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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76화 (77/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76화

섬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밤중이라 그런 건지 옷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유독 살을 에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물론 차가워서 땀을 식히는 데 딱 좋기는 했지만.

“……후.”

숨을 깊게 들이쉬자 차가운 바람이 폐부까지 찌르듯 훅 치밀고 들어왔다.

한참 수련하고 난 후에는 기분이 좋다. 충분히 땀을 흘리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검을 휘두르면 목표를 충실히 달성했다는 충족감이 든다.

머리에 잡념이 없어지는 것은 덤이고.

고개를 들자 흐드러지듯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예감이 좋은 밤이네.

“용건이 있으면 말해.”

아까 전부터 시위라도 하듯 내 시야 앞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청룡의 눈가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 내가 무섭지 않으냐?

“이런 거에 겁먹기엔 이래 봬도 겪은 게 많아서.”

내게 해를 끼칠 수도 없는 반투명한 청룡의 형상을 보고 겁을 먹었다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분명, 내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간 내 손에 들려 있는 검도, 두르고 있는 갑옷도 무언가 메시지를 띄웠을 테니까.

- 그래, 기껏해야 서른 해쯤 살아온 것 같은데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는 상처가 깊구나.

“……그게 보이나?”

지금 내 외견은 누가 봐도 서른은 아닐 텐데. 이건 내가 얼마 전 거울을 꼼꼼히 보다가 깨달은 사실 중 하나였다.

솔방울 간호사의 스킬이 지정된 대상의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현재 내 얼굴은 스무 살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괜히 이우연이 나이가 어쩌고 하면서 시비를 건 게 아니었다.

내가 그걸 궁금해하는 것이 웃긴지 청룡의 수염이 약간 흔들렸다.

- 내가 보는 것은 영혼의 나이거든.

“마력이라도 보는 건가?”

- 인간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 또한 영혼이 품고 있는 힘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다.

“서론이 길군. 하고 싶은 말만 빨리 해 주겠어?”

슬슬 새벽바람에 데워 놓았던 몸이 식어 가고 있었다. 이래서야 컨디션 조절에 방해만 될 뿐이다.

- 그러는 너는 성질이 급하구나, 아해야. 그래, 인간의 생은 유한하고 네 영혼은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본론을 말해.”

청룡이 긴 한숨을 쉬었다. 몸을 두르고 있던 오색의 기운이 그 바람을 타고 내 주위까지 다가와 맴도는 것이 보였다.

- 부탁이 있다.

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저 정도 되는 존재가 나에게 부탁을 한다고?

이야, 내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보다. 어이없음이 앞서긴 했지만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쪽이 나한테 부탁이란 걸 할 이유가 있나? 나 같은 인간보다 훨씬 전지전능해 보이는데.”

- 설마, 이 세계는 인간의 것이지. 우리 같은 존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어.

“우리 같은?”

- 이미 만나 본 적이 있을 텐데. 네 영혼에 악한 기운이 묻어 있다.

벨리알을 말하는 건가.

청룡이 가벼운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와 함께 내 주위를 빙빙 돌던 오색의 기운이 슥, 하고 나를 훑고 지나갔다.

드라이기 바람을 쐰 정도의 온기였다. 이상하게도 그 훈기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손끝에서 한기가 가셨다.

나는 내 손끝을 바라보았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확실히 피부의 색깔이 달라졌다.

솔직히 사라지기 전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냉기였는데 사라지고 나니 알겠다.

무언가 내 몸에 붙어 있었다는 것을.

“……뭘 한 거야?”

- 악귀들이 사는 세계에 다녀온 생자(生者)에게는 으레 사악한 기운이 들러붙기 마련이지. 찬란한 생명력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것들. 그래서 이렇게 정화해 주지 않으면 언제고 너의 마음에 빈틈이 생길 때를 노린단다.

그렇게 말하며 청룡은 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 물론 너는 그런 것 따위가 생길 것 같은 아해는 아니로구나. 그러나 있어서 좋을 것이 없어.

“그럼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 약간의 성의 표시를 한 정도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군.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의 표시라?

이쯤 되면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도대체 부탁이 뭐길래 콧김 한 번에 마기를 털어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내게 숙이고 들어오는 건지.

“일단 내용이 궁금하니 들어나 보지. 무슨 부탁인데?”

청룡의 눈이 웃는 것처럼 휘어졌다.

낮에 보았을 때는 무감정하고 무기질적인 눈동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새벽의 하늘 밑에서는 퍽 다정해 보였다.

- 파마의 검이 필요하다고 말했었지.

“그런데?”

-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필요한 아해는 네가 아니다. 너는 네가 가진 검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구나.

……역시, 이렇게 나왔나.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평온한 나와는 반대로 그 말에 기뻐하는 녀석이 있었다.

바로 내 손에 들려 있는 에이펙스의 광검이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동의의 뜻을 표합니다.

부르르 떠는 것이 저 말이 아주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어쩐지 청동검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침묵하고 있더라니. 은근히 삐진 모양이었다.

- 놀라지 않는구나.

“예상했으니까. 솔직히…… 누가 봐도 전투용 검은 아니지.”

현재 백록담에 있는 검을 시스템이 전설에 따라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제사용 검’으로서 만들어진 것일 테다.

사실상 양태원의 추측이 옳을 거란 말이다.

- 그래, 그 검은 나 같은 존재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라.

용의 눈동자가 머나먼 하늘을 향하는 듯했다. 나도 고개를 들었다. 다만 내가 보는 광경과 용이 보는 광경이 같은 것일지는 알 수 없었다.

- 내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가 반드시 파마의 검을 손에 들어야 한다.

보호하고 있는 아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양태원일 테지. 목소리가 아니라 머리로 직접 전해지는 의지는 단호한 결의를 품고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일단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양태원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도, 이 청룡이 청동검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 따위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 앞에서는 가벼운 것이다.

지금 내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파마의 검이 있으면 정말로 마계와 이어지는 길을 봉인할 수 있는 건 맞아?”

만일 청룡의 최종 목적이란 게, 양태원이 파마의 검을 손에 넣는 것이고, 내가 그 과정에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 물론이다. 나는 거짓을 말할 수 없어.

“미안하지만 그런 말엔 많이 속아 봤어.”

놀랍게도 악마인 벨리알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진실을 교묘하게 숨기고 오염시켜 독처럼 상대방의 귀에 주입시킬 뿐이다.

청룡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더 확실한 증거를 원해.”

- 내 아이를 걸고 맹세하겠다.

“그런 말만으로 하는 맹세로는 부족하군.”

- ……뭘 원하는 거니?

“나와 거래를 하려면 네 영혼도 걸어.”

그 말에 처음으로 청룡이 놀란 듯 움직였다.

- 인간이…… 영혼의 거래 방법도 아는 건가.

그야 물론이다.

예전에 나는 마계를 벗어나기 위해 벨리알과 거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벨리알은 영혼의 거래를 내세워 나의 의심을 해소하려고 했었다.

약속을 어기는 쪽의 영혼이 소멸되는 조건으로.

그야 담보도 없이 악마와 거래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물론, 제 영혼까지 걸고 용사에게 한번 죽어 보고 싶다는 악마의 심리는 도통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알고 있다.

이런 존재들과는 영혼 정도는 걸지 않으면 대등한 입장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청룡은 고개를 저었다.

- 나는 인간과 영혼을 거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악마만이 짓는 죄업이거든.

그리고 마치 나를 걱정하는 것 같은 눈길이 이어졌다.

- 또한 한 번이라도 악마와 영혼의 거래를 한 자의 영혼에는…… 거래가 파기된다 할지라도 깊은 상흔이 남는다.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룡의 말이 거짓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긴, 그 벨리알이 내게 좋은 짓을 단 하나라도 할 리가 없지. 악마가 할 법한 짓이었다.

“영혼에 상흔이 남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데? 딱히 보이는 상처도 없고, 난 여전히 살아 있잖아.”

- 보이지 않는다 해서 상처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 당장 죽지 않는다 해서 다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그 약점은 언제든 사악한 것이 파고들 수 있는 틈이 될 테지. 돌아보면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순리를 거스르는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더냐?

……와.

나는 혀를 찼다.

짚이는 것이 있었다. 외려 너무도 많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있었다.

내 클래스는 용사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순리를 거스르는 마법은 내 힘이 닿는 한 파훼가 가능하다.

그러니 같은 원리로 정신계 마법에 대한 대항력도 높아야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항상 정신계 마법에 자주 당하는 편이었다.

앙겔루스의 가호를 장비하지 않는다면 간단한 최면 마법도 간파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물론 처음 타르토스에 떨어졌을 때부터 정신계 마법에 약하기는 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유독 정신 계열의 마법에 좀 더 약해졌다고 느꼈는데…… 따져 보니 마계에 다녀온 이후가 맞았다.

그런데 그게 벨리알 그 새끼랑 한 거래 때문이었다, 이거지.

“이런 개 같은 마족 놈이…….”

그냥 확, 다시 돌아가서 죽도록 패 버릴까?

그간 했던 고생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여기서 뜻밖의 답을 찾을 줄이야.

다만 이 상황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는 답이었다.

“……그럼, 영혼의 거래는 하지 못한다고 치고. 그래도 대가는 확실하게 받아야겠어.”

- 말하거라.

아무리 지금 청룡이 원하는 것이 있어 숙이고 들어온다고 한들,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쉽게 대항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저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는 확실하게 받아 내야겠다.

“그쪽이 원하는 건 양태원에게 파마의 검을 쥐여 주는 거겠지?”

- 그래, 그게 내 부탁이다.

“나는 공짜로 부탁 같은 거 안 받아. 대가를 받고 의뢰를 수행한다면 모를까.”

타르토스에서 용병으로 일했던 만큼 의뢰를 수행하고 대가를 받는 일은 익숙했다. 상대가 청룡쯤 되는 존재인 것은 처음이다만.

- 좋다. 무엇을 원하지?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게는 영혼을 걸고서라도 알아내고 싶은 것이 있다.

“운명의 씨앗에 대해 알려 줘.”

시스템이 내게 내건 메인 퀘스트.

운명의 씨앗을 찾으라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엇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타르토스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여러 정보를 접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평범한 인간이 알아낼 수 없다는 정보라는 의미다.

물론 그게 실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벨리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다만 구체적인 사항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운명의 씨앗에 대해 시스템이 알려 줄 때까지 손 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데, 차라리 내가 성을 갈고 말겠다.

믿을 걸 믿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청룡을 만난 것은 운이 좋았다.

청룡이 벨리알과 마찬가지로 시스템에 잡히지 않는 존재라면 시스템에 대한 지식이 있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혹은, 모르더라도 나보다는 정보를 찾는 것이 수월할 테다.

그렇게 생각해 거래를 제안한 것이었는데.

- 운명의 씨앗?

그런데 용의 반응이 기묘했다.

- 그런 것을 왜 궁금해하느냐?

“뭐?”

굉장히 신경 쓰이는 발언인데.

청룡은 내 표정을 기묘한 것이라도 보듯이 들여다보더니, 얼마 가지 않아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 아, 그렇군. 진실로 모르기에 물어본 것이구나.

“……굉장히 사람 찝찝하게 만드네. 말할 생각이 있다면 제대로 알려 줘.”

- 이런, 이것을 거래 조건으로 내걸지 않았느냐? 의뢰를 완수하기 전에 대가를 줄 수는 없지.

이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의뢰 전에 착수금부터 받고 시작하는데.”

-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지. 나 또한 네가 대가를 받고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게, 시스템에도 잡히지 않는 존재라서 좀 숙이고 나가 줬더니.

청룡을 노려보자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농이다. 후후. 운명의 씨앗이라…….

청룡의 눈동자는 다시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을 헤매는 시선은 아득한 창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 나의 친우 또한 그 갈림길 앞에 선 적이 있었지.

“친우?”

- 그래, 운명의 씨앗이란 갈림길 앞에서 발아하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청룡의 말을 경청했다.

-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니냐. 한번 싹을 틔우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고, 그 모든 고통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지…… 그렇게 격렬한 것이, 결국에는 허무하게 스러져 버려.

그리움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용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새벽의 하늘이었으나, 보고자 하는 것이 나와 다른 것임은 명백했다.

- 그렇게 일순간의 반짝임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무언가를 남기며 퍼져 나가는 것. 그리하여 필멸은 불멸의 존재가 된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룡의 눈동자 속에는 흐린 별들이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역사, 그 자체가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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