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을 운영하는 후작가의 영애로 평안한 나날을 보내던 알리오스 리엘. 어느 날 길을 가다 쓰러진 가련한 미남자를 구해 줬는데, “잠들기 전 나와 스친 건 그대인가?” “네, 그런데요?” “처음이야.” “예?” “스치는 것만으로 날 재우는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라고.” 남자의 마지막 문장을 듣는 순간, 전생의 기억이 되돌아왔다. 남자는 내가 읽었던 소설 속 여주와 남주를 통째로 파멸로 이끈 희대의 흑막, 카시아르 키센이었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 여주한테 해야 하는 말이잖아? 게다가 흑막을 재울 수 있는 건 여주만이 가졌던 능력이었다. 흑막은 원작의 여주에게 하듯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내가 대신 파멸 엔딩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주를 찾아나섰는데. “자네는 부고를 전달받지 못한 모양이군.” “부고라니요? 누구의.” 여주의 아버지인, 백작의 붉게 충혈된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좋지 못한 직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었네. 내 딸이.” 소설 속 여주가 죽었다. 내게 파멸로 가는 능력을 넘겨 주고서. *** 결국 흑막에게 붙잡혀 조건부 계약 결혼을 시작했는데, 내 능력만을 필요로 한다던 흑막의 행동이 수상쩍다. “이 정도로는 빨리 잠들기 어려울 것 같은데.” 카시아르 공작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느새 그는 내 손을 제 뺨에 댄 채로 날 나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닿아 있어도 잠이 오지 않으니까.” 잠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던 카시아르 공작의 입술이 내 손에 닿았다. 입술의 감촉만큼이나 부드러운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재워 줘. 리엘.” 나, 이 흑막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파멸 엔딩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는 대리 여주, 리엘과 그럴수록 집착하는 계략 흑막, 키센의 밀고 당기는 달달한 로맨스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