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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85화 (86/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85화

정소현은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횡액이라는 게 내일 닥치는 모양이지.’

정소현은 습관처럼 잠시 청룡을 올려다보았으나 청룡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처럼 고고히 그 자리에서 인간을 내려다볼 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봐요, 강예나 씨. 그래도 제가 지옥에서 당신을 구한 연도 있는데 이유 정도는 말해 주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다른 것보다 그렇게 다짜고짜 명령하듯이 이야기하는 거, 굉장히 불편하네요.”

갑작스럽게 공격적으로 변한 태도에 당황할 법도 한데 강예나의 얼굴에서는 그런 기색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

그 태평스러운 태도에 정소현이 오히려 당황했다.

묘한 일이었다.

정소현도 딱히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혼을 볼 수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인간이니, 눈이 있는 이상 외모에서 받는 인상이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 인상과 전혀 반대로 행동하는 인간은 드물다.

인상이라는 게 대개 본인의 행동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런데 눈앞의 이 강예나라는 여자는 그 밸런스가 전혀 맞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갓 고등학교나 졸업했을까 싶게 어리다.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볼은 어딜 보나 순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하는 행동은 그런 외양과는 전혀 달랐다.

다른 사람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무뚝뚝함.

갓 성인이 된 어린애들이 허세를 부리는 것과도 달랐다.

정말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는 거다.

본인은 스스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마치…… 뭐랄까.

닳고 닳은 백전노장 같다고나 할까.

지금도 강예나는 정소현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래요. 내가 그쪽한테 빚을 지기는 했지.”

돌아오는 말도 태연하고 능청스러웠다. 심지어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때마침 정소현 씨가 와 주지 않았다면 마몬이랑 붙을 뻔했죠. 이건 뭐, 내가 이길 거긴 했지만. 아, 그래도 릴리스에게서 구해 줬으니 앞으로의 내 인생을 구한 거나 다름없고. 이건 좀 크네.”

“…….”

“그리고 또, 맞다. 손도 부러트렸지. 그런 다음 집에 와서 저녁도 대접받고, 차도 대접받고. 빚이 좀 있긴 하네요.”

그러다가 강예나가 고개를 들어 정소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예의 없게 말한 것까지 빚으로 추가해서 달아 놔도 뭐, 큰 차이 없을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논리란 말인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정소현도 이십 년 넘게 무당으로 살아온 경험이 있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죠.”

“아, 내가 말 예쁘게 하는 건 못 해서. 그냥 돈으로 갚는 게 편하겠네.”

아니면 몸으로 갚거나.

불순한 말이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정소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이유는 말해 주지 못하겠다는 거군요.”

애초에 그리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 여자가 굳이 이렇게 이야기를 끄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강예나가 민망한 듯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빙고.”

하지만 뻔한 일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정소현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청룡 님이 저를 지켜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던가요?”

그 말에 강예나의 눈이 둥글어졌다.

그걸 보며 정소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저 여자에게는 알려 준 것이다.

나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횡액의 정체를.

청룡은 정소현과 양태원 외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표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문득 청룡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청룡은 조용히 눈앞의 여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강예나의 무언가가 특별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소현이 이 여자의 말에 따를 의무는 없다.

“이건 제 일이에요.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청룡이 이 여자 곁에 붙어서 횡액을 피하라길래 그저 행운의 부적 정도로 삼으라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 강예나는, 왜인지는 몰라도 횡액에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정소현은 이제껏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사명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닥쳐올 운명을 회피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다.

어차피 자존심 하나로 버틴 인생이다. 이대로 끝까지 홀로 버텨 내겠다.

그게 정소현의 각오였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 말고…….”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강예나가 뚝, 정소현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렸다.

“난 딱히 그쪽을 지키려는 건 아니야.”

뜻밖의 대답에 정소현은 눈을 끔벅였다. 강예나는 이미 정소현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문득, 코에 풍겨 오는 풀 내음이 좀 더 진해진 것 같았다.

“나는 나만의 이유로 이 일을 해야만 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쪽이 죽으면 곤란한 것뿐이거든.”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내 사정이야말로 그쪽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정소현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강예나가 씩 웃었다.

“애초에 그냥 하루 집에 있으라는 말에 왜 그렇게 죽자고 달려드는지 모르겠네. 됐고, 하루 정도 푹 자요.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정소현은 눈을 껌벅였다.

그래, 확실히 피곤하기는 했다.

어제 한숨도 자지 못해서 그런가, 어쩐지 강예나의 말이 느리게 재생되는 오르골 소리처럼 들렸다.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예요.”

적당히 듣기 좋은 높이의 목소리는 다정하게 들려서 아주 포근한 자장가 같기도 했다.

“그럼 나는 이만.”

그렇게 말한 강예나가 등을 돌리려 하기에 정소현은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만요.”

이상하게도 자신의 손이 뻗어 나가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강예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도 할 말이 있어요?”

“우, 우산이요.”

그래도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저걸 그냥 맞고 가게 내버려 두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왜 이렇게 졸린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정소현은 일단 애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현관문 근처에 처박아 두었던 우산 하나를 기어코 찾아냈다.

구깃구깃한 우산을 손에 쥐여 주자 강예나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한번 웃었다.

“그래요, 뭐. 이미 다 젖었지만 잘 쓸게요.”

정말 얄미운 소리만 한다. 정소현은 우산을 건네주면서도 한마디 더 못을 박아 두기로 했다.

“어쨌든 내 일에 상관…….”

하지 말아라.

그 말을 끝까지 하지는 못했다.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이거 내 몸이 이상하다, 그렇게 인식하는 동시에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 게 무슨…….’

“아, 약빨 진짜 늦게 듣네. 이것도 도력 때문인가…….”

흐릿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정소현은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말똥한 아이의 눈동자가 정소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똘망한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정소현은 스프링 튕기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 태원아! 왜 울어?”

“엄마, 괜찮아?!”

“응? 엄마야 당연히 괜찮지. 깜빡 잠이 들었나?”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아주 명료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소현은 아이가 꺼내는 말에 심각해졌다.

“엄마 현관문에서 갑자기 기절했어. 어제 봤던 이모가 침대에 옮겨 줬구.”

“……뭐?”

잠깐,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떻게 잠든 거더라?

혼란스러워하는 정소현에게 양태원은 똘똘하게 대답해 주었다.

“갑자기 잠든 건 엄마가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깨우지 말라고, 나 배고프면 밥 먹으라고 밥도 차려 주고 용돈도 줬어. 그런데 과자 있으니까 과자만 먹었어. 잘못해써요.”

그 말을 듣고 정소현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겨우 떠올렸다.

잠결에 들었던 강예나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상황은 명백했다.

강예나가 자신을 잠재운 것이다. 본인의 말대로 하루 종일 집에 있게 하기 위해서!

정소현은 황급히 핸드폰을 열었다.

폴더 폰 화면에 표시된 날짜는, 1월 29일 오후 11시.

“……!”

미쳤다.

정말로 하루를 꼬박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정신이 팔릴 새도 없었다.

“엄마, 근데 바깥이 이상해여.”

양태원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하며 창밖을 가리켰다.

정소현은 아이 손가락을 따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정소현은 홀린 듯이 창가로 다가섰다.

‘……횡액 정도가 아니잖아.’

기껏해야 인재(人災)를 생각했거늘, 이건 천재(天災)였다.

밤 열한 시이니 칠흑같이 어두워야 할 하늘이 붉었다.

그 붉은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그때마다 미친 듯이 내리는 빗줄기가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거울로 비추어야 보이는 균열이 이제는 맨눈으로도 보였다.

붉은 하늘에는 누가 수많은 칼집이라도 낸 것처럼 숱한 균열이 비치고 있었다.

비가 오는 하늘 사이로 시꺼먼 기운이 오로라처럼 내리비치는 것을 본 정소현은 이를 악물었다.

묵묵히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청룡을 올려다보았다.

경고하려던 것이 이거였나.

지옥과 현세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언제든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각오도 하기는 했다.

아무리 정소현이 제 한 몸 바쳐 지옥을 정화한다고 한들 결국 천재는 하늘의 몫이다.

정소현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라면 현세는 곧 무너진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막을 수 있다면 정소현은 부모님과 남편이 죽을 때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버티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태원아.”

“어, 엄마.”

무엇을 예감한 건지, 잔뜩 겁을 먹은 아이가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정소현은 아이의 손을 다독이며 떼어 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여기에 있어.”

“엄마는 어디 가는데! 나 혼자 무서워!”

“엄마 따라오는 게 더 무서워.”

이걸 막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리고 아직 자신의 아이는 살아야 할 날이 많았다.

“태원아, 엄마가 없으면 힘든 일이 많을 거야. 알아, 그래서 엄마가 미안해.”

가엾게도 아이는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딸꾹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한 번 꼭 껴안아 주고 정소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이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예감 때문에, 그건 도저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소현은 아이의 뺨을 쓰다듬지도 못한 채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태원아.”

“엄마!”

“너는 이렇게 살지 마라.”

자신에게 단 하나 남은 소원이라면 그것뿐이었다.

내 아이는 평범하게 살면 좋겠다.

이런 끔찍한 것을 보지 않고서, 평범한 일상생활에만 버거워하면서.

- 기어코 가려고 하느냐.

엉엉 우는 아이를 방 안에 두고, 제대로 복장을 갖추어 입고서 문을 나서려는 정소현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청룡이 조용하게 물었다.

정소현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청룡 님, 내가 죽으면 우리 애를 돌볼 생각이지?”

-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청룡은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걸 지적하는 대신 정소현은 환히 웃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청룡 님은 내 옆에 있었지. 원망도 많이 했고, 화도 냈지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곁에서 함께할 친구 하나가 있었다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닌 것도 같았다.

정소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퍼할 때마다 그 옆에서 청룡 또한 슬퍼했음을.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음을 서글퍼했다는 걸.

그런데도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아서, 정소현은 다른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수고 좀 해 줘.”

감사 인사 하나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인간이 야속할 법도 한데 청룡의 눈동자는 그저 온유했다.

그 온유한 눈동자도 닥쳐올 운명 앞에서는 그저 갈가리 찢길 뿐이겠지.

그것이 슬펐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삶이니.

- 무엇을 바라느냐?

정소현은 부채를 들어 하늘에 걸릴 듯 닿아 있는 산의 정상을 가리켰다.

백열하는 번개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땅으로 내리쳤다.

내가 죽을 자리는 저곳이다.

“나를 현세의 마지막 보루까지 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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