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10화
영광은 순간이지만, 그 후의 삶은 지난하다.
전투가 끝나 기뻐했던 것도 잠시.
“언제나 그렇지만 뒤처리가 가장 힘들군.”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루카스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얼굴에는 전투 때보다도 더 깊은 피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황제의 목을 베어 전투가 끝난 지 만 하루가 지날 동안 루카스는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혈육을 제 손으로 베었다는 슬픔에 잠길 여유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아직도 할 일이 산더미야.”
이 전투가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황제의 목이 베이는 것으로.
덕분에 루카스는 승리하기는 했으되 당장 소속이 불분명해진 군사가 몇만 명이나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이다.
아무리 전투가 끝났다고는 해도 당장 병사들을 해산시켜 집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 그들 자체가 남은 일거리였다.
심지어 전투가 길어질 것을 예상해 적을 기습, 당장 쓸 군량미를 모두 불태운 상태라서 더 골치가 아팠다. 그렇다고 굶길 수도 없는 일이지 않나.
만에 하나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골치 아파진다. 무장을 해제시켜 놨어도 수가 많으니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황제가 죽어도 백성들을 징집한 귀족들이 어떻게든 수습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싸늘한 시체로 막사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들 중에는 나와 한 번 부딪혔던 베른 공작의 얼굴도 있었다.
어쨌든 덕분에 평원에 덩그러니 남겨진 수만의 병사들은 루카스가 처리해야 할 짐 덩이가 되었다.
각 귀족 가문의 가신들에게 유해를 수습하도록 하고, 패배한 병사들을 다독이며 아직 적개심이 남은 성 측의 병사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분리하는 것과 동시에 사상자들을 옮기고, 모자란 식량을 닥닥 긁어모아 먹여야 하는 것도 모자라 또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 시체도 처리해야 하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는커녕 몸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그리고 당장 루카스 전하가 움직이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수도에는 정예병을 곧바로 파견해야 합니다.”
친구가 홀로 바쁜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고 함께 일하느라 바빴던 일리아스가 덩달아 피곤한 눈을 짚었다.
“황제가 죽었다고는 해도 수도에는 아직 황제파 세력들이 남아 있습니다. 루카스 전하가 제대로 보위에 오르기 전에 방계 출신의 어린 후계자를 옹립해 수도에서 버틴다면 골치 아파질 겁니다.”
“……머리 아프군.”
“또 수도에는 대신전도 있으니, 그쪽도 주의해야 합니다. 신전 또한 루카스 전하보다는 황제의 후계자를 선호할 테니까. 심지어 신전이 사기꾼으로 몰린 마당이니 더욱 필사적으로 발악할 테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루카스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일리아스를 쳐다봤다.
“……생각보다 정치적 식견이 있군. 관심 있었나?”
“정치에는 관심 없습니다. 전하의 안위에 약간 관심이 있는 것뿐이죠.”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줄도 알고.”
“뭐, 만일 여기서 루카스 전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왕위를 잇는다면 저나 알리시아나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요.”
“아주 잘났다, 잘났어.”
그리고 이런 일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전투가 끝난 후 푹 쉬고 있던 알리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지금 그런 정치 같은 게 문제냐? 다들 저 메시지가 안 보여?”
“…….”
- ‘죽음의 길’이 생성되었습니다.
- 두 세계의 동기화까지 138:10:42
성의 창문 너머로, 여전히 하늘을 꿰뚫듯 생성된 검은 기둥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딜 보나 불길한 징조의 출현.
당연하게도, 저 ‘죽음의 길’이 나타난 순간부터 모두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래도 루카스가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할 일을 정확하게 지시했고, 또 그 루카스의 지시를 페트라나 엘리사 같은 기사들이 정확하게 이행하며 남들 앞에서는 불안을 한 점도 보이지 않았기에 당장 통솔이 되고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역력했다.
아마도 다들 남은 시간이 지나면 대체 어떻게 될지, 저게 과연 해결은 될 것인지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리라.
일리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악마에 홀려 제 형제를 죽이려 한 황제가 마지막 발악으로 이 세상을 저주했다…… 그런 소문은 퍼트려 두었습니다. 잘 먹히더군요. 사실이 어찌 되었건 언제나 원망할 대상은 필요한 법이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니까.”
바로 그, ‘사실과 관계없이 원망할 대상’으로 낙인찍혀 몇 년을 고생했던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 더 설득력이 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해한 현상에 억지로라도 이유를 붙여 두면 두려움이 덜해지지. 일단 지금은 사람들을 달래는 게 더 중요하니.”
“네, 이 마당에 혹시라도 병사들의 통제력을 잃으면 큰일이니…….”
“그렇게 통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앞으로 3일만 더 지나도 문제가 생길걸. 집단이란 그런 거니까.”
창가의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이우연이 그렇게 말했다.
“시선을 돌릴 핑곗거리가 더 필요할 거야.”
이우연의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알리시아가 눈을 도로록 굴렸다.
나를 향해 시선을 보내는 것이, ‘쟤는 뭔데 여기에 저리도 자연스럽게 끼어 있냐.’라고 묻고 싶은 모양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눈치 없는 알리시아뿐이고, 일리아스와 루카스는 가만히 이우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건 그것대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이우연의 시선이 조용히 창가 너머, 기이한 모습을 담았다.
“심지어 저런 시스템 퀘스트까지 떴으니, 갈수록 의문이 커져 갈 테지.”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가 내 손을 뿌리치고, 이 세상에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순간.
죽음의 길이 생성된 후, 우리 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세계가 ‘최후의 전령’을 적으로 인식합니다.
-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 ‘최후의 전령’ 을 처치하십시오.
- 보상 : 플레이어가 원하는 보상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란 태어난 이상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생물이다.
그래서 시스템은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적에 맞서 새로운 퀘스트를 내놓은 것이다.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보상과 함께.
그 의지의 총체를 운영하는 일리아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보상이래 봤자 죽으면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그거야 그렇다.
결국 저 ‘죽음의 길’이 완성되는 순간 이 세계는 멸망한다.
조한율 :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복구할 방법 없는, 완전한 덮어씌우기를 당하는 셈이에요. 그냥 그 세계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거라고요.
어제부터 도통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조한율도 끼어들었다.
조한율의 분석으로는 ‘죽음의 길’이 완성되면 아리아드네가 살아온 B루트의 데이터가 현재의 세계에 완전히 덮어씌워진다고 했다.
새로운 운명의 가능성은 고사하고, 모든 것이 멸망한 세계로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린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리아드네는 정말로, 이 세계의 존재를 용납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래, 보상이고 뭐고 살려면 어떻게든 막아야겠지만 말이다…….”
알리시아가 내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죽음의 길인지 뭔지가 시전되기 전에…… 나, 아리아드네를 죽이려고 했어.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더라고.”
“…….”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 나는 조용히 알리시아의 말을 들었다.
행방불명이 된 나를 몇 년이나 찾아 헤맸던 알리시아다. 그런 알리시아가 차라리 친우를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면, 본인의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틈이 안 보였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야. 지금의 아리아드네는 우리 셋이 다 덤벼도 이길까, 말까야.”
확실히, 그랬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리아드네는 시스템 자체가 죽음이라고 인지할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손에 넣었다. 이미 일반적인 인간의 수준은 넘어선 지 한참인 것이다.
그나마 아리아드네가 타인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시전했던 ‘죽음의 장막’은 성검으로 파훼할 수 있었지만, 저 ‘죽음의 길’은 시험 삼아 성검으로 베어 보아도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마치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아무리 베어도 소용없다는 것처럼.
일리아스가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건 네가 설명하지 않아도 레나도 충분히 알아. 저 ‘죽음의 길’을 베어 보려고 했다가 반나절 동안 기절했잖아.”
그래, 파훼에 실패해서 반동으로 기절했던 건 덤이다.
전투의 피로도 있었겠지만 진짜 전신의 장기를 다 뒤집어 까는 것 같은 고통에 순식간에 기절했더랬다. 심지어 성검조차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약간 까맣게 타 버렸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지금도 파트너는 검집 속에서 치를 떨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게다가 기절할 때 혀를 잘못 깨물어서 말도 못 하고 있지.”
루카스가 얄밉게 사람 아픈 곳을 찔렀다.
나는 루카스를 노려보았다.
“…….”
안 그래도 입속에 포션을 물고 있느라 대화에 참여도 못 하고 답답해 죽겠는데 말이야.
“그러게 좀 조심하지 그랬나. 언제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라고 말한 건 누구였더라.”
내가 미궁에서 루카스에게 했던 말이긴 했지만, 저걸 꼭 그렇게 돌려줘야 하나?
그리고 이미 한 시간 넘게 포션을 물고 있었는데, 이쯤이면 혀도 다 나았을 텐데 그만 삼켜도 되지 않나…….
“포션 삼키면 화낸다.”
“…….”
이우연의 말에 나는 가만히 포션을 물고 있기로 했다.
무시해도 되겠지만 솔직히, 내가 기절에서 깨어났을 때 이우연의 표정이 어땠는지 떠올려 보면…….
‘그냥 얌전히 들어주는 게 낫지.’
어쨌든, 골자는 현재의 아리아드네를 쓰러트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궁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존재감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약한 몬스터들은 절명했을 정도인데, 이제는 아예 세상을 집어삼키겠다고 달려드니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막을 재간이 도통 생각나질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단은 상태를…….”
이우연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우리가 모여 있던 응접실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인 루카스가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전하, 이세계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그렇게 전한 것은 페트라의 목소리였다.
“예나 누나!”
루카스가 문을 열라고 말하자, 양태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뒤에 보호자처럼 선 이선 헌터의 모습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양태원이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뛰어들어 오려다가, 모여 있는 다른 면면들을 보고 멈칫했다.
“어, 혼자가 아니셨네요. 혹시 이야기 중이셨나요? 제가 방해를…….”
“방해하긴 했지.”
이우연이 한숨을 쉬며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드디어 잔소리에서 해방이 된 모양이다.
나는 포션을 꿀꺽 삼켰다.
“……아냐, 태원이 너는 신경 쓸 거 없더.”
“없더?”
“없어.”
혀가 덜 나았나.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터라 목이 잠겼다.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으며 양태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오히려 고맙다. 네 덕분에 묵언 수행에서 해방됐어.”
“예에? 뭔 소리?”
“어, 이야기 중인 줄 알았으면 제가 말릴 걸 그랬어요.”
이선 헌터가 약간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있다가 올 걸 그랬나 봐요. 태원이가 당장 급한 용건이 있다고 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잠깐 쉬던 중이었으니까. 사실 제가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데…….”
전투가 끝난 후, 이선과 잠시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제대로 대화할 기회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선은 한국 헌터들을 챙겨야 했고, 나는 나대로 바빴으니까.
하지만 사실 도움을 받은 입장이니만큼 내가 이선 헌터를 먼저 챙겼어야 하는데…….
내가 미안해하는 기색이자 이선이 선선히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정신없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하면 되죠, 뭐.”
과연 젊은 나이에 한국 헌터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는 만큼 배포가 크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양태원을 바라보았다.
양태원의 몸을 감싼 청룡이 눈을 살짝 깜박였다.
그 청색의 비늘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용이 자유롭게 헤엄치던 푸른 하늘과, 그 하늘 밑에 선 누군가를 떠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태원아?”
“아, 맞아.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누나, 제가 전투 중에 시스템 오류를 수복한 건 아시죠? 그때 목소리를 들었거든요.”
나는 눈가를 좁혔다.
“목소리? 누구의?”
“그야 물론 누나 친구죠. 이름은 모르겠고, 음…… 금발에 초록색 눈. 죽음의 천사처럼 생긴 사람이요.”
죽음의 천사.
그건 아리아드네를 가리키는 정확한 묘사였다.
하지만 양태원은 아리아드네를 직접 본 적이 없을 텐데……?
“너 대체 무슨 소리를…….”
“그 사람이 도와 달라고 했어요.”
“……?!”
양태원의 말에 나는 굳었고, 창가 자리에 몸을 묻고 앉아 있던 이우연도 고개를 돌렸다. 반듯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리아드네가 너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고? 대체 뭘…….”
“정확히 말하자면, 원혼에 몸을 빼앗긴 쪽이.”
양태원이 씩 웃었다.
저 웃음은, 본인이 자신 있는 분야를 설명할 때…… 그러니까, 무당의 일을 할 때의 모습이다.
양태원의 몸을 감싸고 있는 청룡이 기특하다는 듯 꼬리를 탁, 쳤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볼게요. 그러니까, 지금 누나 친구…… 아리아드네 님은 원혼에 몸을 빼앗긴 상태예요. 뭐, 신을 믿는 사람의 기가 허약해지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랄까? 그런데 보통은 인간의 몸이 혼을 감당하지 못해서 금방 빙의가 풀리든가 혹은 기가 빨려서 죽거나 하지만, 이번에는 몸이 견디고 있어서 오히려 문제인 거죠.”
……말이 그렇게 되나.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양태원의 설명을 들었다.
이렇게 들으니 한국 민속 신앙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몸의 주인은 이 세계의 누나 친구예요. 원혼에게 몸은 강탈당했지만 본래의 혼백이 소멸된 건 아니란 거죠. 그래서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어요.”
“주도권 싸움이라면…….”
나는 내가 페트라의 몸을 빌렸을 때를 떠올렸다.
주로 움직이는 것은 나였지만 페트라의 의지가 강렬해질 때, 나도 분명히 페트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처럼 죽음의…… 아리아드네에게 지배당한 몸 안에 또 다른 아리아드네의 의지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 즉…….
“본래의 아리아드네 님이 몸의 주도권을 찾게 되면…….”
조한율 : B루트의 절망 씨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겠네요.
두 세계의 운영자가 동시에 말했다.
그래, 그런 이야기가 된다.
나도 퀘스트가 끝나고 페트라가 제 몸의 주도권을 되찾을 때마다 내 세계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현재 B루트의 아리아드네 또한 본래의 아리아드네에게 몸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도 내 몸으로 이 세계에 왔잖아. 아리아드네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조한율 : 아뇨, 그건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두 운영자 중 조금 더 경험이 쌓인 쪽이 대답했다.
조한율 : 아마 그 아리아드네 씨가 자신의 세계에 남은 마지막 생명체일 테니까요. 생명체가 떠난 세계는 완전히 소멸하는데, 상관없다면 모를까 아마 그게 싫어서 빙의란 형식을 택한 걸 거예요.
“그럼 결론은 나왔네.”
일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의 아리아드네 님이 몸의 주도권을 되찾고 지금의 아리아드네 님을 쫓아내면 해결되겠군.”
“하지만 문제는 본래의 아리아드네에게 어떻게 주도권을 돌려주느냐, 하는 거지.”
이우연이 좁혀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저런 동작은 루카스와 꼭 닮았다.
“소금이라도 뿌려야 한단 건가? 양태원, 무슨 방법이 있어?”
“그야 물론, 방법은 있어요. 소금으로는 무리지만.”
양태원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삼도천, 그러니까 ‘죽음의 길’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원한이 현세에 저주라는 형태로 구현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원한을 풀어 주면 된다는 거지.”
내 말에 양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그거예요. 제를 치르면 원혼의 방어벽에도 틈이 생길 테니, 그 틈을 타 심상 세계에 들어가면 원한을 풀 찬스가 반드시 있을 거예요.”
“제를 치르면 너한테 부담이 가는 건 아니고?”
“에이, 단군 신화의 청동검까지 있는걸요. 저주를 푸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하죠.”
양태원이 소매에 매단 청동검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이건 제 전매특허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약간 감회에 젖었다.
설마 이런,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돌파구가 보일 줄이야.
한라산 정상에서부터 이어진 묘한 인연이 꼭 나를 보호해 주는 것만 같았다.
“저주라니 이거, 꼭…… 그때 같네요.”
문득, 그렇게 말한 것은 이선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기라도 했는지 이선이 손으로 본인 입을 막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게요.”
생명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저주에 걸린 성.
아리아드네는 나와 함께 여행을 다니던 시절부터 항상 타인의 원망을 들어 주곤 했다.
원망이란 소망이 좌절되었기에 품는 미련이다.
그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법.
그걸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아리아드네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를 동정하고 사랑하는 법이고.
아리아드네가 그것을 내게 가르쳤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인간 모두를 그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신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걸 아리아드네는 신도 아닌 몸으로, 인간의 몸으로 이루려다가 실패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기에 기대하고, 좌절하고, 희망하고, 절망하고.
그리하여 지금 저렇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그 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차례다.
나는 창가 너머로 보이는 검은 기둥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이번에야말로…… 물레 바늘에 찔린 공주님을 깨우러 가야겠네요.”
유령성의 악몽은, 한 사람에게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