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를 위하여.2021.04.25.
놀랍고 신기하고. 식사에 집중하는 태령을 바라보는 강준의 눈빛이 그러했다. 대체 저 작은 몸 어디로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 건지. 설마 저것도 연기는 아니겠지. 사람들에게 맛있게 먹는다는 건 대부분 이런 의미다. 음식은 담뿍, 그리고 허겁지겁, 리액션은 과하게. 하지만 태령은 반대였다. 음식은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리액션은 조그맣게. 그런데도 그 음식의 맛이 궁금해질 만큼 맛깔나게 먹는다. 사람들이 먹방 너튜브를 왜 보는지 이해가 될 만큼. 이쯤 되니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음식의 맛을 즐기는 아내의 모습을 자신도 즐기고 있다는걸. 세 그릇을 뚝딱한 후 향긋한 수정과로 입가심을 하던 태령이 흠칫했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강준의 눈빛에 민망했는지 처음으로 미소란 걸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제가 좀 많이 먹었죠?”
한쪽 보조개가 깊게 들어가고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매가 반달처럼 휘는 미소가 예뻤다. 봄볕에 수줍은 듯 톡 터지는 꽃망울 같다고 해야 하나. 그 미소는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걸 깨닫게 했다. 불같은 성질을 드러내든, 현모양처인 척 가식을 떨든. 유태령은 무척 예쁜 여자라는 것.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기어이 그걸 인식하게 만든 아내가. 끝까지 모르게 할 것이지, 이제야 왜.
“먹방 프로 찍는 줄 알았습니다.”
강준의 담담한 대답에 태령은 무척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많이 흉했어요?”
차라리 흉했더라면. 그 반대였기에 강준은 대답을 아꼈다.
“이번 주 내내 다이어트 때문에 4시 이후 금식 중이에요. 그래서 오늘 좀 많이 먹은 거지 저 원래 소식하는 스타일이에요.”
침묵을 오해한 태령이 조곤조곤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군요.”
아내의 식사량은 궁금하지도 않지만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심히 흘린 대답인데 아내가 동요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있어도 흔들림 없이 단정하던 여자가.
“……진짠데.”
속삭이듯 말을 하며 내리깐 눈동자는 긴 속눈썹이 드리워져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강준은 느낄 수 있었다. 난생처음 동요한 아내에게서 희미하게 물결치는 불안함을.
“믿을게요, 태령 씨가 소식한다는 말.”
아내가 원하는 대답을 무심하게 해주면서 강준은 차근차근 떠올려 본다. 앙큼하게 반격까지 해오던 아내를 불안하게 한 게 뭔지. 저녁 식사, 갈비찜, 다이어트, 체중 관리, 눈치, 불안함.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질서함 속에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접점.
“그 대신 태령 씨도 날 좀 믿어주면 좋겠는데.”
감은 잡았으니 어디 한번 찔러볼까.
“제가 강준 씨의 뭘 믿으면 될까요?”
“난 우리 둘 사이의 일을 타인에게 발설하는 악취미는 없어요. 예를 들면 장모님.”
놀랄 줄 알았는데.
“강준 씬 본인이 한 말은 꼭 지키는 성격이죠.”
묻는 게 아니라 확답을 하는 아내의 눈동자는 떨림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믿을게요.”
그 눈으로 순진무구하게 바라보며 연하게 미소 짓는 아내를 본 순간 강준은 깨달았다.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줘서 고맙구요.”
아내의 계략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는 걸.
“강준 씨를 믿는 만큼 제가 더 노력할게요. 말 잘 듣는 착한 아내가 되도록.”
강준 입장에선 아내에게 공식적으로 약속해준 꼴이었다. 어쩌면 아내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일지도 모르는 조 여사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사이의 일을 알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근데 강준 씬 아예 안 먹었네요?”
원하는 바를 취하고 매끄럽게 대화를 돌리는 태령을 바라보는 강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군가의 속내가 궁금했던 적이 있던가.
“부인이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난 배가 불러서.”
없었지.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강준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뭐 그래도 나쁘진 않은 말장난이었다. 덕분에 강준도 새로운 걸 알아냈으니 말이다. 예전에도 좋아 보이지 않던 모녀 사이가 지금은 더 악화되었다는 것과 아내가 가장 신경 쓰고 경계하는 게 장모님이라는걸.
“근데 부인이란 호칭 좀 안 쓰면 안 될까요?”
“여보나 자기보단 나을 것 같은데.”
“그래도 좀 간지러워서요. 차라리 저처럼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어요.”
하나 더 추가. 무언가를 고집할 때는 꼭 눈을 맞추는 것. 강준이 오늘 새롭게 파악한 아내의 버릇이었다.
“그럼 상황에 따라 쓰는 걸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아내를 보며 강준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식사 끝났으니 술이나 마시러 가죠.”
“술은 제가 사게 해주세요. 강준 씨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꽤 잘 버니까요.”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하겠다는 듯 고집스러운 아내의 모습에 강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씨름도 질색이지만 별것 아닌 일로 이겨봤자 득이 될 것도 없어서였다.
“고마워요, 그럼 2차 장소도 제가 안내할게요.”
꽃망울 같은 미소를 수줍게 터뜨리는 아내를 강준은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웃는 게 젤 예뻐요. 활짝 핀 붉은 장미 같아서.’
꿈을 꾸는 표정으로 녀석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활짝 핀 붉은 장미란 건지. 강준의 눈엔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새하얀 은방울꽃에 가까웠다. 설마, 미소까지 조절할 줄 아는 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서는 아내를 강준은 꽤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눈도 모자라서 이제 저 미소까지 취향 저격인 것 같아서. 이러면 꽤 위험한데.
*** 이태원의 외곽에 위치한 싱글몰트 위스키 바.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강준의 질문에 태령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전 혼술주의라서 잘 몰라요. 그래서 김 비서한테 물어봤어요.”
오늘 술을 사겠다고 한 이유는 조금 미안해서였다. 좀 치사하긴 하지만 가련한 연기를 해서 남편에게 원하는 걸 얻어냈으니까. 하지만 태령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유일한 휴식처인 집마저도 침범당할 상황에 남편까지 조 여사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면. 물론 확인할 게 있기도 했다. 지금까진 상관없었지만 남편이 돌아온 이상 김 비서가 조 여사의 사람인지 아닌지. 직원이 다가와 물과 함께 메뉴판을 주었다.
“술은 어떤 걸로 시킬까요.”
“태령 씨가 사기로 했으니 취향대로 시켜요.”
강준이 건네준 메뉴판을 진지한 눈빛으로 보며 훑어내리던 태령의 손끝이 중간중간 멈추었다. 안주 맛집이라는 김 비서 추천대로 사진이 첨부된 안주가 모두 맛있어 보여서. 맘 같아선 다 시키고 싶지만, 입이 짧은 조 여사의 딸을 생각하며 포기했다.
“안주는 강준 씨 원하는 걸로 시키세요.”
술만 시킨 태령이 메뉴판을 덮기도 전에 강준이 매끄럽게 안주를 주문했다. 정확히는 태령의 손끝이 잠시 멈추었던 안주들을. 직원이 간 후 태령은 알 수 없는 떨림에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말아쥐었다. 남편의 그 섬세함이, 자신의 모든 게 남편의 시야 안에 있다는 게, 기분이 미묘해서.
“이왕 먹은 거,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으면서 오늘을 치팅데이 삼아요.”
태령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남편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 남자 속을 정말 모르겠다. 이게 배려인지, 또 다른 계략인지.
“장모님껜 비밀로 해줄 테니.”
그래도 태령이 경계심을 풀지 않자, 그가 짧게 웃었다.
“나 약속 잘 지키는데.”
긴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에 지퍼 잠그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어떻게든 참아야 했는데. 처음 보는 남편의 장난기에 태령도 따라 웃어버렸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남편이 그 웃음을 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할 만큼 불안함이나 두려움 따윈 느끼지 못했다. 태령이 뭘 해도 이 남잔 조 여사에게 일러바치지 않을 테니까. 식사 자리에서 그러겠다고 한 남편은 약속을 꼭 지키는 남자니까.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남편을 향한 이율배반적인 믿음이었다. 그 믿음 때문인지 몰라도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고 편했다. 강준은 어떨지 몰라도 태령은 그렇게 느꼈다. 식사도 그렇고 이 술자리도 그렇고. 꿍꿍이가 있을 것 같은 남편을 향한 경계심이 조금 풀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때 직원이 나타나 술과 안주를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그제야 강준이 느릿하게 물었다.
“싱글몰트는 어떻게 마십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강준이 태연히 말했다.
“와인 말곤 술은 마셔본 적이 없어서.”
귀국한 남편이 참석했던 파티, 태령이 아는 것만 해도 수십 개였다. 남편에 대한 무성한 소문도. 그런데 술 없이 파티를 즐겼다는 이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번에 태령 씨한테 술 한번 배워보죠.”
강준이 술잔을 기울여 오며 눈을 부딪쳐왔다.
“친해지는 데 술이 최고라던데.”
“친해져서 뭐 하려구요.”
그가 기울인 술잔에 짙은 액체를 천천히 채워주며 태령은 속삭이듯 다시 물었다.
“안 친해질 건 또 뭔데.”
무심하게 대꾸하는 남편의 말에 태령은 문득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서강준을 볼 때마다 늘 했던 생각이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강준에게 술병을 건네며 태령은 확인차 태연히 물었다.
“근데 술자리가 많았을 텐데. 술 안 마셔도 괜찮았어요?”
직위가 높을수록 술자리는 많아진다. 사람을 상대하고 인맥을 넓히고 유지하는 게 곧 비즈니스니까.
“내가 마시기 싫다는데.”
뭐 어쩌라고.
“그럼 지금은요?”
“마시고 싶으니까.”
필터링을 걸치지 않은 게 분명한 남편의 심플한 대답들이 태령의 뇌를 흔들었다. 정중한 마스크에 가려져 있을 뿐, 남편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고 행동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손에 쥐었고 늘 항상, 자신 위주로 주변이 돌아갔을 남자.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남편은 태령에게도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중이었다. 괴롭히고 싶으면 괴롭히고, 귀찮으면 무시하고, 가여우면 조금 걱정해주고, 뭐 그렇게. 사실 태령은 남편을 속과 겉이 다른 위선적인 남자라고 생각했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못된 심보를 품고 갑질하는 재벌 3세 정도.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남편이 보여주는 매너와 배려는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게 분명하다고. 그런데 그게 오해였다는 걸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 했다. 계산된 것도 아니고 속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감정에 솔직했을 뿐인데. 이래서 착각은 자유라고 하는 건지도. 착각이 깨지고 나니 눈앞의 남편이 덩치 크고 까다롭고 잘생긴 31살짜리 어른이처럼 보였다.
“그럼 얼음 넣어줄게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태령의 음성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불편하던 남편이 조금은 편하고 쉬워졌다고 해야 할까. 잘 달래고 어르면 남편이 왠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아서. 식사 자리에서 조금 불쌍한 척 연기하니 바로 태령이 원하던 약속을 해준 것처럼.
“태령 씨는 얼음 넣어 먹어요?”
“아니요, 전 원액으로 천천히 즐겨요.”
“그럼 나도 똑같이 원액만.”
짧은 대화에도 존칭과 반말이 뒤섞인 남편의 매끄러운 화법에 태령은 또다시 웃음을 겨우 참았다. 어린이도 이렇게 변덕이 심하진 않을 것 같아서.
“혼자 웃지 말고 같이 좀 웃어요.”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한 태령이 글랜캐런 잔에 술을 따르는데 그가 툭, 말을 던졌다.
“안 웃었거든요.”
“두 번.”
시치미를 떼며 무슨 소리냐는 듯 태령은 눈을 들었다.
“웃음 참는 거 봤는데.”
내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어? 순간 술병을 들고 있던 태령의 손이 미끄러졌다. 빠르게 일어난 강준의 상체가 테이블 위를 넘어오고 민첩하게 술병을 잡아냈다.
“은근 허당이네.”
술병을 잡고 있는 태령의 손 위에 그의 손이 겹쳐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남편의 손이 더 크고 단단해 보였다.
“자꾸 손이 가게 만들어.” 남편의 나직한 음성은 부드럽고 짙은 눈동자엔 희미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태령이 조금 무뎌진 것처럼, 남편도 그런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그 편안함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어색해서일까. 두 사람 사이에 낯설면서도 미묘한 침묵이 감도는 순간, 남편이 그 침묵을 먼저 깼다.
“의미 있는 첫 술자리니 태령 씨가 한마디 해봐요.”
어느새 자리에 앉은 남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마치 우리 두 사람은 그래선 안 된다고 선을 긋는 것처럼. 태령이 가만히 고개를 젓자 강준이 잔을 들었다.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를 위하여.”
그러자 태령도 잔을 부딪쳤다.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를 위하여.”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하게 들려오는 그 말을 태연히 따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