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같이 자려고.2021.05.02.
차의 뒷좌석에 몸을 깊이 묻은 강준은 핏발 선 눈을 잠시 감았다. 한신모비스 부사장까지 겸한 이후 살인적인 스케줄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타고난 체력의 강준이라도 지칠 수밖에. 그 와중에도 문득문득, 집요하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게 아니라 솔직한 성격이어서 화법이 직설적인 거고.’
‘그 정도면 매너 끝판왕 아닌가요?’
그날 밤의 아내는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강준이 아는 알리샤 바튼은 굉장히 예민하고 불같은 성격의 여자였다. 작은 것 하나에도 불만을 터뜨리고 신경질을 부리며 받은 건 배로 기어이 돌려주고. 특히 일행인 남자에게 집적거리는 여자는 뺨까지 올려붙이며 욕까지 퍼부을 만큼, 말보다 늘 행동이 앞서는 여자. 그 일화를 말하던 녀석은 알리샤가 투정 부리는 아이 같다고, 알리샤의 질투라고 행복한 표정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패악이었다. 그런데 화장실 복도에서 마주쳤던 아내는 지독히도 낯설었다. 조곤조곤 말로 반박하는 것도,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남편을 편드는 것도, 어깨를 밀친 사장의 머리채를 휘어잡지 않은 것도. 자신이 없는 순간조차 차분하고 단정했다. 연기를 넘어서서 빙의라고 느껴질 만큼. 그래서일까, 아내를 떠올릴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사장님?”
윤 실장의 부름에 눈을 뜨니 신혼집 주차장이었다. 차에서 내린 강준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하강하는 화살표가 보였다. 강준은 엘리베이터가 열리기 기다리며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앗!”
그런데 턱 아래 어딘가에서 작게 터지는 신음소리. 무심히 내린 시야에 코를 손으로 감싼 아내가 강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리는 사람이 먼저예요.”
내가 아니라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조곤조곤 눈빛으로 따지는 아내를 강준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 서니 새삼스럽게 또 느껴진다. 미동조차 없었던 자신과 달리 몸까지 휘청였던 이 여자가 얼마나 작고 가냘픈지. 마지막 만남 때보다 더 살이 내려앉은 모습에 쓸데없는 생각이 치밀었다. 오늘도 밥을 굶었으려나, 뭐 그런, 미미한 궁금증 정도.
“미안해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움직이지 않은 강준의 품에 돌진한 건 아내였다. 그걸 짚어주는 대신 강준은 깔끔하게 사과했다.
“근데 어디 가려는 중이었어요?”
“강준 씨 마중 나온 거예요. 그게 아내로서 제 도리니까요.”
틀에 박힌 대답을 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강준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볼수록 이상한 여자였다. 남편에게 작업 거는 여자는 너그럽게 봐주면서 자신에게는 작은 것 하나도 지기 싫다는 듯 조곤조곤 반박해오니. 그게 또 마냥 미워보이지 않으니 그것도 거슬리고. 강준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위해 상체를 기울이자 몸이 가까워졌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내리깐 아내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 떨림이 마치 자신을 향한 거부 반응처럼 느껴져 기분이 조금 더러워졌다.
“먼저 타요.”
엘리베이터 문을 붙잡아주며 강준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또 부딪힐까 봐.”
*** 이 집이 처음일 텐데도 넓은 공간을 누비는 강준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건성으로 대충 거실을 훑고 소파에 앉은 강준을 태령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강준 씨 어머님인데, 전화 좀 받고 와도 될까요?”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태령은 테라스로 나가서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강준이한테 전화해봤자 알아서 한다고 끊을 게 뻔해서 너한테 전화했는데. 많이 놀랐지?]
처음이었다. 강준의 어머니인 연숙에게 전화가 온 건.
[혹시 강준이 옆에 있니?]
“강준 씨는 거실이고 전 전화 받으러 테라스로 나왔어요. 그러니 말씀 편히 하세요.”
그제야 연숙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전화를 한 이유는 내 아들이 좀 유별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야. 아니, 서 씨 집안 남자 유전자가 죄다 유별나다고 해야 맞겠구나. 덩치만 컸지 애만도 못하고 청개구리도 그런 청개구리가 없다니까?]
서강준이 애만도 못한 데다 청개구리라고? 전혀 상상이 안 돼서 태령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태령이 네가 우리 강준이 좀 잡아줬으면 해서.]
“제가요?”
[너희 모녀가 이해해도 내가 이해 못 해. 내 아들이 그러고 다니는 꼴도 못 보고. 결혼은 왜 하고 조강지처가 왜 있는데.]
연숙은 식사 때 나누었던 대화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강준의 일탈을 일 년 동안 눈감아주기로 했던.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강준이가 절대 그 호텔에 다시 못 가게 하렴.]
“호텔에 다시 못 가게 하라는 건 외박을 못 하게 하라는 뜻인가요?”
[그래, 그 표현이 맞겠구나! 우선 외박부터 못 하게 하고 차근차근 시작하는 거야. 부부로서 친근한 시간도 보내고 정도 쌓고 대화도 많이 나누고.]
연숙의 말에 태령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강준이가 워낙 간섭받는 걸 싫어해서 또 호텔로 가려 할 거야. 아니면 두 살림 차리듯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할 수도 있고. 그런 말을 안 해도 네가 먼저 외박은 안 된다고 딱 못 박으렴. 엄마 무서운지 몰라도 아내 무서운진 알겠지.]
그런 태령의 속도 모르고 연숙의 목소리가 해맑아졌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강준 씨가 제 부탁을 들어주려고 할까요?”
강준이 외박을 한다면 태령은 오히려 환영이었다. 그런데 그 외박을 못 하게 하라니.
[얘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못 들었어? 그리고 장담하는데 강준인 분명 너한테 마음이 있어. 그러니 그 성격에 이혼한다는 소리를 안 하는 거지.]
아니요, 아니라구요. 어머니까지 왜 이러세요. 태령은 울고 싶어졌다.
[혹시 사돈이 속 좁은 아내처럼 군다고 뭐라 할까 봐 걱정되면 그건 나한테 맡기렴. 내가 당장 사돈에게…….]
“할게요, 어머니.”
연숙이 조 여사를 언급한 순간 태령은 얼른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거실로 들어와 강준의 맞은편에 앉는 순간까지, 태령의 머리는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외박이란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난 호텔이랑 이곳을 번갈아 가며 지냈으면 하는데. 태령 씨 생각은 어때요?”
그 침묵을 깨며 남편이 먼저 한 말에 태령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소녀처럼 여리고 해맑아 보였는데, 연숙도 엄마였던 거다. 속내를 절대 내보이지 않는 저 남자를 꿰뚫어 보다니. 이래서 엄마는 위대하다고 하는 걸까.
“너무 늦은 시간에 일이 끝나면 들어오는 게 민폐니까. 서로에게 그게 나을까 싶어서.”
강준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강준 씨가 늦은 시간이라도 집에 들어왔으면 해요.”
“그렇게 하는 게 내가 불편하다 해도?”
대답이 의외라는 듯 강준이 반문했다.
“혹시 다른 이성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호텔을 고집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간섭할 겁니까?”
“집에 들어온 이상 강준 씨의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외박은 절대 안 돼요. 그건 부부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니까요.”
연숙이 조 여사에게 전화할까 봐 하루하루 불안해하느니. 지금 당장 담판을 지은 후 연숙에게 전화를 해주는 게 나았다.
“이상한 논리네요. 외박을 못 하는데 사생활은 어떻게 즐기라는 건지.”
더 낮아진 음성과 싸늘한 눈빛, 그건 곧 남편의 경고였다.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냐고.
“20대도 아닌데 체력이 좋은 편인가 봐요. 외박까지 하려는 걸 보면요.”
“그만한 체력이 된다고 하면, 양보해줄 겁니까?”
하지만 서강준은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여 거리를 좁히고선 나지막하게 속삭여왔다.
“못 믿겠으면 부인에게 먼저 증명해 보일 수 있는데.”
느긋한 말투처럼 여유로운 눈빛이 이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어.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태령은 한숨과 함께 진실을 털어놓았다.
“어머님이 많이 불안해하세요. 강준 씨가 다시 호텔로 간다고 할까 봐.”
“…….”
“그럼 어른들 모두 제 탓이라고 생각할 테고 그건 곧 이노와 한신의 동맹에 균열이 갈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하구요.”
어설픈 언변으로는 이 남자를 절대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약속대로 사생활은 절대 간섭 안 할 테니 부부로서의 최소 도리는 지켜주세요. 제가 흠 잡힐 일이 없도록. 그럼 뭐든 다 할게요.”
“뭐든?”
마지막 조건에 구미가 당겼는지 강준이 흥미를 보였다.
“뭐든요. 한 가지 부탁만 더 들어주면요.”
하나를 알게 되니 깨달음의 연속이랄까. 외박을 못 하게 하는 게 연숙의 바람이라면, 태령의 바람은 이거였다.
“강준 씨 상대에게 유부남인 건 밝혀주었으면 해요.”
두 사람이 부부인 걸 아는 사람들 앞에서, 혹은 남편의 여자들 앞에서 휘두를 유일한 무기. 태령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고 고개를 빳빳이 들게 해 줄. 아내의 허락하에, 그리고 허용한 선 안에서 남편이 놀고 있다는 증거.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다 들어주고 이해해줄 것 같더니. 말이 좀 다르네요.”
태령의 뻔뻔한 요구에 재밌다는 듯, 그가 피식 웃었다.
“그 대신 전 강준 씨만 볼게요.”
남편을 휘감고 있던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싸늘한데 무겁고 고요한데 휘몰아치는 것 같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폭풍전야.
“이쪽 세계에선 결혼한 부부들이 서로 애인을 두는 건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저에게 남자는 강준 씨가 유일할 거예요. 강준 씨가 누구와 뭘 하고 다니든…….”
“받아들이죠.”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편이 대답했다. 잘못 들었나 싶은 태령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그가 태연히 눈을 맞춰왔다.
“어딜 가든 유부남이라고 밝히고, 외박은 절대 안 하는 걸로.”
장난기를 쫙 뺀 검은 눈동자 안에서 거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대신, 나만 보고 내 말은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할 거예요.”
확인 차원으로 되짚는 담담한 음성에서 태령은 위험을 감지했다. 태령이 대답을 망설이자 그가 무심한 듯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자신 없어요?”
싫다고 하면 다 뒤집을 거면서.
“약속은 지켜요.”
지금 한 대답이 후폭풍을 몰고 올 거라는 걸 알지만 태령은 결국 대답했다.
“봐야 할 서류가 많아서 2층에 가서 마무리해도 될까요?”
“그래요.”
이번에도 그는 너무 쉽게 보내주었다. 2층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태령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고작 강준과 함께한 건 20여 분 남짓인데, 이미 탈진 상태였다. 처음으로 쉬고 싶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 2층에 마련한 집무실에서 밀린 서류를 검토하던 태령은 손으로 코를 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새벽 2시. 복도로 나와 계단 아래 1층을 내려다보자 고요하고 어둡다.
“잠들었겠지?”
그제야 태령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 끝 욕실로 향했다. 답답한 메이크업과 두통이 올 만큼 꽉 묶었던 머리를 풀고 샤워를 하니 숨통이 트였다. 곧 잠자리에 들 테니 가운만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칼의 물기를 닦으며 욕실을 나왔다. 긴 복도를 기척 없이 걸어 침실 문을 연 태령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태평양처럼 넓고 탄탄한 남자의 등. 인기척을 느꼈는지 강준이 몸을 틀자 잘 잡힌 섬세한 근육들이 요동쳤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태령의 앞에 남편이 멈추어 섰다.
“오, 옷을.”
너무 무방비한 상태에 당한 습격인지라 머릿속이 멍했고, 그래서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맨얼굴이란 것도 잊을 만큼.
“잠옷이 어딨는지 몰라서.”
그렇게 대답하는 남편은 눈빛도 표정도 담담했다. 이 상황에서조차 이 남잔 왜 태연하지.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이고. 헐벗은 건 이 남자고 여긴 분명 내 방인데.
“그래도 바지는 입고 왔어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조금 발끈한 눈을 들자 머리칼처럼 젖어 있는, 그래서 더 짙어진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자는 줄 알았더니 샤워를 하고 있었나 보다.
“잠옷 가지고 내려갈게요. 그러니까…….”
“이 방에서 나가라고?”
태령의 말을 자르며 남편이 태연히 되물었다. 그것도 당연한걸.
“여긴 제 침실이니까요.”
분명 무슨 오해나 착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태령은 최대한 차분하게 그에게 다시 알려주었다.
“알아요.”
그런데 헐벗은 상체보다 더 뻔뻔한 남편의 대답에 태령은 넋이 나가버렸다. 느닷없는 이 상황이, 헐벗은 남편의 상체가, 좁은 방을 꽉 채운 압도적인 존재감이. 서서히 뒤엉켜 몸집을 부풀리더니 기어이 태령을 집어삼켜 버렸다.
“알면서 왜요?”
왜 싫은데요. 태령이 떨리는 눈동자로 속삭이듯 묻자.
“같이 자려고.”
남편은 지독할 만큼 서늘한 눈동자로 담담히 대답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