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이 듣지 못할 이야기는 없어.” [1부] 용이 될 운명인 이무기 우희림(雨喜林)은 승천 직전에 안 좋은 일에 휘말려 인간이 되고, 몇 번의 환생을 거듭하며 업보를 쌓는다. 그러다 무당의 핏줄로 태어나 극적으로 호법신 연려와 재회하고 이무기 시절의 기억을 되찾는다. 희림은 업보를 씻고 다시 용이 되고자 연려, 세 요괴들과 함께 수많은 원혼을 만나고 그들을 돕는다. [2부] 마침내 업보가 사라지며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 용이 된 우희림. 하지만 염라대왕의 명으로 아직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희림은 그에게 충성스러운 세 요괴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희림만을 기다렸던 연려와 함께 또다시 산 자와 죽은 자를 도와야 하는데……. [3부] 용으로 승천했으나 여전히 이런저런 이유로 인간세계에 머물고 있는 희림과 연려와 요괴 셋.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 연려가 어느 귀신을 보고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 역시 연려를 알아보고는 접근을 시도하고, 이내 그것이 사건에 얽혀들기 시작하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 한 일이 너무 많았다. 뒤늦게 찾아온 피곤에 몸이 축 늘어졌다. 부적 재료고 염라대왕이고, 순식간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고 싶지 않게 되었다. 연려는 혹시 내가 후다닥 뛰쳐나가 1층으로 가 버릴까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자기도 침대로 들어와 나를 푹 끌어안았다. “으음, 안 내려갈게……. 잘래…….” “잘 생각했어.” 그가 칭찬이라도 하듯이 나를 끌어안은 채 머리카락과 등을 살살 쓸었다. 잠드는 주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시간도 늦었고 수마에 저항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눕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푹 잠이 들었다.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연려가 나를 품 안에 넣은 채 꽉 끌어안고 있었다. * * * 눈을 뜨자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뭐에 묶인 것처럼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아서 꿈틀거리자 죄고 있던 힘이 약해졌다가, 다시 와락 끌어안는다. 아직도 연려에게 끌어안긴 채였다. 목덜미에 닿던 고른 숨소리가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되었다. “새벽에 열났었어…….” 그렇게 말하며 연려가 손을 더듬어 내 이마를 짚었다. 푹 자고 일어나 체온이 조금 올라가긴 했지만, 지금은 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걱정했겠구나. 꾸물꾸물 품으로 파고들어서 잠시 같이 끌어안고 있다가 일어났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오래 잔 바람에 머리가 몽롱했다. 부스스한 채로 침대에 앉아 과일이며 차가운 물 같은 걸 먹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몸을 씻은 뒤에도 한참 여유를 부리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신당 문을 열었다. 거울 너머는 비어 있었다. 앞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얼마쯤 지나 방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뒤늦게 쳐다보았더니 어느새 염라대왕이 와서 거울 표면 가까이 얼굴을 대고 날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놀라서 움찔하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흔들흔들했다. 얼른 눈을 제대로 떴다. “감사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주지 않았는데?” “이제 주실 거잖아요.” “흐으음…….” 염라대왕은 괜히 뜸을 들이다가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제야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구슬 목걸이가 감긴 작은 항아리와 붉은 비단 보자기였다. 냉큼 손을 뻗어서 하나씩 집어 들었다. 항아리에는 평소보다 짙은 힘이 담긴 경면주사, 보자기에는 두 가지 색의 종이와 지푸라기가 들어 있었다. 종이는 각각 부적을 쓸 것과 길지를 만들 것이다. 평소에는 경면주사 말고는 알아서 마련한다. 굳이 저승의 것을 쓰지 않아도 어지간한 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재료를 전부 저승에서 가지고 오는 건 내가 들여야 할 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신력을 소모하는 만큼 나중에 피곤하다. 자주 내다 쓸 수 없는 귀한 재료들이라 이번처럼 위험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부탁하지 않지만……. 물건을 내준 염라대왕이 의자에 길게 기대어 앉았다. 미묘하게 입꼬리가 덜 올라가 있었다. 평소보다 약간 덜 태평하다는 의미였다.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즈음은 도무지 길하지 않구나.” “불길한가요?” “그래.” 그는 앉은 자세를 바꾸었다. 방울이 가볍게 소리를 냈다. “찾아오는 손님을 많이 맞이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셨죠…….” 그래서 굉장히 바쁘다. 그런 와중에 생각도 못한 큰일이 걸리는 바람에 더. “별이 잘 보이지 않을 때란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드물게도 염라대왕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별이 잘 보이지 않는 건 흐리다는 뜻이고, 당연히 맑은 것과는 반대된다. 맑지 않으니 길하지 않다…… 불길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날씨가 바뀌듯 세상을 둘러싼 기운 또한 바뀐다. 그게 맑지 못하면 기운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일종의 상호작용이 안 좋아지는 것이다. 긴 세월 동안 몇 번인가 찾아온 흐린 날이었다. 당연히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 수백수천 명이 희생되는 큰 재난, 여러 나라가 휘말리는 전쟁. 내가 입을 다물자 염라대왕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걱정할 정도로 크게 어두운 건 아니지.” “그러면 다행이지만요.” “하나 다망해지겠구나.” “…….” 지금보다 더? 순간 멈칫했다가 어깨의 힘을 풀었다. 대재난이 일어나는 것보다야 내가 바쁜 게 훨씬 나았다. 재난을 막을 수 있을 정도면 더 좋을 거고. “이번만큼 힘을 소모할 일도 많겠지.” “네에…….” 연려가 싫어할 얼굴이 눈에 선했다. “좋은 것을 줄 터이니 먹도록 하렴. 호법신과 위신(位神)들의 몫도 준비했으니.” “감사합니다.” 염라대왕이 내민 건 옥이며 마노 같은 보석이었다. 식용이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기세에 비하면 조용히 들어온 연려가 내 뒤에 서서 거울과 그 앞에 쌓인 것과 염라대왕을 번갈아 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시간을 많이 빼앗았구나.” 그런가? 그렇게 오래 있진 않았는데. 하지만 거울 앞에 쌓인 물건을 챙겨 신당 밖으로 나갔을 때 왜 연려가 쳐들어왔는지 알았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가고 있었다. 재료는 그렇다 치고, 보석을 내주는 것에 염라대왕이 시간을 꽤 들인 모양이다. 신당 안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 가까우니, 안에서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도 알 방법이 없다.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요괴들이 돌아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눈 세 쌍이 동시에 도르륵 구르듯이 돌아와선 나와, 연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든 보석을 보았다. “앞으로 고생하라면서 주셨어.” 백낭자와 모란이 신당 문을 흘끗 보더니 슬쩍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우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수 전에 일꾼들에게 상을 잘 차려 주는 것과 같은 게 아닌지요.”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연려가 끼어들었다. “소답게 잘 아는군.” “무슨 말이냐. 소는 추수 때가 아니어도 일을 많이 한다.” “…….” 잠시 묘하게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조용히 우귀 앞으로 보석을 더 많이 놓아 주었다. 염라대왕이 준 건 신력을 채워 줄 보물이었다. 손끝을 댈 때마다 설탕이 물에 녹듯 사라지고 힘이 차곡차곡 쌓였다. 말하자면 영양제 같은 것이다. 하루 종일 찾았지만 역시 악귀에게 큰 영향이나 위해를 입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가 굳이 가지 않아도 해결되는 수준이었다. 그 건물의 유동 인구를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얼마 후 눈앞에 쌓여 있던 보석이 전부 사라지고, 요괴들도 다시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 나는 재료와 붓 같은 걸 챙겨 거실에 앉았다. 숨을 짧게 내쉬었다. 뚜껑을 열자 기름 같은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손끝에서 피를 내어 떨어뜨렸다. 늘 섞던 것보다 조금 많이. 적당히 피가 섞인 항아리를 옆에 두고 붓을 들었다. 연려는 걱정하는 얼굴이긴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내가 손도 대지 못하게 했겠지만, 금줄과 부적과 주술이 전부 같은 힘이어야 틈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시무룩한 모습이다. “너는 다른 거 해 줘야 하잖아.” 은근히 그걸 기대하지 않을까 하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힘을 채워 주는 것보다 애초에 네가 안 힘든 게 좋아.” “…….” 귀와 꼬리가 축 처진 것처럼 느껴졌다. 미안해져서 손짓해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