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52화
그래서, 그 썩어 빠진 세상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나무 둥치에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성기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재갈이 물린 채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발버둥은 치지 못하는 것이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그런 성기사 옆에는 해골 병사가 검을 든 채 달그락거리고 있었고.
하기야 내가 운영자와 대화를 하는 동안 벌써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고 했으니, 이틀 내내 발악하면 힘이 빠질 만도 했다.
그리고 내가 쓰러져 있던 이틀 간.
일리아스는 착실하게 일했다.
언데드 군대로 나머지 병사들 전부를 제압한 건 물론이고, 근처 인가로 향하던 길에서 버려진 폐가를 발견해 내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나를 눕히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운영자와 한번 대화할 때마다 이래서야.’
지난번에 조한율이 나를 직접 일대일 채팅방에 소환했을 때도 시간 차이가 제법 났었다.
하지만, 조한율은 한국에 있고 나는 타르토스에 있었기에 시간의 차이가 났던 건데…… 이번에는 왜 그런 현상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타르토스의 운영자는 다른 세계에 있기라도 한 건가?
여러 가설이 어지럽게 머리를 떠돌았지만 나는 곧 머리를 저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봤자 답이 없는 문제는 미뤄 두고, 일단 눈앞의 할 일에나 집중하자.
나는 성기사의 재갈을 풀어 주었다.
해골 병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덜그럭대며 턱뼈를 움직였지만, 딱히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일리아스가 내 행동을 막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기사는 탈진한 건지 재갈을 풀어 주어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지만, 내가 입가에 물을 흘려 넣어 주니 한참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냐.”
“응, 묻고 싶은 게 좀 있어서.”
“내가 대답할 거라고 생각…….”
“네 부하들이 다 잡혀 있는 건 알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주위를 가리켰다.
성기사 휘하로 편성되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은 모두 묶인 채로 언데드 병사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다들 언데드 소환수의 기운에 잠식되어 얼굴이 퍼랬다.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부하들을 죽이기 싫으면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윽……!”
성기사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어차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수단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 체념한 듯 시선을 내렸다.
“그냥 죽여라. 모두 죽을 각오는 되어 있다. 네크로맨서 따위에게 굴복할 수는…….”
“그러니까,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나는 성기사의 몸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내가 말했지. 일리아스는 옵타티오를 공략한 사람이야. 네 머리에 피도 마르기 전에 이 대륙을 구한 영웅이란 말이야.”
이 대륙의 시간으로는 벌써 20년도 더 흐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 ‘은의 기사’ 또한 당시 이미 대륙을 주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때 옵타티오의 존재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구한 건 일리아스고, 알리시아다.
신전이 아니라.
역시나, 내 지적을 들은 성기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건…… 그러나 네크로맨서는 그 존재만으로도…….”
“웃기고 있네, 염치도 모르는 새끼들.”
바닥에 침을 뱉자 성기사의 몸이 움찔거렸다.
정말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대체 신전의 누가 너한테 일리아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거냐?”
그래.
그게 의문이었다.
아무리 일리아스가 네크로맨서라고는 해도 옵타티오를 공략한 공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터.
신전의 프로파간다 탓에 애먼 일리아스나 알리시아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중이지만, 최소한 신전 측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전이 직접 나서서 일리아스의 추살대를 꾸리는 건, 그것도 이 ‘은의 기사’ 같은 유명한 성기사를 포함시키는 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이건 신전 쪽의 누군가가 작정하고 일을 꾸미고 있다고 봐야 했다.
특히나 신전 쪽에서도 큰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다면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교황인가?”
내가 툭 내뱉자 성기사가 울컥했다.
“감히 교황님을 함부로……!”
“내가 알 게 뭐야. 난 종교 없어.”
“이, 이 이단 놈이! 닥쳐라!”
그 말에 어쩐 일인지 허리에 걸린 에이펙스의 광검이 반응했다. 성난 듯 몸을 흔들며 빛을 뿜어내는 모습에 성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성기사의 몸을 발로 툭 걷어찼다.
“그래서 대답은? 교황이 내린 지시, 맞아?”
성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에 서린 무언의 긍정.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내 질문의 대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환부(患部)가 제대로 썩어 빠졌다.
“대외적으로는 본인 거짓말에 책임을 지며 물러나겠다고 해 놓고서는, 뒤로는 옵타티오를 공략한 일등 공신을 죽이려고 해? 이것들이 미쳤나…… 왜 그딴 짓을 하는 거지?”
“그건 굳이 저자한테 물을 필요 없이 내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성기사를 더 추궁하려던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그러모아 모닥불을 피운 일리아스가 불을 쏘삭이며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주위에는 언데드 병사와 골렘들이 늘어서 있고, 나무 둥치에 묶어 놓은 수십 명의 병사들만 없었다면.
“레나, 일단 저놈은 그대로 두고 여기 와서 앉아. 이틀 내내 굶었잖아?”
일리아스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남은 손으로는 국자를 들고, 모닥불에 끓고 있는 스튜를 젓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것에 묶여 있는 병사들이 침을 꼴깍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긴 하지.
나는 한숨을 쉬며 모닥불 근처에 앉았다.
하지만 일리아스는 대신 대답하겠다고 말해 놓고서는 한동안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뭐야? 교황 놈은 왜 염치도 모르고 이딴 짓을 벌인 건데?”
“레나는 이럴 때 보면 정말 이세계 사람이라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건데.”
“그래, 나 멍청하니까 똑똑한 네가 좀 알려 줘.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음, 역시 루카스 님 때문이겠지.”
뜻밖의 대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루카스가 왜 여기서 나와?”
“너도 루카스 님이 2왕자인 건 알고 있잖아.”
그거야 그랬다.
루카스는 왕국의 2왕자라 위에 확고한 차기 왕위 계승자인 형이 있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옵타티오 레이드 파티에 합류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왜 여기서 루카스가 나오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내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기색이자 일리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왕족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는 건 흔한 일이지.”
“아니…… 루카스 녀석이 왕이 되고 싶대?”
“본인의 의사랑은 별반 관계가 없지. 옵타티오를 처치한 덕에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서 말이야. 그러니 루카스 님의 혈족이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않아?”
“잠깐만.”
나는 일리아스의 말을 멈추었다.
“너랑 알리시아는 옵타티오를 처치한 다음 오히려 대륙 공적으로 몰렸는데, 루카스 녀석의 명성은 높아졌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아니겠어? 네크로맨서나 괴물 팔을 단 용병왕을 탓하기란 쉽지만 고귀한 왕족은 탓하기 쉽지 않거든. 게다가 잘생기기도 했고.”
말문이 턱 막혔다.
일리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있지만 속내는 그리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 말대로라면…….
타르토스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이 되어서, 나는 신음했다.
유령성의 전장에서 황제를 마주쳤을 때가 생각났다.
성주가 루카스였으니, 황제는 자연히 루카스의 형제라고 추측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
어쩐지 눈동자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루카스와 닮아서였던 건가.
‘페트라의 기억 속에서 루카스는 황제만이 그대로 시스템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했지.’
그리고 그건 타르토스의 운영자, 즉 신전이 벌인 일이었다.
페트라의 기억을 들여다볼 때는 단순하게 신전이 권력에 빌붙었나, 하고 생각했지만…… 일리아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좀 더 사정이 복잡했던 모양이다.
옵타티오가 생각보다 빨리 공략되며 거짓말을 했던 신전은 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 위세가 줄어들었다.
‘어쩌면…… 알리시아나 일리아스에게 책임이 있다는 소문 자체를 신전 측에서 냈을 수도 있겠네.’
일리아스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대외적으로는 책임을 인정했더라도 지금 일리아스에게 하는 짓을 보면, 그럴 공산이 컸다.
하지만 왕족인 루카스의 경우 그렇게 처리할 수도 없다.
게다가 옵타티오 공략에 공을 세운 루카스가 정말 왕이 된다면 신전의 세력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전이 황제…… 그러니까, 루카스의 형제 편을 들었던 건가.”
덕분에 루카스는 왕위 싸움에 휘말려 그 유령성에서 처참히 죽어 갔어야만 했던 거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일리아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여러모로 조각이 꿰어 맞추어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세상을 구한 영웅들의 말로라니, 너무도 하찮지 않은가?”
루카스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SSS급 몬스터를 공략했지만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인간을 죽이는 건,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몬스터가 아니라 같은 인간인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 같잖다…….”
어쨌든, 이쯤 되면 교황이 운영자인 건 확정이라고 봐야겠지.
- 승리 조건 : 세계를 멸망시킨 자를 죽이시오.
그렇다면, 교황이 세계를 멸망시킨 주체이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타르토스의 운영자인 걸까?
나는 페트라의 기억을 더듬으며 정보를 정리해 보았다.
일단, 현재 신전의 교황은 대외적으로는 공석인 상태였다. 전 대륙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책임을 지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그 공석이 된 교황 자리를 놓고 내부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있고, 아리아드네 또한 휘말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교황이 아직 시스템의 운영자를 맡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다음 운영자가 되려면 현재의 교황을 죽여야 하니까.
만일 운영자가 바뀌었다면 새로운 교황 또한 진작 선출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 꺼림칙한 이야기였다. 교황 선출 과정 자체가 문자 그대로 배틀 로얄이라는 셈이니까.
사실 신관들끼리 죽이건 말건 내 알 바는 아니다만, 거기에 아리아드네가 참여하고 있다니 영 신경이 쓰이긴 하는데…….
“역시 교황을 찾아서 죽여야 하나?”
내가 중얼거린 말에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성기사가 울컥한 목소리로 외쳤다.
“헛소리하지 마라! 그런 무도한 짓이 용납될 것 같…… 끄억!”
빠악!
나는 돌을 던져 성기사의 머리에 맞추었다. 굉장한 소리가 났다.
짱돌에 제대로 처맞은 성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저 기사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야, 레나.”
스튜를 뒤적이며 일리아스가 무심히 대답했다.
“교황 성하의 현재 소재는 불명이야. 찾아내서 죽이려고 해도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
“뭐, 그야 그렇지.”
“게다가 아무리 제한 시간이 없어졌다고 해도 레나 네가 페트라의 몸을 빌리고 있는 이상, 얼마나 오래 이 세계에 머무를 수 있을지는 모르는 거고.”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렇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면 되는 거 아니야?”
“응?”
일리아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런 일리아스를 마주 보며 미소지어 보였다.
“너도, 나도 혼자는 아니거든.”
내가 쓰러져 있던 시간은 이틀.
내가 이 던전에 들어온 지는 이미 거의 일주일 가까이 흘러가고 있었다.
즉, 페트라가 일리아스에게 편지를 전달한 지 일주일쯤 지났다는 것이다.
그건 누군가가 달려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 음?”
일리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럴 만도 했다.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누군가 오는 것 같은데.”
나보다 그 기척을 늦게 알아챈 일리아스는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성기사와 병사들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아마 당연히 응원군이 온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대륙이 모두 외면한 네크로맨서의 편을 들 자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레나, 지금 내가 소환수들을…….”
“아니, 기다려 봐.”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지평선 너머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곧이어 먼지 속으로, 거대한 백마가 가장 앞서서 맹렬하게 대지를 질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수십 기의 병사가 따르고 있었다.
“저건……!”
백마 위에 탄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한 일리아스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국자를 떨어트렸다.
반대로 성기사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신전의 성기사들이 아니었으니까.
“워, 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수십 기의 병사를 거느린 남자가 백마에서 내렸다.
익숙한 얼굴이 십수 년의 세월을 거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쭉 늘어선 언데드 병사들도, 묶여서 제압당한 신전의 병사들도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일리아스를 향해 달려왔다.
“일리아스! 괜찮나?”
그리고 그는 예전에 알리시아에게 그랬듯 일리아스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왔다.
이 대륙에서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남아 있었다.
루카스.
백마 탄 왕자님을 보며 나는 웃었다.
“역시, 때맞춰 올 줄 알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