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자로서 나, 감당할 수 있겠어요?2021.04.18.
유연하게 몸을 반쯤 튼 아내의 행동은 강준의 시야를 노린 게 분명했다.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하얀 재킷 아래로 드러난 진주 같은 피부도. 과감한 노출 덕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여리여리한 뒷모습도. 아내의 전략은 성공했고 강준의 시선을 너무도 쉽게 앗아갔다. 아찔한 뒷모습으로, 그의 시야가 아닌 심장을, 질투가 아닌 분노를 자극해서. 내리깐 긴 속눈썹 아래 반쯤 잠긴 고혹적인 눈동자가 강준을 비웃듯이 여유로웠다. 하, 내가 유태령을 너무 몰랐지. 강준은 지금 이 상황이 아내에게 데자뷔처럼 보이길 원했다. 자신은 자유분방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상대방에겐 허락하지 않는. 난 되지만 넌 안 돼.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끝내자는 아주 오만하고 뻔뻔한 사고방식. 유태령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난 되지만 넌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 하지만 보란 듯이 남자들이 밀집한 바로 향한 태령은 요염하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화려한 외모는 도발적이지만 분위기는 도도하고 자태는 단정하고. 지금 이 순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수많은 남자를 홀렸던, 그리고 순진한 녀석의 영혼까지도 흔들어버렸던, 알리샤 바튼의 매력이 뭔지. 그걸 증명하듯 아내의 주변으로 남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러면 반칙이지.”
뽀얗게 드러난 아내의 어깨에 닿으려는 음흉한 손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탁 끊겼다.
“그 손 떼는 게 좋을 텐데.”
끊긴 무언가가 이성이란 걸 깨달았을 땐, 아내를 노렸던 음흉한 손을 쳐내며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은 후였다.
“내가 초대한 손님이라서.”
지독히도 낮고 섬뜩할 만큼 차가운 음성에 회전의자를 반쯤 튼 태령은 조금 당황했다. 제 발로 걸어올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당당할 줄은 몰랐으니까.
“이봐!”
뒤로 밀린 남자가 발끈하든 말든, 남편은 태연히 다시 물어왔다.
“나 보러 온 거 맞죠?”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던 태령은 흠칫, 했다. 드러난 어깨 위에 남편의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
“추워 보여서.”
“저도 재킷 있어요. 그러니까 가져가세요.”
“내 것이 더 길잖아.”
재킷을 벗으려는 작은 손을 커다란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강준이 상체를 기울였다.
“옷이 야해서 신경도 쓰이고.”
지금 보인 매너에 이유가 있음을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여주었다.
“그 정도 간섭할 자격, 나한테도 있지 않나.”
난 당신 남편이니까. 태령이 재킷을 벗으려던 손을 내린 후에야 강준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
“따라와요.”
태령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강준도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슬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미묘한 침묵을 흘리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참을 걸었다. 그 와중에도 스칠 듯 말 듯 한 손끝이 신경 쓰여 내리깐 시야에 태령과 보폭을 맞추려고 느리게 걷는 남편의 긴 다리가 보였다.
“잠깐 기다려요.”
분수대 앞에 도착하자 강준은 벤치에 손수건을 깔아주었다. 참 이상한 남자다. 눈빛은 차가운데 하는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배려가 따뜻하고 반듯한 매너가 다정하다. 괜히 두근거리게. 남편이 손수건을 깔아준 자리에 앉은 태령은 분수대에 시선을 고정하며 담담히 본론부터 꺼냈다.
“오늘 이 파티, 강준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예요.”
“그럼 나한테 올 것이지, 왜 바(Bar)로 갔어요?”
“강준 씨가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어요.”
알면서 묻는 그가 조금은 얄밉지만 태령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느른하게 닿아오는 눈빛이 싸늘했다. 또 그 눈이다. 결혼식 때 태령의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졌던, 차갑지만 타는 듯한.
“그 옷차림으로 바에 앉아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얌전히 기다리는 겁니까.”
본인은 여자들에게 양쪽 팔까지 다 내어주었으면서. 따지는 대신 입술을 질끈 깨무는 태령을 보며 강준은 태연히 대화를 틀었다.
“말해봐요, 할 말이 뭔지.”
“이혼할 게 아니라면, 다른 부부처럼 한집에서 같이 살았으면 해요.”
흥미로운 말을 들은 것처럼,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준 씨가 저를 많이 불편해하는 거 알아요.”
그 말에 남편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속내를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로 빤히 태령을 볼 뿐.
“하지만 양쪽 어른들이 함께 사는 걸 원하시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대체 어딜 보는 거지. 자신의 얼굴은 맞는데. 눈은 아니고. 코보다 좀 더 아래 어딘가.
“집에 들어오면 강준 씨에게 어떤 간섭도 안 한다고 약속할게요. 강준 씨가 누굴 만나고……?”
“입술에 상처가 있네요.”
나직한 음성이 말을 자르고, 공기를 가르며 느리게 다가온 손끝이 아랫입술에 닿는 순간, 태령은 움찔했다.
“누가 그랬어요?”
담담히 물어오는 질문에 태령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조 여사에게 맞아서 터졌다고는. 말해봤자 신경도 안 쓰겠지만.
“부딪혔어요.”
살짝 고개를 틀었지만 소용없었다.
“어디에?”
집요한 손길만큼 집요한 질문.
“날아오는 물건을 피하지 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던진 사람이 무조건 잘못한 거지.”
문득 태령은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편이 제 편을 들어주는 것도 같아서.
“꽤 아팠을 것 같은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상처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이 정말 걱정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지금 뭔가 좀 이상해. 아니, 많이 이상해. 갑자기 왜 다정해지고 부드러워진 거지.
“누가 그랬는지 나한테 일러요.”
이르면 당신이 혼내줄 건가요. 이 남자라면 정말 혼내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럴 만한 능력에 배경에 추진력까지 갖춘 남자니까. 하지만 태령은 남편을 믿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속내를 숨기는지 잘 안다. 지금 이 다정함과 부드러움에도 목적이 있겠지.
“손 먼저 떼주실래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강준이 손을 떼며 정중히 사과부터 했다.
“그냥, 걱정되어서.”
어느새 온기와 부드러움이 사라진 눈동자로 또다시 무의미한 말을 했다.
“……왜요?”
그래서 태령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눈을 하고 있으면서 왜 내가 걱정되는데요.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날 경멸하면서.
“짧은 원피스도 신경 쓰이는데, 상처면 더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담담한 그의 대답에 태령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남편의 차가운 배려. 이기적인 다정함. 조 여사에게 맞아 터진 입술의 상처보다 더 태령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이었다.
“아니면, 방금 태령 씨가 한 말처럼 나도 간섭하지 말까요? 태령 씨가 어떤 모습으로 누구와 뭘 하든, 어딜 어떻게 다치든.”
잠시 말을 끊은 그는 태령을 빤히 응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참고로 난 간섭 안 당했으면 하는데, 혹시 부인도?”
본인이 말해놓고도 재밌다는 듯 그가 픽 웃는다. 여유로운 그 미소에 이제야 알 것 같다. 병 주고 약 주고, 강준이 지능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걸. 그걸 깨닫자 태령은 더더욱 빨리 이 만남을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더 있어봤자 이 남자 손 위에서 놀아날 게 뻔하니까.
“강준 씨 원하는 대로 해요.”
“그럼 부인이 허락했으니, 난 간섭하는 걸로.”
뻔뻔하고 이기적인 대답에 태령은 기다렸다는 듯 조건을 걸었다.
“단, 강준 씨가 집에 들어온다는 조건 하에 동의하는 거예요.”
하나를 내어줬으니, 이제 하나를 얻어갈 차례였다.
“바로 대답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강준 씨 말대로 남보다 못한 사이인데, 당장 한집에 같이 사는 건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할 일이니까요.”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태령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희 엄마랑 강준 씨 어머님이 이번 주 일요일에 저녁 약속을 잡았어요.”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것처럼. 요구 사항을 하나 더 슬그머니 투척했다.
“정확한 일정은 강준 씨 비서분에게 따로 연락이 갈 거예요. 저랑 따로 만나는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그날 대답해주면 될 것 같아요. 별도로 약속을 잡아도 되지만 서로 바빠서 스케줄 조정이……?”
“부인 뜻대로 해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편이 대답했다. 이번엔 또 무슨 속셈일까.
“시간 낭비는 질색이라.”
의심스럽게 바라보아도 남편은 이 대화에 흥미를 잃은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천천히 일어난 태령은 앉았던 자리에 재킷을 올려놓았다.
“옷 고마웠어요.”
가만히 그녈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분수대에서 반사된 빛이 고여 있었다. 독특한 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릴 만큼 차가운데 그게 또 너무 예뻐서.
“전 먼저 갈 테니 강준 씬 마음껏 편히 즐기세요.”
태령이 사라진 후에도 강준은 파티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술, 여자, 소음, 스킨십, 향수 냄새, 난잡한 분위기. 그걸 다시 겪느니 차라리 밤을 새우며 일하거나 운동하고 말지.
“이 짓도 함부로 할 게 아니네.”
턱 끝을 무심히 쓸어내리는 손끝에서 묻어나는 건 피곤함이었다.
*** 일요일 저녁.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한식당의 복도 끝 방엔 강준이 먼저 와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만나기로 두 사람의 비서가 조율한 결과였다.
“일찍 왔네요.”
예의상 인사를 건네며 맞은편으로 가려고 했다.
“여기예요, 유태령 씨 자리.”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강준이 옆자리 의자를 빼며 태령에게 눈짓했다.
“강준 씨 귀국 후 처음 갖는 식사 자리예요. 그러니 오늘은 각자 부모님 옆에 앉기로 해요.”
꽤 그럴듯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의자 등받이를 잡은 채 응시해오는 검은 눈동자는 양보 따윈 모른다.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듯이 두 개의 시선이 살벌하게 뒤엉켰다.
“어른들은 우리가 사이좋게 앉아 있는 걸 더 보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은 낮고 부드러웠다.
“이 식사 자리도 그럴 목적으로 마련한 걸 테고.”
그럼에도 버티는 태령을 바라보는 남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별거하는 상태에서 따로 앉으면 말이 더 나올 텐데. 예를 들면 이혼, 이라든지.”
조 여사에게 잡힌 약점이 할머니라면, 강준에게는 이혼이었다. 그걸 꿰뚫은 예리함에 소름이 돋은 태령은 결국 남편의 옆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굽히는 정확한 타이밍에 의자를 밀어 넣는 매너가 매끄러웠다. 그런데 강준이 옆자리에 앉자 태령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서로의 어깨가 밀착하듯이 닿아 있었다. 의자의 간격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서류에서 보았던 188센티미터에 78킬로그램. 단순하지 않은 남편의 신체 사이즈 덕분이었다. 이대로 있자니 불편하고, 의자를 옆으로 당기자니 피하는 것 같아 좀 그렇고. 고민하는 그때였다.
“이런, 나 때문에 자리가 좁네요,”
강준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옆으로 옮기면서 닿았던 어깨가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그 간극을 가만히 바라보는 태령에게 그가 물었다.
“불편하면 내가 더 옆으로 가줘요?”
“아니요, 너무 떨어져 앉으면 나란히 앉는 의미가 없잖아요.”
빠르게 대답한 태령은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대답 먼저 해주세요. 집에 들어올 건가요?”
“싫다면?”
“서 회장님 찾아가서 이혼한다고 말해야겠죠.”
“아쉬운 건 한신이 아닐 텐데.”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가늘게 뜬 눈매가 싸늘했다.
“지금 자동차 회사에서 주력하는 미래사업이 전기차라고 알고 있어요. 전기차엔 최장 주행거리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배터리가 필요하고 그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 규모를 갖춘 건 이노의 천안 공장이 유일하구요. 한신이 이노화학에 과감히 투자해주면 배터리 핵심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테고 모든 조건을 갖춘 천안 공장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할 거예요.”
막힘없이 말을 하던 태령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신자동차의 사장으로 취임한 강준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그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동맹이 깨지면 손해 보는 건 이노겠죠. 하지만 강준 씨, 한신이 이노보다 더 좋은 기술력과 공장을 소유한 기업을 찾는 게 빠를까요, 이노가 한신보다 더 좋은 투자처를 찾는 게 빠를까요?”
대답을 마친 그녀는 강준을 빤히 바라보며 긴 속눈썹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게 꽤 앙큼하고 도발적으로 보인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이었다. 공장이야 그렇다 쳐도 기술력은 한순간에 쌓아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3년 전 배터리 소재 사업에 진출한 이노화학은 꽤 진척이 있는 상황. 그걸 똑똑한 남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재밌네요, 유태령 씨.”
갑자기 강준이 피식, 웃었다. 매력적이면서도 묘한 비꼬임이 담긴 희미한 비소였다. 강준이 천천히 팔을 뻗어 태령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무척 자연스러우면서도 진득한 소유욕이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젊고 건강한 남녀가. 그것도 부부가 한집에 산다는 의미가 뭔지는 알고 요구하는 겁니까?”
그가 질문한 의도를 알고 있지만 태령은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경멸하고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난 남자가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읽히지 않는 속내를 파악할 수 없어서.
“질문을 다시 하죠.”
더 가까워진 몸, 닿을 듯 다가온 입술,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숨결.
“남자로서 나, 감당할 수 있겠어요?”
더욱더 낮아진 음성이 달아오른 태령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