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하해요, 내 아내가 된걸.2021.04.04.
신부 대기실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신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머리 위의 티아라보다 반짝거리는 미모. 새하얀 웨딩드레스보다 눈이 부신 자태까지.
“면사포 가장 촘촘한 걸로 챙겨온 거 맞죠?”
헬퍼에게 묻는 신부의 차분한 음성엔 잔떨림조차 없었다.
“네. 그런데 신부님,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면사포를 꼭 쓰셔야겠어요?”
신부가 아름다울수록 헬퍼도 의기양양해지는 법. 눈앞의 신부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건대, 지금껏 보았던 어떤 신부보다 아름다웠다. 작고 투명한 얼굴 안에 꽉 들어찬 바비인형 같은 화사한 이목구비. 갸름한 턱선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우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곡선. 이 아름다움을 다 드러내도 모자랄 판에 왜 면사포로 가리지 못해 안달인 걸까. 헬퍼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부는 고집스러웠다.
“면사포 씌워주세요.”
헬퍼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면사포가 신부의 얼굴 위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신부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가리지 못했다. 뿌연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은 미모는 오히려 보는 이의 궁금증을 자아내며 신비로워 보였다. 그때 호텔 관계자가 들어왔다.
“신부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신부는 무감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되돌릴 수도 없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는 길을.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꼭 잡은 작은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하지만 면사포 안에 가려진 영롱한 눈동자만큼은 겨울 호수처럼 건조하고 차분했다. *** 푸르른 산과 탁 트인 한강 뷰, 완벽한 철통 보안. 팰리스 호텔의 세비지 하우스는 유명 셀럽들이 스몰웨딩을 올리는 장소로 유명했다. 신랑은 한신그룹의 후계자 서강준, 신부는 이노그룹의 장녀 유태령. 비공식적으로 치르는 결혼식인 만큼 하객 대부분이 일가친척이었고 50명이 전부였다. 향긋한 꽃으로 장식된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하객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턱시도를 입은 신랑은 위험할 만큼 잘생겼고 면사포 너머로 아른거리는 신부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고.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하객분들에게 잘 산다는 언약의 의미로 신랑 신부의 키스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도 신랑이 꼼짝도 하지 않자 그제야 하객들의 대화가 멈추었다. 다행스럽게도 비싼 몸값으로 모신 사회자가 매끄럽게 진행을 이어갔다.
“어른들만 모신 자리라 예의 바른 우리 신랑님 입장이 굉장히 곤란한 것 같습니다. 이럴 땐 사회자인 제가 당연히 봐드려야겠죠? 두 분의 언약은 반지를 끼워주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그제야 신부의 면사포 너머로 서서히 침범해오는 신랑의 커다란 손. 길고 단단한 손가락에 쥐어진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 반지를 태령은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한신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재계 최고의 신랑감인 서강준. 그럼에도 비혼주의를 선언해서 딸 가진 정·재계 인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던 남자. 그런데 갑자기 독일에서 귀국한 후 이노그룹 장녀와의 맞선을 원했고 석 달 만에 결혼식까지 치르게 되었다. 이 모든 게 그가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결과였다. 물론 결혼의 목적은 기업가에서 흔한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조 여사의 말에 의하면 한신의 후계자가 딸에게 첫눈에 반한 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결혼은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태령은 공들여 치장한 얼굴을 촘촘한 면사포로 가려야만 했다. 최고의 신랑감이자 최고의 미모를 겸비했다는 신랑의 얼굴조차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가 독일로 떠나는 그 순간까지. 그때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차가워진 손끝을 커다란 손이 감싸왔다. 손끝에서 번지는 온기에 태령은 문득 희미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이 온기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이 남자의 눈빛도 따뜻할까. 재벌가 남자도 사랑이란 걸 하긴 할까. 무모한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태령의 입술이 감탄스러움에 절로 벌어졌다.
“……!”
무섭게 시선을 흡입하는 이기적인 얼굴에서 감히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신랑이 고개를 들었다. 차갑지만 타는 듯한 눈동자와 부딪힌 순간 태령은 긴 속눈썹 아래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겼다. 그 와중에도 그의 눈이 참 오묘하고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하는 남자의 눈이라기엔 지독히도 차가운데, 감정이 없다고 하기엔 눈동자 깊숙한 곳이 뜨겁게 타고 있어서. 그가 얼굴을 가까이 내리자 밑도 끝도 없는 아득함에 태령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유태령 씨, 축하해요.”
귓가에서 번지는 나지막한 속삭임에 속눈썹의 떨림이 증폭되어 심장까지 전이된다.
“내 아내가 된걸.”
당연한 그 한마디가 왜 이토록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걸까.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서늘한 감촉. 다이아의 영롱한 반짝임. 손을 통해 번지는 커다란 손의 온기. 차가우면서도 타는 듯한 신랑의 눈빛까지.
“이후는 어른들의 자리이니 우린 이만 퇴장하죠.”
그 모든 것들이 태령의 가슴에 문신처럼 아프게 새겨지고 있었다.
“손잡을 테니 놀라지 말고.”
허락을 구한 후 신랑이 가만히 손을 잡아왔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신랑 신부의 발밑에서 잔디가 수줍게 사락거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신랑 신부의 자태에 시선이 홀린 하객들은 아무도 몰랐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고요하면서도 꽉 차오른 미묘한 텐션을. 그렇게 두 사람이 걸어서 도착한 곳은 세비지 하우스의 입구. 보안요원조차 멀찍이 떨어지자 강준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잡고 있던 손을 놓는 거였다.
“…….”
“…….”
몸을 반쯤 튼 신랑이 정중하면서도 짤막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자 태령도 얼떨결에 고개를 까딱했다. 대화 한마디 없이, 건조한 격식을 차린 인사. 그게 신랑 신부의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신부만을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 신랑은 원래 있었던 독일로 떠났다. 당연히 신혼여행도 없었고 첫날밤도 없었다. 하지만 태령은 서운하긴커녕 오히려 간절히 바랐다. 4년만 버티면 끝이 날 결혼이었다. 그러니 제발 남편이 4년 동안 한국에 들어오지 않게 해주세요. 그녀에겐 남편에게 절대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이 있었다. 난 진짜 유태령이 아니라는 것.
*** 3년 후. 태령을 태운 차가 인천공항으로 내달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스케줄 다 캔슬하고 지금 공항 가고 있어요.”
차분하게 통화하는 얼굴과 달리 태령은 사실 넋이 나가 있었다. 이제 8개월만 버티면 4년. 이 결혼에서, 유태령이라는 이름에서, 해방되는 날이 코앞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귀국이라니. 그녀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무조건 순종적이고 조신하게 굴어. 서 서방 말에 죽는 시늉이라도 하란 뜻이야. 좀 달라 보여도 좋은 아내가 되려는 노력인데 트집 잡진 않겠지.]
“알겠어요.”
대답과 달리 태령은 조 여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 여사의 딸은 불같은 성격에 제멋대로 기분파라 순종과 조신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어쩐지 3년이 편히 간다 했더니.]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독일로 가버린 손자 때문에 미안했는지, 시할아버지인 서 회장은 손자가 귀국하기 전까지 태령에게 며느리 노릇은 할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태령도 조 여사도 나름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상황에 조 여사도 머리가 아픈 눈치였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서 서방한테 어설픈 수작은 안 부리는 게 좋을 거야. 이제 8개월 남았는데, 그간의 고생들을 날려버리고 싶은 게 아니면.]
길어지는 조 여사의 잔소리에 눈가로 피곤함이 몰려든다.
[내가 서 회장님께 안부 전화해서 망정이지. 시키지도 않은 일만 죽어라 해대니 남편이 귀국하는지도 모르는 거 아니니?]
서강준이 최고의 신랑감이란 건 태령도 인정한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하건대 단 한 번도 욕심낸 적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독일로 떠나버린 그에게 3년간 연락 한번 안 한 것도 그런 이유였고. 그런데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엄마도 아시잖아요, 저 노력하고 있는 거.”
[노력에 성과가 없으니 내가 이러는 거 아니니? 하여간 맹해서는. 넌 어떻게 된 애가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내가 뭘 해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당신이잖아요. 난 당신의 진짜 딸이 아니니까, 그리고 당신도 진짜 내 엄마가 아니니까.
“실망시켜서 죄송해요. 제가 더 노력할게요.”
하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가시 같은 그 말 대신 태령은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무서워서 벌벌 떨며 납작 엎드린 걸 보여줘야 여우 같은 조 여사가 방심할 테니까.
[네깟 게 노력해봤자 뭐 달라진다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 여사가 코웃음을 쳤다.
[내 딸과 가증스러울 만큼 닮은 네 얼굴에 감사해야 할 거다. 그게 아니면 너 같은 것한테 이런 기회가 가당키나 하니?]
가끔씩 통화할 때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조 여사가 항상 하는 레퍼토리였다.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아이가 제 딸과 쌍둥이처럼 닮아버렸다. 그 아이를 조 여사는 끔찍하게 싫어했다. 하지만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조 여사의 딸과 닮은 제 얼굴도, 그리고 조 여사도,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달 앞두고 변고가 생긴 딸을 위해 조 여사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끔찍한 그 아이에게 원하는 걸 하나 내어주고 제 딸 노릇을 시키기로. 이노그룹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미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래서 꼭 필요한 한신과의 동맹을 맺기 위해. 그게 평행선처럼 달리는 두 사람의 관계였다.
[서 서방 만나거든 이번 달에 식사 자리나 마련해. 그 정돈 할 수 있으리라 보마.]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 매번 이런 식이었다. 가끔씩 하는 통화에도 태령이 편안한 꼴은 못 본다는 듯 조 여사는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김 비서, 두통약이랑 청심환 좀 줄래요.”
김 비서가 얼른 약과 생수를 내밀었다.
“사장님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대답 대신 약을 꿀꺽 삼킨 태령은 가는 손가락으로 노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결혼식 날, 딱 한 번 보았던 남편의 존재감은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특히 차가우면서도 타는 것 같던 검은 눈동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태령은 중얼거렸다.
“……8개월만 늦게 돌아오지.”
그랬다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끊길 인연이었다. *** 차에서 내린 태령은 주차장을 차분히 훑었다. 87서 0432. 조 여사가 말한 차가 보였다. 그녀가 다가가자 운전석의 문이 열리면서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작은 사모님.”
서 회장을 오랫동안 보필한 박 비서였다.
“차 키 주실래요.”
“제가 목적지까지 모시겠습니다. 장시간 비행으로 도련님이 피곤하실…….”
“박 비서님 눈에는 제가 그 정도 배려심도 없는 아내로 보이나요?”
“……예?”
“운전은 내가 직접 할 거예요.”
속삭이듯 말을 하는 태령의 음성은 무심하면서도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제가 박 비서님을 더 설득해야 할까요?”
키를 건네받은 태령은 차에 타는 대신 밖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폭풍전야를 앞둔 지금 절실한 건 마음을 추스를 잠시의 여유였으니까. 서강준이 어떤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표정으로 무슨 행동을 하든. 동요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도록.
“순종적이고 조신하게.”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추스르던 태령을 고요히 흔든 건 한 줄기 바람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폭풍전야에 태령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압도적인 외모와 주변을 압도하는 반듯한 걸음걸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차가우면서도 타는 듯한 눈동자까지. 그다, 내 남편 서강준. 태령은 남편과 처음으로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이 순간이 두려웠다. 정말 첫눈에 반한 거라면 미세한 차이라도 알아볼 것 같아서. 조 여사의 딸과 태령을 자세히 뜯어보면 알 수 있는 가장 큰 차이는 눈꼬리와 피부색이었다. 태령은 투명한 피부에 눈이 동그란 편이고 조 여사의 딸은 창백한 피부에 눈꼬리가 올라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완벽한 메이크업으로 커버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스스로를 다독인 후 거리를 좁히던 태령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코끝을 스치는 섹슈얼한 체향. 그건 태령을 무심히 지나쳐버린 남편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태령은 생각했다. 차 키를 손에 넣기를 잘했다고. 차 키를 이용해 태령이 시동을 걸자 예상대로 강준이 돌아섰다. 하지만 다가오는 대신 차체에 몸을 기대고선 느긋한 눈빛으로 응시해왔다. 차분히 걸어서 바로 앞에 설 때까지, 남편의 시선은 집요하게 태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 귀국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남편의 나지막한 음성은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하지만 햇빛을 머금은 신기할 만큼 새까만 눈동자는 잘 벼른 칼날처럼 빛이 났다. 본능적인 감이었다. 남편이 그 칼로 자신을 베어버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