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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4화 (25/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4화

“아니, 진짜.”

나는 핸드폰을 집어 던지기 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나 돈 없지.

핸드폰은 고이 베개 밑에 넣어 버리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아니, 그런데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별걸 다 줄이네, 이 나쁜 놈들아!

방랑하는 구도자, 일곱 자밖에 안 되잖아! 몇 글자 되지도 않는데 그냥 제대로 부르라고!

사실 인터넷에서 이러고 있을 게 뻔해서 안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근처에 맛집은 없는지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검색을 하다가 그만 봐 버렸다.

“잊자, 잊어.”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자기들 나름대로는 숨긴다고 나온 별명이겠지, 뭐.

어차피 플레이어명은 바꿀 생각 없으니까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게, 우연히 블라인드 처리되기 전에 본 게시글에서는 내 웃기지도 않은 별명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지난 강남역 근처에서 일어난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내가 그동안 뭘 했냐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처럼 게으름을 부리며 휴식을 취한 게 아니라, 단순히 일어나 보니 일주일이 흘러 있었던 탓이었다.

눈을 떠 보니 나는 헌터 전용 병원의 6인실에 입원해 있었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안 돼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체크아웃 때가 됐는데도 내가 내려오지 않아 호텔 직원이 확인차 방에 들어왔다가 침대 위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뻗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기겁한 직원이 구급차를 부르고, 일반 병원 응급실에서 처치를 받던 도중 내 신분이 밝혀서 헌터 전용 병원으로 이송됐던 것.

이 모든 사정은 내가 일어난 후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언제 내가 헌터 등록을 했지…… 라고 잠깐 고민했는데, 강원도의 그 던전을 클리어한 다음 날, 당시 통화했던 친절한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일단 비대면으로 임시 등록을 했던 기억이 났다.

나중에 관공서에 와서 헌터임을 증명하고 정식으로 등록하면 된다고 했었다.

어차피 지금 내 능력치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수준이었고, 플레이어명만 숨긴다면 정체를 들킬 일도 없을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등록을 했던 거였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한국의 합리적인 행정에 감동을 받고야 말았다.

심지어 헌터 전용 병원의 병원비는 무척 저렴했다. 헌터들의 원활한 던전 공략을 지원하기 위한 방침이라고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던전 브레이크가 끝난 다음 바로 병원으로 갈 걸 그랬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타르토스에서 으레 그랬듯, 무작정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간 건데 까딱하면 정말 그대로 시체로 발견될 뻔했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하여간 그런 경위로 나는 헌터 전용 병원에 정신을 잃은 채 실려 왔고, 대략 일주일 만에 눈을 떴다.

그렇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이 바로 솔방울 간호사의 해사한 얼굴이었다.

2주일 전과 너무 똑같은 일이 일어난 나머지 순간적으로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있었던 모든 일이 꿈이었구나! 했는데, 내 저질인 상태창은 그대로였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

LV.79

특성 : 관철하는 아귀

클래스 : 용사

체력 : 40

근력 : 35

민첩 : 25

마력 : 750

스킬 : 사용 불가

정말 개미 눈물만큼 수치가 오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보면 볼수록 답이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레벨은 초기화되지 않아서, S급 보스 몬스터인 리치를 잡았는데도 레벨 업조차 불가능했다.

즉, 능력치는 저렙인데 렙업에 필요한 경험치는 고렙 수준이라는 무시무시한 상태.

이거 레벨 올리는 게 가능하긴 한 거냐?

그나마 다행인 건 일주일 꼬박 기절해 있어서 용사를 기리는 망토의 대기 시간이 거의 다 흘러갔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 아이템을 사용한 후 후유증이 생각보다 크다는 건데…… 이렇게 사용할 때마다 일주일이나 앓아누워야 한다면 내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긴다.

내가 이 답도 없는 수치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6인실이라 사생활을 위해 쳐 놓은 커튼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예나 환자님! 저 솔방울인데요. 커튼 걷어도 될까요?”

무슨 일이지?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 예. 무슨 일이에요?”

커튼이 걷히고 솔방울이 얼굴을 쏙 내밀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밝게 웃었다.

“다행이다! 좀 괜찮아 보이시네요.”

나를 찾아온 그는 간호사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대학가 근처를 걷다가 토익 책은 필요 없냐고 강매당할 인상이었다.

포션과 링거를 처방받고 나니 상태가 훨씬 나아졌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대로라면 지금 당장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

“헤헤, 잘됐네요!”

본인이 퇴원하는 것도 아닌데 솔방울이 밝게 웃었다. 아무래도 천성이 저런 모양이다.

“그래도 스쿼트 백 개는 하지 마시고요. 그렇지 않아도 담당 교수님이 곧 퇴원 가능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따 저녁에 회진 도실 때 말씀해 주실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솔방울과의 만남은 뜻밖이었지만 이렇게 챙겨 주니 편리하기는 했다.

그럼 내일 퇴원할 수 있는 건가. 할 일이 쌓여 있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그거 말하려고 온 거예요?”

“그냥 말 놓으셔도 되는데. 저 오늘 데이 근무라서 지금 퇴근하거든요. 그래서 인사하고 가려고 왔죠. 내일 퇴원하면 한동안 얼굴 못 뵐 테니까…….”

솔방울이 한번 숨을 들이쉰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핸드폰 번호 여쭤봐도 되나요?”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이 사람, 별것도 아닌 일을 진지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나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 번호 찍어 주세요. 전화 걸 테니까.”

“와, 감사합니다!”

솔방울은 뛸 듯이 기뻐하다가 곧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번호를 준 것에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 힐링 관련 스킬이 있는 사람 하나 알아 두면 편리할 테니까.

사실 어제 솔방울 간호사를 처음 봤을 때는 상당히 당황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요양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서울에 있는 거지, 싶어서.

“원래 서울의 헌터 전용 병원은 항상 인력난이라서 채용은 상시 모집이거든요. 물론 어느 정도 인맥이 있기는 했지만…… 가끔 헤드 헌팅을 받기도 했고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돌아온 솔방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솔방울은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 해 보려고요! 예나 씨 덕분에 결심이 섰어요.”

그 말에는 아…… 예, 정도로 대답했던 것 같다.

나 때문에 결심이 섰다는 게 도통 무슨 소린지…… 그러고 보니 솔방울이 땅을 파길래 무언가 잔소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다행히 솔방울은 그렇게 말하고 내게 친절하게 굴었을 뿐, 딱히 더 부담스럽게 치대지는 않았다.

만일 더 들이댔다면 주먹부터 나갔을 텐데 솔방울의 태도는 무해하기 짝이 없었다.

솔방울이 어제부터 오늘까지 찾아온 횟수 자체도 회진을 제외하고 두 번 정도였다. 그것도 꽤 바쁜 모양인지 몇 마디 말만 걸고 나가기 일쑤였다.

하는 말이라는 것도 다 이랬다.

예나 환자님, 밥은 드셨나요? 병원식이 맛이 없을 텐데 어쩌죠? 제가 빨리 퇴원할 수 있게 도와 드릴게요…… 뭐 그런 식이다.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누구지, 하고 보니 솔방울이었다.

방금 병실에서 나가자마자 나한테 문자를 보낸 건가? 무슨 내용인가 보니 별것 아니었다.

예나 씨! 저 솔방울이에요^0^ 몸조리 잘하시고, 내일 퇴원 잘 하세요!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이 함께 왔다. 나는 그 문자에 답장하려다가 문득, 연락해야만 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아, 맞다.”

이우연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아까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다가 이우연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린 참이었는데, 솔방울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까먹고 말았다.

이우연에게 연락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로, 리치를 쓰러트린 후 획득한 아이템의 처리였다.

내가 획득한 아이템은 ‘망령의 지팡이’와 ‘망령의 왕관’.

값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누가 보나 리치 공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나 획득할 아이템인 게 문제였다.

내가 헌터 스토어에 가서 팔았다간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이우연에게 처리를 부탁해 볼 작정이었다.

물론 이우연이 이런 부탁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제 내 정체를 알고 숨겨 주기도 한 유일한 헌터였다. 더 들킬 것도 없으니 부탁한다고 손해 볼 건 없다.

두 번째로는, 일주일 전 던전 브레이크가 끝난 후의 상황을 묻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때 깨진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고, 그리고 옵타티오를 목격했다. 옵타티오야 시스템이 나에게만 보여 준 일종의 오류라고 치더라도, 깨진 메시지는 이우연도 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도 물론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떠오르는 바는 있었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는 이우연의 의견도 묻고 싶었다. 그의 의견은 나와 다를 수도 있으니까.

타르토스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으려면 아주 작은 실마리도 놓칠 수 없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만일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진작 연락했을 것을, 일주일이나 드러눕는 바람에…… 쓸모없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곧바로 병상에서 일어섰다.

이우연에게 연락하려면 아이템을 써야 했으니 조용한 곳을 찾아갈 셈이었다.

나는 조용한 곳을 찾아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직 낮이었지만 옥상에 꾸며진 하늘 정원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차가운 바람이 얇은 병원복을 뚫고 들어와 팔을 연신 쓰다듬으며 아이템을 꺼냈다. 아주 조그만 파란 보석으로 된 귀걸이가 나타났다.

귀걸이를 햇빛에 비추어 보자 반짝반짝 빛이 났다.

흠,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해 보이긴 하는데. 시스템으로 아이템을 상세 조회해 보았다.

- 푸른 인연의 귀걸이 : 한 쌍의 귀걸이를 나눠서 착용한 경우, 상대방과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단, 대화 내용은 시스템 메시지로 출력됩니다.

타르토스에서 쓰던 연락 아이템과 그다지 다를 건 없는 설명이었다.

나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한 번 더 둘러본 후 조용히 에이펙스의 광검을 꺼내 들었다.

검집에서 검을 꺼내자 희고 투명한 날이 드러났다.

약간 긴장하면서 귀걸이를 검날에 갖다 대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흠.”

저주가 걸려 있지는 않은 것 같네.

에이펙스의 광검은 클래스 보정을 받아야 성검으로 진화하지만, 광검인 상태로도 어느 정도의 저주는 간파해 낼 수 있었다.

검날에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이 귀걸이에 딱히 문제가 없다는 것.

물론 아주 고위의 저주라면 이런 식으로 알아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확인은 해야 하니까.

이우연을 의심한다기보다는 그냥 습관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귀걸이를 착용하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푸른 인연의 귀걸이를 사용하였습니다!

-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 중입니다…….

- 상대방의 의사가 확인되었습니다!

진짜 전화랑 별다를 바도 없네.

나는 이우연의 메시지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곧 허공에 떠오른 하얀색의 메시지.

―오, 일주일 만에 완쾌한 거야? 오래 걸렸네.

목소리도 표정도 없는데 그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이우연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

아, 한 대 때리고 싶다…….

그래도 얄밉기는 했지만 내가 이우연 덕을 본 건 사실이었다.

일주일 전 던전 브레이크 이후, 뉴스 어디서도 ‘랭킹 1위’에 대한 말은 없었으니까.

워낙 보는 눈이 많았으니 입소문은 어쩔 수 없이 좀 난 듯싶었지만 나도 그런 루머까지 어떻게 막아 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고마운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솔직하게 감사하기로 했다.

“응, 덕분에. 이제 뉴스 봤어. 내 이야기 없더라. 고맙다.”

― ……너무 오래 연락이 없길래 비꼬는 거였는데, 진짜 낫는 데 일주일이나 걸린 거야? 대체 왜? 어디에 있는 건데?

어라,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당황해 침묵했다.

그나저나 비꼬는 거였냐?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시스템 메시지는 쉴 새 없이 폭주하고 있었다.

―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데다 당신 사정이 있으니 그냥 보낸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할 걸 그랬잖아.

― 그렇게 심각하면 왜 이야기 안 했어? 포션은 안 쓰는 거야?

― 지금 어디야? 혹시 아직도 회복 못 한 건 아니지?

― 어딘지 밝히기 싫으면 어디라도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포션이라도 받아 가면 안 될까? 걱정되는데.

“잠깐만. 좀 진정해라. 완쾌했다니까.”

나는 당황해서 줄줄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끊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잔소리를 백 마디씩 듣는 기분이었다. 또 이우연의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에 내가 황급히 말했다.

“그건 그렇고, 부탁할 게 있는데. 혹시 언제 시간 돼?”

금방 답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또 한참 동안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딴짓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체감상 5분 정도의 침묵이 흘렀을 때 겨우 메시지가 떴다.

― 내일 오후 4시 어때?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내게는 딱 좋은 시간이었다. 아침에 퇴원 절차 밟고, 정식으로 헌터 등록한 다음 만나면 되겠군.

“좋아, 강남역에서 만나도 돼?”

― 나야 상관없지만 그쪽은 길드랑 너무 가까워서 보는 눈이 많아. 사람 없는 곳에서 만나는 게 낫지 않겠어?

“어, 그럼 어디가 좋지?”

― 당신만 괜찮다면 내 집으로 와.

그 메시지를 보고 이번에는 내가 잠시 침묵했다.

집으로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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