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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69화 (270/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69화

들어 보니 이선과 김숙자 교수가 선율 공방에 들른 건 정말 별거 아닌 이유였다.

“의뢰했던 마력 증폭 반지의 제작 과정에서 사용자의 마력 각인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는데, 그때 마침 교수님을 뵙고 있었거든요. 가봐야 한다고 하니 교수님이 태워 주신다길래 같이 왔어요.”

“나이 들면 남는 게 시간이지.”

저건 썰렁한 농담인가? 김숙자 교수도 대한민국에서 바쁜 걸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텐데.

여하튼 김숙자 교수가 이선을 제자라고 생각하며 아낀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적인 시간을 내서 만날 정도로 친근한 사이인 것은 몰랐다.

대학원생과 교수가 원래 저렇게 지내던가?

“공략도 아닌데 이렇게 넷이 우연히 마주치다니 별일이로군.”

“그러게 말이에요. 랭킹 2위 빼고 5위까지 한자리에 모였네요. 시간만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조한율이 아쉬운 눈길로 이선과 김숙자 교수를 번갈아 보았다. 운영자 입장에서 아끼는 플레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밥이라도 한 끼 사 주고 싶다는 마음이 역력해 보였다.

“진짜 오늘은 너무 바빠서요.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교수님, 이선 헌터.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지.”

“네, 조한율 헌터도 수고하세요! 아, 그럼 예나 씨는요? 예나 씨도 오늘 바쁘신가요?”

“아뇨.”

“잘됐다!”

이선 헌터가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흔한 기회도 아닌데 셋이 함께 차라도 어때요? 괜찮으시죠, 교수님?”

“나야 당연히 괜찮지. 강예나 헌터는?”

“저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바람이나 쐬려고 하던 차라.”

농담은 썰렁해도 둘 다 반가운 사람들인 데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사실 쉰다고 해도 혼자서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그럼 뭘 하지. 음…… 아직 저녁 먹기에는 이르고…….”

나와 김숙자 교수가 멀뚱히 서 있는 동안 잠시 고민하던 이선 헌터가 묘안을 내놓았다.

“아, 여기 여의도라 한강 공원이 가깝잖아요. 그럼 맥주 사서 한강 공원 산책은 어때요? 평일 낮이라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그거 좋네.”

선율 공방의 펜트하우스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만큼 한강 공원까지는 걸어서 가기 충분한 거리였다.

그렇게 한번 목적지를 정하니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우리는 여의도 한강 공원 편의점에서 적당히 맥주와 걸어 다니며 먹을 수 있을 만한 주전부리를 샀다.

참고로 결제는 김숙자 교수의 카드로 했다.

한사코 사양해도 김숙자 교수가 결제하겠다고 하기에 그냥 두었더니, 교수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주차비 폭탄이 나오면 할부라도 해 달라고 조한율 헌터에게 사정이라도 해야겠군.”

목적이 산책이었던 만큼 김숙자 교수의 차는 선율 공방 건물 지하 주차장에 대 놓은 상태이기는 했다.

다만 김숙자 교수쯤 되는 인물이 주차비가 얼마쯤 나오든 곤란한 일은 없을 테니 저건 농담이랍시고 한 것일 텐데…….

“……교수님, 썰렁한 농담을 좋아하시는군요.”

정말이지 의외였다.

항상 발목까지 내려오는 까만 가죽 코트를 입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느와르 영화의 조연으로 나올 법한 이지적이고 예민한 인상이라 전혀 상상하지 못했는데, 사적인 대화는 의외로 썰렁하다.

“그런가? 다들 좋아하던데.”

계산을 마치고 핫바부터 뜯은 김숙자 교수가 내 말에 어리둥절한 듯 눈을 껌벅였다.

“썰렁하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군.”

그 한마디에서 김숙자 교수 밑에서 구르고 있을 대학원생들의 사회생활 고충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이선이 큰 소리로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아하하! 무슨 소리세요, 교수님. 저는 아주 재밌어요! 주차비를 할부로! 무려 교수님께서!”

“그러니? 다행이구나.”

“예나 씨도 차암, 재밌으면서 괜히 그런다~.”

“아뇨, 진짜 재미 없…….”

이선 헌터가 김숙자 교수의 사각지대에서 내 등을 마구 찔렀다. 아무래도 김숙자 교수의 농담 센스가 최악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저런, 아무리 상대가 스승이라고 해도 할 말은 하고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텐데.

“와, 맥주 진짜 맛있다.”

한참 내 등을 찌르며 눈치를 주던 이선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고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늘따라 날씨도 엄청 좋네요. 휴가 진짜 너무 좋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 어? 이건 사망 플래그인가?”

이선 헌터도 평소보다 들뜬 모습이었다.

하기야…… 평소라고 해도 난 이선 헌터의 평소 모습을 모른다. 거의 대부분 던전 내부나 전투 상황에서만 마주쳤기에, 내가 아는 이선 헌터의 모습은 오히려 비일상적이라고 해야 맞겠지.

어쨌든 이선의 말대로 기분이 좋긴 했다.

시원한 맥주는 맛있었고, 하늘은 맑고 높았으며, 한낮의 한상은 햇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걸어 다니면서 수다를 떨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예나 씨랑 밥 한번 먹기 참 힘들었는데 기회가 이렇게 오네요. 역시 휴가가 최고라니까.”

“그러게요. 진작 이렇게 한번 만날 걸 그랬어요.”

“에이, 앞으로도 시간은 많은걸요, 뭐.”

이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적으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바로 대답하질 못하자 이선이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나를 살폈다.

약간의 기묘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김숙자 교수가 흘끗 내게 눈길을 주었지만, 딱히 무어라 첨언하는 대신 고맙게도 주제를 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강예나 헌터. 저번에 영원 길드 검사들이랑 대련했다고 들었네. 그것도 며칠 동안이나.”

화제를 돌려 준 것에 감사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었죠. 이번 던전 공략 때 꽤 활약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지. 게다가 대형 공략에서는 보통 20레벨대에서 사망자가 나오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없었으니. 고작 몇 번의 대련 경험 유무로 이렇게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다니, 흥미로워.”

“뭐, 작정하고 죽일 것처럼 두들겨 팼으니까요.”

레벨 차이가 압도적으로 큰 내게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았으니 검술 실력의 향상도 향상이지만, 보스 몬스터 앞에서 겁에 질려 손이 굳거나 긴장해 저지르는 실수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만으로도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서는 살아남는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어지기에 충분하다.

“곧 검사 클래스 훈련용 VR도 나올 테니까 더 좋아질 겁니다.”

“아, 그 훈련용 VR 대박이던데요? 엄청나게 살벌하고, 현실감 넘치고. 저 심지어 대련하다가 한 번 죽었어요.”

나는 눈을 껌벅였다.

그야 조한율이 훈련용 VR 개발을 하면서 다른 헌터들에게도 테스트를 시켜 보며 업데이트하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정부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먼저 공개될 예정이었던 터라 공무원 헌터들로 먼저 시험해 볼 것까지도 예상 범위 내였으나…….

“이선 씨는 마법사인데 왜 테스트를……?”

“음, 공무원이란 필요하면 지원을 가야 하는 입장이라서요? 클래스 같은 건 별로 상관이 없답니다.”

현실적으로 슬픈 이야기가 나왔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랭킹 상위권들은 다들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물론 랭킹이란 게 단순 레벨이 아니라 업적치에 따라 매겨진 탓도 있겠지만.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궁금해진 차에 나는 말을 꺼냈다.

“이선 헌터는 왜 공무직에 머무르는 겁니까?”

“네?”

“이선 헌터 정도라면 어느 길드에서건 환영받을 텐데요.”

진언까지 깨우친 마법사이자 랭킹 4위의 헌터, 이선을 영입하려 들지 않는다면 미친 짓일 것이다.

게다가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실력 있는 헌터 중에서 드물게도 온화하고 공략원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책임감은 물론, 다른 헌터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인물이 아닌가.

여러 헌터들이 모이는 대형 공략 때는 필수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이우연에게 들은 바로는 공무원 헌터로서도 나름 이점은 있었다. 공략 시 사용하는 아이템이나 포션 지원이라든가, 세금 면제라든가.

하지만 그 정도는 이선 헌터가 어느 길드에 가더라도 지원받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들어 보면 공무원 헌터로서 이선이 하는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애초에 첫 만남이 헌터 스토어에서 아이템 감정을 하다가 만났으니 말 다한 셈이다.

“아, 그런 말 많이 듣긴 해요.’

하지만 이선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냥 제 신념의 문제예요. 저는 이렇게 강대한 힘은 개인의 양심보다는 국가의 법 아래에 묶이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예?”

“음, 우리는 저런 빌딩 하나쯤은 이제 쉽게 파괴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헌터들에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걸 모두가 알죠.”

이선이 여의도의 상징적인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볍게 말했다. 가벼운 어투치고는 그냥 넘기기 힘든 내용이었다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이라는 건 너무 쉽게 악용되고요. 그래서 전 최대한 공공 서비스 영역에 헌터들이 머물러야 한다고 봤어요. 전 인간의 자제력을 딱히 믿지 않거든요. 저 자신을 포함해서.”

어느 날 너무 피곤해서.

혹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또는 마지막 한 방울로 둑이 넘쳐흐르듯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전 몬스터보다도 헌터들이 더 무서워요.”

하긴, 괜히 사자(死者)보다 산 자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헌터 집단이 자제력을 잃고 이익을 좇아 날뛰기 시작하는 순간, 유지되고 있던 사회의 질서는 금세 붕괴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이선 헌터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제가 꼰대…… 김성연 길드장 같은 인간을 싫어하는 거예요. 능력에 따라 돈 버는 게 뭐가 나쁘냐느니, 헌터들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며 마석 거래 세금 면제해 달라고 X랄하고, 공무원은 패배자니 정부의 노예니 하며 개무시하고! 거기다 인터넷에선 공산주의가 어쩌고 지껄이면서 정작 던전 브레이크 터지면 공무원 헌터는 뭘 하냐고 욕하고, 그러면서 본인들은 어떻게든 던전 공략에서 빠지려고 발악을 어찌나 하는지…… 죄송합니다, 교수님.”

“괜찮아.”

“감사합니다. 아니, 그러는 본인들도 의료 보험 혜택은 잘만 받으면서! 진짜 이기적인 새끼들만 모였다니까요?!”

콧김이 씩씩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이선 헌터가 그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김성연 길드장이 마침 이 여의도에 있는 마석 던전에서 큰 사고를 치긴 했지.

사람은 다면적이기에 김성연을 딱 잘라 악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인 이득이 되는 일에 약삭빠른 것은 사실이다.

이선이 그런 종류의 인간을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 둘 다 나름대로 철학이 있긴 하군.’

김성연 헌터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길드를 운영하고 있기는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이선 헌터 편에 마음이 기울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이선 헌터가 저렇게 대놓고 인간을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건 의외였다.

유령성 던전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동료들을 지키던 인상이 강하게 남아서인지, 어딘가 성인군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선 헌터가 그런 생각으로 일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선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공무원으로 일하다 보면 사람에게 실망할 일이 워낙 많아서요. 아, 세상 사람들이 다 예나 씨 같으면 좋을 텐데!”

“글쎄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시스템이 없다면 전 그냥 일반 소시민으로 살 것 같은데요.”

이선 헌터처럼 사회봉사 같은 건 딱히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딱히 개인적 욕심 없고, 하지만 책임감은 강하고…… 예나 씨, 혹시 정치할 생각은 없어요? 20년 후쯤엔 가능할지도.”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다.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선이 어느새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겼다.

“물론 국가 기관이 부패하면 그때는 공무원도 다시 생각해 보든가, 아니면 구조 자체를 개혁해야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이선이 씩 웃었다.

“그래도 아직은 공무원인 게 나은 것 같아요.”

그때까지 이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숙자 교수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런 말할 거면 박사 과정 밟으렴, 선아. 다음 학기에 바로 받아 주마.”

옛 지도 교수의 말에 이선은 자신이 구긴 맥주 캔처럼 쭈그러들었다.

“아뇨, 아뇨! 요새 일이 너무 바빠서 박사는 도저히 못 할 것 같아요, 교수니임…… 아, 맞다! 예나 씨.”

이선 헌터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예나 씨는 정부 소집 회의 때 부재이긴 했지만…… 들으셨죠? 곧 서버가 통합될 거라는 이야기.”

듣고 자시고, 그 정보를 한국에 물어다 준 게 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죠. 그래서 훈련용 VR 제작에도 협력한 거예요.”

“아,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나라에서도 지원을 늘린다고 하니 한 3, 4년 정도면 성과가 나오겠죠?”

“그러길 바랍니다.”

통합 서버가 된다면 우리가 그때 보았던 멸망한 한국의 모습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B루트의 한국이 어째서 멸망했는지 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아, 예나 씨. 그것도 알아요? 정부 아카데미의 검사 클래스 지원 경쟁률이 빡세진 거. 요새 예나 씨 공략 영상이 알고리즘 타고 다시 뜨고 있거든요. 지원자들이 방랑하는 구도자 같은 검사처럼 되고 싶다고 한대요.”

김숙자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검사 중엔 롤 모델이라고 할 법한 이가 없었으니 말이야. 롤 모델의 유무는 중요하지.”

“캬, 십 년쯤 지나면 전설의 검황이나 검제, 검성쯤으로 불리는 거 아니에요?”

“……그런 이름은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은데요.”

요새 인터넷에서 방랑하는 구도자님 소리 듣는 것도 민망한데.

그렇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어느새 맥주가 다 떨어졌다.

“앗, 제가 맥주 더 사 올게요. 두 분은 여기 앉아 계세요.”

휴가라 술이 더 당기는 건지, 이선 헌터가 잽싸게 저 멀리 보이는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나는 김숙자 교수와 함께 벤치에 남겨졌다.

“…….”

“…….”

분위기를 융화시키는 역할을 하던 이선이 갑자기 사라지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교수님이나 나나 딱히 살갑지는 못한 성격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나는 말없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김숙자 교수님이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뜻밖의 화제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네?”

“그래, 왜 그러지? 선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들었네만.”

김숙자 교수가 말하는 목표란 뻔했다.

“이우연이 말했습니까?”

“그래, 불쾌했다면 내가 사과하지. 내가 캐물어 보았던 거야. 던전을 공략하는 이우연 헌터의 얼굴이 워낙 안 좋아서 강예나 헌터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거든.”

“……그랬군요.”

아까 내가 이선 헌터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 교수님이 날 보는 시선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뭐, 교수님이야 내가 던전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갔었다는 것을 이우연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고…… 내 입으로 직접 저쪽 세계를 우선시하겠다고 말했으니 상관없기는 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고민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우연 말대로 어차피 쉬는 김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일상을 보내는 순간에도, 조금만 틈이 생기면 아리아드네가 떠올라서.

하지만 이런 건 이우연에게도, 조한율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예정된 이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앎에도,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려 애쓰는 사람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김숙자 교수가 까칠한 얼굴로 말했다.

“고민이 있다면 들어 줄 수 있네만.”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교수님이요?”

“그래, 어떤 고민은 그냥 털어놓는 것만으로 조금 가벼워질 때가 있거든.”

어쩌면 그저 체면치레나 사회적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털어놓아 봤자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고.

“…….”

그렇지만 김숙자 교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냉정하고 날카롭지만 딱히 가식도 없는 눈빛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꺼내 놓았다.

둑 안에 가두어 놓았던 물이 넘친 것처럼.

“……구하고 싶은 친구가 있어요. 제가 최악이었던 시기에 다시 제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에요.”

“그렇군.”

“그 앨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 그러게, 모른 채 살라고 했잖아.

“어쩌면…… 그 친구를 구할 수 없을지도, 아니, 본인이 그걸 바라지 않나? 하아, 잘 모르겠네요.”

- 다시는 이 세계에 돌아오지 마라.

그게 정말로 아리아드네라면.

이번 던전에서 일리아스를 보고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신전에게, 그리고 자신들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해 세상을 포기했던 일리아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는?

아리아드네는 신전의 성녀이자 고귀한 신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신념이 항상 신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전이 정치적 입장을 내세울 때마다 아리아드네는 정면으로 맞서기가 일쑤였다.

그런 애가 교황이 되겠다며 신전 내 정치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십 년이 넘게 흘렀고, 아리아드네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본 것은 루카스의 성이 짓밟혀 죽어 가는 모습이었다.

물론 다른 친구들도 죽은 지 오래였고.

그 모습을 본 아리아드네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연, 거센 풍랑 앞에서 꺾이지 않고 올곧게 나아갔을까.

‘그렇게 믿는다면 그건 내 이기심이지.’

사람은 생물이고, 변화한다.

누구든 상처 입고 꺾일 수 있다.

내가 아는 아리아드네는 누구보다도 강건하고 꼿꼿했으나 그렇다고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리아스는 나 없이 10년을 보냈다.

심지어 아리아드네가 견뎌야 했던 시간은 더욱 길었다.

그래서 만일 아리아드네가 일리아스처럼 세상에 실망했다면.

그런 아리아드네가 운영자가 되어 페트라처럼 시간을 넘어 회귀했고, 결국 다시 타르토스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모르겠다.

“이제는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두렵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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