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58화
“그래서, 나를 기절시킨 동안 추기경을 협박했다?”
“그…… 그게, 괜히 네가 나서면 신전이랑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니까…… 너는 슬쩍 빼 두려고 했지. 그래서 계속 가면도 잘 쓰고 있었어. 페트라 신분이 노출될 일은 절대 없다니까.
“그래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루카스가 위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가리켰다.
“그게 대체 왜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로 연결되는 거지?”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이 백 개쯤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전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불러온 게 맞았으니까.
“……그, 그래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태야.”
본래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한 번 시작되면 특정 구역에 투명한 막이 씌워지면서, 3차 브레이크가 지나갈 때까지 해당 구역에서 나갈 수 없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까지 10:37:45
아직 돌발성 던브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
나의 경우는 이 구역을 벗어날 수 없게 설정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변명에도 루카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 렇지?”
사람들이야 대피시킬 수 있어도, 그래 봤자 내가 있던 성벽을 중심으로 내성까지 모두 몬스터의 출현 범위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만일 돌발성 던브 클리어에 실패하게 되면 그 몬스터들은 던브가 지나가더라도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러니까 어차피 깔끔하게 클리어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루카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할 말이 있을 텐데?”
“……미안합니다?”
“또?”
“클리어하는 걸 도와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왜 계속 의문형으로 말하는 거지? 그리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을 대체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군. 혼자서 그렇게 폭주하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 그럼 네가 추기경을 뭐 어떻게 할 건데? 성기사 신변은 어차피 신전에 넘겨야 하는데, 저 새끼도 그걸 알고…….”
나는 방구석에 묶어서 대충 굴려 놓은 추기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추기경은 돌발성 던브 메시지가 뜬 이후로 실성한 채 계속 미친 것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광인의 모습이었다.
“성문 앞에서 같잖은 짓을 하고 있었다니까. 어떻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뻔히 보였는데 계속 그렇게 뒀다간……!”
또 어떻게 될지 뻔한데, 그렇게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좋지 않은 일을 괜히 입에 올렸다가 현실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루카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말을 아끼는 게 낫겠군……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시켜야겠어.”
“어? 어어?”
나는 당황하며 따라 일어섰다.
“이게 끝이야?”
솔직히 한소리 더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와 말다툼할 시간이 아깝다. 어차피 벌어진 일을 어쩌겠나. 게다가…….”
루카스가 눈을 빛냈다.
“추기경 요하임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단으로 몰린 데다 신전 측이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다는 증거까지. 이 던전 브레이크만 끝나면 이걸 증거로 신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다.”
하기야, 추기경쯤 되는 작자가 사람들 앞에서 성력을 파훼당한 것은 꽤 큰 사건이었다. 어쨌든 신전의 권위는 그 신성함에서 비롯되는, 사람들이 신전을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기에 나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성검으로 성력을 파훼하면서, 그 권위에 완전히 손상이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신전에 운영자가 있으니만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했어. 사람들을 대피시킬 시간은 벌었으니 이 정도면 감수할 만해. 다만…….”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째서 발생 시간이 지연된 거냐?”
그건 확실히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조한율도 루카스와 같은 의문을 던졌었다.
조한율 : 그런데 이상한 게, 저 같으면 어차피 이런 식으로 살인멸구할 거라면 굳이 던브 발생 시간을 지연시키진 않을 것 같거든요? 지연된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불면 끝이니까.
조한율 : 그쪽 운영자가 새삼 바보가 된 게 아니라면…… 제가 떠올린 가능성은 한 가지 더 있어요.
나는 조한율의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만약 현재 타르토스 대륙에 운영자가 한 명이 아니라면?”
“한 명이 아니라고?”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교황이 운영자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건가?”
“……일단 그런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만 알아 둬. 확실한 것도 아니고, 돌발성 던브 처리가 먼저니까.”
그 말에 루카스가 내 눈을 직시했다.
속을 훤히 들여다볼 것 같은 시선에 나는 고개를 미묘하게 틀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조한율의 말도 그저 가능성에 불과했다.
“그보다 던브 준비가 먼저야. 너는 동원 가능한 병력이나 준비해. 가솔들도 챙겨야 하니 할 일 많겠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크.
루카스가 정말 열받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다음으로 찾아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 * *
“나도 시스템 메시지는 봤어.”
방에서 홀로 쉬고 있던 일리아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주 잠깐 눈을 뗀 것뿐인데 그사이에 아주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구나.”
“사람을 무슨 사고뭉치처럼…….”
“다짜고짜 추기경을 끌고 가서 패는 건 사고뭉치가 맞지. 뭐, 속은 시원하지만.”
일리아스는 보고 있던 책을 탁, 하고 덮었다.
“어차피 나나 루카스 님이 있으니 레나 너도 그걸 믿고 막 나간 거 아니야?”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긴 했다.
현재 레벨이 80이 된 나부터 시작해 루카스나 일리아스가 이 성에 있는 이상, 사실 어떤 사고가 터지더라도 어지간해선 모두 대응이 가능한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이 두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을 리도 없고.
“당연히 도와줄 거…… 악!”
“뻔뻔함이 늘었네, 아주.”
일리아스가 볼을 세게 꼬집었다가 놔주었다.
그래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까지 07:57:12
“앞으로 8시간이라…… 사람들이 대피하기에 딱 괜찮은 시간이네. 그걸 의도한 걸까? 참 이상하네. 정보 좀 새어 나갔다고 던전을 터트리는 녀석들이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일리아스는 창문 밖으로 성을 내려다보았다.
창문 틈으로 보이는 밖에서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성민들은 짐을 싸서 정신없이 대피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대피를 유도하는 동시에 기사의 지시를 받아 몬스터 대비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미리 설치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간 던전을 많이 경험해 본 만큼 이 성 또한 던전 브레이크 대책이 상당히 잘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들 갑작스러운 시스템 메시지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제법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피해는 크지 않게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아, 레나. 난 딱히 이곳 사람들의 피해를 걱정한 건 아냐.”
일리아스가 웃음기를 띤 채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나. 나는 솔직히 이 성 사람들이 죽건 말건 상관없어.”
- 메인 퀘스트 클리어 조건 : ‘일리아스’를 설득하시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다.
메인 퀘스트 클리어 조건은, 여전히 떠올라 있었으니까.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신경 쓰는 사람은 레나 너 하나뿐이야.”
* * *
-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까지 00:47:12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대략 40분 전.
다행히도 얼추 준비가 끝났다.
다만…….
“…….”
나는 일리아스와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엄청나게 어색했다.
“…….”
일리아스는 말없이 언데드 병사들을 점검하고 있었고, 루카스는 던브에 대비해 배치한 기사와 병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동안 이제까지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것도 그랬다.
저 두 사람의 문제는 알리시아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용사면 뭐하냐. 친구들 화해 하나 못 시키는데.”
조한율 : 에이, 그냥 용사도 아니고 혼돈의 용사시잖아요? 엄청나게 히든 클래스인데.
마침 손이 비어 있었는지 조한율이 위로하듯 메시지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별반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조한율 :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곧 그쪽에서 튕겨 나갈 거란 소리는 안 하셔도 되나요? 대충 시간 보면 던브 끝날 즈음에 분명…….
“……그거 진짜 어떻게 안 될까?”
조한율 : 음, 저도 진짜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말이죠…….
그랬다.
기껏 운영자와 거래까지 하는 꼼수를 부려 시간을 연장했으나, 조한율의 말에 따르면 결국 내 몸이 아닌 이상 언제까지고 이쪽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모양이다.
조한율 : 운영자와 거래를 했다고요?! 하아…… 그래도 현재 빙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아마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더 버티려나? 그 이후에는 튕겨 나갈 거예요.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것도 페트라와 내 영혼의 파장이 상당히 잘 맞아서 생긴 일이라고 했다.
시간이 더 있다면 나도 대륙을 쥐 잡듯이 뒤져서라도 어떻게든 알리시아를 찾아내겠지만…….
그게 불가능했다.
나는 옆에서 입을 다물고 언데드 병사들을 점검하고 있는 일리아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온한 척하고 있지만 얼굴에는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 있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렇지만 그렇게 다짐한 것이 너무나 우스울 정도로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갔고, 그사이에 일어난 일은 나 혼자서는 어쩔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 세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 것도 내가 아니라 페트라가 한 일이고, 나는 그런 페트라의 몸을 빌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나, 이번 던전에 들어와서 아무것도 못 했어.”
나름대로 일리아스를 구하려고도 해 보았고, 루카스도 만났고, 성기사나 추기경을 두들겨 패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저 내 속만 시원해졌을 뿐이다.
운명을 바꿀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몬스터와 싸우는 것보다 친구 하나 설득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우우웅!
옆구리에 찬 검이 나를 위로하듯 몸을 떨었지만,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알리시아 보고 싶다.”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내 혼잣말에 일리아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좀. 내가 너무 무력하단 생각이 들어서…….”
“지나가던 알리시아가 들어도 웃을 소리를 하고 있네.”
일리아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어린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레나 네가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잖아.”
“이런, 언제부터 우리 레나가 이렇게 노력을 폄하하고 결과만 중시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잘못 키웠나?”
“네가 언제 날 키웠냐?”
“……알리시아 일은 네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레나.”
일리아스가 고개를 돌려 성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죄다 빠져나간 마을에는 언데드 병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공기가 언데드가 뿜어내는 사기로 차가워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네가 아니었더라면 알리시아는 어차피 아이들을 구하려다가 그 숲속에서 알버트 손에 죽었을 거야.”
“그건…….”
“하지만 기적처럼 네가 나타났지. 그래서 알리시아는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어.”
“무슨 빚?”
“어릴 적 우리처럼 고통받는 다른 아이들에게.”
일리아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난 가끔 내 동생의 사고 회로가 이해가 가지 않더라고. 그래, 나나 알리시아나 운이 좋은 건 사실이지. 배척받아 마땅한 인간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다니.”
“야, 무슨 말을 그렇게…….”
“그렇지만 그건 그뿐이야. 나는 이 세상에 빚이 없어.”
갈색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걷어 낼 수 없는 그림자가 자리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동생에 대한 원망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동생이 만류도 듣지 않고 남들을 구하겠다며 뛰쳐나갔다가 소식이 끊겼으니까.
“아무리 세상에 손을 뻗어 보았자 그 손을 맞잡아 주는 건…… 특별한 사람들뿐이야. 친절도 호의도 돌아오지 않아.”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거다.
- 메인 퀘스트 클리어 조건 : ‘일리아스’를 설득하시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일리아스를 설득해야 하는 클리어 조건, 그 자체였다.
세계를 멸망시키려던 결심을 잠시 바꾸게 했다고 한들 그게 클리어 조건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일리아스는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던전 브레이크를 사람들과 함께 대비하고 있었다. 만일 일리아스가 세계를 멸망시키는 걸 막는 게 클리어 조건이라면 이미 만족시킨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클리어 조건은 충족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은 변하지 않으니까.”
일리아스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과거, 사람들에게 배척당했음에도 함께 어울려 살고자 옵타티오를 쓰러트렸는데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리아스는 이 세상에 절망했다.
기대한 만큼 절망했고, 사랑과 인정을 갈구한 만큼 실망했다.
이 세상이 더 이상 존속되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손을 뻗어도 나는 그저 예외일 뿐, 일리아스가 다시 세상을 믿어 보려는 계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나만은 이 퀘스트를 해낼 수 없다.
“……하.”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차라리 SSS급 몬스터랑 한판 더 붙는 게 낫지.
나 혼자서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퀘스트를 대체 어떻게…….
뿌우우우우!
그때였다.
성벽 위에서 뿔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세 번 이어졌다.
그 소리에 병사들이 동요했다.
“이거, 성문을 열라는 뿔나팔 소리인데?”
“곧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데 성문을 개방하라고? 지금 감시병 맡은 놈 대체 누구야?”
“누가 왔길래 성문을 열라는 거지?”
“그만!”
루카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오닐 경.”
“네!”
“성문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아라. 만일 거절할 수 없는 손님이 왔다고 해도 사정을 설명하고 외성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
“존명!”
데이먼 오닐이 다급하게 말을 타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 말대로였다.
만일 이 성에 누군가 왔다고 해도 현재 성문을 개방하는 건 위험했다.
돌발성 던브는 형성된 구역 중앙에서부터 몬스터가 기어 나오기 시작하니까, 괜히 성문을 열었다가 대피한 성민들 쪽으로 몬스터가 몰려가면 곤란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드르륵!
사람들이 죄다 빠져 조용한 성안.
덕분에 내 귀에는 저 멀리서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도르래가 감기며 커다란 문이 바닥을 긁었다.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어째서 성문을…… 헨리 경, 그대가 가서 알아보고…….”
두두두!
심지어는 멀리서 흙먼지가 일며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가 온다.”
“대비할까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기사들이 분주해졌지만 나는 어쩐지 가만히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떤, 예감이 스쳤다.
“레나?”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깊은 숲속에서, 알리시아를 구하지도,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옴짝달싹하지 못했을 때.
나 혼자서는, 도저히 어떻게 하지 못했을 때.
그때 나는…….
“어, 어어?”
시작은 열 가장 끝 쪽에 선 병사가 낸 탄성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던전 브레이크에 대비하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라고는 하나 없는 성안.
그 대로를 무언가가 질주하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아까 전 상황을 파악하라고 보냈던 데이먼 오닐 경.
말을 타고 질주하는 앳된 얼굴의 기사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기묘한 환희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런 데이먼 오닐 경 뒤로…….
낮의 태양이 뜨거웠다.
덕분에 기사가 입은 갑옷이 은빛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한참 더 성장했고, 혹은 더 어린 얼굴이었지만 벌써 세 번째 보는 얼굴이었으니까.
금발에 초록빛 눈을 한, 젊고 생기 넘치는 기사는 구르듯이 말에서 내려와 자신의 주군을 향해 경례했다.
“이 엘리사 메이, 주군의 명을 완수하고 지금 복귀했습니다!”
주군의 명을 완수했다.
그 말의 뜻을, 나는 알고 있었다.
루카스가 엘리사 메이에게 내린 명령은…….
“어휴.”
엘리사 메이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사람이, 한숨을 쉬며 느긋하게 말에서 내렸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이게…… 이래도 되는 건가?
정말로?
“돌아오자마자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라니, 이게 무슨 일이래?”
한쪽에 거대한 괴물 팔을 단 여자가 엘리사 메이 뒤에서 웃고 있었다.
긴 은발은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고, 얼굴은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핼쑥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알리시아였다.
엘리사 메이가 알리시아를 구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