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으로 인한 특별기로 하네다에 날아온 부기장 기수호. 매일 카운터 앞에 세워두는 입간판의 모델은 생각보다 미친놈이었다. 도저히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수호의 플러팅에 넘어가 하룻밤을 보낸 은조. 그렇게 시작된 섹스 파트너 관계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띄엄띄엄 이어지고. 몸뿐인 관계라 금세 흐지부지될 것이라 단정짓던 은조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수호는 앞으로 매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 * * “이러면서, 나를 꼬시고 있다고?” “이러는 게 뭐?” “…그냥 섹스 돌 취급하고 있잖아.” 은조는 파격적인 소리를 한 것치고는 서글픈 얼굴을 했다. 수호는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이런 장난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때마다 그렇게 느꼈다면, 은조가 ‘우리에게 서사가 없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럼 섹스 돌 씨는 섹스 돌 취급이 싫으면 어떤 취급이 받고 싶은데. 말해봐.” 빈정거리는 수호의 입에서 나온 ‘섹스 돌’이란 말에, 은조는 다시 한번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술이 들어가니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같이 금세 눈가가 뜨거워져, 은조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고작 섹스 돌이랑 섹스를 하겠다고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