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빙 인 더 월드 (Being in the world)

붉은 석양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고 있으면 수마들이 나를 종종 구세계의 문 앞에 데려다 놓곤 했다.
그러나 억센 덩쿨이 구불구불 말려 있는 낡은 손잡이, 바싹 녹이 슨 거대한 철문은 이제 더 이상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 앞에서 고함을 지르고 하염없이 배회하다가 이윽고 눈가가 뜨거워질 때면, 번쩍하고 산산조각 난 꿈의 파편들이 어김없이 내 눈앞에 흐트러져 있었다.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꿈은 신이 약속한 먼 훗날의 마지막 선물인 것이다.
누군가는 유신 시절이 기나긴 암흑 시절이었노라고 회고하기도 한다.
반석 위에 놓여 있지 않았던 불안한 정권들은 몇 번이고 내 눈앞에서 고꾸라졌다. 또 변덕스러운 봄과 겨울은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분명 내 시절은 투쟁과 격정의 시대로 기억되리라. 다만 그 관점에 매몰된 개인의 삶이 결코 끔찍한 악몽만으로 점철된 건 아니었다.
내 유년은 오래된 책 향기, 변색된 유화, 흐릿한 연필 자국, 설탕으로 만든 장미의 정원, 유쾌하게 울리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컬러풀한 비틀즈의 환영 속에 있었다.
작은 소년은 거기서 사랑의 달콤함과 떫은맛을 배웠다.
“그럼 우리 그걸 사랑이라고 하자.”
1970년대 후반, 광기와 낭만이 뒤섞여 있던 시절.
이안을 처음 만난 건 15살, 늦은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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