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69화
“피곤해.”
알리시아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알버트는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뿐이다.
그렇게 한 것은 알버트가 결코 알리시아의 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가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눈꺼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알버트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다소 시간이 지난 언젠가.
대륙 어딘가의 외딴 숲.
알버트는 알리시아와 함께 가장 성공한 실험체 중 하나였다. 그도 알리시아처럼 몬스터의 신체 일부를 이식받은 실험에서 살아남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알리시아처럼 이식된 몸을 잘 다루지는 못했다.
그 결과 알버트는 어제 던전 공략에서 왼쪽 다리를 잃었고, 연금술사들은 이것이 또 다른 몬스터 이식을 실험해 볼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럴 권한을 가지고 있는 어떤 자가 실험을 승인했다.
분명, 알버트 본인의 것이었을 권한을 빼앗은 사람.
아마 알버트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남은 한 팔로 무릎을 끌어 모으고 얼굴을 묻으면서 알리시아는 한 번 더 속삭였다.
“그만하고 싶어.”
정말이지 그랬다.
아픈 것, 배고픈 것, 더러운 것, 불편함, 자유 없이 어딘가에 갇혀 실험을 당하는 것…… 그리고 그 실험의 성과를 확인한답시고 강제로 던전으로 던져지는 일까지 모두 지겹기 짝이 없었으니까.
우스운 것은,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공략하는 일이 개중 가장 쉬웠다는 것이다.
알리시아는 싸구려 철제 검 한 자루와 자신의 몸 크기에 맞지 않는 몬스터의 팔만 가진 상태로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알리시아를 가둔 사람들은 그걸 재능이라고 불렀다.
비록 본인은 그것이 재능인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던전에서 살아남아 봤자 종국에는 이곳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돌아오면, 연구자들은 알리시아의 ‘다른’ 쪽 팔에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알리시아가 새로운 팔을 이식받을 때마다 겪어야만 하는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더 나은 결과를 바라며 실험을 거듭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했다.
‘대륙의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몬스터의 팔을 이식당하고도 살아남아 강대한 힘을 얻은 알리시아는 그 평화를 이룩할 단초라고도 했다.
그들은 마치 알리시아를 통해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몬스터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알리시아가 자신들의 평화를 되찾는 것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꿈꾸었다.
한편으로 알리시아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아이들이 죽어 가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 느끼는 죄책감은 끔찍했다.
그들은 그게 필요한 희생이라고 했다.
다른 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나마 그렇게라도 쓸모를 찾은 것이 다행이라고도 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알리시아가 그걸 반박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오기 전 알리시아는 오빠와 함께 길거리를 방황하며 쓰레기를 주워 먹거나 무언가를 훔치며 살았다.
알리시아가 기억하는 한 그 거리에서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은, 거리에 살던 빵집 주인이 가끔 팔고 남은 딱딱한 빵을 주었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그 좋은 추억도 알리시아와 일리아스가 매일 그 동정을 기대하며 빵집 앞에 나타나자 곧장 끝났지만.
만일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도 아주 형편없는 삶을 살다가 형편없이 죽었겠지. 주제도 모르고 동정을 바라다가 염치도 모른다며 끝장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쓸모를 증명한 지금은 자신만의 침대와 충분한 음식을 제공받으니, 그때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이건 알리시아를 소유하고 있는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알리시아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때는 아직 어렸으니까.
“알리시아.”
수분이 부족해 메마르고 갈라진 알버트의 목소리를 들은 알리시아는 무릎 위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알버트는 끔찍해 보였다.
그의 표정도,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육신도.
곧 연금술사들이 그를 실험실로 옮겨 가 신체를 또다시 개조할 것이다.
알버트는 이미 양팔을 모두 이식받은 상태였다. 더 이상의 개조를 견딜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알버트가 생존하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알버트의 고통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걸 알버트도, 알리시아도 알고 있었다.
알버트는 알리시아에게 속삭였다.
“도망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몬스터의 몸을 이식받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설령 알버트나 알리시아처럼 성공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몬스터의 신체 일부분은 인간과는 맞지 않아 정기적으로 교체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은 인간의 신체마저 함께 썩어 들어간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알버트를 데리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도망쳐 봤자 어차피 죽을 테니까.
알리시아는 알버트의 눈에서 눈물이 고이다 흘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 무서워.”
그걸 보면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이제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몰라.
“너무 무서워.”
그런데도 알리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알버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심지어 떨리는 손을 잡아 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의 손도 떨리고 있다는 걸 들킬 테니까.
그건 알리시아가 아직도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였다.
최악의 친구를 선발하는 대회가 있다면, 알리시아는 자신이 우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도 그때 대답을 해 주었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무리 떨린다고 해도 손이나마 잡아 주든가.
어찌 되었든 알버트는 알리시아의 친구였고, 그 시절에 곁에 있었던 유일한 동료였다. 만약 당시에 그렇게 했더라면 알버트는 저렇게까지 최악의 길을 걷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십수 년도 더 지난 지금, 알리시아는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알리시아는 알버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분노에 휩싸인 녹빛 눈동자.
익숙한 빛깔이었다.
방금 그는 뭐라고 했지?
아, 내가 이미 인간답게 살 수 없다고 했던가.
이제는 그다음 말이 튀어나올 차례였다.
알버트는 증오에 휩싸인 채로 내뱉었다.
“어차피 우리는 괴물이니까.”
알리시아는 알버트가 저 꼴을 하고서도 어느 정도 똑똑한 소리를 한다는 것에 제법 감명을 받았다.
사실, 옳은 말이었다.
알리시아는 꽤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건 비단 팔 한쪽이 몬스터의 것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알리시아는 자신을 이런 상황에 밀어 넣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노했고, 격렬한 증오를 느꼈다. 그때부터 몬스터의 머리를 베면서 자신을 가둔 인간의 머리를 베는 상상을 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아니게 되었다.
배부르게 먹는 것도, 편안한 잠자리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원하는 것은 복수뿐이었다.
알리시아의 적은 던전의 몬스터가 아니라, 자신을 몰아넣은 인간들이었다.
그때부터 알리시아는 자신이 어딘가 망가졌음을 느꼈다.
만일 오롯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첫걸음이라면, 알리시아가 스스로 결정한 첫 번째 일은 살인이었다.
몬스터보다 더 많은 인간을 베었다.
네게 투자한 게 얼만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부짖는 사람을 베었고, 대의를 생각하라며 설득하는 사람도 죽였고,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며 애원하는 사람에게도 그랬다.
사실 인간 중 무죄인 자들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알리시아가 고통받는 동안 보지 못한 척 방치했다. 길거리 한구석의 시궁쥐였던 시절이든, 실험을 당하는 동안이든 간에.
무지조차 죄처럼 느껴졌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 무작위적인 분노가 몇 년간 알리시아를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자, 알리시아는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몬스터 대신 인간을 죽이기 시작하자 모두가 알리시아를 미워했고, 증오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알리시아를 괴롭힌 건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이었는데, 언제나 인간이 훨씬 더 잔혹한 짓을 했는데 몬스터가 만악의 근원인 듯 굴었다.
아니, 그건 어쩌면…… 인간들에게는 알리시아가 ‘다른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알리시아는 더러운 골목에서 살던 시궁쥐였고, 그다음에는 대의를 이룰 도구였고, 결국에는 인간을 죽이는 괴물이었다.
인간이 알리시아를 배척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알리시아는 같은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역시, 알버트의 말이 맞았다.
잘난 듯 이리저리 말하기는 했지만 알버트도, 알리시아도 결코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알버트가 몬스터가 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사실 그의 몸은 애초에 몬스터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알리시아도 그랬다.
자신은 이미 괴물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설령 ‘최후의 던전’을 공략했다고 해도 인간들은 어차피 자신을 받아들일 생각 따위는…….
“알리시아!”
알리시아는 멍하니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의 꼬마가 팔을 흔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희미하게 감각에 잡히는 은빛 가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빠르게 그 영혼의 주인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떤 절망 앞에서도 언제나 찬란히 빛나고 있는 저 눈동자.
그 속에서 불타오르는 의지의 빛을 보면, 그게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알리시아는 멍하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레나…….”
그리고 레나는 결코 알리시아에게 멍하니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짝!
거센 소리와 함께 뺨에 날카로운 아픔이 스쳤다.
그 아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나는 정말 인정사정이 없었다. 다짜고짜 뺨을 갈기는 게 모습이 바뀌었는데도 손맛이 매웠다.
“뭐 하는 거야. 움직여!”
콰직!
레나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데, 방금까지 있던 그 자리에 알버트가 내던진 커다란 나무 둥치가 명중했다.
나무는 산산조각이 났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잠시 그 힘에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글쎄, 같은 괴물이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버트가 외쳤다.
“너도 속으로는 내가 옳다는 거, 알고 있지?”
콰쾅!
한 번 더 커다란 나무가 날아왔고, 미처 피할 수 없었던 알리시아는 검면으로 나무를 쳐 냈다. 나무가 통째로 땅에 처박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나무 조각과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알버트가 시야가 혼잡해진 난장판을 틈타 달려들었다.
쾅! 쾅!
달려드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지만, 둔중한 발걸음에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리가 움푹 움푹 파였다.
그리고 어느새 놀라울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알버트가 팔을 휘둘렀다. 괴물의 팔은 그 무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자신이 그 주먹을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질투의 빛이 짙게 서린 눈동자는 이제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물리적인 공격보다 알버트의 말이 먼저 귀에 꽂혔다.
“너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인간을 미워하는 괴물이.
결코 목소리로 나오지 않은 부분을,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말이 옳을 거라고도.
아니, 사실은 이미…….
“나는…….”
카캉!
커다란 금속성의 굉음이 일었다.
동시에, 알리시아는 거대하고 강렬한 흰빛이 시야를 일순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헉!”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알버트가 저 멀리로 나가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알리시아조차 갑자기 눈앞에서 터진 빛 때문에 비틀거려야 했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알리시아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화가 난 어깨와 등뿐이었다.
그건 두 괴물 사이에 온전히 서 있는 것은 조그마한 꼬맹이의 모습이었다.
알리시아를 앞을 막고 지키기에는 턱도 없이 작아 보이는, 그럼에도 익숙한 등이다.
알리시아는 몇 번이고 저 등을 보아 왔다.
숲 한쪽을 완전히 가를 만큼 길어진 성검을 든 레나가, 살벌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X랄하고 있네…….”
살벌한 욕설이 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달릴 정도로 살기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감히 누구랑 누구를 비교해?”
“레……!”
“저번에도 말했지. 너를 그렇게 만든 건 너야. 너랑 알리시아는 전혀 달라!”
알리시아는 멍하니 그 작은 등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괴물이 되었지만, 알리시아는 아니야.”
레나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나가떨어진 괴물을 향하고 있었다. 당연한 진리를 말한다는 듯, 한 점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
“얘는 목숨을 걸고 애들을 구하러 갔어. 전혀 상관도 없는 애들을. 그냥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
빛나는 검이 알버트를 향해 길게 휘둘러졌다. 검날이 스치는 자리는 놀라울 정도로 눈이 부셨다.
이 몇 년간 보지 못했던 빛이었다.
언제나 적에 맞서서 인간을 구하는 용사의 검.
“알리시아는 저 애들을 구한 용사야.”
알버트는 제 머리 위로 휘둘러지는 검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감히, 내 친구를 괴물이라고 부르지 마.”
검이 내리쳐졌다.
언제나 알리시아를 구해 주는, 용사의 검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알버트도 그 빛을 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