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75화
메시지를 보는 순간, 시야가 흐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클리어 조건이 대체 왜 이런 거지?
한 10초 정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던 것 같다. 살다 보면 몇 번쯤 겪어 보는, 그런 흔한 일 중 하나.
그러나 본 것이 믿어지지 않아 숨을 멈춘 것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게다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내 멍청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더 떴다.
- 운영자, ‘운명을 거스르는 자’와 플레이어, ‘강예나’와의 내기가 진행 중입니다.
- 승리 조건 : 세계를 멸망시킨 자를 죽이시오.
……왜 이 타이밍에 저 메시지가 뜬 건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메시지창 너머로 보이는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 또한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기 짝이 없을 얼굴을, 마치 그리워하던 것을 겨우 찾은 것처럼.
“성녀님?”
그러나,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아리아드네 쪽이 먼저였다. 아리아드네는 성기사의 부름에 정신이 든 듯 어깨를 움찔하더니, 이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두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정위치에서 대기하십시오.”
“그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내부의 경비는 강화하지 않아도 될까요?”
“적이 이미 침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소지창 사용 불가 마법진이 깨졌다면 외부보다는 차라리 내부를 지켜야…….”
“필요 없습니다.”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떨어졌다. 그 목소리는 성녀라기보다는 냉엄한 지휘관에 가까운 것이다.
“제가 누구인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에 금빛의 성력이 어렸다.
그래, 아리아드네는 대륙 제일의 성력을 가진 신관이다. 그 위명은 저 애가 신전에서 가출해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더 커졌다.
그런 아리아드네가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여긴 탓인지 기사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가장 신성한 여인, 방랑하는 자를 이끄는 인도자시여.”
그 거창한 호칭에 아리아드네의 곧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줄줄이 따라붙는 찬사에는 언제까지고 익숙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역시나, 내가 알고 있던 아리아드네의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 냉엄한 지휘관의 얼굴을 했다는 양, 아리아드네는 민망한 기색을 감추며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지금 대신전 내부에는 이미 결계가 활성화된 상태, 일반적인 호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대들이 할 일은 내부에 있지 않습니다.”
“성녀님, 그럼 이미 들어오신 외부의 손님은…….”
외부의 손님이란 것이 라인하르트를 핑계로 이 대신전에 들어온 나와 메이를 뜻하는 것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나와 메이가 서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병사가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움찔했다.
‘젠장, 던전 클리어 조건 때문에 너무 놀라서 굳었어.’
본래대로라면 병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곧장 대신전 내부로 잠입할 셈이었는데, 아리아드네의 등장으로 병사들의 혼란이 빠르게 가라앉은 데다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놀라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명백한 실책이었다.
만일 이대로 아리아드네가 병사들에게 우리를 쫓아내라는 명령을 내리기라도 한다면, 여기서 전투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망할.’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랬다간 큰 소란이 일어날 텐데.
만일 교황이 외부의 소란을 알아차리고 루카스를 더 깊은 곳에 가두거나 없애 버리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막 굳어 있던 머리를 돌리려고 했을 때였다.
청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사, 사소한 일이요?”
“네, 이런 종류의 공격은 꼭 근거리에서 일어났다고 단정할 순 없으니까요.”
아리아드네의 말에 일반 병사들은 납득하는 기색이었다만, 고참 성기사들 중 몇몇은 ‘과연 그게 맞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방금은 그냥 헛소리에 불과했다.
소지창 사용 불능의 권한쯤 되는 마법진이 깔려 있는데, 이런 정도의 대규모 마법진을 어떻게 원거리에서 사용 불가로 만든단 말인가.
파훼하려면 근거리까지 접근해 마법진을 이루는 코어를 부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대저(大抵) 이런 경우엔 발화의 내용보다도 발화자의 신뢰도에 극히 좌우되는 것이다.
어쩐지 권위 있는 목소리에 다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선동에 능숙하다.
아리아드네가 엄숙한 얼굴로 또 헛소리를 했다.
“그보다, 외부 결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거기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나를 따라오세요.”
겉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따져 보면 알맹이 따위는 하나도 없는 지시다.
불과 조금 전까지는 위치를 지키라면서.
“넵!”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아리아드네였다.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성녀에게 드러내 놓고 거역할 자는 없었다.
……신전의 저런 점도 싫다고 했지.
“저는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면 좋겠어요. 레나처럼요.”
“그럼 이쪽으로.”
지시를 내리며 아리아드네가 등을 돌렸다.
흰 신관복의 자락이 나풀거리며 멀어졌다.
그간 애달프게 만나고 싶어 했던 것도, 아리아드네의 운명을 알게 되어 심란했던 것도 우스울 정도로 찰나간의 스침이었으나.
아리아드네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병사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준 거로군.’
도대체 아리아드네가 나를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는 모르겠다.
신관은 영혼의 빛을 보고 내세까지 인도해 준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일까. 하기야 페트라 또한 영혼인 상태에서 아리아드네 곁에 머물렀다.
어쨌든 아리아드네쯤 되는 애가 현재 대신전 내에 발생한 이상 현상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신전을 보호하는 대신 나를 도와준 것은…….
‘아직은 되돌릴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희망이 떠올랐다.
페트라의 기억 속에서 본 아리아드네는 현 운영자인 교황의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두었다. 교황에게 더 이상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기에 스스로 운영자가 된 것이겠지.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아드네의 손에 타르토스는 멸망했으며…… 계속 나를 죽이고 싶어 하고, 타르토스를 한 번 더 멸망시키려고 하는 또 다른 운영자도 아리아드네라는 것은 이제 확정적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의 아리아드네는 시기상으로 추측해 보았을 때 아직 운영자가 아니다.
아까 헛소리를 늘어놓을 때 성하 운운한 것도 그렇고 아직은 교황이 건재하다고 보아도 되겠지.
게다가, 잠시 눈빛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알았다.
아리아드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애정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그 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아직 기회가 있다.
아리아드네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망할 클리어 조건 같으니.’
아리아드네를 죽이는 게 던전 클리어 조건이라고?
그런 걸 내가 하겠냐.
나는 아리아드네를 구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설령 그 애가 나를 죽일 생각이라고 한들, 그래도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리아드네를 죽이라니, 그딴 건 말도 안 된다.
친구를 죽여야 구할 수 있는 세계는 단언컨대 잘못됐다.
‘히든 루트가 있을 거야…… 있어야 해.’
시스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이제껏 그래 왔듯 파훼법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분명히 허점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용사님?”
문득, 손에 전해지는 온기가 있었다.
그제야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마치 한바탕 악몽에라도 시달린 것처럼.
“괜찮으세요?”
메이의 속삭임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여기에 멈추어 있을 때가 아니다.
목적을 잊지 말자.
족쇄처럼 여겨지는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자.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나는 고개를 흔들어 복잡한 심상을 떨쳐 냈다.
“……가자, 엘리사 메이 경.
멀어져 가는 아리아드네를 뒤로한 채, 나는 대신전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진정한 메인 퀘스트의 시작이었다.
* * *
대신전 내부는 정문의 물샐틈없는 감시가 우스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야말로 지나가는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어쩐지 숨이 막히는 느낌이네요.”
“신성력 농도가 짙어서 그래, 메이. 마법 적성이 있나 보네.”
신성력은 순리를 따르는 힘. 인간의 소망으로 순리를 거슬러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과는 상극이다. 그렇기에 마법 적성이 있으면 신성력의 진원지나 다름없는 대신전에서 갑갑함을 느낄 만도 했다.
물론,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법에 눈곱만큼의 소질도 없는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나와 메이는 조용히 대신전 내부를 탐색하며 나아갔다. 그러나 대신전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눈을 가리고 돌아다니는 꼴이라 탐색은 느렸다.
그도 그럴 게 대신전 내부는 철저히 비밀에 싸인 곳이었으니 정보 같은 게 전혀 없었다. 하나하나 직접 탐색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탐색을 진행할수록 무언가 이상했다.
“건물이 크긴 했는데…… 이렇게 끝도 없었나?”
아무리 나아가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루카스 정도의 능력자를 감금할 만한 시설이 대신전 내에 있다면, 가까워질수록 내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나아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끝이 없는 직선의 미로를 헤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고맙게도 계속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조한율의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조한율 : 이런. 예나 씨, 대신전 자체가 이미 운영자의 권한이 발동된 필드 안이었어요!
“뭐라고?”
조한율 : 지금 예나 씨가 보고 있는 시야랑 제가 맵핑한 지도가 달라요. 지금 눈앞에 지도 띄워 드릴게요.
조한율의 말대로였다.
나와 메이의 감각으로는 계속 전진하며 탐색했지만, 조한율의 표시를 보면 우리는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조한율 : 운영자 권한 중에 근거지 설정이 있거든요. 근거지 안에서는 운영자 권한 제한이 좀 풀려요. 저의 경우에는 선율 공방 길드 건물이 근거지라서 제작 스킬을 사용할 경우 성공 확률을 높이는 권한을 적용해 놨는데…… 그쪽 운영자는 종교인 클래스라 신성력을 극대화시켰나 봐요.
나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 말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즉…….
“……이 안에서는 운영자가 신성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거군.”
마법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신성력의 약점은 끝이 정해져 있는 고갈이다. 한 번 소모된 신성력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신전 안에서는 그런 단점조차 사라진 것이다.
메이가 숨이 막힌다고 느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신성력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방금 시야가 왜곡되었듯 환상 부여부터 자가 치유까지.
그런데 신성력의 소모조차 없다면 사실상 쓰러트릴 수 없는 언데드나 다름없는 것이다.
조한율 : 그뿐만이 아니에요. 다른 플레이어의 활동 권한도 엄청나게 제약을 건 구역이 있어요. 강제 익스트림 하드 모드로 플레이되는 구역이랄까.
“그딴 게 가능한 거야? 리스크는?”
조한율 : 운영자 리스크란 게 플레이어한테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간섭할 때 받는 건데, 이건 직접적인 간섭이라기보다는 주위 환경을 건드린 거라…… 딱히 리스크도 없을 것 같은데요? 플레이어용 하드 모드 던전을 구현시킨 것 정도니까. 머리 좋네요.
대신전 내부에 호위가 별로 없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 자체가 이미 운영자의 영역인 데다, 일반 플레이어들은 능력을 제한당하고 정작 본인은 신성력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니.
“불공평하기 짝이 없군.”
조한율 : 일단 시야부터 정상화해 둘게요.
파지직!
약간의 스파크와 함께, 시야가 일변했다.
도깨비 방망이라도 휘두른 건가.
온통 순백색이던 대신전 내부가 사라지고, 눈앞에는 거대하고 육중한 문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문은 닫혀 있지 않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건…….”
밑으로는 끝도 없이 뻗어 있는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계단의 끝에 있는 것은.
“미궁이군.”
높다란 벽으로 세워진 미궁이다.
실제 현실에 있는 공간이라고 하기보다는…….
조한율 : 우와아, 진짜 ‘본진’이라는 느낌이네요. 저 안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능력치 감소가 적용될 겁니다. 몬스터도 있는 것 같고, 현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던전에 가깝군요.
조한율의 설명을 굳이 듣지 않아도 문에 다가갈수록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랄까, 강제로 너프를 당하는 것 같다. 처음 한국에 돌아가 레벨 1의 육체로 깨어났을 때 이런 느낌이었던가.
근처에서조차 이 정도니 본격적으로 미궁에 입장하면 정말 레벨 1즈음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메이에게 설명이 필요할 듯했다.
“메이!”
“예?”
“이 앞에 루카스를 가둔 미궁이 존재해. 지금 네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조한율의 메시지를 볼 수 없는 메이에게는, 내게 조력자가 있다고 미리 전달해 둔 터라 메이는 곧장 납득했다.
“그렇군요. 어쩐지, 무언가 사지에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 듭니다.”
기특하기도 하지.
나는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었다.
“맞아. 여길 지나가면 능력까지 제한된다고 해.”
“용사님의 조력자분께서 도와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조한율 : 아쉽게도 그러네요. 이 신성력으로 움직이는 마법진이야말로 그쪽 운영자의 근거지 능력 중 핵심이라, 여기부터는 저도 재밍 정도로는 막을 수 없어요. 리스크를 각오한다면 모를까…….
“아니, 조력은 필요 없어.”
나는 단호히 말을 끊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해, 메이.”
내 말에 메이도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능력 저하를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
“아니, 그건 아니고.”
“……네?”
메이는 어리둥절해했지만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 마법진을 파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운영자는 그대로 권한 사용이 가능할 테니 이대로 여기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시스템상의 능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현 운영자와 마주치게 되면, 허무하게 죽는 결말밖에 기다리지 않는다.
저쪽은 중무장을 했는데 이쪽은 차, 포를 떼고 싸우다니 말도 안 되지.
그리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켠 후, 조한율에게 물었다.
“여기가 운영자 영역의 핵심이라면, 운영자는 지금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가?”
조한율 : 네, 분명히. 예나 씨를 보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고심하고 있을걸요. 외부에서 온 영혼이 그 세계의 육체에 깃들어 있고, 심지어 퀘스트까지 부여돼 있으니까요.
그래, 그거면 됐다.
이제부터 할 일은, 그 망할 운영자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챙!
나는 검집에서 파트너를 뽑아 들었다.
“좋아. 그럼, 이 거지 같은 구역의 코어부터 파훼하고 시작해 볼까.”
“네?!”
조한율 : 네에?!
메이와 조한율이 깜짝 놀랐다.
특히나 조한율은 메시지를 우다다 쏟아 냈다.
조한율 : 아무리 예나 씨 레벨이 80이라고 해도 그건 무리예요! 운영자 권한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구요. 지금 ‘혼돈의 용사’라서 이론상으로 신성력을 파훼 가능한 건 알지만, 아무래도 그걸로는 능력치가 부족하다니까요?!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누가 레벨이 고작 80이래?”
용사의 의지에 힘입어 성검으로 화한 파트너는, 압도적인 신성 앞에서도 그 위용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나는 검이 발하는 빛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세계에서 신성력이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신의 의지라 믿고 그 운명을 수행하는 것에서 얻는 힘이지.”
절대적인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한 부분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신전이 저지른 결과는 결코 용납할 수 없어.”
페트라의 기억 속에서 교황은 자신이 한 일을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말했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자신의 욕망에 빠져 죄를 저지른 황제 쪽이 인간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자신이 결정하고 저지른 일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신의 의지를 입에 담으며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죄를 면피하려는 작태는 추하고 비굴하다.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릴리스라는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욕망이 있는 이상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래, 이만한 권력을 얻었음에도 인간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욕망은 많은 것을 얻었음에도 오히려 더욱 자라나, 결국에는 이 세계를 집어삼켜 멸망으로 몰고 갔다.
교황이 말한, 더 큰 대의에 의해.
존재만으로 죽음을 흩뿌린다는 네크로맨서를 배척하고, 대륙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옵타티오마저 만들어 내고.
만 명을 살려야 하니 백 명을 죽이고.
대륙을 지킨다는 대의 아래 숱한 이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갔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것을 선이라 부르는 자도 있겠지.
현실이란 가혹하니까. 희생 없이 모두를 살리는 것 따위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검자루를 꽉 쥐었다.
“나는 이 욕망을 악이라 판정하겠다.”
그딴 건, 내가 인정하지 않겠다.
현실은 분명 가혹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길이 있었을 것이라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 대신 그 자리에 머무른 나태함은 악이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당신의 판정에 동의합니다.
- 성검이 보유한 특성, ‘악의 처단’이 발휘됩니다.
성검이 뿜어내는 빛이 확 치솟았다.
파트너는 단죄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애초에, 운명을 거스를 용기조차 없는 녀석들에게 이런 힘은 과하잖아.”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정해진 운명으로 치부하기에 내려진다는 그놈의 신성력……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다.
나는 몇 번이고 운명이 바뀌는 모습을 보아 왔다.
저 백록담 정상에서.
어느 깊은 숲속에서.
“용사님…….”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는 메이가 그 산증인이다.
그러니 신관이란 건, 정말이지 나와 맞지 않는 존재일 수밖에.
조한율 : 그, 그래도 안 돼요. 파훼하다 실패하면 그 반동은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진짜 죽는다고요!
현재 내 레벨은 80.
게다가 페트라의 몸을 빌린 상태라 어느 정도의 전력 손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조한율의 말대로 이 대륙 최강이라고 불릴 법한 교황의 마법진을 단숨에 타파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건 내 얘기다.
“여기서 내가 죽을 리가.”
-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장비합니다.
- 상태창이 갱신됩니다!
- 활성화 시간 00:10:00
용사를 기리는 망토는 내 영혼이 기억하고 있는 최상의 능력치를 잠시나마 구현하게 도와주는 아이템.
그리고 지금의 내 영혼은, 나 자신이 도달한 경지뿐 아니라…….
“두 세계 모두 구해 내.”
마침내 시스템상 최고 레벨에 다다른 또 다른 나의 능력치 또한 기억하고 있다.
등 뒤로 망토가 펄럭였다.
플레이어명 : 강예나
LV.100
특성 : 관철하는 아귀
클래스 : 혼돈의 용사
체력 : 9999
근력 : 5134
민첩 : 3812
마력 : 1250
스킬 :멸혼의 불꽃 lv.max 기사회생 lv. max 불굴의 의지-on
“이거라면 충분하겠지.”
이 힘을 빌어.
순리와 운명을 강제하려는 신성 따위, 인간의 의지로 베어 보이겠다.
나는, 눈앞의 미궁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