈다. 그토록 원하던 말을 들었는데 왜 기쁘지 않을까. 감정이 넘실거리던 물기 어린 눈동자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낯선 통증, 낯선 감각. 기어이 끄집어낸 아내의 본모습이 자꾸만 거슬린다. 분명 알리샤가 맞는데. 눈앞의 아내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그래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거냐고.”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린 강준은 6시에 집을 나왔다. 주차장에서 그를 깍듯이 맞이하던 윤 실장이 강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사장님, 사모님도 내려오셨습니다.”
이제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아내가 보였다. 강렬한 메이크업과 말끔하게 틀어 올린 말총머리. 여리여리한 곡선을 살려주는 세련된 원피스에 아찔한 스틸레토 힐까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걷는 모습은 도도하기까지 했다. 어젯밤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강준은 차체에 몸을 기댄 채 그런 아내를 흥미롭다는 듯 주시했다. 집요한 시선을 느꼈는지 아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을 떠올리면 민망하고 분하겠지. 또 도망가지 못해 안달하겠지. 하지만 어느 한 점에서 눈빛이 뒤엉킬 때까지 아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
팽팽한 침묵이 둘 사이를 빠듯하게 채웠다. 다가오는 대신 고개를 숙이는 걸로 아내가 인사를 먼저 건네왔다. 강준이 먼저 출발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변함없이 단정한 얼굴과 자태로.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독하다고 해야 할지. 시선을 먼저 거두고 차에 오른 강준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여전히 움직임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작고 가냘픈 실루엣을. 가슴에서 욱신거리는 감각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남동으로 갑시다.”
지독하고 대단한 여자라는 감탄과 함께 강준도 이만 인정하기로 했다. 녀석 때문에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의 감정을 아내에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걸. 그를 자극하고 도발하는, 지옥이고 사막이 될 이 결혼에 한 줄기 미미한 즐거움을 줄, 감히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말이다. *** 매주 목요일 오전 7시. 서 회장이 한신의 핵심인사들을 집으로 불러모아 조찬을 하는 이 시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기도 했다. 사람을 떠보고 가늠하고, 그에 따라 힘을 실어 주었다가 가차 없이 뺏는. 총성 없는 전쟁터 안에서 서 회장은 혈연에게 더욱더 가차없었다. 약육강식과도 같은 이곳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게 혈연관계였으니까. 그래서 며느리가 임신하자마자 이 아이가 한신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엄포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을 시엔 새로운 전문 경영인을 채용해서 한신을 통째로 넘기겠노라고. 한신의 후계자가 건재해야만 네놈들 자리도 유지할 수 있다는 가차없는 협박이었다. 그러니 서 회장의 손자인 서강준이 망나니라고 해도 한마음으로 지지할 수밖에. 다행스럽게도 서강준은 일탈 한번 없이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한신의 지지 않는 태양이 되었다. 지금도 그랬다. 갑작스러운 귀국에도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서강준에게 모두가 만족했다. 오로지 서 회장만 제외하고선. 독일에서 돌아온 지 벌써 두 달이 넘었건만. 저번 주말엔 제 어미와 장모와도 식사했다더니. 왜 나한텐 코빼기도 안 비쳐? 머리끝까지 부아가 치밀어 불러들인 손자는 제 옆에서 태연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귀국한 지가 언제인데 할아비가 부를 때까지 코빼기도 안 내비쳐?”
급기야 서 회장이 젓가락을 던지듯이 식탁 위에 놓았다.
“제 동의도 없이 취임식에 포럼에 행사에 모임에 각종 스케줄을 잡아놓은 회장님 덕분에 바빴습니다.”
손자의 담담한 대답에 서 회장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위독하다고 하면 손자가 바로 귀국할 걸 알았고 그래서 일정을 차르륵 잡아놓긴 했다. 기습적으로 자리에 앉혀놓지 않으면 손자가 또 독일로 떠날 것 같아서였다. 치사하다는 건 알지만 서 회장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하나뿐인 손자도 곁에 두고 또 증손주도 보면 얼마냐 좋냐고.
“그 손가락은 부러졌냐? 전화라도 하면 될 거 아니야! 할아비 걱정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고얀 놈 같으니라고!”
이번엔 서 회장의 손에 있던 숟가락이 공중부양했다. 그걸 신호로 15명이 앉아 있던 너른 식탁엔 둘만 덩그러니 남았다.
“독일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장님 건강을 보고받습니다. 보고서를 조작해서 저를 귀국하게 만든 한 번을 제외하고 늘 무탈하다고 적혀 있더군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서 회장이 늘 무탈하듯이 손자도 늘 이런 식이다. 괘씸해 죽겠는데 항상 완벽한 대답을 준비해놓으니 족칠 수가 없다.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완벽히 수행하니 트집도 못 잡겠고. 결국 서 회장은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손자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앉히는 데 성공했으니 궁금한 거나 묻자고.
“허 비서 죽은 게 언제인데 아직도 독일을 고집해.”
“할아버진 손자가 죽었는데 여전히 아무렇지 않나 보네요.”
서 회장을 빤히 응시해오는 눈동자는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을 만큼 무감했다. 내 핏줄이고 내 손자지만 참 속을 알 수 없단 말이지. 서 회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손자는 너 하나뿐이다. 거두어주고 네 옆에 붙여준 것만으로도 내 몫은 다 했어.”
허경수, 자신의 혼외 자식이 낳은 또 다른 손자. 젊을 적 돈을 노린 여비서의 농간에 하룻밤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 때문에 이혼당할 뻔했지만 충분한 보상과 함께 쫓아냈고 임신 사실도 몰랐다. 훗날 의지할 곳 없는 녀석을 호적엔 올리진 않았지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특한 데다 밝고 올곧은 성격이라서 커서는 손자에게 수행비서로 붙여주었고. 서 회장에겐 그게 전부였다.
“그러는 넌? 아직도 슬픈 게냐?”
“슬퍼한 적 없습니다.”
강준의 대답은 담담했다. 녀석이 죽었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이 슬픔인지는 모르겠다. 나약한 그 녀석에게 화가 났고 그 녀석을 그렇게 몰아붙인 누군가에게 분노했을 뿐.
“독일에 있으면 자동차 시장의 추이도 빨리 읽을 수 있고 영입해야 할 인물과 교섭도 진행 중이라 더 있으려 했던 겁니다. 일 년 안에 마무리하고 들어올 생각이었구요.”
“그럼 태령이랑 별거한 이유는 뭐냐?”
지금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서 회장이었다. 신혼여행은 그렇다 쳐도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신부를 버리듯이 떠났다. 그것도 모른 척 눈감아주었건만. 3년 후 손자는 독일지사 본부장직을 더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래서 겨우 불러들여 앉혀놨더니 이젠 별거라니.
“호텔이 더 편해서 잠시 머무른 것뿐이에요.”
“맞선도 거부하던 네가 얼마나 좋으면 결혼을 급하게 서두를까 하는 마음에 난 이 결혼 반대 안 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비혼주의를 고집하던 손자가 결혼하겠다는데, 우선 결혼부터 시키고 볼 일이었다.
“독일에 있는 동안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해서 손주 며느리도 없는 셈 치고 3년을 지냈다. 그렇게 돌아왔으면 행복하게 잘 사는 걸 보여줘야지.”
“저희 부부 문제예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서 회장은 조심히 물었다.
“강준아, 혹시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거냐?”
서 회장의 말에 강준은 유태령을 떠올렸다. 이젠 내 여자이고 내 아내. 지옥과도 같은 결혼 생활을 평생 함께할 동반자.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한, 이 결혼에 탈출구는 없다.
“이혼할 결혼을 왜 해요.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준이 딱 잘라 말을 하니 서 회장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들추어낼 사생활도 없고 업무적인 부분도 완벽하고. 이대로 대화가 중단되면 손자가 가버릴 건 뻔한데.
“요즘 자동차 반도체 수급에 문제가 많다던데. 한신은 어떠냐.”
이미 보고를 받았던 걸 다시 묻는 건 손자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할아비 마음이었다.
“올해 생산될 신차와 대량생산을 앞둔 전기차까지, 1년은 거뜬합니다.”
“모두 네 선견지명이었다지?”
어느새 손자를 바라보는 서 회장의 눈빛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작년은 대유행했던 전염병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자동차 시장도 IMF였다. 국내외적으로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생산을 줄였고 자동차 칩 생산회사도 당연히 추세를 따랐다. 오로지 한신만이 평소보다 더 많은 반도체 칩을 주문하고 구입해 두었다. 모든 임원들이 미친 짓이라고 반대했음에도 손자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독일 유명 자동차 회사와의 콜라보부터, 발 빠른 신차 생산과 생산력을 구비한 해외 공장까지. 이 모든 걸 단기간에 이루어낸 손자가 대견할 뿐이다.
“앞으로도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일정 때문에 이만 일어날게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매끄럽게 의자에서 일어나는 강준에게 서 회장이 다급히 물었다.
“증손주는 언제 안겨줄 생각이냐.”
“어제 신혼집에 들어갔어요.”
증손주는 최대한 빨리 안겨드릴게요. 그 말을 간절히 원하는 서 회장의 바람을 강준은 무심히 외면했다.
“약속대로 한 침대에서 잠도 잘 겁니다.”
잠은 꼭 같이 자는 걸로. 그게 강준이 신혼집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을 때 정한 이 결혼의 마지노선이었다. 아내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