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저와 자고 싶어요?2021.04.22.
나름 완전무장했다고 자신했는데. 남편의 그 한마디가 순식간에 태령을 무너뜨렸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했더라면. 뜨거워진 머릿속만큼 얼굴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아 태령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번을 반복하니 차가워지는 머릿속으로 이성이 서서히 차올랐다. 그가 대놓고 짓궂게 구는 의도는 하나뿐이다. 태령을 곤란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었다.
“강준 씨는 저와 자고 싶어요?”
태령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웃음기를 뺀 말간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강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응할 마음은 있고?”
“우린 부부니까 고려는 해봐야겠죠. 참고로 며칠 전에 미리 알려주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려해볼 생각이구요.”
하아. 옅게 흘리는 남편의 나직한 숨소리가 지금 이 순간 태령은 듣기 좋았다. 왠지 그를 한 방 먹인 것도 같아서.
“유태령 씨.”
아내를 부르는 강준의 눈동자엔 미묘한 이채가 돌았다. 제멋대로인 성격에 남자 홀리는 재주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의 재주가 있어. 양파처럼 까면 깔수록 나오는 새로운 모습이 기가 차면서도 재밌어서.
“그런 걸 며칠 전에 통보하는 남자가 몇이나 될 것 같아요? 굳이 말로 표현할 일도 아니고.”
늘 그렇듯 아내의 연기는 완벽했다. 다소곳한 자태도, 순종적인 표정과 말투도. 하지만 조곤조곤 반박해오는 눈동자는 지금껏 봤던 누구보다 고집스러웠다. 그 눈동자가 강준을 격렬하게 충동질하고 있었다. 더 괴롭히고 자극해도 난 끄떡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원한다면, 도발해주는 수밖에.
“만약 내게 그럴 마음이 생긴다면 즉흥적인 거죠. 암묵적인 몸의 신호가 통하는 순간 바로.”
“부부라는 관계가 모든 것의 면죄부가 될 순 없어요. 부부일수록 더 존중해주고 배려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존중하고 배려해주려는 거잖아요.”
더 낮아진 음성, 그리고 다정해진 말투. 하지만 태령을 응시하는 차가운 눈동자는 머릿속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나랑 같이 있으면 도망치고 싶어서 안달난 부인을 위해서.”
그리고 정말 태령은 머릿속이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같이 있는 것도 감당 못 하는데 더한 건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도 되고.”
당혹스러움에 긴 속눈썹 아래 눈동자를 숨기는 작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서 호텔로 간 겁니다. 적어도 우리 사이에 그럴 일은 없으면 해서.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없고.”
느릿하게 시선을 끌어올리며 강준은 다시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묻죠. 태령 씬 아직도 내가 집에 들어오길 바랍니까?”
남편이 원하는 대답을 안다. 그리고 태령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조 여사의 요구 사항을 하나라도 충족 못 하면 계약은 산산조각 난다. 그게 남편의 오랜 부재로 3년을 거저먹은 대가였다. 퇴원해서도 할머니는 약을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데. 만약 가양병원 임상센터에서 약을 탈 수 없다면? 숨이 넘어갈 것처럼 경련하며 발작을 했던 할머니가 떠올라 태령은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안 돼!
“마셔요.”
귓가로 나직하게 스며드는 음성이 태령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냈다. 하지만 빠르게 자세를 추스르면서도 남편이 내민 컵만은 외면했다.
“……마시기 싫으면 말고.”
안쓰러울 만큼 창백한 얼굴로 고집을 부리는 아내를 보는 강준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공격을 위해 칼을 빼 들었고, 무기력해진 상대방이 눈앞에 있다. 그런데도 왜 베지를 못해. 이 모든 게 요망한 아내 탓이었다. 훅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냘픈 저 모습으로 상대방을 오히려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니. 이것도 새로운 수법인가, 의심이 될 만큼.
***
“태령이 너 다이어트 중 아니었니? 소갈비는 양념 때문에 칼로리가 높을 것 같은데.”
조 여사의 말에 갈비찜으로 향하던 태령의 손이 멈추었다.
“위도 약한데 고기 먹다 체하면 어쩌려고. 응?”
“어휴, 요즘 애들은 참. 태령이 넌 지금도 말랐는데 무슨 다이어트를 한다고 그러니. 넌 오히려 살 좀 쪄야 할 것 같은데.”
연숙이 편을 들자 조 여사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돈, 사실은 우리 태령이가 날 닮아서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이에요. 지금도 내가 이렇게 관리해주니 저 얼굴에 저 몸매 유지하고 있는 거랍니다.”
싸늘하게 바라보는 조 여사의 눈빛에 태령은 갈비 한 조각을 집어 강준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제가 먹으려는 게 아니라 강준 씨 주려던 거였어요.”
대답은 차분히 했지만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거절하면 어쩌지. 다행스럽게도 강준은 거부하지 않고 그 고기를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아들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연숙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서 집엔 언제 들어가기로 했니?”
“글쎄요.”
고개를 튼 강준이 뻔한 시선으로 태령을 보았다. 한 번 더 괴롭혀볼까, 짓궂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른하게. 갈고리처럼 숨통을 조여오는 눈빛에 태령은 숨이 막혀왔다.
“다음 주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잠시 후, 나직한 웃음이 스며든 느릿한 대답. 그제야 태령은 참았던 숨을 작게 토해냈다.
“잘 생각했어, 아들. 부부가 같이 안 살면 이상한 소문만 돌지,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제가 결혼한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데 소문이 돌아봤자죠. 뭐 틀린 소문도 아니고.”
감정이 결여된 강준의 무심한 눈동자가 조 여사에게 향했다.
“장모님도 저에 대한 소문은 들으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조 여사는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난 사실 자네가 오히려 지금을 실컷 즐겼으면 해.”
그 말에 가장 놀란 건 바로 연숙이었다.
“사돈! 지금 무슨…….”
“최 여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결혼 전까지 강준 군 여자관계가 결벽적이었다는 건 나보다 최 여사님이 더 잘 알지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결혼해서 한 여자만 보려니 오죽 답답하고 억울할까.”
조 여사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연숙의 손을 잡으며 다독였다.
“그러니 강준 군에게 우리 일 년 정도 여유를 줘요. 실컷 즐겨야 미련도 없을 테고 아기 준비할 때 마음 다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게 다 집안 좋자고 한 결혼인데 우리 모녀가 그렇게 속 좁은 것도 아니구요. 그렇지, 태령아?”
“엄마 말이 맞아요.”
다소곳한 대답과 달리 태령은 속으로 조 여사에게 치를 떨었다. 나한텐 신랑이 첫눈에 반해서 한 결혼이라고 자랑해놓고선. 조 여사의 음성은 더욱더 부드러워졌다.
“우리 태령이가 한참 바쁠 때 자네가 갑자기 귀국해서 제대로 신경도 못 써주고 있지? 내조도 못 받으니 집에도 들어가기 싫었을 테고.”
태령 때문에 강준이 밖으로 나돈다는 뜻이었다.
“그건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자네가 일 년만 기다려주게나. 내년에 결혼 공식 발표할 때 맞춰서 우리 태령이도 일을 관둘 거니까.”
짧은 시간 동안 조 여사가 머리를 꽤 잘 굴렸다. 아내가 바빠서 내조를 못 한 대가로 외도를 눈감아주겠다니. 어차피 다른 여자를 만나는 동안은 태령을 가까이할 일도 없으니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그리고 일 년 후 각자 제 위치로 돌아갔을 때 진짜 부부생활을 하는 것. 결론은 맘고생은 지금 자신이 다하고 고생의 대가는 조 여사의 딸에게 돌아가는 거였다.
“저는 아내가 일을 그만둘 필요까진 없다고 봅니다. 탁월한 경영능력을 썩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강준의 대답에도 조 여사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남편 내조하는 게 아내의 최고 덕목 아니겠나? 아이 준비하려면 여자 마음도 편해야 하고. 우리 태령이가 보다시피 자네처럼 워커홀릭이라 몸 버리게 일을 해. 그렇게 일하면 건강도 안 좋아지고 체력 딸려서 아기 갖는 건 힘들지.”
가만히 듣고 있던 연숙이 기다렸다는 듯 태령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태령이 네가 회사 운영을 잘한다더구나. 그런데 정말 미련 없이 관둘 수 있겠니?”
“일도 좋지만 가정이 더 중요하니까요. 아이도 갖고 싶구요.”
일 년 후의 일은 내 알 바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잘 먹는 것 좀 보여주든지.”
남편이 무심한 손길로 태령의 앞접시에 소갈비를 얹어준 것이다. 설마, 내가 먹고 싶어 한 걸 눈치챈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건강과 체력이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 노력해야죠.”
말은 태령에게 하고 있지만, 강준의 서늘한 눈빛은 조 여사에게 향해 있었다.
“고작 고기 몇 점에 체할 만큼 건강이 나빠서도 안 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장모님?”
내 아내에게 내가 먹이고 싶다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마치 그렇게 엄포를 놓는 것도 같았다.
“자네가 내 딸 건강을 이렇게 잘 챙기니 이제 난 신경 안 써도 되겠어. 그렇지, 태령아?”
웃는 입술과 달리 태령을 바라보는 조 여사의 눈은 독사 같았다. *** 주차장에서 어른들을 배웅하는 아내의 단정한 뒷모습을 강준은 담담히 지켜보았다. 30분이면 끝날 식사 자리였다. 그런데도 제 옆자리에 앉지 않으려는 아내의 가상한 노력이 그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 여자를 괴롭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같이 사는 거라는 걸. 곁에서 서서히 숨통을 조여주는 거라는 걸.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계획을 변경할 생각은 없었다.
‘강준 씨는 저와 자고 싶어요?’
아내가 순진한 눈망울로 바라보며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묻기 전까지는. 강준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일탈 한번 없이 인공지능처럼 살던 강준에게 모두 한결같이 말했다. 뼛속까지 지독한 놈이라고. 하지만 강준은 본능적으로 살고 있었다. 딱히 흥미를 돋우고 관심을 끌고 재미를 줄, 일탈을 하게 할 만한 무언가가 없었을 뿐이지. 그런데 아내가 그를 제대로 자극하고 도발하고 있었다. 이러니 궁금할 수밖에. 저 작은 머리 안에 꽁꽁 숨긴 의도가, 제 몸의 반도 안 되는 몸 안에 숨기고 있는 진짜 모습이. 그런데 그렇게 독하고 대단한 여자가 오늘은 엄마 눈치를 보느라 식사조차 편하게 못 했다. 갈비찜이 뭐라고 편히 먹지를 못해. 영악한 모녀가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짜고 치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너무 치사한 수법 아닌가. 두 대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태령이 다가왔다.
“집에 들어오는 날짜는 비서 통해서 연락 주실 건가요?”
지쳐 보이는 아내를 바라보는 강준의 눈빛이 촘촘해졌다. 작고 갸름한 얼굴을 지탱하는 목선이 희고 가늘었다. 얼굴도 작고 몸도 작고 손도 작고. 아내는 눈 빼고 모든 게 작고 가늘었다. 이러니 중간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괴롭힐 맛이 안 나지. 아내가 뿜어내는 보호 본능 앞에서 강준도 어쩔 수 없는 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이성과 아내에게 뭘 먹이라는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했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저녁 먼저 먹으러 갑시다.”
강준은 본능적으로 사는 쪽이었으니까.
“……뭐라구요?”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는 아내의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했다.
“갈비찜 맛있게 하는 식당이 있어서.”
“저희 방금 저녁 식사 하지 않았나요?”
“장모님한테 죄지은 거 있습니까? 눈치 보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하던데.”
유태령이 수작질을 부린 거라면 이번엔 제대로 먹혔다. 희미한 동정심 정도는, 차갑게 메마른 가슴에도 존재한다는 걸 알게 해주었으니.
“제가 위도 많이 안 좋고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에요. 그리고 부모들마다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 달라요. 과잉보호긴 하지만 엄마도 다 저를…….”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인지는 안 궁금하고.”
이 정도 넘어가 줬으니 가증스러운 연기는 그만해야지, 응? 삐딱하게 말을 자르며 강준이 한 걸음 다가서자 아내는 그만큼 뒷걸음질 쳤다. 서로의 구두코가 닿을 만큼 기어이 거리를 좁힌 강준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라도 찾을 것을, 피하긴 왜 피해서 이렇게 날 끌어당기는 건지. 그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강준을 올려다보는 아내의 눈동자가 투명해지면서 눈빛이 말랑말랑해졌다. 어쩌면 저 눈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알리샤 바튼도 아니고 가증스러운 연기도 아니고, 어쩌면 녀석도 모르고 있을, 저 눈만큼은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서. 아내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이 낯선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해야 할까. 난 이런데 유태령 당신은 어떨까.
“태령 씬 나에 대해 얼마나 압니까?”
아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연히 아는 게 없겠지. 천천히 뻗어오는 강준의 손끝을 아내는 이젠 체념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의 허락을 받고 가만히 끌어당기자 밀착해오는 아내의 몸은 놀라울 만큼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마주 선 아내에게 얼굴을 기울이는 강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거봐요, 아는 거 없잖아.”
그러니까 밥 먹자고. 잡아먹기 전 사냥감을 살찌우는 것. 느긋한 포식자의 여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