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편의 도발, 아내의 도전.2021.04.15.
“네가 공항에서 대체 뭘 어쨌길래 서 서방이 집에 안 들어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노려보는 조 여사에게 태령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말을 했다.
“팰리스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1003호. 공항에 마중 나간 날 같이 갔어요. 한남동 집도 불편해서 5년 전부터 이용하던 곳이라고 우선 그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해서.”
시기의 문제였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외출 준비도 도와줬고 강준 씨도 앞으로 종종 제게 부탁한다고 했어요. 엄마 말대로 나쁘지 않은 관계예요. 그리고 이제 몇 개월 안 남았으니 따로……?”
“그 입 못 다물어!”
듣기 싫다는 듯 조 여사가 말을 가로챘다.
“나라고 뭐 좋아서 너한테 같이 살라고 하는 것 같니? 네가 멍청해서 이해를 못 하나 본데 한신에선 네가 서 서방을 거부해서 따로 지내는 걸로 오해하고 있어! 이를 어쩔 거야!”
“하지만 엄마, 지금 상황에선 떨어져 지내는 게 안전해요. 강준 씨와 한집에 사는 건 너무 위험해요.”
조 여사의 딸과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 단 두 번뿐이었던 만남, 그리고 계약 종료 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남편의 장기 출장. 사실 태령에게 이 결혼은 어려울 게 없었다. 조 여사에게 당하는 괴롭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남편이 돌아온다는 변수를 계산 못 한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특히 그 남편이 서강준 같은 남자라면 더더욱.
“내가 오죽하면 서 서방 외국에 나가 있는데도 맹한 널 대타로 끌어다 놓았겠니? 이럴 경우를 대비한 건데 상황을 이따위로 만들어?”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은 눈으로 태령을 노려보며 조 여사가 말을 이었다.
“서 서방은 경쟁 구도 없이 한신의 유일한 후계자야. 그런 남자가 아내의 능력이나 재력을 볼 것 같니? 살림만 하며 내조해도 모자랄 판에, 일 못 해 죽은 귀신 들린 것처럼 일만 해대니 아내로서 어필이 될 리가 없지.”
태령은 더욱더 기죽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다 우리 모녀를 위한 일이에요. 제가 지금 기반만 잘 다져놓으면 나중에 경영진이 바뀌어도 회사는 흔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이노패션 주식이 폭등해서 엄마도 많은 이득을 봤고 회장님께 칭찬도 들었잖아요. 엄말 닮아서…… 제가 사업 수완 좋다는 소문도 돌구요.”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조 여사의 눈꼬리가 파들거렸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망하기 직전인 이노패션 사장직에 대타인 딸을 앉힌 건 조 여사의 꼼수였다. 망한 회사를 살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한신에서 딸을 부르지 못하도록. 더 바닥칠 것도 없는 회사였으니 망한다고 해도 무능력하단 소린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런데 저 끔찍한 아이가 기적처럼 그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10개월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고 바닥 치던 회사 주가는 순식간에 폭등했다. 하지만 그게 저 아이가 거만 떠는 걸 봐줄 이유는 아니었다.
“그러니 남은 시간 동안 제가 더 열심히 해서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망할 년,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건방 떨어.”
태령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 그리고 조 여사의 손에 들린 물잔.
“난 정말 네가 소름 끼치게 싫어. 할 수만 있다면 네 몸에서 나와 똑같이 흐르는 피를 다 뽑아내고 싶을 만큼.”
쌍둥이였던 조 여사는 태어날 때 몸이 약하단 이유로 동생 대신 버림받았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예쁜 얼굴과 영특한 머리로 원래 가려고 했던 남자아이 대신 중소기업 사장 부부의 외동딸로 입양되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이노의 작은 사모님이 되었고 지금은 한신그룹 후계자의 장모가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더 업그레이드된 완벽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두 번 말 안 한다. 이번 주에 사돈이랑 저녁 자리 마련할 테니 그 안에 서 서방 집에 들어오게 하고 같이 나와.”
“노력해볼게요.”
조 여사의 눈에 다소곳이 대답하는 작은 얼굴 위로 어떤 얼굴이 겹쳐졌다. 자신과도 닮았고 저 아이와도 닮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증스러운 얼굴이. 차라리 저 아이도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조 여사의 방식이 아니었다. 피를 서서히 말리면서 스스로 죽게 했음 했지, 절대 제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을 것이다.
“노력만으로 끝나지 않아야 할 거다.”
조 여사는 찬바람을 쌩하니 날리며 나갔다. *** 태령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젖어 있는 얼굴과 옷을 보고 놀라 다가오는 김 비서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차의 뒷좌석에 오른 태령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목요일, 조 여사가 요구한 저녁 약속은 일요일. 우선 그를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대상전자 박경진이 초대한 파티 날짜와 장소가 어떻게 되죠?”
대상전자의 장남 박경진, 서진그룹의 차남 장재우. 까다로운 남편이 유일하게 곁을 허락한 친구들. 그러니까 결혼 사실도 알렸겠지. 파티광인 두 사람과 어울리며 파티를 휩쓸고 다니는 뉴페이스 미남의 정체가 남편이라는 건 태령도 알고 있었다. 이 바닥은 생각보다 좁고 말도 많았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금요일 저녁 5시, 파라다이스 호텔 야외 홀입니다.”
두 남자는 남편의 귀국을 명목으로 파티를 주최했고 태령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의도는 뻔했다. 그걸 꿰뚫었기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부부란 관계를 들먹이며 비서를 통해 남편에게 만남을 청할 순 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만큼 거절당하거나 더 시간을 끌면 낭패다. 태령을 곤란하게 할 일이라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동참할 남편이라는 건 호텔에서 눈치챘으니까.
“그 파티에 6시 참석할 테니 스케줄 조정해줘요.”
“알겠습니다.”
서강준은 폭풍전야 같은 남자였다. 그런 남자와는 단둘이 있느니 술과 사람이 있는 곳에서 상대하는 게 훨씬 유리했다. 진지한 분위기에선 경계를 하지만 느른한 분위기에선 그만큼 느슨해지는 게 인간이니까.
*** 서늘한 밤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금요일 저녁. 한강과 산을 앞뒤로 낀 파라다이스 호텔의 야외 홀에서 강준의 귀국파티가 열렸다. 경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3년 만에 귀국한 친구를 바라보며 재우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나타나선 한다는 말이 결혼했다는 것도 모자라서 이 파티에 아내를 초대해달라니. 재우 넌 저 녀석이 이해되냐?”
“난 20년째 쟬 이해 못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다시 강준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부터 서강준은 독보적이었다. 재벌가 자제들이 밥 먹듯이 하는 일탈이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았고, 어른들이 잘해야 한다는 건 늘 1등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자연스럽게 가장 위에 군림하는 서강준 같은 놈을 보고 왕이 될 상이라고 하는 건지도. 굳이 흠을 잡자면 심각하게 고지식하고 재미없다는 정도. 결혼 생각이 없으니 연애할 이유도 없다며 여자에게 무관심했던 강준은 첫사랑조차 없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 그럼 저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
그러던 녀석이 유부남이란 타이틀을 달자마자 삼천궁녀를 거느린 의자왕처럼 굴고 있다.
“뒤늦게 든 물이 무섭다잖아. 유부남 되니까 깨달은 거지. 그간 못 놀았던 것도 억울하고. 서강준은 뭐 인간 아니고 남자 아니냐?”
“그거야 그렇지만…….”
경진은 말끝을 흐렸다. 오늘의 파티가 강준의 귀국 환영파티라는 건 세 사람만 알고 있다. 서강준이란 이름은 수도 없이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저 잘난 얼굴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으니까. 그때 재우가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듯 갑자기 키득거렸다.
“아, 저 녀석 진짜. 하긴 바른 생활 사나이가 어련하실까.”
“뭔데? 나도 좀 같이 웃자.”
“대놓고 밀어내지만 않지 여자들한테 스킨십이 들어오면 자세를 바꿔서 싹 피하고 있잖아.”
그제야 경진의 눈에도 보인다. 대화에는 응하지만 여자들의 스킨십에는 무심한 움직임으로 방어를 하는 강준이.
“난 저 녀석 속을 더 모르겠다. 싫어하면서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둘 중 하나겠지. 유부남 되고 나니 억울해서 좀 놀아보려는데 체질에 안 맞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아내 때문이겠지.”
“유태령이 왜?”
“뭐겠냐, 질투심 유발이겠지.”
재우의 추측에 경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천하의 서강준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해. 유태령이라면 모를까.”
“그럼 왜 자기 아내를 초대하라고 해놓고 저러고 있겠냐?”
일리 있는 말인지라 경진은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건 유태령은 절대 안 온다는 거야. 어떤 아내가 미쳤다고 여길 오냐. 웬만한 여자들은…… 헐.”
말을 멈춘 재우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덩달아 그 시선을 따라간 경진도 입을 쩍 벌렸다. 홀에 막 들어서는 여자가 보였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강렬한 메이크업, 한껏 더 도도하게 치켜올린 말총머리. 골반까지 내려오는 화이트 톤의 머스큘린 재킷 밑으로 뻗은 아찔한 각선미. 품이 넉넉한 재킷 안에 얼마나 아찔한 원피스를 입었을지는 상상하기 나름이었다.
“……유태령이다.”
“대박, 진짜 왔네.”
두 사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노패션의 유태령은 웬만한 여자가 절대 아니라는걸. 부담스럽게 쏟아지는 시선에도 태령은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골반까지 빈틈없이 가려주는 재킷 안에 입은 건 등 노출이 과감한 백리스 원피스였다. 옷을 새로 장만하는 대신 드레스룸을 꽉 채우고 있는 조 여사의 딸 옷을 하나 골라 입은 건데.
“이 재킷을 벗는 일이 없기를.”
작게 중얼거리며 걸어간 태령이 멈춘 곳은 초대장을 보낸 두 남자 앞이었다.
“태령 씨 진짜 오셨…… 험험. 반갑습니다. 강준이 20년 지기 박경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장재우입니다.”
초대장을 보내고 남편의 귀국파티라는 걸 들먹이며 꼭 와달라고 할 땐 언제고. 진짜 나타나니 웃픈 표정으로 맞이하는 두 남자에게 태령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두 분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절 초대해주셨는데 당연히 와서 성의 표현은 해야죠.”
“위험……이라니요?”
“이렇게 즐거운 파티에 아내가 오는 걸 좋아할 남자는 없잖아요. 그런데도 이 파티에 절 초대해서 오랜 친구보다 아내인 절 더 배려해주신 마음, 절대 잊지 않을게요.”
차분한 표정, 또렷하게 고막에 박혀오는 나긋나긋한 음성. 그대로 해석하면 고맙다는 뜻. 하지만 두 남자는 태령의 경고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남편과 작당해서 날 엿 먹이려 부른 오늘의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그래서…….”
멍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두 남자에게 태령은 차분히 물었다.
“제 남편은 어디에 있나요?”
“아, 저기 있긴 한데…… 흐익!”
어딘가를 손가락질하던 재우가 기겁을 했다. 잘도 피하던 여자들의 스킨십을 받아들이고 있는 강준이 보인 것이다. 잘못 보았나 싶지만 제대로 본 거였다. 맙소사, 저 자식이 언제부터.
“고마워요, 두 분.”
두 남자가 돌아보았을 땐 태령은 이미 두 남자에게서 돌아선 후였다.
“저 미친 새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 내린다는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진짜 올 줄은 몰랐겠지. 여튼 우린 그냥 지켜보자. 된통 한번 당하면 정신 차리고 오늘 같은 짓을 안 하든가, 아니면 우리한테 털어놓고 도움 요청하든가 하겠지.”
*** 남편은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예상했던 상황이기에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도록 만든 건 남편일 테니까. 그런 남자였다. 의도한 바가 아니면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빤히 쳐다본 게 꽤 된 것 같은데 남편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호텔에선 대놓고 괴롭히더니 오늘은 돌려서 괴롭히려는 걸까.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남편이 생각을 잘못한 것 같다. 질투란 것도, 자존심이란 것도, 마음이 있어야만 반응하는 법이니까. 이 결혼을 계약이라고 생각하는 태령에게 지금의 상황은 한 편의 재밌는 드라마 같았다. 마음 같아선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지만 오늘 태령에겐 남편과 담판 지어야 할 게 있었다. 그 전에 남편을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여자들과 먼저 담판을 지어야 하지만. 부부라는 걸 밝히면 끝이지만 그건 쓸 수 없는 패고.
“뭐가 좋을까.”
남편이 제 발로 걸어 오게 할 방법. 생각에 잠겨 있던 태령의 시선이 강준의 왼쪽에 앉은 여자에게 향했다. 화려한 네일을 받은 여자의 두 손이 껴안다시피 강준의 팔을 감싸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가슴 안에서 낯선 감정이 들끓었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몸을 내주고 있는 남편을 보니 기분이 좀 더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관심 없는 물건이라도 내 거라는 건 변함이 없는데. 그 물건에 허락도 없이 누군가 손을 대는 것 같아서. 미묘한 그 기분은 태령에게 궁금증을 유발했다. 나는 이런데 당신은 어떨까. 남편의 도발에 태령은 기꺼이 도전으로 답하기로 했다. 조 여사에겐 바짝 엎드리고 기는 흉내를 내야 했다. 하지만 남편에겐 대타인 걸 들키지 않고 이혼당하지 않도록, 선만 넘지 않으면 되니까. 물론 도전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태령은 반쯤 몸을 틀며 느린 손길로 재킷을 벗었다. 이 각도라면 등을 훤히 드러낸 아찔한 뒷모습이 남편에게 보일 것이다. 피곤한 듯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내리깐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그리고 맞닥뜨렸다.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와.
“…….”
“…….”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이번엔 태령이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앙큼하고 새침하게. 서강준 씨, 이번에도 날 모른 척해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