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72화
다음 날 아침.
“얼굴이 창백한데 괜찮으세요?”
식탁에 앉은 조한율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사실은 그다지 괜찮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던전 공략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로운 공략에 들어가기 바로 전날 페트라의 기억을 보았다는 것 정도일까.
만일 쉬기 전에 심기일전하겠답시고 페트라의 기억을 봤었다간 일주일 내내 쉬기는커녕 끙끙 앓기만 했을 것이다.
조한율이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혀를 찼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요?”
“그러게. 그래서 던전에 들어가도 되겠어?”
혼자 식탁에 그릇을 늘어놓고 있던 이우연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식사 준비를 할 때 거들려고 했지만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며 거절당한 참이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는 없어.”
이미 새로운 던전의 세팅도 끝났다.
나는 일주일을 쉬었다지만 조한율은 그간 바쁜 시간을 쪼개 새로운 운명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는 던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건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를 판이었다.
조한율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이틀 정도는 미뤄도 괜찮으니까요.”
“이틀 미룬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 괜찮아. 오히려 이틀 동안 더 악화될지도 몰라.”
차라리 타르토스에 들어가 사건을 해결하다 보면 조금쯤은 잊힐지도 모르겠지만, 쉰답시고 여기에 있다간 약간이라도 방심하는 사이 내가 본 페트라의 기억이…… 아리아드네의 모습이 악몽처럼 부상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일주일을 쉰 보람도 없이 반시체 상태가 되어 공략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조한율, 밥이나 먹어. 저 고집을 누가 꺾는다고.”
그러는 이우연 본인도 아침에 일어나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기겁한 주제에 모르는 척하기는.
그래도 마지막 만찬이 될지도 모른다는 명목으로 이렇게 식사를 차려 준 건 고마웠다.
부모님과 사이가 그렇고 그랬다 보니 딱히 집 밥이란 것에 별 의미를 두지는 않았었는데, 이후에 내가 타르토스에서 그리워할 게 있다면 아마 이우연의 요리가 될 듯싶었다.
‘심지어 맛있고.’
머리가 좋은 놈은 뭐든지 잘하는 건가?
약간 불공평함을 느끼게 된다.
“으으…… 요리까지 잘하다니 재수 없어.”
이우연이 끓인 된장찌개를 맛본 조한율도 비슷한 감상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대고 이우연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봤자 뭐해. 차였는데.”
“……엥? 또?”
“이우연, 너는 아직도 삐져 있냐…….”
엄밀히 따지자면 서로 찬 건데 왜 일방적으로 차인 척인가.
그리고 또는 뭐냐, 또는.
“삐진 게 아니라 담아 두고 있는 건데?”
“그걸 삐졌다고 하는 거 아냐?”
“아뇨, 보통 뒤끝이 있다고 하죠. 하여간 이우연 성깔 더러운 거 하나는…… 야!”
“넌 그만 처먹어.”
“처먹다니! 그게 고생하는 운영자에게 할 말이야?! 네가 개발자의 설움을 알아? 아냐고!”
마치 배신당한 가장처럼 조한율이 식탁을 탕탕 쳤다. 그 모습에 식탁 예절이 없다고 혀를 차는 이우연까지, 무슨 시트콤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둘이 저러는 걸 보고 있자니 짊어지고 있던 근심이 아주 약간은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이별이 슬플 정도로 괜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것을 들으면서 식사를 끝낸 후, 나는 세팅된 던전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조한율도 같이 갈 거다.
“이제 출발해?”
그리고, 이우연이 묘한 표정으로 나와 조한율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일주일간의 휴식이 끝난 후, 내가 곧장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할 때 이우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나눴고, 서로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도 납득했기에 그런 건지도.
어쨌든 이우연이 있을 곳은 한국이고…… 나는 친구를 구하러 떠나기로 했으니까.
잠시 걷는 길이 겹쳤을 뿐, 애초부터 목적지는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아쉽다고 해도 결국은 그런 것이다.
이우연이 나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잘…… 다녀와.”
왜 중간에 기묘한 침묵이 들어갔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나는 이우연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다녀올게.”
남은 운명의 씨앗은 하나.
그 때문에라도 적어도 한 번은 더 한국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나 없는 동안 공략 잘 부탁한다.”
내 말에 이우연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주 일만 떠맡기는구나?”
“널 믿으니까 맡기는 거야.”
“……잠깐만, 뭐라고? 한 번만 더 말…… 아, 강예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탕, 하고 닫혔다.
지켜보던 조한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죄 많은 사람 같으니…….”
뭐라는 거야?
* * *
이번에 조한율이 운명의 씨앗을 세팅한 던전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경기도 인근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농지 중 하나였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여기서 모니터링하면서 기다릴게요.”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캠핑카를 끌고 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번보다 캠핑카에 넣어 둔 식량이 많았다는 것 정도일까.
하긴 지난번 던전 공략은 한국 시간으로 일주일을 훌쩍 넘겼다. 조한율 혼자 처박혀 지내기에는 고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조한율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아 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마. 저쪽 운영자와 너무 대립하려 하지 말고.”
아리아드네가 운영자로서 허용된 것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자마자 손가락 다섯 개가 순식간에 비틀렸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었다.
운영자가 짊어지는 리스크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되니 솔직히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러자 조한율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예나 씨 반응을 보니…… 정말 운영자가 주변 인물 중에 있었나 보네요.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고 뭐고, 던전 공략 보상으로 기억을 엿본 만큼 이제 운영자가 아리아드네라는 것은 확정이다.
생각해 보면 유령성 때부터,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강남의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 때부터 조짐은 있었다.
- 당신은 세계를 멸망시킨 최후의 전령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아리아드네의 모습이었으니.
그땐 설마 아리아드네 본인이 그 메시지의 주인공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두 눈으로 직접 본 지금도 잘 믿기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야 물론, 교황을 죽이고 운영자 권한을 넘겨받는다는 선택을 한 아리아드네는 가혹한 입장에 처해 있기는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저 페트라를 과거로 돌려보냈을 뿐이다.
즉, 그때만 해도 세계 멸망을 기도(企圖)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그것도 페트라가 운명을 변화시키고 있는 타르토스를 다시금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는 걱정 마시고요.”
조한율이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예나 씨야말로 조심하세요. 위험할 것 같으면 도망치시고…… 라고 말해도 듣지 않으실 거죠?”
“응, 도망칠 생각은 없어.”
그럼에도 역시.
나는 아리아드네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정체까지 알게 된 이상 발목을 잡고 늘어져서라도 그 진의를 알아내고, 그리고 막아 보이겠다.
그리고 용사란 건 본래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바보 멍청이를 좋게 표현한 말 아니던가.
아니, 이쯤 되면 사실상 욕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기도 하고.
우우웅!
조한율이 건넨 검집에 담긴 파트너가 화려한 위용을 뽐내며 나를 격려했다.
조한율이 쓰게 웃으며 내 손을 놓아주었다.
“진짜…… 용사님의 주변인 롤은 최악이라니까요.”
“……미안?”
“사과하진 마시고요.”
등을 돌린 조한율은 제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그 눈에는 이제 본인에게만 보이는 모니터가 자리하고 있으리라.
“그래도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던전에 뛰어들었다.
Chapter 19. 미궁의 수감자
- 메인 퀘스트를 시작했습니다.
- 모든 장비가 해제되었습니다.
- 시스템이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를 재인식하였습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재입장을 환영합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능력치가 해당 인물보다 현저히 높아 능력치가 전이되지 않습니다.
- 던전 클리어 후 해당 인물의 기억을 일부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나는 곧장 거울을 꺼내 내 얼굴부터 확인했다.
역시, 이번에도 페트라의 얼굴이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였다. 애초에 페트라가 회귀하며 내가 운명에 끼어들 틈을 얻게 된 것이니 말이다.
다만 문제는 빙의한 시점과, 그리고 장소였다.
‘얼굴을 보면 아직 20대 초반 즈음인가. 지난번과 별 차이는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른 상황 파악부터 해야…….’
그런데, 내가 미처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이었다.
뺨에 강렬한 아픔이 스쳤다.
뻐억!
누군가가 주먹으로 내 뺨을 친 것이다.
‘또 이 패턴이야?’
이번에는 또 누가 페트라를 때리고 있는 건가.
반사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함께 고개를 돌려 폭력을 휘두른 놈이 누군지 보려고 했을 때.
뻐어억!
한 번 더 제대로 들어간 주먹 때문에 고개가 돌아갔다.
뼈가 시릴 정도로 아팠다. 상당한 능력치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뜬금없이 맞아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내가 잴 것 없이 주먹을 치켜들고 감각이 움직이는 대로 상대를 향해 내뻗으려던 순간.
“으응……?”
나는 멈칫하고야 말았다.
그러자 나를, 아니, 페트라를 호쾌하게 주먹으로 갈긴 여자가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아니, 이걸 맞으면 어떡해? 피해야지!”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나 했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갈기려던 주먹을 멈춘 채 눈앞의 여자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정갈한 기사로서의 차림에 익숙한 녹음의 눈동자.
그러니까, 엘리사 메이었다.
……메이가 페트라를 패고 있었다.
하마터면 너희들 싸웠냐고 허리에 손을 올리고 혼낼 뻔했지만, 나는 곧 메이의 표정을 보고서 상황을 파악했다.
“페트라, 왜 그래?”
뭔지는 몰라도 여기서 메이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해야 했던 걸까?
페트라의 몸을 빌린 것은 이게 3번째지만 이런 패턴은 또 처음이었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메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메이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일단은 뭔진 몰라도 피해 주었다.
그러자 메이의 주먹이 빗나간 탓에 저 위에 있던 무언가에 부딪혀 집기들이 와장창 떨어져 깨졌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내가 있던 곳이 상당히 호화로운 장식품들로 꾸며진 성의 복도라는 것을 알았다.
귀하게 금실로 수놓인 붉은 카펫 위에 도자기의 파편이 흩어졌다.
그러자 곧…….
“무슨 일이냐!”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인가!”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들이었다.
‘저 휘장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내가 달려온 기사들과 엘리사 메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메이가 달려온 기사들을 향해 코웃음을 치는 것이 보였다.
“뭘 이렇게 다 같이 달려옵니까, 근위대장. 왕성에는 인원이 남아도는 모양입니다?”
충격적이었다.
뭐가 충격적이냐면 엘리사 메이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비꼬고 있다는 것이.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아직도 뇌리에는 어릴 때 모습이 생생한데, 주워 온 새끼 강아지가 어느새 범이 되어 남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자 그런 엘리사 메이를 향해 근위대장이라는 자가 언성을 높였다.
“메이 경! 신성한 왕성에서 이 무슨 소란인가! 그대들은 기사로서의 명예도 없나!”
“명예까지 들먹이시다니.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인데 좀 싸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엘리사 메이가 복도에 놓여 있던 집기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주군께서 부재하는지라 제 혈기가 미처 눌러지지 않는군요. 아, 언제 돌아오시려나.”
쨍그랑!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도자기가 와장창 깨졌다. 메이의 행패에 기사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저, 저년이! 미친 거냐!”
“아, 지금 내가 눈 돌아가지 않고 배길 상황입니까? 이깟 도자기가 뭘 어쨌다고.”
쾅!
메이가 복도에 걸린 장식품에 대고 한 번 더 발길질을 했다.
여전히 상황은 파악이 되지 않았다만 누가 봐도 악역은 이쪽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
와장창!
“페트라 경! 자네까지!”
내가 메이를 따라 발길질로 아직 멀쩡한 장식품을 부숴 버리자 근위대장이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픽 웃어 보였다.
뭔지는 몰라도 저 아이가 괜한 짓을 할 리 없고,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부리는 난장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메이한테 장단을 맞춰야겠지.
그리고 깽판은 내 전문이다.
“신성한 왕성은 개뿔이.”
콰장창!
발길질 한 번에 복도의 벽에 큰 균열이 일었다.
그러자 기사들은 물론, 메이까지 숨을 들이켜는 것이 들렸다.
왕성에서 왕을 모욕하는 건 역시 너무했나?
‘뭐, 내 알 바인가.’
상황이 완전히 파악되지는 않았다만 대충 예상이 가기는 했다.
엘리사 메이와 페트라의 나이는 지난번에 내가 던전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차이 나지 않았다.
즉 루카스의 성에서 추기경이 발광한 후로부터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은 상황이란 말이다.
그리고 루카스의 형, 즉 현재의 왕과 신전이 손을 잡고 있으며, 루카스를 눈엣가시로 여기면서 대립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으니…….
‘왕성에 쳐들어와서 깽판을 쳐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거겠지.’
솔직히 이대로 왕좌에 쳐들어가 목을 따는 것도 해 볼 만했다.
페트라의 몸이라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가면을 쓰고 목을 따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러면 루카스가 어떻게든 뒤처리를 해 주겠지. 무진장 혼나겠지만 뭐…… 그것도 왕자님이 나를 오냐오냐 키운 탓이다.
“막아 볼 수 있으면 막아 보든가.”
“뭐, 뭐, 뭐……!”
내가 기세를 뿜어내며 접근하자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으로 근위대장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약간의 너프는 먹었지만 현재 내 레벨은 80.
만렙보다야 못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다다르기 힘든 경지다. 아무리 근위대장이라고 해 보았자 한곳에 매여 있는 만큼 나처럼 많은 던전을 공략하긴 어려웠을 터.
‘기껏해야 레벨 50대일까.’
그러니 현재 이곳에 지금의 내 기세를 감당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다고 보아야 했다.
내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기사들에게 다가가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가 계신 곳에서 이게 다 무슨 소란이지?”
시끄러운 귀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복도 저편에서 한 어린 소년이 나타났다. 그 뒤로는 제법 많은 시종들이 딸려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껏해야 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나를 보고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질 않느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저 자식. 어디선가…….
마침 타이밍이 좋게도 내게 위압당해 퍼렇게 질려 있던 근위대장이 당황하며 어린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라, 라인하르트 공자님. 이것은…….”
그러나 이름까지 들은 것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누구인지를 모르겠다.
대체 어디서 봤더라?
하지만 나에게는 다행히도,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 아이템, ‘금석맹약의 서’가 발동합니다.
- 계약자 : 강예나, 라인하르트(임시)
- 해당 아이템은 계약자가 계약을 위반하였을 때 계약자에게 정해진 페널티를 부과합니다.
- 해당 아이템에 새겨진 페널티는 ‘죽음’입니다.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왜 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