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나에게만 헤픈 남자 (12/12)

“어머님 얘기 해 줄래요?”

지하는 시류의 품에 안겨 물었다. 두 사람은 시류의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시류의 품은 따뜻했다. 사랑을 나눌 땐 델 듯 뜨거웠지만 지금은 딱 맞는 온도로 그녀를 안아 주었다.

“미안해요. 지금에야 물어봐서.”

“전혀 아닙니다. 그런 마음 가질 필요 없어요.”

그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아들을 걱정해 주던, 아주 다정하고 강하고 어진 분이었다. 그의 기억에 남은 어머니의 모습은 단편적인 기억들뿐이었다. 어쩌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빨래를 널며 노래를 불러 주던 모습.

비 오는 날 이불 속에 함께 누워 자장가를 불러 주며 재워 주었던 기억.

설거지를 하다 돌아보며 웃어 주던 미소.

옷을 입혀 주며 우리 아들 많이 컸다, 칭찬하던 담갈색 눈동자.

하나같이 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느 순간 깨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걷잡을 수 없이 비뚤어졌어요. 아버지도, 나도… 어쩌면 아주 약한 사람들이었는지도. 우릴 똑바로 세워 주었던 사람은 어머니였나 봅니다. 주춧돌이 무너지자 함께 망가졌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땐 그렇게 나쁘진 않았는데, 한순간에 폐인이 되었죠. 제가 여기로 온 후에도 돈 문제로 회장님을 꽤 괴롭혔던 모양이더군요. 그 돈 받아서, 술과 노름에 탕진하곤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지하는 마음이 아파 시류를 안아 주었다.

“흠, 저 사춘기 소년 아닙니다. 위로해 주실 생각이라면….”

“미안해요. 마음 아픈 거 물어봐서.”

시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애써 주는 게 고마웠다. 그 마음만으로도 따뜻했다. 시류는 팔을 둘러 지하의 가는 등을 끌어안았다.

“이제 회사 안 떠날 거죠?”

“글쎄요.”

“그게 뭐예요? 절대 떠나면 안 되는데. 아빠가 저승에서 나 막 꾸짖을 텐데.”

“당신 하는 거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아, 정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말만 해요.”

“글쎄요. 지금은, 이렇게 매일 내 옆에서 잠드는 것.”

“그리고 또요?”

“승마 금지.”

“그건…. 알았어요. 안 탈게요.”

“다치지 말 것.”

“네.”

“그리고 여행 갈까요?”

“여행은 왜요?”

“이번엔 웃으면서. 웃게 해 주고 싶으니까.”

“아….”

지하가 끄덕였다. 아마 즐겁게 지내지 못했던 신혼여행을 만회하겠단 소리이리라. 그건 그의 탓만은 아니었는데. 그렇기에 지하도 행복한 의미의 신혼여행을 다시 가고 싶어졌다.

“가요.”

이 남자는 늘 그렇듯 자신을 생각해 준다. 깊이.

그래서 자신도 더 깊이 그를 생각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또 있어요?”

“내 아이를 가져 주세요.”

지하의 눈이 커졌다. 시류가 시트를 젖히고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는 창피함에 몸을 가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대답은요?”

시류가 부드럽게 채근했다. 지하가 곧 활짝 웃었다. 그의 목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대답은 당연히… ‘Yes’였다.

***

평온한 나날이 흘러갔다. 행복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시류는 곧장 회사로 복귀했고, 지하도 졸업 작품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두 사람의 화해에 그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나영이었다. 이제 딸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시류를 만날 수 있다고 누구보다 좋아했다. 나영과 시류는 장서 관계뿐 아니라 사업 파트너로서도 더없이 완벽하게 맞았다.

시류는 무리 없이 대표직을 승계했고 회사는 안정 속에 순항 중이었다. 정웅의 경영 철학을 이어받아 점차 발전하는 중이었고, 그가 유언처럼 남긴 장학 사업도 확장해 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시류와 지하의 가슴 한 곳엔 어쩔 수 없는 무거움 하나가 깃들어 있었다.

바로 몇 달 전 매스컴을 통해 접한 주아의 소식.

자살 기도였다.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스스로 몸을 던진 게 아닌가 하는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다. 그 사고로 손목 인대가 끊어져 주아는 더 이상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접하고 시류는 많이 아파 보였다. 지하는 그런 시류의 아픔을 이해했다. 어쩌면 가해자엔 자신도 포함될지 몰랐기에.

서재에 앉아 있는 시류에게 지하가 다가갔을 때 시류가 지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하는 아무 말 없이 시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누군가가 행복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라는 먹이 사슬에 얽힌 사람들이 아닐까? 그게 지하는 참 슬펐다.

차라리 그가 지하의 앞에서 아파해서 다행이었다. 그는 굳이 감정을 숨기고 피하지 않았다. 아주 안타깝게 생각했던, 여동생보다 더 가까웠던 주아의 불행에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

다만 그의 옆엔 자신이 있고, 자신의 곁엔 그가 있다. 아무도 없기에, 아니, 시류를 잃었기에 주아는 불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후 간간이 들린 소식으로는, 그녀가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양부모님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곳에서 작은 학원을 하며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뷰 기사에 나온 주아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그리고 그녀의 인터뷰.

“나를 정말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깨달았어요. 저한텐 그게 그 무엇보다 확실한 축복이에요.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이 국제적인 리사이틀 무대에 서는 것보다 기쁘다면 믿기세요? 이곳에서 소박한 행복을 느끼며 미래를 기다릴 생각이에요. 후회되는 건… 좀 더 일찍 이런 마음을 깨우쳤다면 좋았을걸. 바라는 거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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