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11/12)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그 사람은 살아갈 것이고,

그 사람이 모르는 곳에서도 나는 똑같이 살아갈 것이다.

내가 없어도 그의 세상엔 태양이 뜨고 풀이 숨 쉬고 꽃이 피어나겠지.

당신이 없어도 내 세상엔 나무가 자라고 새싹이 움트고 계절이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태양이고, 풀이고, 꽃이고, 나무이고, 새싹이고, 계절일까?

단지 그건 배경일 뿐.

자신의 뒤로 피고 지며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한 변화일 뿐.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단지 숨 쉬는 이상의 의미는 없으리라.

그래도 당신, 부디 너무 괴롭진 않았으면 좋겠다.

“헤어져 드릴게요. 놔 드리겠습니다.”

시류의 말에 지하는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현재로선 서로를 그만 괴롭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냥, 당신이 아플 때 놔주겠습니다. 불행해지기 전에.”

“…….”

“당신을 지옥에서 살게 하기 싫으니까.”

“미안해요.”

시류가 고개를 저었다.

“감히, 사람을 죽인 손으로 당신을 안을 생각을 했습니다. 가끔 환각이 일곤 했었죠. 얼굴에, 손에 튄 피가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되살아난 칼의 감촉. 그 서늘한 금속성의 느낌.

내 손 안에서 사람의 살을 파고 들어갈 때의 물컹한 감각. 그 순간의 끔찍한 기억.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던 피.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퍼붓고 있었는데도 그때 손에, 얼굴에 묻은 피가 아무리 비를 맞아도 씻겨 내려가지 않았었다. 피란 게 그렇게 끔찍한 것이었다.

“그런 제가,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영원하고자 기대했었습니다.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서 너무도 행복해 잠깐 현실을 잊었나 봐요. 아니, 필사적으로 잊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지하는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자학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끔찍한 기억, 자신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누구도 그걸 손가락질할 순 없어요. 서주아한테 들어서 알게 됐어요. 이해하게 되어 다행이에요.”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그걸 지하는 극복할 수 없었고, 시류는 설득할 수 없었다. 설득하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만을 앞세우는 것이었고, 지하는 두 번 다시 서주아의 이름을 꺼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날 지하가 주아와 만났던 날, 두 사람 사이엔 몇 마디 더 대화가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오빨 놔 줘요, 지하 씨.”

그때 지하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쪽 뇌는 이미 날아간 것 같고, 반쯤 남은 뇌는 오기로 똘똘 뭉쳐 굳은 상태였다.

“바보 아니야?”

그때 지하가 입을 열었다.

“자길 구해 준 고마운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는 거예요?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이를 가는 것처럼? 난 흉내도 못 내는 소중한 추억을 갖고 있으면서 그걸 인질로 삼고서 지금 무슨 짓이야? 그냥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 안 되는 거야? 이렇게 모든 걸 다 헝클어 놔야 속이 시원해?”

주아가 떨고 있었다. 하지만 지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당신이 아무리 절실하고 간절할지 몰라도 그 방식은 잘못됐어. 당신보다 어린 나도 그건 알아. 그렇게 사랑하는 남자를 꽁꽁 묶어서 옆에 두면 뭐해? 아름다운 음악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래?”

“…….”

“꺼져요, 당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버려도 내가 버리니까, 당신 따위 끼어들지 마.”

그렇게 주아를 두고 나왔었다.

그래. 버려도 내가 버린다. 그렇다고 주아에게 주는 건 아니다.

“곧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그 순간 시류가 한 말에 지하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시류는 지하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녀가 너무도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결정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자.

“그,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아니요. 제가 사라져 드리는 게 아가씨께도 편할 겁니다.”

지하는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별이란 헤어지는 건데, 그가 회사까지 떠난단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자신은 떠나더라도 그는 계속 같은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했었나 보다.

회사까지 그만둘 정도로 몰아붙였단 생각에 크나큰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 마음 편하게 잡을 순 없었다. 상실감을 꾹 견디며 그녀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시류가 말없이 지하를 응시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제가 처음으로 사랑하고 유일하게 사랑한 건 당신이란 걸.”

눈물이 흘렀다.

헤어지는 와중에도 그 말에 위안을 받다니. 여자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 동물인지. 이 와중에도 내가 그 남자한테 유일하게 사랑받은 여자란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

그날 이후 지하는 유학 준비를 했다. 시류도 비밀리에 회사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웅의 사망 후 잇따른 시류의 부재. 그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회사에 타격이 될 것이기에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건 나영과 지하 그리고 아주 최측근의 간부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괜찮니?”

지하가 집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나영의 물음에 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 가득 박스를 쌓아 두고 필요한 것을 정리하는 지하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으, 그냥 다 새로 살까 봐. 뭘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어. 짐 싸는 거 진짜 귀찮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영이 놀랄 정도였다.

하긴, 일주일 내내 죽을 정도로 꽁꽁 앓았으니. 깨어나기 전에 모든 걸 툴툴 털어내고 힘내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정상이라 다행이었지만, 애써 만든 미소가 나영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는 건 사실이었다. 딸이 정말 괜찮은지 아닌지, 그걸 엄마인 자신이 모를까?

“근데 지하야.”

“응?”

“너 가고, 난 시류랑 가끔 만나도 되지?”

순간 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잖아. 넌 시류랑 파탄 났어도, 사실 순서를 따지면 너보단 내가 시류랑 먼저 인연이거든. 딸도 없고 시류라도 있어야 내가 덜 적적하지. 너한텐 전남편이더라도 나한텐 아들이니까….”

“그 족보 참 콩가루네. 내 전남편이 어떻게 엄마 아들이 돼? 엄만 그런 말을 하고 싶어?”

“그게 사실인데 어쩌니?”

‘흥!’이라는 듯 나영이 뻔뻔하게 버텼다.

지하가 혀를 차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딸이 금방 아픔을 디디고 되살아났는데 내 앞에서 강 상무 얘길 하고 싶어? 적어도 내 감정 고려해서 그 사람에 대한 건 자제해 주는 게 엄마로서 할 도리 아냐?”

“그러니까 엄마가 설명했잖아. 너랑은 끝난 인연이지만, 나하고의 인연은 안 끝났다고. 내가 언급한 건 너랑 끝난 강 상무가 아니라 내 아들 시류….”

“아, 몰라!”

지하가 빽 소리쳤다.

하여튼 이놈의 집구석은 섬세하지가 못해! 그러니까 내가 이 모양이지. 참을성도 없고, 인내심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고. 나만 생각하고 이기적이고, 그러니 진짜 사랑하는 남자의 아주 작은 허물 하나 못 감싸 주고, 아픈 과거 하나 못 보듬어 주고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에잇!

“다 엄마 탓이야.”

“난 네 성격이 고약해서라고 본다. 시류는 결백하다고 봐.”

“아, 진짜!”

“그래서 어떡할 거야? 엄마 시류 만나도 돼, 안 돼?”

“끝까지!”

“너 몰래 만나면 그것도 그렇잖아.”

“아, 만나! 만나서 마구 닭살 떨어! 됐지?”

“오케이.”

참 쿨하시다. 강시류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욱신거리는 딸의 심정 같은 건 애초에 생각도 안 하는 아주 나쁜 엄마다.

“근데 엄마. 혹시 아빠가… 날 좀 모자란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게…. 뭔가가 자꾸만 걸려서.”

“뭐가?”

“그러니까…. 아빠 임종 직전에 말야. 그 사람한테 한 말 있잖아. 날 구해 줘서 고맙다고…. 대체 내가 어디가 부족하다고? 마치 어디 내 놓으면 시집도 못 갈 딸인 양, 되게 못생기고 머리 딸리는 진상 딸인 양, 그걸 강 상무가 떠맡아 준 것처럼 그렇게 말했었잖아. 나랑 결혼한 게 강 상무가 날 구해 준 거야?”

나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아!’ 하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지하는 그래서 점점 더 자존심 상했다.

“왜 웃어? 엄마도 실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나영이 곧 웃음을 그치더니 팔짱을 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그 말이 억울했어?”

나영의 얼굴엔 아직 정웅을 보낸 이후의 슬픔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애써 강한 척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 있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버텼다.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도 엄마처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숨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아픔은 결국 저 깊은 가장 진실한 곳에 숨어 있다. 자신만이 열어 볼 수 있는 아주 고요한 공간에. 그래서 가끔 꺼내 볼 때마다 따끔따끔 가슴이 찔려 온다.

아직 너무나 아프다. 얼마나 지나야 이 아픔이 무뎌질까? 그럴 날이 오긴 할까?

“당연히 억울했지. 엄청.”

“그럼 그때 따지지 그랬어?”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하긴, 아버지 가시는 마지막 길이었지.”

“엄마아.”

“휴우, 그게 그 뜻이 아니었는데. 너 결국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뭘?”

“아버지 말은, 못난 딸 구제해 줘서 고맙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뭔데?”

“기억 안 나니? 시류 여기 오고 딱 1년 됐을 때….”

***

시류는 담담하게 주아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수척했다. 수없이 전화가 왔지만 한 통도 받지 않아 주아의 얼굴도 슬퍼 보였다.

주아가 핸드백을 꽉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얘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낮게 말했다.

“왜… 전화 안 받았어?”

“널 원망할까 봐, 만나고 싶지 않았어.”

“날 원망할까 봐? 한지하 때문에?”

“그래.”

“그렇게 대단한 존재야? 나보다 더?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할 정도로?”

“널 다시 만나고, 수없이 말했을 거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단 걸 넌 알고 있었어.”

“그래. 하지만 그게 정말 사랑이 아니란 것도 알았어. 오빤 착각한 거야. 회장님에 대한 은혜를 한지하를 사랑하는 걸로 보상하려고 했던 거야.”

시류가 피식 웃었다.

“남의 마음을, 마치 자기 것처럼 쉽게도 떠들어 대는구나.”

서재욱도, 주아도 마찬가지였다.

“오, 오빠.”

시류가 똑바로 주아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너도 착각한 거야. 난 지하를 사랑해. 왜 그녀가 회장님의 딸이어야 했는지, 그게 수없이 원망스러웠을 정도로.”

주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시, 싫어.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오빨 사랑하잖아. 날 사랑해 주면 되잖아. 이렇게 오빨 사랑하는데….”

“사랑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야.”

주아가 소리쳤다.

“내 아빨 죽였잖아!”

순간 주변에 있던 손님들이 두 사람을 흘끗거렸다. 하지만 주아는 그런 건 신경도 안 쓰이는 것 같았다. 시류도 오로지 주아만 응시하고 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날 위해 그래 준 거 아니었어?”

주아가 울었다.

“그땐 날 좋아했잖아. 날 지켜 주고 싶어 했잖아. 날 위해서 그 악마를 죽여 준 거잖아.”

“주아야.”

“왜 날 사랑하게 만들었어? 가족이 사라지고, 피붙이 하나 없는 세상에서 오로지 오빠를 만날 수 있단 생각으로 살았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어. 그래서 외롭지 않았어. 힘들지 않았어. 다시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서주아, 이제 그만 환상에서 벗어나.”

“…뭐?”

“난 널 구해 준 게 아냐. 너와 똑같은 날 구해 준 거지. 다시 만났을 때 네가 행복해 보여서 난 그걸로 기뻤다. 그러면 됐다고 생각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어. 그걸 사랑이라고 하진 않아. 사랑이라면 그럴 수 없어, 서주아.”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이제 그만하자.”

“막 흔들렸었어. 한지하는 내 말에 정신없이 휘청거렸다구. 실제로 오빠 지금 아프잖아. 한지하가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거잖아. 내 존재를 넘어서지 못한 거잖아. 그건 사랑이야?”

“흔들리기 쉬우니까 사랑이야.”

주아의 눈이 커졌다.

“강철 같으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겠니.”

“아,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나라면 오빠 못 버려. 아프게 안 했어.”

“아파도 내 선택이야.”

주아의 머리 위로 쾅! 하고 번개가 내리꽂혔다.

“나도 수없이 그녀 때문에 흔들렸다. 괴롭고 아파서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가도 결국 눈앞에 보이면 결심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다시 다가가고 싶어져. 모든 걸 끝내려는 순간에 그녀는 또다시 샌들 하나를 손에 들고서 빗속을 맨발로 달려 내 앞에 나타났어.”

“…….”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과 남자애한테 취해서 업혀 왔을 때, 미친 듯 화가 났었다. 처음으로 내 감정을 알았다. 내 안에 그런 유치한 감정이 있는지 처음 알았지. 그 키 큰 남학생한테서 그녀를 빼앗듯이 받아 안고서 내쫓듯이 차갑게 보내 버린 적이 있었어. 그 정도로 화났어.”

“그, 그만해. 듣기 싫어.”

“그 이전에 잠깐 한국 들어왔을 때 중학생인 그녀의 과외를 잠시 봐 준 적이 있었지. 그때 불만스럽게 앉아서 톡톡 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되바라지게 굴던 그런 모습조차 밉지 않았어. 아마 그 직전이었을 거다. 내가 살인자란 걸 듣게 된 건. 그래서 날 멀리하고 보기만 해도 소름 끼쳐 했었지. 그런데도 난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주아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만해, 제발….”

“그때마다 괴로워서 몇 번을 그만두고 싶었는지 몰라. 마음을 닫고, 굳히고,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게. 상처받지 않게. 그렇게 수없이 흔들렸었다. 그래도 사랑했다.”

강철 같지 않아도.

결국 그녀를 놓아주고 말았대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날 사랑하지 마. 그녀와 더 이상 다시 만나지 못한대도, 너로 인한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

그렇게 주아와의 길고 긴 고리를 끊어 냈다.

***

지하는 정신없이 액셀을 밟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려서 아무리 훔쳐 내도 그치질 않았다.

나영이 한 말이 떠올랐다.

“기억 안 나니? 시류 여기 오고 딱 1년 됐을 때….”

“그, 그때 왜?”

“가족 전부 휴가를 간 적이 있었어. 그때 너랑 시류랑 둘이 놀다가 네가 찻길로 나간 모양이야. 시류가 찾으러 갔다가 네 앞으로 갑자기 차가 달려드니까 시류가 달려들어서 널 구해 줬어. 널 감싸느라 대신 차에 치여서 아주 크게 다쳤었지.”

지하의 몸이 정지했다.

“…뭐?”

“피를 아주 많이 흘려서 살아날지 어떨지 아버지랑 얼마나 걱정했는지. 시류 덕분에 넌 머리를 가볍게 부딪치는 경미한 상처밖에 없었지만, 겁먹었던지 사고 당시의 일을 홀랑 잊어버렸더라? 자길 구해 준 오빠한테 고맙단 한 마디 안 하고.”

지하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 말도 안 돼.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그때 생긴 상처가 아마 아직 시류의 팔에 남아 있을 거야.”

순간 지하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파, 팔?”

“그래. 아주 오래전 상처라서 희미하겠지만.”

지하의 심장이 미친 듯 울렁거렸다. 눈앞이 희미해졌다.

“그, 그게 날 구해 주다 난 상처라고?”

“그래. 정말 얼마나 놀랐었는지.”

“아…. 아… 엄마, 나… 어떡해.”

갑자기 지하가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하자 나영이 놀라 달려들었다.

“어머, 얘, 너 갑자기 왜 그래? 얼굴이 하얘져선. 지하야!”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줬지만 지하는 협심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숨을 잘 쉬질 못했다. 그녀가 바닥으로 풀썩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건 분명히, 서주아와 관계된 상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주아를 지키려다 생긴 상처일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나 어떡해….”

지하는 심장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렸다. 나영이 경희를 부르고 병원에 전화를 하고 분주했다.

대체 왜 잊었을까?

그럼 그때 아빠의 그 말은….

“시류야, 지하를… 구해 줘서 고맙다.”

딸을 구해 준 시류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네 상처부터… 봤어야 하는데… 미안했다. 정말로 미안했어. 그날… 이후로… 널 내 아들로… 생각했다.”

고마움이자 죄책감이었다.

딸을 구하느라 피를 쏟으며 응급실에 실려 간 시류. 그런 시류를 아들이라 생각하며 데리고 있었다지만, 막상 딸이 다치자 딸부터 챙겼던 것이다. 그런 자신에 대한 반성, 사죄.

그리고 딸이 깨어나자 그제야 자신의 이중성을 깨달은 정웅은 그날부터 시류를 자신의 아들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런 뜻이었다.

“지하야, 엄마 잡아. 일단 병원 가자.”

“엄마… 나 차 키.”

“뭐?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괜찮으니까 차 키!”

나영이 놀랐다. 하지만 지하는 정신없이 차 키를 찾아 그대로 차고로 달려갔다. 그리고 미친 듯 액셀을 밟았다.

눈물이 미친 듯 앞을 가렸다.

“잊긴. 넌 절대 잊은 게 아니었잖아, 한지하.”

머리를 부딪쳐서 홀랑 잊어버렸다고 엄마는 말했지만, 아마 너무 무서워서 스스로 모르는 척했던 건 아닐까? 그때 자기를 감싸느라 팔에서 피를 콸콸 흘리는 시류에 대한 죄책감에 일부러 잊어버린 척한 것이다. 그렇게 자기 편하려고 아예 시치미를 뚝 떼고 살았던 것.

그런데 거기에 살인자라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더해져서, 자꾸만 피가 섞인 악몽을 꿨던 것이다. 그 피는 바로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죄책감의 표현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붉은색.

번뜩거리는 칼날.

그 칼을 쥐고 있는 소년,

번쩍!

그 순간 번개가 내리치며 소년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건 바로 어린 시류.

하지만 그건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칼을 쥐고 있는 그 소년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

실제로 꿈속에 나왔던 그 피는, 그가 자신을 위해 흘린 피였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든 그렇게 구해 낼 사람이었어. 누구든 지켜 주려는 사람이었어. 서주아만이 아니라….”

지하가 핸들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서주아가 내세우는 특별함은 전혀 특별함이 아니란 소리야. 당신 팔에 남아 있는 상처는, 그 지워지지 않는 자국은… 서주아를 지켜 준 증거가 아니었어.”

핸들을 휙 틀었다.

“그 남자가 지켜 주고 싶었던 유일한 여자, 그게 서주아 당신이 내세우던 주장이었으니까. 날 괴롭히던 장애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깨졌어.”

나와 관계된 상처.

모두에게 헤픈 남자.

“도대체 왜… 그렇게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거야?”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자기가 피를 흘리는 거야. 그래 놓고 아무한테도 보상받지 못하고. 손해만 보고!

지하의 차가 시류의 빌라 앞에 섰다. 하지만 그는 빌라 안에 없었다. 내부는 적막할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텅 빈 것 같은 그 공간.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이미 떠난 건가?

지하는 회사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시류가 결근했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지하는 미칠 것 같았다.

“대체 어디 간 거야?”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하는 마음에 얼른 휴대폰을 받았지만 나영이었다.

“어, 엄마.”

- 너 어디야? 그 몸으로 어딜 나간 거야?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 강 상무… 결근했대. 어디 갔는지 알아? 짐작 가는 데 없어?”

- …뭐?

“강 상무… 강시류, 그 남자 좀 찾아 줘.”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내 앞에 좀 데려다줘. 응?”

- 못 살겠다.

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 시류 지금 아버지 산소에 있을 거야. 마지막 인사드리고 올라온다고 했어. 엄마가 알려 줬다고 하지 마. 아무리 내 딸이라도 네가 더 이상 우리 시류 아프게 하는 거 못 보겠….

“고마워. 끊어, 엄마!”

지하는 그대로 휴대폰을 끊고 정신없이 차에 올랐다.

***

시류는 정웅의 묘지 앞에 서 있었다. 비석 앞엔 국화가 놓여 있었다. 그가 천천히 앉아 소주를 한 잔 따랐다.

“죄송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곁에 있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게 정웅에게 못내 미안했다.

“저한테도 약점은 있더군요. 우는 모습을, 도저히 더 볼 수 없었습니다. 제 변명입니다.”

묘지 앞에 홀로 앉은 시류의 등이 쓸쓸했다. 그가 소주를 목에 털어 넣었다. 쓴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언젠가 이 열병 같은 마음도 무뎌지는 건가? 아니, 영원히 품고 살아도 자신은 상관없었다.

자박!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잔디를 밟는 소리에 시류가 흘끗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멍해졌다.

환각인가?

소주 한 잔에 취하기도 하는 건지. 이상하게 지하가 보였다. 숨을 몰아쉬며 땀에 흠뻑 젖어선 간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가.

피식.

그가 웃었다.

“소망이 과했군.”

그가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리려는 그때 그 환각이 다가왔다.

똑바로 와서 서선,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무를 스치고 달려든 바람, 그 바람결에 그녀가 자주 쓰는 향수 내음이 묻어났다. 시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말했다.

“아… 숨 차.”

***

시류는 멍했다. 잠깐 이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일어나 섰다. 옷을 툭툭 털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차 타구….”

시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셨겠죠.”

“강 상무님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난 그냥,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어서 들른 건데. 뜬금없이 확 생각이 나더라구요.”

“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전 먼저 가겠습니다.”

이런, 젠장!

지하는 안달이 났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말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뾰족한 수가 아직 떠오르지 않았는데 저렇게 서두르면 난 어쩌란 거야?

그렇게 냉정하게 끊어 내고선 다시 매달리기 민망해서 그런 건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양심상 망설이고 있는 건데. 막상 말이 안 나와서 그런 건데.

“자, 잠깐만요!”

스쳐 지나가려던 시류가 멈칫했다.

“말씀하세요.”

“차… 갖고 왔어요?”

당연히 가져왔겠지! 차가 없다면 이 먼 거리까지 어떻게 왔겠어?

빌어먹을.

지하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나서 쭈뼛쭈뼛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건 갖고 왔단 소리죠? 하여튼 답답하게 입 꾹 다물고서, 그게 상대방을 얼마나 짜증 나게 하는지 알아요?”

순간 시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 그건 바로, 그녀가 자신의 가슴 안에 확고하게 박힌 그 비 오던 날. 샌들을 손에 든 채 빗길을 찰박거리며 달려왔던 그녀가 자신에게 쏟아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그녀도 알고서 기억을 떠올려 말했던 거였는지 싱긋 웃었다.

“들어 본 적 있는 거 같죠, 이 말? 나 이렇게 당신만 보면 쌈닭처럼 굴었었는데.”

“…그만 가겠습니다.”

시류는 돌아섰다.

그녀는 이미 자연스러운 관계로 되돌아간 건지 몰라도 자신은 아직 그녀와 아무렇지 않게 사담을 나눌 수 없었다. 촌스럽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랑하는 여자를 아무런 욕망 없이, 느낌 없이 수다나 떨면서 함께하는 것, 자신은 할 수 없었다. 다음부턴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 것도 없기를 바랐다.

“자, 잠깐만요!”

지하가 소리쳤다.

“가지 마요! 미안해요, 괴롭혀서!”

순간 시류가 서서히 멈춰 섰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지하를 돌아보았다.

“잔인하시군요.”

“…….”

“전 당신과 장난을 칠 수 있을 만큼 아직 괜찮아지지 않았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그만하십시오. 우연히 마주쳤다면, 그냥 스쳐 보내면 되는 겁니다. 그게 앞으로 당신과 제가 할 일입니다.”

“팔의 상처, 나 때문이었어요?”

시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죠?”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이유,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던 내 감정, 서주아를 지켜 주고자 했던 당신 마음. 유일한 걸 뺏겼다고 생각해서 도저히 질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아니었잖아요. 나도 당신이 지켜 주고 싶었던 사람이었어요. 서주아는 절대 특별한 게 아니었어요.”

시류가 냉정하게 지하를 쏘아보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역시나 모르겠군요.”

“어릴 때 사고 날 뻔한 나 구해 줬었죠? 그땐 왜 그랬는데요?”

“다칠 것 같으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

“안 다치길 바랐으니까요.”

“봐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누구나 다 행동으로 옮길 순 없는데.”

“설마 그 일로 감동하신 겁니까? 그래서 고맙단 말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그럼 사양하겠습니다.”

“고맙단 말은 아직 안 할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이 좀 더 있으니까.”

“그럼 하세요.”

“서주아를 구해 준 걸 동정이었다고 깎아내리진 않을게요.”

어쩌면, 동질감이었을까?

“아무튼 당신은 본성이 정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단지 지켜보지 못했겠죠. 그러니까 내가 매번 그랬잖아요. 당신 헤픈 남자라고. 감정 하나 안 내어 주면서 헤픈 남자…. 내 말이 맞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감정에 헤퍼선….”

“…….”

“그러니까, 헤픈 건 이제 나한테만 해요.”

시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지하가 시류의 앞으로 다가섰다.

“내가 말했었죠? 내가 입고 있는 옷, 헤어스타일, 좋아하는 향수, 이게 나라고.”

손을 뻗어 시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머리카락부터 이마, 코, 눈, 입술을 만지게 하며 말했다.

“이렇게 화장하고 이렇게 생겼으니까, 나 잊어버리지 말라고. 그런데 벌써 잊어버린 거예요? 마음에서 작아진 거예요?”

시류의 손끝이 떨렸다. 손가락 끝에서 그녀의 촉감이 전해졌다.

“내가 감수할게요. 당신 옆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여동생의 존재를, 당신을 열렬하게 좋아하는 한 여자의 존재를, 당신이 너무도 가엾게 생각한 자기 자신의 모습 그 자체였던 그 어린 여자애를… 당신이 차마 끊어 낼 순 없는 그 존재를 감수할게요.”

시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나 내내 아팠어요. 일주일 동안 물도 못 마시고 아무것도 못 먹고 링거만 맞아 가며 내내 한 사람 꿈만 꿨어요. 없어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헤어지자 하지 않았을 거예요. 없는 것보다… 슬퍼도 같이 있고 싶었어요.”

시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너무 사랑해서….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런 거창한 이유 같은 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이제 알 거 같아요. 당신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

결국 그 순간 시류가 지하를 확 끌어안았다.

지하의 등이 휘어지고 고개가 들릴 정도로 세찬 포옹이었다. 지하는 고개를 든 채 눈물을 머금었다.

어떡해…. 너무 좋아.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두근거리면서도 평온했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미안해요. 힘들게 해서….”

시류는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고 더욱더 강하게 지하를 으스러트리듯 안았다.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아플 줄 미리 알았으면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하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세상 전부가 말렸대도 결국 사랑했을 겁니다.”

“떠나지 않는 거죠?”

“네.”

“두 번 다시는 나 서먹하게 대하지 않는 거죠? 냉정하게 스쳐 지나가지 않는 거죠?”

“네.”

“나도 두 번 다시는 아픈 말 하지 않을게요. 의심하고 괴롭히지 않을게요.”

시류의 숨결이 지하의 목에 닿았다.

“사랑합니다.”

지하의 몸이 뜨거워졌다.

“항상 먼저 손 뻗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으니까. 그만큼 혼자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사랑합니다.”

포옹한 그대로 시류의 입술이 지하의 입술을 덮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머금으며 온기를 나누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 나 미안하지만 잠깐만 아빠 앞에서 눈꼴신 짓 좀 할게. 그러니까 참아 줘. 지금은 이 사람이랑 너무 키스하고 싶어서…. 찰싹 달라붙고 있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어.’

아버지가 만들어 주고 또다시 이어 준 인연. 만약 그때 임종 시에 정웅의 그 말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과 그는 어떻게 됐을지. 아마도 어리석음으로 이 소중한 사람을 놓쳤을 것이다. 더 늦지 않게 깨달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 나 아침부터 너무 울어서 지금 눈이 너무 아파요.”

지하가 그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런 지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시류가 말했다.

“그럼 눈을 감으세요. 저도 함께 감겠습니다.”

지하의 가슴이 뭉클했다. 고개를 들어 그의 턱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의 입술을 만지고, 그러다 다시 키스했다.

아….

나 정말 아빠한테 혼나겠다. 그래도 난 이미 철없는 딸이니까.

“사랑해요.”

그의 입술에 쪼듯이 몇 번이나 키스하며 지하가 속삭였다.

“사랑해요, 당신.”

계속해서.

그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따스한 햇볕이 키스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힘들고 고단했던 자신의 삶, 시류는 처음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가 돌아옴으로써 꺼져 가던 마음의 불씨가 다시 지펴졌다.

그녀의 뺨을 만졌다.

누군가에게는 단지 사랑,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랑이 자신을 살게 하는 이유였다.

“곁에 있어요.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웅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다. 그저 남자로서의 열정, 욕심, 뜨거움으로 그녀를 탐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자신이 그녀를 지켜 주고, 그녀가 자신을 지켜 준다.

아마도 영원히, 그녀에 대한 열망이 가실 일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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