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7월 둘째 주 목요일.
보육원에 온 지도 근 한 달이 지났다.
소망 보육원 초등부 아이들과 신 원장, 그리고 강선을 실은 봉고차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거쳐 커다란 하우스 앞에 멈춰 서자 이들을 마중 나와 있던 가족들 중 한 인영이 쏜살같이 달려와 문을 열었다.
“원장님!”
“어머, 어머, 수영아!”
애교 점이 찍힌 코끝과 옅은 주근깨로 덮인 뺨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보고 싶었어요.”
“아이고… 어른 다 됐네, 우리 수영이. 아!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이렇게 뵈니 너무 반갑네요. 얘들아 안녕-!”
먼저 하차한 신 원장이 김수영의 부모와 인사를 나누며 아이들을 짝지어 줄을 세웠고, 아이들이 마구 풀어 헤쳐 엉켜 버린 안전벨트를 풀던 강선은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좌석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어?”
“선이 형!”
“뭐야, 너 수영이야?”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키는 강선보다 작은 수영이 차 안으로 들어와 와락, 껴안았다.
“와, 진짜 형이야? 와, 대박. 와, 형, 진짜 어른이네?”
김수영은 있지도 않은 꼬리를 붕붕 흔들 듯 반가운 얼굴을 감추지 않고 강선의 손을 잡아 아래위로 흔들었다.
강선이 기억하는 게 확실하다면, 이게 지금 스물세 살이나 먹은 성인 남자라는 건데…….
“촐랑거리는 건 여전하네.”
“으하하, 그런가? 아냐, 형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래. 우리 옛날에 막 원장님 몰래 귤 까먹었던 거 기억나?”
귤이라는 말에 순간 엄한 것이 스쳐 갔지만 강선은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다잡았다.
“응, 기억하지.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리자.”
“내일모레까지 있는 거지?”
앗싸-! 하며 폴짝 뛰어내린 김수영은 등에 걸쳐 두었던 밀짚모자를 푹 눌러썼다.
깨끗하고 조용한 자연 환경 속에서 살면 저렇게 밝게 살 수 있는 걸까.
‘저건 좀 지나치게 밝긴 하지만…….’
순수하고 해맑은 김수영이 꽤나 부러운 강선이었다.
✲ ✲ ✲
부재중 전화 26통, 메시지 19개.
지예준의 집착은 이제 무서울 지경이었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한상연에게서 지예준의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강선이 보육원으로 떠난 다음 날부터 지예준은 김초희에게 연락해 강선의 행방을 묻고 다녔으며 한상연 또한 귀국하자마자 그에게 붙잡혔다고 했다.
분명 그는 울산에 있을 텐데도 꼭 서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순 바보인 줄 알았는데 애가 생각보다 무섭더라.
“……바보 아닌데.”
-너 도대체 그 체교과랑 무슨 사이냐? 보기만 해선 뭔 도망간 애인 찾듯 굴더만.
“도망은 무슨… 방학 끝나면 다시 갈 거야.”
하우스 안에서 강선은 한쪽 어깨에 핸드폰을 끼고 손으로 조심조심 표고버섯을 따 바구니에 넣었다. 버섯은 나무에서나 자라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나무 통 같은 것에 뿅뿅 붙어 있는 모양이 무척 신기했다.
-그럼 너 거기 있는 거 말해 줘도 돼? 뭔 놈이 하루에 전화를 다섯 번씩 하냐, 진짜… 나도 우리 아빠랑 이렇게까진 안 하는데.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심통이 잔뜩 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기 등이 터지는 걸 제일 귀찮아하는 한상연이었던지라 마음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아주 조금 자리했다.
“말하기만 해.”
-그럼 지금처럼 맨날 얘 전화 받고 살라고?
“…….”
-지난주 토요일엔 공방까지 찾아왔더라.
“뭐? 걔 지금 울산인데?”
-그건 나야 모르고… 우리 누나한테 너 없냐고 물어봤다던데,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아냐.
아, 미치겠다…….
아무래도 지예준은 저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만 좀 잊으라는 마음으로 떨어진 건데 강선이 한 발자국 멀어지면 지예준은 세 발자국씩 성큼 다가왔다.
“미안. 상은 누나 곤란했겠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누르며 강선이 후우, 한숨을 쉬었다.
“일단 너나 초희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해 놓을게.”
-…너희 진짜 뭐 사귀다 헤어지기라도 한 거야?
“…….”
-……진짜?
“……김초희한테 말하면 뒤진다.”
-씨발, 미쳤다. 강선이 연애를 하다니.
이 새끼가…….
속으로 오만 가지 욕을 짓씹은 강선이 계속 입을 떼지 않자 한상연은 허, 참, 흐어, 하며 저 혼자 구구절절 떠들어 댔다.
-그래, 뭔가 이상했어. 맨~날 둘이 붙어 다니질 않나, 밥도 같이 먹질 않나, 밤에 게임 좀 하자고 부르려면 꼭 둘이 같이 있고… 참나.
“…….”
-야, 웬만하면 화해해라. 너도 너지만 걔도 한 성격 하는 것 같던데… 둘이 그렇게 좋아 죽었으면 잘 살아야지 왜 나랑 김초희만 괴롭히냐?
할 말이 매우 많았으나 강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속으로 10초를 셌다. 눈앞에 있었다면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냐’며 버섯이 달린 저 원통으로 머리를 깡깡 때려 주는 건데, 그럴 수 없으니 자신이 참을 수밖에.
“……미안.”
-미안할 건 없고. 아무튼, 나름 서로 제일 친한 친군데 이런 거 하나 눈치 못 채서 나야말로 미안하다, 야. 지예준한테 또 연락 오면 너 거기 있다고 할게. 그래야 걔도 네가 돌아오든 말든 기다릴 거 아냐. 어디랬지? 충청도 어디?
지금처럼 내내 한상연이나 김초희를 닦달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한상연 말처럼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아… 여기가 어디냐면…….”
자신은 충북에 있는 한 버섯 농장에서 봉사 활동 중이니 끝나면 알아서 올라가겠다, 그러니 전화 좀 그만하고 가만히 있으라며 지예준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를 한상연에게 전했다.
직접 전화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감정에 격해진 자신이 또 무슨 폭언을 퍼부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둘이 잘되면 술 사라.
“지랄.”
-쟤럘~
아무래도 당장 서울로 올라가 한상연의 입을 깡깡 쳐 줘야 할 듯싶다.
✲ ✲ ✲
“형, 고기 먹어!”
“어어, 고마워.”
넓은 펜션 거실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TV에선 한창 프로 야구 경기가 진행 중이었고, 오늘 경기는 세진 돌핀스와 한경 스타즈의 울산 홈경기였다.
익숙한 구단명에 예민해진 강선의 신경은 누군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내내 TV를 향하고 있었다.
“원장님! 내일은 우리 물놀이해요?”
“응, 내일 물놀이하지.”
“몇 시에요? 얼마나요?”
“글쎄~ 한 세 시간 정도?”
“에에엥! 너무 적은데…!”
숯불에 잘 구워진 삼겹살을 먹던 아이들이 ‘네 시간은 안 돼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안 돼요?’ 하며 아우성쳤다.
“내일 오후에 비 온대 얘들아. 그러니까 그 전에 신나게 후딱! 놀고, 안에 들어가서 맛있는 팥빙수 먹자. 응?”
양옆에 남자애들을 끼고 앉은 김수영이 장난꾸러기처럼 싱글거리며 입에 상추쌈을 넣어 주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래도 보육원에서 나름 형 역할이었다고, 투덜대는 애들을 챙기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팥빙수는 우리가 만들어요?”
“그럼~ 형아가 아까 우유도 얼려 놓고 초코시럽도 갖다 놨지.”
“그럼 수영하고 팥빙수 먹을래요!”
“먹을래요!”
“팥빙수! 팥빙수!”
단번에 만들어진 김수영 군단이 팥빙수, 팥빙수, 노래를 불렀다.
완전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산골 소년의 빙수 이야기 수준이었다.
메론 빙수, 딸기 빙수, 망고 빙수… 읍내까지 한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사는 애가 강선보다도 프랜차이즈 빙수 메뉴를 더 잘 알았다.
[네, 다시 왼쪽! 높게 떴습니다. 좌익수, 잘 따라가는데요-!]
[오-! 김인수! 점프 캐치… 네! 잡았습니다! 다치진 않았나 모르겠네요. 다시 승부는 세진 돌핀스의 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을 보며 뛰어가는 선수를 잡던 카메라가 다시금 선수의 모습을 비추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모자를 고쳐 쓰는 이 뒤로 함성을 내지르며 박수 치는 세진 돌핀스의 스태프진이 포커스를 받았다.
[아~ 네. 최응철 감독이 아주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요.]
[역시 세진이죠. 홈에선 절대 지질 않아요-]
아주 찰나였다.
“어…….”
해설진의 말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감독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점수판에 가려져 겨우 반절만 보였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땅을 보고 있는 건… 지예준이 확실했다.
그의 위치를 확인한 강선은 카메라가 스태프진 쪽을 비출 때마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옆에서 김수영이 무어라 말을 걸어도 강선의 눈은 쌀알보다도 작게 보이는 세진 돌핀스의 스태프석만 좇았다.
카메라는 선수에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지예준이 조금이라도 나온 화면은 대부분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 뒤로 서너 번 발견한 그의 모습은 짧은 시간에 보아도 너무 어둡고 초췌해 보였다.
저 모습으로 매일…….
“형, 야구 좋아해? 아까부터 눈을 못 떼네.”
어떡하지.
“형?”
지금 당장, 지예준이 너무 보고 싶었다.
✲ ✲ ✲
“형, 진짜 안 들어갈 거야?”
“응. 괜찮으니까 가서 놀아.”
그늘진 평평한 바위에 작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카메라를 꺼내자 김수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물 싫어하는 건 여전하네.”
“그렇지 뭐. 사진 찍어 줄 테니까 애들이랑 가서 놀아.”
그는 산바람에 넘실거리는 앞머리 사이로 나타난 하얀 흉터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 강선이 바다에서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냥 여기 있을까?”
“계곡에서 논다고 튜브까지 끼고 왔으면서, 무슨.”
작정을 한 모양인지 래쉬가드에 워터슈즈까지 신고 온 김수영의 행색에 입꼬리가 픽, 올라갔다.
나름 저를 챙긴답시고 구는 게 꽤나 기특했지만 정말로 옆에 앉으라 하면 당장 물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일 게 뻔했기에 강선은 벌써 이쪽을 보며 브이 자를 그리는 아이들을 향해 렌즈를 돌렸다.
“큰형이 놀아 줘야 애들도 재밌지. 가서 공놀이도 좀 해 주고.”
“네에-”
크고 작은 돌멩이 사이사이를 밟으며 금방 물가에 도착한 그와 아이들을 프레임에 담아 찰칵, 셔터를 눌렀다.
맴맴, 찌르르르- 우는 매미와 첨벙이며 물장구치는 소리가 몹시도 여름다웠고 오후 늦게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와 다르게 하늘 또한 쾌청했다.
어제저녁, TV에 비춰진 지예준의 모습을 보아서인지 간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계속해서 생각나는 그의 어두운 얼굴이 감은 눈을 열고 들어와 이별을 고하는 순간 보았던 눈물과 겹쳐졌다.
자신과 헤어진 상황에서 그 아버지라는 놈에게 갔으니, 지예준에겐 매일이 상처에 불을 붙인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한상연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뒤로 핸드폰 전원을 꺼 가방에 쑤셔 넣은 게 과연 잘한 짓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꺼진 핸드폰에 대고 쉴 새 없이 통화를 걸지는 않길 바랐다.
붙임성 없고 낯가림이 심해도 그곳에서만큼은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아, 진짜 미친놈인가.’
있는 상처 없는 상처 다 줘 놓고 잘 지내길 바라는 꼴이 허망하다.
✲ ✲ ✲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나타난 지예준이 활짝 웃으며 몸을 끌어안았다.
-좋은 아침.
-응, 좋은 아침.
지예준의 등을 마주 안고 아침 인사를 나누는데, 복도 창밖으로 보인 하늘은 어두컴컴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발목은 괜찮아?
-어? 발목?
-주말에 병원 가자.
손을 마주 잡은 그가 가리킨 곳을 내려다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깁스가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1층을 향해 내려가는 숫자가 어딘가 이상했다.
7층을 지나 바로 5층으로 가더니 다른 층을 건너뛰고 곧바로 1층에 도달하며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1층입니다.>
-내일 집으로 갈게.
그러나 열린 문 너머로 보인 것은 캄캄한 비상구 계단이었다.
-……준아?
분명 잡고 있었던 그의 손이 모래처럼 사르륵, 사라져 고개를 들자 지예준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강선아, 좋아해.
좋아해, 미안해, 잘못했어, 미안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공간과 함께 그의 모습 또한 멀어져 갔다.
-지예준!
급하게 손을 뻗어 보아도 더욱 멀어지기만 할 뿐, 발은 도무지 나아가지지 않았다.
꼭 뒤에서 누군가 뒷덜미를 잡고 놔 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가 버리면, 나는…….’
“……아.”
막혀 있던 샘이 터지듯 몸을 가득 채운 건 물소리와 햇빛이었다.
“형, 일어났어? 잠 한번 무섭게 자네. 깨워도 안 일어나고…….”
“……나 잤어?”
“응. 엄청 잘 자던데?”
깜빡깜빡.
뻐근한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하품이 절로 나왔다.
분명 애들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는데 언제 누워서 잠에 든 건지…….
허리를 일으켜 쭈욱 기지개를 켜고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아이들은 원장님과 김수영네 부모님과 함께 수박이며 컵라면을 먹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 몇은 여전히 물놀이 삼매경이었다.
시간을 보니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몸이 물에 잔뜩 젖은 것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강선은 제 양다리에 아이들이 장난삼아 널어 둔 물안경과 젖은 수건들을 걷으며 다시금 길게 하품했다.
“어제 잘 못 잤어?”
“아니… 그냥 피곤한가 봐. 아, 고마워.”
김수영에게 수박 한 조각을 받아 한입 베어 물자 달달하고 시원한 과즙이 입안 가득 들어찼다.
차라리 늘 꾸던 악몽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꿈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한낮의 태양 때문인지, 내내 돗자리에 누워 있던 등이 땀으로 푹 젖어 있어 몹시 찝찝했다.
수박을 먹으며 옷을 팔랑이고 있자 김수영은 그러지 말고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 게 어떠냐 했지만 강선은 여전히 내키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형.”
“응?”
“형은 여자 친구 있어?”
“……뭐?”
갑자기 나온 뚱딴지같은 소리에 강선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제 옆에 앉은 김수영의 양 뺨이 미묘한 수줍음과 함께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눈치를 살살 보면서 고개를 가만히 놔두질 못하는 저 행동은 평소에도 누구 씨에게서 많이 보던 것인데, 설마…….
“수영아, 너…….”
급격히 흔들리는 동공에 꿀꺽, 침을 삼켰다.
안 된다, 김수영. 너까지 이러면…….
“나… 좋아하는 누나가 있어서… 연애 상담해도 돼…?”
“…….”
“……형?”
“……어, 어어. 뭐? 아, 그래? 아, 어. 청춘이네…….”
“청춘씩이나 되는 일인가…?”
헤헤, 하며 웃는 얼굴이 해맑다.
‘시발.’
스윽-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강선은 주먹으로 제 입을 찰싹찰싹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며 민망함에 달아오른 귀를 벅벅 문질렀다. 하마터면 본의 아니게 왕자병 증세를 보일 뻔했다.
큼큼, 괜히 헛기침을 하던 강선에게 김수영은 자신의 러브 스토리를 구구절절 풀기 시작했다.
우연히 읍내에 있는 군립 도서관에 갔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분과 친해지게 되어 서로 누나 동생 할 정도로 가까워졌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그 사람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막상 번호를 주고받으니까 좀 어려워지는 거 있지?”
“뭐가?”
김수영이 콧잔등을 쓱쓱 문질렀다.
“나는 연애적인 감정으로 만나고 싶은 건데 누나는 아닐 수도 있잖아. 몇 번 밥도 같이 먹었는데 딱히 분위기가 변한 것 같지도 않아서…….”
“어… 그분한테 고백은 했어?”
“헐, 그걸 어떻게 말해…!”
“뭐야. 고백도 안 하고 뭘 바라냐, 바보야.”
고백이라는 말에 김수영의 얼굴이 불에 달궈진 듯 벌게졌다.
“너 여자 친구 안 사귀어 봤어?”
“안 사귀어 본 건 아니고, 딱 한 번…….”
부끄러울 일이 아님에도 김수영은 뭐가 그렇게 수줍은지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비밀이야’ 했다.
“마냥 애기인 줄만 알았는데 연애 상담도 하고. 다 컸네.”
“아, 형- 장난치지 말고오…….”
강선은 제 팔뚝을 잡고 흔들며 투정 부리듯 매달리는 김수영의 어깨를 도닥였다.
“말을 해야 상대가 알지.”
“으아,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거절당하면 또 어떡하지?”
“말도 안 해 보고 겁부터 먹으면 어떡해. 거절당하는 게 무서우면 계속 이렇게 지내는 건데… 그건 싫잖아.”
그 말에 또 김수영은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누구한테 고백해 본 적 없지? 하긴, 형은 맨날 받아 보기만 했을 것 같긴 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푸욱,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강선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방금 그 말을 듣자마자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예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늘 열렬하게 고백하던 쪽은 그였는데, 자신은 그때마다 뭐라고 대답했지.
“아- 그래도 누구한테 말이라도 하니까 후련하네.”
“…….”
“솔직히 이런 얘긴 친구들한테 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괜히 민망하고.”
제 말에 대답 않는 강선의 반응을 뭐라고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김수영은 정말 속이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 형. 그럼 난 다시 애들이랑 놀다 올게.”
“……아냐. 뭘.”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한달음에 아이들 틈에 섞인 그가 크게 웃으며 물장구를 쳤다.
등을 적시고 있던 땀은 어느새 다 말랐고 바위 옆에선 어른들이 모여 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하늘 저 멀리서 까만 먹구름 같은 것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난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강선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 ✲ ✲
“아이고, 차가워라! 얘들아 후딱 들어가-!”
맑았던 하늘은 어디로 가고, 후드득 쏟아지는 빗줄기에 모든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먼저 하우스에 도착한 김수영의 부모님이 우산을 있는 대로 꺼내 와 아이들에게 쥐여 주었고 아이들은 우산 하나에 둘, 셋씩 들어가 물장구를 치며 펜션으로 뛰어갔다.
강선은 펜션 욕실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남자아이들이 씻는 것을 도왔다.
다행히 말썽을 피우는 애들은 아닌지라 큰 사고는 없었지만,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의 머리를 일일이 감겨 주는 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대머리가 될 수 없다는 아이들의 아우성에 제 머리보다 더 꼼꼼히 샴푸질을 했더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얼얼했다.
내일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작업에 몰두해야 하는데 손목까지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라 아이들을 씻겨 내보내고 빠르게 샤워를 마친 강선은 김수영에게 파스를 빌려 손목을 꼼꼼히 감쌌다.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도 지치지 않았는지 아이들은 펜션 거실을 뛰어다니며 팥빙수, 팥빙수, 노래를 불렀다.
“아휴, 진짜 애들 체력은 못 따라간다니까.”
다른 방 욕실에서 여자아이들을 씻기고 나온 신 원장이 잔뜩 젖은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리며 호탕하게 웃다 시끄럽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곧 쯧쯧, 혀를 찼다.
“그나저나 내일까지 이러면 집엔 어떻게 간담…….”
“왜요?”
“여기 산길이 워낙 험해서 장마 때는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한다고 하시더라구. 안 그래도 수영이 어머님이 여기서 하룻밤 더 지내는 건 괜찮다고 하셨지만은… 선이, 내일은 작업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이곳으로 오는 산길이 심하게 구불거리고 가파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하루 정도 일을 미루는 것쯤이야 상관은 없어 강선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장맛비는 아닌 것 같은데… 내일이나 모레면 그치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아, 가서 수영이 도와야지. 혼자 얼음 가느라 팔 빠지겠다.”
“제가 가서 도울게요.”
강선이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찾아 신는 동안 신 원장은 아직도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중재하러 거실로 향했다.
빨리 비가 그쳐야 할 텐데.
습하고 차가운 공기에 속이 답답했다.
✲ ✲ ✲
<쏟아지는 장대비, 프로 야구 우천 취소……>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빗줄기가 요란했다.
“예준 씨, 이것 좀 같이 들어 줘요!”
“아, 네!”
거울을 보다 급히 모자를 눌러쓴 지예준이 저를 부른 이들에게 다가갔다.
거친 야구모자 천이 상처를 짓눌러 쓰라렸지만 아픈 티를 낼 수 없어 묵묵히 상자 하나를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준비 다 했는데 갑자기 이러네. 이따 밤에 애들이랑 치킨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시죠. 어차피 할 것도 없지 않아요?”
앞서서 가고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살짝 고개를 돌려 지예준에게 말을 걸었다.
‘최성현’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코치도, 정식 직원도, 하다못해 아르바이트생도 아닌 지예준을 챙기는 몇 안 되는 인물이자 원정 경기 때마다 늘 같은 방에 배정받는 이였다.
지예준이 이번 시즌에 새로 들어온 지재만 코치의 아들이라는 소문에 주변에선 혹여나 아버지 이름을 업고 진상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우려와 다르게 예의 바르고 조용한 지예준의 모습에 누군가는 ‘정말 지재만 아들이 맞느냐’며 놀라기도 했다.
“아… 괜찮아요.”
“왜요, 벌써 약속 잡았어요?”
“……네.”
“아따, 빠르다.”
긴 복도를 지나 들어간 지하 주차장은 어둡고 습했다.
울산에서 대전까지 올라왔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저녁 경기가 미뤄진 탓에 50명 안팎의 사람들은 다시 울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미 선수들은 다른 버스에 탑승했고 자잘한 짐 몇 개만 옮기면 되었기에 지예준은 남은 물품을 체크하는 최성현 옆에 서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지예준은 울산에 내려온 이후로 단 잠시도 강선을 놓지 않았다.
이따금씩 방으로 불러낸 아버지에게 ‘도대체 쉬는 날마다 어딜 싸돌아다니느냐’며 손찌검을 받을 때에도 제가 모르는 곳에 있을 강선만 떠올렸다.
낮에는 한상연과 김초희에게 연락해 강선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며 밤에는 홀로 있을 강선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고, 어떤 밤엔 강선이 혼자가 아닐 수 있을 거라는 상상에 자신이 악몽을 꾸기도 했다.
한상연(서예): 충북 여산군 도은면 읍내2리 88-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