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결혼의 목적.2021.04.11.
그럼에도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손을 보자 강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여지를 보이면 못 이긴 척 유혹에 넘어올 줄 알았더니, 끝까지 순진한 척 연기하시겠다? 그 연기를 더는 못 볼 것 같아 천천히 일어나자 아내가 한걸음 물러났다. 설마, 아니겠지. 확인을 위해 강준이 한 걸음 다가서자 아내는 또 뒷걸음질 쳤다. 거실에서와는 다르게 조금은 허둥지둥한 모양새로.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것 같아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날 대체 뭐로 보고. 밑도 끝도 없는 그 연기가 강준을 또다시 도발했다. 어디 그 연기 한번 끝까지 해보든지. 강준에게 몰려 뒷걸음질 치던 아내는 벽에 등이 닿자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손끝 하나 닿지 않은 채 비스듬히 각도를 튼 입술이 아내의 붉어진 뺨을 스쳤다. 연기 따위 집어치우라고 소리 지르는 대신, 딱 붙는 진주 귀걸이를 한 귓불에 부드럽게 속삭여주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작게 움찔한 아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미묘한 눈빛으로 잠시 강준을 올려다보더니 하는 말은 더 기가 막혔다.
“단추, 지금 잠가주고 싶은데요.”
지금 단추가 문제인가.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가증스럽다고 해야 할지. 대답 대신 강준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그러자 가는 손끝이 차분하게 셔츠의 단추를 채워나갔다.
“커프스단추를 다른 걸로 골라와도 될까요?”
단추를 모두 채운 태령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준이 길을 내주었다. 숨 막히는 순간을 용케도 참아낸 태령은 액세서리 진열장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눈은 왜 감아선.”
서강준은 심장이 아닌 머리로 상대해야 하는 남자였다. 벽과 남편의 품에 갇힐 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인지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는 격렬한 눈동자에, 그럼에도 이마를 간질이는 숨결은 너무도 부드러워서, 눈앞에 있는 입술이 아찔해서,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남편을 보지 않아야 이성이 돌아오고 이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넥타이와 커프스단추를 고른 태령은 다시 남편에게 다가갔다.
“허리 좀 숙여줄래요?”
얌전하게 허리를 기울여주는 남편의 입술이 또다시 다가왔다. 태령의 이마에 입맞춤이라도 할 것처럼. 마음 같아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싶지만 별일 아닌 것에 동요하는 것 같아 악착같이 버텼다. 남편의 목에 넥타이를 둘러 매어주며 태령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동요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자고. 긴장을 놓아서도 안 되고 경계를 늦추어서도 안 된다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유혹은 무시하고 돌발 상황엔 유연하게 대처하면 된다고. 그렇게 8개월만 잘 버티고 떠나면 되는 거다. 태령은 섬세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어주고 커프스를 채우고 헤링본 재킷의 단추까지 잠가주었다.
“셔츠 깃에 새겨진 은색 자수가 화려해서 커프스단추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대신했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원래 걸로 다시 가져올까요?”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종종 부탁하고 싶을 만큼.”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는 매끈하고 긴 손가락을 보며 태령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강준 씨도 약속 있는 것 같으니 전 그만 가볼게요.”
“내 핑계 대지 말고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요.”
놀란 눈을 들자 연한 웃음이 번진 눈동자가 보였다. 그런 눈으로 잘도 내려다보며 노골적인 말을 잘도 했다.
“나와 있는 게 불편해 죽겠으니, 이제 그만 헤어져주라고 말이에요.”
마지막 순간조차 곱게 보내주기 싫다는 것처럼.
“제 말이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강준 씨가 너무 급작스럽게 귀국하는 바람에 스케줄을 모두 펑크냈어요. 저에겐 일보단 남편이 중요하니까요.”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는 태령의 음성은 낮고 매끄러웠다. 이 남자의 말에 동요하지 말고 저 눈빛에 흔들리지 말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긴 덕분이었다.
“아까 온 전화는 비서에게 온 거였어요. 중요한 계약 건이 있는데 제가 펑크내서 틀어질 것 같다고요. 그러니 이번엔 강준 씨가 절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이건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너도 잘한 건 없다고. 스케줄을 캔슬한 건 연락도 없이 귀국한 당신 때문이라고. 머리가 좋은 남자이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알아들은 남편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였다. 더 못되게 나오거나 깔끔하게 인정하거나. 숨 막히는 긴장감에 입안이 타들어 가는 순간, 강준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태령이 조금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그가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주죠.”
혼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안타깝게도 불편한 호의를 거절할 핑계가 태령에겐 없었다. 남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긴 복도를 걷던 태령은 흠칫하며 손끝을 안으로 말아쥐었다. 우연히 스친 손끝,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 태령과 달리 강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걷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태령은 결혼식 날처럼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강준도 무감각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게 3년 만에 재회한 부부의 작별인사였다.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강준이 사라지자마자 태령은 쓰러질 것처럼 벽에 몸을 기대었다.
“숨 막히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야.”
조 여사가 옐로카드라면 서강준은 레드카드였다. *** 룸으로 돌아온 강준은 모든 걸 다 벗어던졌다. 유태령의 손길이 닿았던 셔츠와 넥타이, 재킷까지. 오늘 아내는 매끄럽고 유연하게 그에게서 빠져나갔다. 마지막엔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너도 잘한 건 없지 않냐고. 단정한 눈빛으로 조곤조곤 반박까지 하면서. 그런데 앞으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강준은 친구인 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너. 설마 한국이야?]
“오늘 귀국했어.”
[그걸 도착해서 말하는 놈이 어디 있냐고!]
“잔소리는 만나서 하고.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환영파티나 화끈하게 열어줘.”
[에이, 장난치지 말고.]
술 NO, 담배 NO, 여자 NO. 친구들이 아는 서강준은 법 없이도 살아갈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 그런데 파티를 열어달라니, 경진이 못 믿는 건 당연했다.
“장난 같아?”
[그럼 진짜라고?]
“어.”
[그러니까 왜?]
“그냥.”
해보진 않았지만, 흉내 정돈 낼 수 있겠지.
“그간 못 놀았던 거, 지금부터 좀 놀아보려고.”
통화를 끝낸 후 소파에 앉으며 강준은 중얼거렸다.
“대체 뭘까.”
유태령이 본모습을 숨기고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는 이유. 동시에 이노에서 망나니 같은 딸을 설득한 절대적인 미끼. 그 성격에 평생토록 몸에 맞지 않은 연기를 하며 살진 않을 테고.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추어 나가니 가닥이 잡힌다. 연기에 종지부를 찍을 끝이 존재하는 거다. 아내는 자유를 찾을 날을 기다리며 참는 걸 테고. 바로 이혼. 결론을 내리니 웃음부터 나왔다. 남자를 홀리는 재주는 타고난 아내에게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혜안은 없는 것 같아서.
“설마, 희망이라도 품은 건가.”
유태령 입장에선 그럴지도 모르겠다. 비공식적인 정략결혼,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독일로 가버린 남편, 기약 없는 기다림. 재회의 순간조차 싸늘했고 하다못해 오늘은 따로 지내자는 말까지 했으니 그 희망이 더 커졌을지도. 그렇다면 이노에선 딸에게 몇 년을, 그리고 얼마를 약속했을까. 이노가 한신의 막대한 투자를 받아 전기차 배터리 핵심기술 개발 및 대량 생산을 위한 설비를 확보할 기간을 생각하면 최소 5년 또는 6년 정도. 그런데 어쩌지.
“이혼은 없어, 유태령.”
아내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증스러운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연기가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사악한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것도 모른 채. 못되게 굴고 괴롭혀서 무너뜨리고 폭발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했으면 했다. 대체 내게 왜 이러냐고, 왜 나와 결혼한 거냐고. 악 받쳐서 소리 지르고 때리고 발악할 만큼. 그래야 처절하게 깨닫고 인정할 테니. 남편의 모습이 바로 과거 자신의 모습이라는 걸.
“우린 같이 책임져야 하니까.”
환하게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선연하다. 평생 안 하려고 했던 결혼에 강준을 끌어들인 장본인. 하지만 녀석은 죽었고 그 죽음에 자신도 책임이 있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알았을 텐데, 일에 미쳐서 그러지 못했다. 불장난이라 생각했고 빨리 타오른 만큼 빨리 꺼질 줄 알았다. 그런 녀석의 시체조차 수습 못 했다. 생전에 외로웠던 녀석인데, 죽어서도 외롭게, 그것도 차가운 바닷속에 있을 녀석이 신경 쓰였다. 그러니까 같이 책임을 져야지. 유태령 당신과 나, 우리 둘이 함께. 평생토록 서로에게 빠져나가지 못할 지옥이 되어주는 것. 그게 이 결혼의 목적이었다. *** 서울 외곽의 고즈넉한 한정식집. 직원들이 안내한 룸엔 두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이노그룹의 작은 사모님, 조영희. 그리고 조 여사의 말이라면 뭐든지 다 하는 운동선수 출신의 정 실장. 이제 막 도착한 태령의 앞에 정 실장이 내려놓은 건 체중계였다. 태령은 익숙하게 그 위에 올라갔다.
“0.8킬로 찌셨습니다.”
“바쁜 척은 다 하더니, 살까지 쪄? 팔자가 아주 늘어졌구나.”
단단히 비꼬는 말에도 태령은 차분히 정 실장에게 물었다.
“이번엔 몇 킬로로 유지해야 하나요?”
한 달에 한 번씩, 그녀에게 주어지는 목표 몸무게가 있었다.
“지금보다 2킬로 더 빼야 합니다.”
“그럴게요.”
태령이 맞은편에 앉자마자 조 여사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서 서방이랑은 어떻게 지내니?”
“엄마가 말한 대로 적당히 남처럼 지내고 있어요.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로의 연락처조차 모르면서 비서를 통해 서로의 일정만은 항상 공유했다. 한신 자동차 사장 취임식을 무사히 마친 것도 비서를 통해 들었고.
“식사 자리 마련하라니까 왜 소식이 없어? 이번 주 일요일에 저녁 한 끼 같이하자고 해.”
“취임한 지 얼마 안 돼서 바쁜 것 같아요. 그래도 말은 해볼게요.”
“우리가 가족이지 남이니? 무조건 약속 잡아.”
“하지만 어머니.”
“변명은 그만.”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조 여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너처럼 맹한 애한테 맡겼다가 다 된 밥에 재 뿌리려고? 결혼했어도 서 서방 노리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서 서방 정도면 이혼남이라도 서로 사위 못 삼아서 안달이야. 그러니 나라도 나서서 잘 달래놔야 할 거 아니니?”
태령이야말로 조 여사에게 따지고 싶었다. 서강준 같은 남자가 이노그룹 장녀와 결혼한 진짜 이유가 뭐냐고 말이다. 남편은 절대 아내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 경멸했으면 경멸했지.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남자가 그것만큼은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정중하면서도 우아하게, 태령이 알아주길 바란다는 것처럼. 영문도 모른 채 당하려니 미칠 것 같았다. 처음 조 여사에게 이 제안을 받았을 땐 단칼에 거절했지만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가 하겠다고 했다. 지금 이건 결혼이 아니라 계약일 뿐이고 눈 딱 감고 4년만 버티면 되는 거라고. 자신의 전부인 할머니를 위해서. 자신을 끔찍하게 증오하는 조 여사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게 이 결혼의 목적이었다. 신랑 될 사람이 누군진 4년짜리 계약서를 작성하고 나서야 알았다. 한신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서강준. 한신 자동차 해외 사업부 본부장이란 막중한 직책 때문에 2년째 독일에 있다고 했다. 결혼 후에도 최소 4년은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했고. 그래서 이 결혼이 성사된 이유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면 다신 볼 일 없는 남편이니까. 그때 정 실장이 핸드폰을 조 여사에게 내밀었다.
“한신 사모님이십니다.”
룸 밖으로 나가려는 조 여사를 정 실장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 순간 태령의 눈빛이 반짝했다. 정 실장의 손이 자연스럽게 조 여사의 허리를 감싸는 걸 본 것이다. 타악, 문이 닫힌 순간 태령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조 여사는 이노그룹 유 회장의 둘째 며느리로 내조 잘하는 현모양처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태령은 조 여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었다. 조 여사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정 실장은 몸도 좋은 데다 8살 연하. 과연, 정말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일까. 그건 사람을 붙이면 조만간 알게 될 일. 그때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온 조 여사가 태령에게 무서운 기세로 다가왔다.
“……!”
짜악-. 얼굴이 왼쪽으로 확 돌아갔다. 아릿한 통증에 혀로 아랫입술을 핥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네가 감히 내 얼굴에 먹칠을 한 것도 모자라 날 눈뜬장님 취급해!”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다는 눈빛으로 조 여사가 태령에게 물었다.
“똑바로 대답해. 너 지금 서 서방이랑 별거 중이니?”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태령은 잘못부터 빌었다.
“잘못했어요, 엄마. 한집에 살기까지 서로에게 시간이 좀 필요했던 거지, 별거는 아니라서 말씀 안 드렸어요.”
이 계약이 끝난 후 당신에게 갚을 걸 생각하면. 이까짓 입술의 아픔과 치욕 따위, 뭐든 다 참을 수 있어,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