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매너 끝판왕.2021.04.29.
어차피 몇 개월 후 남남이 될 사이. 그러니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의 눈빛과 표정, 하는 말들. 태령이 마음에 담아 둘 이유는 없었다. 두 번째 잔을 주고받으며 태령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맛이 짙고 깊어요. 마실 때와 머금을 때와 넘길 때의 향과 맛이 다 다르네요.”
술잔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느릿하게 올라서며 태령에게 향했다.
“독한데 마음에 들어.”
술기운이 일렁이는 눈동자는 짙고 눈빛은 부드러웠다.
“신기하고 재밌고 궁금한 맛이랄까, 마치 유태령 씨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다시 느슨해지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주문하지 않은 메뉴가 세팅되었다.
“서비스 안주입니다.”
서비스라고 하기엔 비주얼이 화려한 안주를 가져온 건 BAR의 사장이었다. 자리에 앉기 전 태령이 화장실에서 잠깐 마주쳤던.
‘처음 보는데, 제 가게 처음 오시는 거죠?’
‘네, 지인이 추천해줘서 왔어요.’
‘근데 같이 온 남자분은 애인? 부러워라.’
‘그냥 동료예요.’
태령은 무심코 나눈 대화가 아름다운 미모의 여사장에겐 아니었나 보다. 노골적인 눈빛과 상냥한 말투, 아찔한 원피스를 입은 몸의 은밀한 각도까지.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려던 것도 잠시, 강준을 노리는 게 분명한 사장을 보며 태령은 고민했다. 모른 척 앉아 있어야 할까, 자리를 피해줘야 할까.
“서비스 요구한 적 없으니 다시 가져가세요. 아니면 계산서에 올리든지.”
자리를 피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일어나려는 순간, 남편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해요. 제가 손님께 드리고 싶은 건데.”
“나한테 관심 있습니까?”
그의 직설적인 질문에 사장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듯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관심 있다면요?”
그 순간조차 남편의 시선은 태령에게 못 박혀 있었다. 사장이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쭈욱.
“내가 관심이 없어요.”
결국 사장은 강준을 한 번 노려보더니 서비스 안주를 다시 들고 사라졌다. 태연한 강준과 달리 이 상황이 이해 안 되는 건 태령이었다. 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남자였다. 남처럼 있을 땐 보란 듯이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여주었고 하다못해 팔까지 내어줘 놓고선. 그런데 지금은 보란 듯이 작업을 거는 여자를 냉정하게 쳐낸다. 부드럽게 풀어진 이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면, 내가 약속을 잘 지키는지 테스트하려고?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괜찮으니 가보세요.”
잠시 망설이던 태령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괜찮다는 겁니까?”
그러자 강준도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로 담담히 되물어왔다.
“저 여자분에게 가보셔도 된다구요. 꽤 상처받았을 것 같은데.”
아마 자존심이 더 산산조각 났을 것 같지만.
“태령 씨는 괜찮고?”
예상 못 한 질문이 술잔에 고정되어 있던 태령의 시선을 끌어올렸다.
“당연히 괜찮아야죠. 저도 강준 씨처럼 약속을 잘 지키니까요.”
거짓 없는 태령의 대답에 남편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대체 날 어떻게 봅니까?”
태령의 침묵에 다시 입을 연 건 강준이었다.
“아내랑 같이 있을 때도 작업할 만큼 쓰레기는 아닙니다. 혹시라도 내가 그러면 태령 씨가 말려줘야 하고.”
그렇게 말을 하는 강준은 꽤 기분이 더러웠다. 남처럼 굴 때는 의도적으로 이성의 접근을 허용했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땐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 도리였다. 특히 동행한 사람이 이성일 땐 더더욱. 그런데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는지,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처럼 굴었나 싶기도 하고.
“강준 씬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제가 간섭해주길 원하는 건가요?”
강준은 탄식처럼 작게 ‘맙소사’를 중얼거렸다.
“술 좀 줄래요.”
그러곤 아내의 눈앞에 잔을 들이밀었다.
“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지 알 것 같으니까, 지금.”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술을 따라주는 아내를 바라보는 강준은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했다.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고 해야 할까. 그때 핸드백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아내가 발신인을 확인하고선 조심히 물어왔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 될까요?”
강준은 동의의 의미로 짧게 고개를 끄덕인 건데.
“전 화장실을 들러야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분위기가 꽤 좋았던 술자리에 미련 따윈 없다는 듯 깔끔하게. 이러니까 내가 안달 나지. *** 태령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조 여사는 25분 안에 오라는 경고까지 날렸다. 통화를 끝낸 후 화장실에서 나온 태령은 복도에서 통화 중인 사장을 보았다.
“그렇게 민망하게 거절당한 건 처음이었다니까? 재벌 3세 같던데 그래서 싸가지도 밥 말아 먹고 매너까지 같이 말아먹었나 봐. 완전 X새끼였어. 서비스로 안주를 준대도 지랄…… 나중에 전화할게.”
때마침 태령을 발견한 사장이 얼른 전화를 끊었다.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던 태령의 스틸레토 힐 소리가 멈춘 곳은 사장의 바로 앞이었다.
“저와 같이 온 남자분은 X새끼가 아니에요.”
왜 그냥 지나치지 못한 거냐고 스스로에게 묻는 와중에도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게 아니라 솔직한 성격이라 화법이 직설적인 거고 매너를 모르는 건 그쪽이구요.”
사장이 도끼눈으로 노려보아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깍듯하게 존칭 써줬고 안주는 놔두고 갈 거면 계산에 올리라고 했고. 그쪽이 아니다 싶어서 단호히 거절했고. 그 정도면 매너 끝판왕 아닌가요?”
남편이 일행에 대한 매너를 지킨 게 욕먹을 이유는 아니었다. 내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그래서 그냥.
“아니면, 대놓고 유혹했는데 시선 한번 못 받아서 그래요?”
그 순간, 태령은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남편이 그런 행동을 하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서. 맙소사, 자신이 했던 그 질문은 남편을 쓰레기 취급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 더 노력해요. 다음엔 더 예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유혹에 실패하지 않도록. 남 탓하면서 뒤에서 멀쩡한 손님 까지 말고.”
경멸하는 여자를 향한 시선도 뺏지 못했으면 네가 매력 어필을 못한 거지.
“내가 그쪽 일행을 깠다는 증거 있어요?”
“누굴 바보로 아나.”
사장의 발뺌에 태령은 싱긋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야! 너 방금 뭐라고…….”
“아니면 말고.”
사장의 말을 자르고 돌아서서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 태령은 기분이 이상했다. 몰랐던 남편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참 이상한 남자야.”
생각보다 나쁜 남자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알쏭달쏭한 생각이 들 때쯤. 태령의 몸이 휘청거렸다. 뒤에서 걸어온 사장이 얼마나 세게 어깨를 쳤는지 발목이 확 꺾여버렸다.
“……!”
겨우 중심을 잡은 태령이 고개를 들었을 때 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맘 같아선 쫓아가고 싶지만 조 여사에게 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결국 태령은 절뚝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마지막 계단을 딛는 순간 발목이 또 꺾여버렸다.
“앗!”
고꾸라지기 직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태령의 허리를 날렵하게 잡아챘다.
“조심해야죠.”
귓가를 울리는 나지막한 음성은 남편의 것이었다.
“……아직 안 갔어요?”
태령은 작은 한숨과 함께 자그맣게 말했다.
“태령 씨 배웅해주고 가야죠.”
허리를 단단히 휘감은 팔에 악력이 흘러들며 몸의 밀착도가 짙어졌다.
“내가 매너 끝판왕이라.”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그 한마디에 태령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다 들었어? 화르륵 얼굴이 달아오른 태령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는 순간, 몸이 번쩍 들렸다.
“꺄악!”
가는 팔로 남편의 목을 휘감은 건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이었다.
“발목을 다친 것 같던데.”
그 대화를 들은 것도 민망해 죽겠는데, 이렇게 안기니 태령은 더 미칠 것 같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만큼.
“삐끗하긴 했지만 충분히 혼자 걸을 수……!”
“안기는 게 싫으면, 어깨에 둘러메 주고.”
그러고도 남을 남자란 걸 알기에 태령은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목에 감은 두 팔 때문에 몸의 밀착도가 깊었다. 괜히 의식이 되어 조심히 내린 왼손이 하필 강준의 쇄골을 쓸며 가슴을 훑어내렸다.
“그렇게 손을 움직이면 곤란한데.”
조금은 허스키해진 음성에 홀리듯이 고개를 든 게 실수였다. 위스키의 도수에 예열이 된 듯 들끓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화들짝 놀란 태령은 얼른 다시 남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한 태령이 조 여사 저택의 현관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네가 간이 부었지? 아니면, 내가 요즘 잘해준 거니?”
소파에 앉은 조 여사가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다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서 서방이랑 둘이 만났으면 재깍 보고를 해야지! 네가 그렇게 잔머리 굴린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아?”
태령은 얼른 조 여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준 씨가 먼저 한 제안이라 거절할 수 없었어요. 의도를 몰라서 확인한 후에 한꺼번에 보고하려 했어요.”
그래도 조 여사의 눈에서 의심이 사라지지 않자 태령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뭘 해도 다 엄마 손안인데 제가 무슨 짓을 하겠어요. 저한테 그럴 만한 담도 능력도 없는 거 아시면서.”
일밖에 모르고 일만 잘하고, 일이 아닌 모든 면에서 물러터진 바보. 그 연기에 또다시 넘어간 조 여사가 표정을 조금 풀자 태령은 얼른 오늘의 일을 보고했다.
“서 서방이 집에 들어오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일 실컷 하면서 늦게 들어가. 오늘 식사 자리에서 내가 잘 말해놨으니 의심은 안 할 거다.”
그제야 조 여사는 의심이 사라진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엄마, 언니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면 안 될까요?”
“내 딸을 네가 왜? 살 포동포동 올라서 잘사는 꼴로 약 올리려고? 최고의 남편에 재벌가 딸에 사장 노릇 좀 해보니 이 삶을 못 놓겠니?”
“그런 거 아니에요. 강준 씨가 제게 느끼는 감정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방금 전까지 서 서방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온 네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다시 조 여사의 신경질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저희 둘이 있을 땐 안 그래요. 사실 마중 나간 날도 느꼈지만, 그땐 정확하지 않아서 말씀 못 드린 건데 이번엔 확실히 느꼈어요. 그게 뭔지 알아야 저도 조심하고 나중에 언니가 돌아왔을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태령의 설명에 조 여사가 살며시 인상을 구겼다.
“하긴, 뭔가 좀 이상하긴 했어. 그때야 다행이다 싶었지만 첫눈에 반한 여잘 3년 동안 방치했다는 게 말이나 돼? 아무리 일 때문이라고 해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조 여사가 태령을 다시 바라보았다.
“생각 좀 해보마. 널 보고 있으면 신경이 곤두서서 피곤하구나. 그만 가렴.”
여전히 끔찍해하는 눈빛으로.
“그럼 전 가볼게요, 이모.”
“너 내가 말조심하랬지! 나라고 너한테 그렇게 불리고 싶은 줄 아니?”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겁먹은 듯 눈을 내리깔았지만 사실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 조 여사가 그 말에 진저리치는 걸 아니까. 어머니란 말은 가짜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모라는 호칭은 진짜니까. *** 남편이 집에 들어오기로 한 수요일 저녁. 말끔하게 샤워를 한 태령은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높이 묶어 올렸다. 지금 이 순간부턴 집에서도 계속 이러고 있어야겠지. 답답해도 참아야겠지. 거울 속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보던 태령은 조 여사의 말이 떠올라 피식, 비소를 흘렸다.
‘최고의 남편에 재벌가 딸에 사장 노릇 좀 해보니 이 삶을 못 놓겠니?’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지. 19살에 창업한 애슬레저 룩 쇼핑몰 ‘도라’가 대박을 쳤다. 물론 조 여사는 도라의 사장이 진경이고 그녀의 친구인 태령은 일개 직원으로 알고 있지만. 그 꼴도 못 보겠다는 듯 진경을 찾아와 협박하는 조 여사를 태령은 단 한 마디로 물리쳤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대들어요.’
입에 풀칠도 못 하게 하면, 당신과 내 관계를 터뜨릴지도 몰라요. 그 이후 적당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기에 조 여사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라의 진짜 사장인 자신이 얼마나 성공했고 앞으로도 얼마나 성공할지. 그러기 위해선 이노패션만큼은 자신이 가져야 했다.
“어쩌죠, 이모. 이노패션은 내 건데.”
이 계약을 맺게 된 순간, 치밀하게 준비한 마지막 목표를 위해. 죽기 살기로 매각 위기에 놓인 회사를 살려낸 것도, 자존심 따윈 없는 것처럼 바짝 엎드린 것도. 모두 조 여사의 의심을 피하고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연기였으니까. 천천히 눈을 뜬 태령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긴 속눈썹에 반쯤 잠긴 눈동자는 또렷하고 고집스러웠다. 늘 조 여사에게 보여왔던 두려움과 순종 따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마중 나갈 시간이네.”
7시 반, 남편이 도착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