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51화
여기저기서 칼을 뽑아 드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는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 경고!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 항복은 이유 불문하고 패배로 판정됩니다.
붉은 글씨가 불길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기사단장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아니, 이런 융통성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네놈은 작전상 후퇴라는 말도 모르냐?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바로 패배 판정되지만 않으면 상관없겠지. 시야를 방해하는 메시지는 일단 무시하고서 나는 눈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베른 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게 누구신가.”
베른 공이 여유로운 동작으로 장창을 집어 던지고서 허리의 칼을 빼 들었다. 소리도 없이 뽑히는 검이 상대방의 실력을 짐작케 했다.
검의 날 끝이 나를 향했다.
“타락한 자의 개가 아닌가.”
말투는 공격적이고 내용도 비난에 가까웠으나 베른 공의 얼굴은 재미있어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낮에 마주했던 ‘황제’와, 그 주위에 있던 기사나 마법사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심지어 크게 웃기까지 했다.
“아하하하! 이거 참, 걸작이군. 포로가 된 전하와 함께 타락한 기사단장이 돌아오다니!”
그때 라인하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이제 신분을 확인했으니 되었겠지. 베른 공, 폐하께 가는 길을 열어라. 적군의 항복을 가져왔으니.”
“항복?”
“방금 항복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주위의 병사들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허공에 뜬 메시지도 불길하게 번쩍거렸고.
다만 베른은 딱히 흔들리는 기색 없이 나와 라인하르트를 함께 훑어볼 뿐이었다.
“글쎄요, 전하. 재미있는 일을 벌이셨군요.”
“무엄하다, 베른 공. 적군의 대장에게 투항까지 받아 생환한 내게 그게 무슨 망발이지?”
“이 상황에서 투항을 하다니, 누구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만. 전하께서 사로잡혀 계신 동안 아군이 상당히 분투했던지라. 저쪽에 강대한 마법을 쓰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라인하르트가 깜짝 놀라자 베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역시, 아무 상황도 모르고서 저 기사단장의 말만 듣고 오신 거로군요.”
“나, 나는…….”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이 적군 내에서 후계자의 입지란 아주 알량한 듯했다.
나는 혀를 찼다.
라인하르트의 쓸모는 여기까진가.
그래도 라인하르트가 없었다면 이렇게 적군 사이로 쉽게 진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좀 더 어려웠겠지.
나는 그나마 약간 쉬었다고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이우연은 아직 마력이 채 반도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니까.
얼굴이 벌게진 라인하르트가 마침 베른을 향해 외쳤다.
“속은 게 아니다! 난 확실하게 계약을 했단……!”
“그래, 속인 게 아니야. 난 정말로 투항하러 온 거라서.”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검을 향할 기세인 병사들을 보고 결국 내가 나섰다.
계약까지 운운하다니, 라인하르트에게 맡겨 뒀다간 이대로 말아먹겠다.
“잠깐만. 너무 날카롭게 구는 거 아닌가? 보다시피 난 빈손인데.”
나는 베른을 향해 검을 차지 않은 허리춤과 빈 양손을 들어 보여 주었다.
하지만 베른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낮에 쓴 그 사술을 생각하면 당장 빈손이라고 하여 안심할 순 없지.”
“이게 당신들이 투항한 자에게 하는 대접인가? 이것 참, 우리는 꽤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는데 말이야.”
라인하르트가 내 말에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나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나는 전하를 몰래 빼돌려 황제 폐하를 뵈러 왔어. 당신들도 눈이 있다면 저 성벽이 보이겠지?”
등 뒤, 멀리 보이는 성벽에서는 그냥 보아도 횃불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탈출한 포로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뭐, 실제로는 엘리사에게 미리 지시해 놓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긴 했지만.
“흐음, 정말로 투항을 하러 왔다고?”
베른은 내 말을 듣고서 제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다지 살가운 시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기 어린 눈빛도 아니었다. 냉정하게 셈을 하고 있는 자의 눈이다.
“그래, 그렇다니까! 그러니 폐하를 뵈러 갈 수 있게 길을 열어!”
그 와중에 라인하르트는 여전히 베른을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맺혀 있었다.
아이템의 페널티가 죽음인 만큼 당연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내게 협박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됐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했을 텐데!”
“전하께서 대체 무슨 책임을 지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그를 대하는 베른은 냉정했다. 네까짓 게,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들은 것 같은 느낌이다.
베른이 명백하게 조롱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길을 연다면 저는 폐하께 차후 역모의 죄를 문책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가 비켜야겠습니까?”
투항한다는 말은 애초에 믿지도 않고 있었다.
즉, 내가 황제를 처치하러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그럼에도 실패했을 경우를 상정하고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재고 있다.
그래, 저게 베른 공이란 말이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는 사실 계획대로였다. 베른에 대한 정보는 이미 이 작전에 앞서 라인하르트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베른이라는 남자를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고, 나도 붙잡혔으니…… 그다음 지휘권은 베른 공에게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건 우리에게 유리해.”
“어떤 성향의 인간이길래?”
“베른 공은 아버지, 아니, 황제에게 충성하는 귀족이 아니다. 황제의 힘만 아니었다면 죽였을 테고, 황제가 죽는다면 울면서 박수라도 칠 인간이야.”
“그럼 즉, 네 패륜을 박수 치며 도와줄 거란 말이네. 진짜 잘됐잖아?”
“네놈은 말을 그딴 식으로밖에 못하는 건가!”
하여간 중요한 것은, 베른 공 또한 황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다만 황제의 힘이 워낙 강대하다 보니 지금은 눌려 지낼 뿐인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그렇듯이.
만일 이 베른 공이라는 자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작자라면 내 얼굴을 본 순간 검을 뽑아 들었어야 옳다. 겨우 몇 시간 전에 내가 황제의 목을 날려 버렸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주위를 둘러본 후 몰려든 군사들을 물리고, 몇 명의 기사만을 뒤에 대기시킨 상태로 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아마도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겠지. 내가 정말로 황제의 목을 칠 수 있을지.
뭐,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그 생각을 좀 단순화시켜 주기로 할까.
내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자 라인하르트와 베른 사이의 대화가 뚝 끊겼다.
베른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나를 경계했다.
“당신이 역모의 죄를 짊어질 일은 없을 거야.”
“과연 그런가?”
“그래.”
나는 아직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이우연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모두 내 등장에 놀란 터라 아무도 이우연을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이우연이 후드 밑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 30초만 더 줘.
그쯤이야 쉽지.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손에 묵직한 검 자루의 감촉이 감겨들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을 소환하였습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검에 라인하르트도, 마주하고 있던 베른도 흠칫 놀랐다.
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여기서 뒈지면 끝이잖아. 그러니 역모고 뭐고, 문책당할 일이 없다는 말이지.”
선택지 따위를 줄 것 같냐? 너희들은 그냥 길이나 비키라고.
베른이 노호성을 발했다.
“네 이놈!”
“뭐 하는 거냐, 단장!”
라인하르트가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내 검이 베른에게 날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베른 공이 검을 뽑아 들어 간신히 막았다.
그리고 내 검을 맞받아친 베른 공이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고,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희미하게 스쳤다.
“핑계를 만들어 주니 예라도 표해야 하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살기가 실려 있지 않은 검이었지만 그래도 베른이 받지 않았다면 가슴을 깊이 베였을 것이다.
약간은 정말로 벨 셈이었던 나는 혀를 차며 검에서 적당히 힘을 뺐다.
“알면 비켜. 적당히 면은 세워 줬잖아?”
“이걸로는 부족하지. 몇 합 더 부탁하네.”
“그쪽은 모르겠지만!”
힘 조절하는 게 진짜 어렵단 말이다, 이쪽은!
나는 몇 번 더 베른의 속도에 맞추어 검을 겨루었다.
상황을 아직도 채 파악하지 못한 라인하르트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당장 멈추지 못해!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뭐가 다르다는 거야, 저 덜떨어진 놈이.
머릿속으로 30초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메시지가 떠올랐다.
― 됐어. 별로 멀지 않아!
“그럼 가자!”
이번에는 힘을 좀 주어 베른의 검을 쳐 내자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베른 공이 검을 놓쳤다.
날아간 칼날에 놀라 말이 앞발을 크게 들었다.
“어이쿠, 이거 안 되겠구만. 낙마하겠어.”
실실 웃는 얼굴로 베른 공이 끔찍한 연극을 했다. 내 말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아무쪼록 성공을 빌지.”
저것도 완전 개자식이네. 라인하르트 같은 놈은 찜 쪄 먹고도 남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펼쳐질 권력 싸움 같은 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이랴!”
힘찬 기합과 함께 이우연이 탄 말이 나를 앞질렀다.
그가 말을 다루는 솜씨는 성주의 영향인 것인지 상당히 능숙했다. 막사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기마술은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앞서가는 이우연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제대로 찾은 거 맞아?”
내가 베른을 상대하며 시선을 끄는 동안 이우연은 보스 몬스터의 위치를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우연이 화답했다.
“잘 따라오기나 해!”
“말은 쉽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른 공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적당히 쫓는 체를 할 뿐이었지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상황이 달라졌다.
막사에서 쉬고 있던 병사들이 뛰어나와 이우연을 향해 검을 휘둘러 왔다.
“적이다!”
“적군이 쳐들어왔다!”
“폐하를 보호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적군이라니, 겨우 둘인데 거창하기도 해라.
내가 병사들의 검을 쳐 내는 동안에도 이우연은 거침없이 말을 몰았다.
“저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이우연이 손가락으로 한 막사를 가리켰다.
이우연과 나는 거의 동시에 말에서 뛰어내렸다. 검을 뽑아드는 건 내가 먼저였고, 이우연은 한발 늦게 마법을 시전했다.
빛나는 은빛의 실드가 막사 주변을 큰 원형으로 감쌌다.
“마법으로 막혔다! 마법사님을 불러와!”
“계속 쳐라!”
실드에 막힌 병사들이 바깥에서 고함을 쳤지만 당장 실드를 뚫기는 요원해 보였다.
“먼저 가. 난 여길 좀 정리하고 가지.”
이우연이 실드 안에 갇혀 버린 병사를 향해 검을 향했다. 내가 말에서 내려서 뛰는 순간 이우연의 눈길이 스쳤다.
이우연이 짧게 외쳤다.
“조심해!”
다행히 실드 안에 갇힌 병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보스 몬스터 바로 근처에서는 마력을 장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저 마법이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빠르게 끝내야 한다.
각오를 다지며 막사 안에 뛰어든 순간이었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 히든 루트 : ‘황제 암습’ 진입 조건을 충족하여 히든 루트가 활성화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