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2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 혼자 몇 년을 산 사람이 잘못한 것 아닙니까?”
지재만이 위협적인 목소리와 함께 눈을 희번득하게 떴다. 감히 네까짓 게 이혼을 하려 드느냐는 듯 오만한 말투였다.
“피고는 결혼 생활의 평생 동안 원고를 지속적으로 폭행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까지 손을 올렸습니다. 원고 측에서 원만한 해결을 원하니 협조해 주시면 합의 조건을 말씀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박 변호사의 말에 지재만이 버럭, 소리쳤다.
“합의? 허, 참! 합의랍니다, 재판장님. 이것 좀 보세요. 자기도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 이렇게 하, 합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지금! 꼴사납게 변호사에 아들까지 끼고 와선!”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권은숙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박 변호사가 항의하기 전 피고는 진정하시라는 말이 낮게 울려 퍼졌다. 지재만은 이미 법정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내 이름을 부르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였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자리한 법정 경위가 박은숙의 옆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재만의 옆엔 아무도 없었다. 변호사도, 증인도.
“지예준! 네가 말해 봐!”
“피고는 정숙하세요.”
그는 아내 편 증인석에 앉은 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눈빛은 아비의 위협에 단 조금도 깜짝하지 않았다.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피고가 원고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가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피고가 증인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저뿐 아니라 동생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동생이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던졌던 드라이버에 맞아 어깨에 흉터가 남았습니다. 지금도 있고요.”
거침없는 증언에 판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혼 사유는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 약 8년 전, 피고가 원고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아 아파트 관리비가 약 5개월간 미납된 것도 확인 가능하네요.”
“생활비는… 저, 저도! 돈 벌러 나가느라 집에 못 보낸 겁니다, 재판장님! 예준 엄마, 잘 생각해 봐. 그때 내가 돈벌이가 뭐 있었어? 응?”
“당시 피고가 직장이 없었습니까? 원고, 대답해 보세요.”
“아, 아닙니다. 저희 큰애가 고등학교에 다녔을 땐 남편은 이미 체육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권은숙의 말에 힘입은 박 변호사가 통장 사본이 찍힌 종이 몇 장을 추가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장님, 피고는 그 당시 불법 골프 도박에 재산을 탕진하며 지냈습니다. 이 또한 올려 드린 서류에서 확인 가능하십니다. 수백만 원대의 금액이 원고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서 수차례씩 빠져나갔습니다.”
지재만은 불법 도박 자금을 권은숙의 통장으로 굴렸다. 제 아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 생각한 그는 여차하면 그 죄를 아내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
“원고, 저 말이 사실입니까?”
“네, 네. 사실입니다, 재판장님. 남편이 생활비를 주, 주지 않아서 밀가루를 사다 수제비만 해 먹던 적도 많았, 습니다…… 통, 통장은… 저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신혼 초부터 자녀 학비로 준비하던 것이었는데, 남편이 저 몰래 사용한 줄 몰랐습니다.”
어머니 말대로 한동안 수제비나 국수만 먹어야 했던 적이 있다. 동생은 이런 것 말고 치킨이 먹고 싶다며 투덜거렸고, 자신은 체육관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몇 번이나 치킨이며 피자를 사 들고 갔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겨우…….
미안함 가득한 눈이 아들을 향했다. 지예준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화를 누르고, 또 누르며 꾹, 주먹을 쥐었다.
“피고의 불법 도박 건은 이와 상관없이 따로 처벌이 들어갈 테니 충분한 판정 후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님! 야, 이, 이, 씨팔! 권은숙! 지예준-!”
법정 경위에게 저지당한 그가 침을 줄줄 흘리며 사지를 허우적댔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욕설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원고는 돌아가도 좋다는 말에 지예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부축했다.
“어머님, 수고 많으셨어요.”
박 변호사의 후련한 목소리가 끝을 알렸다.
4주 후.
<원고와 피고는 이혼하고 피고는 원고에게 재산분할로 일억 원을, 위자료로 천만 원을 지급하라.>
사랑하는 자식들을 마음껏 만나며 열심히 일하는 일상이 그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왔다.
“쑥아, 오늘 별일 없으면 내캉 성차이 행님네 콜? 영이 아빠가 밤낚시 가가 내 넘 적적하다아이가….”
“예, 형님. 좋죠.”
약 27년 하고도 3개월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