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37화
“그럼 언제 하라고?”
그러자 이우연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냥 심기가 불편해서 꼬투리를 잡는 게 분명했다.
조한율은 이우연 따위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던전에는 언제 들어가실 거예요?”
“오늘 당장.”
던전을 공략할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마침 어제 딱 영원 길드 헌터들과의 수련도 끝나 수면도 충분히 취한 참이었다. 또 아이템 보충도 진작 마쳤고.
이 정도면 이번에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은 다 끝낸 셈이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던전은 어디에 세팅했어? 내가 실패했을 경우 던브가 일어날 텐데, 최대한 피해 없는 곳으로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지난번에도 인적이 드물고 공략이 쉬운 곳에 위치한 던전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내 말에 조한율이 인상을 찌푸렸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진짜 기분 별로네요. 던전 공략 실패하면 예나 씨 본인은 죽거나 적어도 죽음 직전까지 갈 텐데?”
“그거야 그렇지…….”
나도 딱히 실패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찌 됐든 내 실패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도 있는 만큼 고려해야 하는 사항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장소는 어디야?”
“……경기도 인근에 하나 봐 둔 자리가 있어요. 아침 먹고 출발하죠.”
딱히 나도 죽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니, 그렇게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은 안 지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르토스를 구하는 건 현재로선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우우웅-
옆구리에 차고 있는 에이펙스의 광검이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아마도 전투를 예감한 탓일 것이다.
먹던 빵도 내려놓은 이우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입맛이 딱 떨어진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조한율 집 부엌이라도 뭐 더 없나 찾아볼걸. 빵 먹여서 보내기가 좀…….”
“빵도 괜찮은데?”
“그래도 한국인은 밥심이잖아. 너는 그러게 진작 장 좀 봐 놓지 그랬어?”
이우연이 조한율을 타박하자, 조한율은 토스트를 입에 문 채 발끈했다.
“야, 나도 이 일주일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야근했거든?!”
하기야 억울할 만도 했다. 조한율의 삶이야말로 노동법 위반으로 고소해야 할 판이었으니…… 제대로 먹기를 하나, 자기를 하나.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던 영원 길드 녀석들에게 조한율의 하루를 보여 주고 싶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식탁에 앉아 있는 셋 다 어지간히 힘들게 살았군.’
나는 어쩌다 보니 이세계로 날려 가 10년간 구르다가 좀 살 만하니 강제 귀환당했고.
이우연 또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시스템이 열린 후 세계에서 부정당하는 존재로 살아왔으며…… 조한율 역시 딱히 바란 적도 없는데 한국인의 목숨이 달린 운영자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갑자기 인터넷에서 보았던 댓글이 생각났다.
‘누가 나더러 인생 개꿀이라던데.’
내 신상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더라. 집안도 유복하고, 본인도 랭킹 1위의 헌터이니 인생 살기 편하겠다면서.
그리고 이우연이나 조한율도 듣는 소리는 비슷했다.
뭐, 확실히 물질적으로 부족하지야 않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삶인가 보다.
정작 우리 셋 다 딱히 이런 삶을 바란 적은 없는데 말이지.
“음?”
빵을 무슨 종이처럼 씹고 있던 조한율이 핸드폰을 들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이우연의 핸드폰 또한 진동음을 울렸다.
동시에 울린 진동음에 셋의 시선이 겹쳐졌다.
“재난 문자인가?”
“조한율, 던전 모니터링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갑자기 이게 무슨 일…… 아, 뭔가 했더니.”
가장 먼저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한 조한율이 머리를 짚었다.
“다행히 던브 알람은 아니고요. 그냥 소집령이에요.”
“무슨 소집령?”
“오늘 오후 2시에 회의를 하시겠대요. 급한 일이니 필참하라고…… 뭐, 할 이야기야 뻔하지만요. 서버 통합 건 얘기겠죠.”
조한율이 밥맛 다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빵가루가 묻은 손을 아무렇게나 털었다. 누가 봐도 ‘나는 평소에 집안일을 하지 않아요.’라는 행동이라 이우연이 엄청나게 질색했다.
“그럼 그 소집령에 나도 가야 하나? 그건 곤란한데.”
정부 주최의 회의에서 어떤 말이 나오게 될지도 이미 조한율을 통해서 들었다.
서버 통합 건은 지금 알려 봤자 대중에게 혼란을 안겨 줄 수 있기에 당분간 비밀로 할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고위 랭커들에게는 던전 공략과 능력치 개발 등, 여러모로 협조를 구해야 하기에 상위 스무 명까지는 정보를 주기로 한 것이다.
아마 그래서 오늘 소집령이 떨어진 것이겠지.
하지만 운명의 씨앗 세팅이 완료되었다면 내게는 던전 공략이 우선이었다. 다 아는 이야기를 듣자고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았다.
조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죠. 정부에는 제가 알아서 이야기해 둘게요. 어차피 저도 안 갈 거고.”
그러자 이우연이 눈을 깜박였다.
“뭐야. 그럼 나 혼자 가? 강예나야 그렇다 치고 너는 안 바쁘잖아.”
“나는 예나 씨가 공략하는 동안 계속 대기하면서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고.”
그거야 그랬다.
일전의 던전 공략을 생각해 보면 이번에도 타르토스 쪽 운영자가 개입해 올 것이 뻔했다. 그러니 조한율이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나로서도 계속 모니터링을 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조한율과 시선이 마주치니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으, 나도 가기 싫은데. 어차피 그 소집령, 나도 다 아는 이야기잖아. 시간 낭비야.”
괜히 혼자 정부 회의에 동원되게 생긴 이우연만 표정이 불퉁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도 없는 일이니 곧 순응한 듯, 이우연은 불퉁한 모양 그대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나는 여기서 인사해야겠네. 잘 다녀와.”
그 표정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인사하는 표정이냐?”
“아, 그럼 뭐. 죽을지도 모르는 던전 가는 길에 활짝 웃으면서 배웅해 줘? 그게 더 재수 없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심정이 복잡한 모양인데.’
평소라면 그냥 유들유들하게 이 상황을 넘겼을 녀석이 저렇게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마 제 딴에는 위험한 곳에 간다는데 같이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하는 일을 말릴 수도 없어서 답답한 것 같다.
아마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지.
“배웅 말고, 마중은 웃는 얼굴로 나가 줄 테니까 무사히 돌아와.”
그렇지만, 거기서 딱히 더 말을 보태지는 않고 이우연이 나를 향해 주먹을 들었다.
나도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혔다.
“그래, 고맙다.”
우리 사이에는 이 정도 인사가 딱 좋다.
정이 쌓여서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믿고 보내 줄 수 있는.
그리고, 조한율이 식탁 한구석에 놓여 있던 자동차 키를 집어 들었다.
“그럼, 갑시다.”
* * *
이번에 조한율이 선택한 곳은 경기도 양평의, 북한강이 보이는 어느 야트막한 벌판이었다.
주변에는 가끔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가 있을 뿐, 인가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벌판 한가운데 던전 입구 표식이 동동 떠 있을 뿐이었다.
“여기예요.”
조한율이 매끄러운 솜씨로 던전 입구 표식 옆에 차를 댔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물었다.
“나는 괜찮은데 그쪽은 여기서 혼자 괜찮겠어?”
밤에는 정말 무서울 것 같은데.
아무리 운영자이고, 헌터로서의 능력치도 높다지만 이런 곳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건 그것과는 별개 문제다.
게다가 던전 공략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난번에는 거의 일주일 가까이 걸렸으니까.
그렇게 묻자 조한율이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제가 왜 캠핑카를 끌고 왔겠어요. 저도 다 생각이 있답니다.”
그건 그랬다.
지난번 내가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밤새 떨었다더니, 이번에는 아예 캠핑카를 끌고 온 것이다.
침대는 물론이고 간단하게 조리를 할 수 있는 부엌까지 딸려 있어서 편리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딱히 식재료는 보이지 않는데…….
“아, 컵라면을 10개 정도 챙겼어요. 어차피 요리할 시간까지는 없고, 10개면 5일은 거뜬하니까.”
“아니…… 하루에 3끼 정도는 챙겨 먹어라.”
돈도 많은데 식량은 좀 더 챙기지 그랬냐.
그러자 조한율이 캠핑카 어딘가에서 초콜릿과 각종 에너지 바 뭉치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어차피 일하는 동안 주식은 이거거든요.”
“……고생한다.”
누가 대한민국 최고의 갑부가 된 조한율이 부럽다는 댓글을 썼던데, 막상 본인이 이러고 사는 거 보면 눈물이 다 난다.
돈이 많으면 뭐하나, 막상 본인이 돈을 쓸 시간이 없는데…….
“그럼, 잘 다녀오세요.”
조한율이 차에서 내리는 나를 배웅했다. 그 말에 문득 지난번 던전이 생각나 조한율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무운을 빈다는 말은 안 해 줘?”
그러자 조한율이 눈을 깜박였다.
“예?”
“아니, 지난번에는 그랬잖아. 무운을 빈다고.”
당시에는 조한율과 이렇게 가까이 지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만 해도 죽든 말든 한국 서버에는 민폐 끼치지 않게 알아서 하고, 무운을 빌어 준다는 말은 그냥 립 서비스 같았지만…….
“안 듣고 가려니 섭섭하네.”
어쨌든 그 말을 듣고 지난번 던전에서 살아남지 않았던가.
전장에 나가는 기사들이 행운의 징표를 챙겨 가는 느낌으로 한마디 듣고 싶었다.
그러자 조한율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운 그 이상으로, 행운과 기적을 빌어요.”
운영자가 빌어 주는 행운과 기적이라.
나는 씩 웃었다.
“……그것 참 고맙군.”
* * *
- 메인 퀘스트를 시작했습니다.
- 모든 장비가 해제되었습니다.
- 시스템이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를 재인식하였습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재입장을 환영합니다.
지난번 운명의 씨앗을 사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누군가가 내 뺨을 후려치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춥다?!’
그야말로 뼛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추위였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이 눈이 쌓인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장 팔을 움직여 일어서려고 했지만, 딱히 어디에 묶인 것도 아닌데 사지가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곧 내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실시간으로 땅바닥에서 얼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는 급하게 체온 조절 기능이 있는 앙겔루스의 가호와 방한 기능이 있는 아이템부터 꺼냈다.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급하게 온갖 방한구를 껴입고, 그러고도 한번 내려간 체온이 쉽사리 돌아오지 않아 포션을 들이켜 가며 잠시 몸에 감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겨우 몸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자칫하면 그대로 얼어 죽을 뻔했다. 설령 죽지는 않더라도 동상은 자칫 방치하면 신체 부위를 절단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증상이었다.
그나마 아주 늦진 않은 모양이다.
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어 얼음 안개처럼 부스러졌다.
정말이지 엄청난 추위였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그제야 겨우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겨,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시야에 한가득 펼쳐진 것은, 온통 흰 눈밖에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설원이었다.
‘왜 이런 곳에…….’
마침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당신은 해당 시간선의 인물 중 하나로 빙의하게 됩니다. 해당 인물은 플레이어와 가장 비슷한 성향을 따라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능력치가 해당 인물보다 현저히 높아 능력치가 전이되지 않습니다.
- 던전 클리어 후 해당 인물의 기억을 일부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능력치가 전이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지난번과 비슷한 메시지였다.
빙의된 인물의 능력치를 받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일단 내가 누군지부터 확인해 보자.’
나는 빠르게 아이템창에서 거울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에는 설마 쓸 일이 있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아이템창에 거울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미리 거울 아이템을 준비해 왔다.
그리고…….
나는 맑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거울에 비친 것은, 분명히 페트라였다.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 고집스러운 인상에 정연한 이목구비.
다만, 지난번 만났을 때 페트라는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는데…….
‘스무 살은 됐으려나?’
양태원과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몸을 내려다보니 키도 훌쩍 커서 나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고, 팔다리도 강건해진 것이 보였다.
아마도 수련을 한 것이겠지.
견습 기사쯤은 될 것 같은 몸이었다.
‘그렇다면 지난번 이후로 10년 정도 흐른 시점이라는 건가.’
이미 던전을 통해 세계를 오갈 때 시간대가 오락가락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막상 시간이 흐른 것을 보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이걸로 내가 운명의 씨앗을 사용할 때마다 페트라의 몸을 사용하는 건 확정인 것 같네.’
아직은 어떤 이유로 페트라라는 인물에게 빙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유령의 성 던전에서 우연히 페트라의 몸에 빙의한 것과 연관이 있을까? 혹은 페트라라는 인물에게 어떤 숨겨진 비화라도 있는 것일까.
하여간 그저 우연은 아닐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아직은 단순한 추측의 영역이지만…….
다만 지금은 추측보다는 현재 페트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내 던전 클리어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동안 쓰러져 있었던 것 같네.’
눈이 쌓인 땅바닥에 사람이 쓰러졌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금 눈이 내리는 속도로 반추해 보면 적어도 한 시간은 넘게 그대로 쓰러져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페트라가 쓰러져 있던 자리 옆에 말 한 마리의 시체도 보였다.
나는 한가득 쌓인 눈을 치워 내고 죽은 말을 살펴보았다.
털이 덥수룩한 특징을 보아하니 냉혈종으로 분류되는, 추운 지방에서도 잘 달리기로 유명한 말이었다.
살펴보니 외피에는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지만, 말의 입술을 들추어 이빨을 보니 그 안으로 피가 비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출혈이다.
‘……독?’
이런 설원에서 말이 독이 든 무언가를 섭취할 리는 없을 테고, 시간차를 두고 발휘되는 독에 이미 당해 있었을 확률이 더 컸다.
‘적이 있다는 거로군.’
혹시 페트라 또한 독을 먹고 쓰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빙의한 시점에서 이미 해독되었을 테니 지금은 흔적을 찾아낼 순 없지만.
‘그러니까 페트라는 죽을 위기…… 에 처해 있었던 거네.’
지난번 던전을 생각해 보면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도 페트라는 감옥에 갇힌 채 어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페트라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를 겪을 때마다 빙의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그나저나 정말이지 기구한 사연의 아이였다.
어릴 적에는 감옥에 끌려가고, 스무 살쯤 되어서는 이렇게 아무도 없는 설원에 홀로 쓰러져 죽어 가고 있다니.
‘이 애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이런 인적 하나 없는 설원에서.
- 던전 클리어 조건을 조회할 수 없습니다.
- 필수 선행 조건이 존재합니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던전 클리어 조건은 조회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필수 선행 조건을 찾아 떠나야 할 모양이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인데, 이걸 어쩐다.
‘일단 주위 인가를 찾아 움직여야 하나?’
그러나 망망대해 같은 설원에, 계속해서 내리는 눈 때문에 방향을 잡기도 쉽지 않다.
방한구를 착용해 훈훈하게 온기가 도는 것과 별개로 머리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귀찮게.’
내가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 내려고 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품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손에 닿는 것은 바스락거리는 양피지의 질감이었다.
“편지?”
그랬다.
얼어 죽어 가고 있던 품속에서 발견된 것은 편지였다. 고급스러운 금박이 박혀 있는 봉투 위에는 밀랍으로 된 봉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열어 볼 수는 없었지만…… 그 편지 봉투에 적힌 글씨만으로도 나는 편지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의 경애하는 전우, 일리아스에게.
그건 루카스의 필체였으니까.
……
…
Chapter. 17 설산의 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