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누구를 죽였는지 그런 건 전혀 몰랐다. 무슨 마음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도.
“서주아가 대체 어떤 존잰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
“적어도 당신이 묻는 의미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내가 묻는 의미 외에는요?”
“그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망설였던 이유.
“아무것도 아니지만 저한텐, 고개 돌릴 수 없는 아이입니다.”
그렇게 말했던 이유.
“그것만은, 말 안 하고 싶습니다.”
뿌리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그날 괴로워 보였던 표정의 이유.
사슬.
가시가 박힌 사슬이 그의 몸에 친친 감겨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지하는 천천히 서재 문을 열었다. 막 퇴근했는지 시류가 등을 보이고 서서 손목시계를 풀고 있었다. 지하는 물끄러미 그런 시류의 등을 바라보았다. 시류가 고개를 돌렸다.
“오셨어요?”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그것에 자신은 얼마나 설레고 두근거렸던가.
지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 없이 무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시류는 의아했다. 그가 손목시계를 테이블에 탁 놓고서 지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앞에 서서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낮은 음성.
지하는 여전히 가슴이 뛰는 자신이 참 원망스러웠다.
결국 시류가 지하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고개를 든 지하의 눈동자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서주아 만났어요. 연락이 와서.”
시류가 멈칫했다. 지하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짐작하죠?”
“잠깐만요.”
“서주아 아버지 죽인 거 맞아요?”
시류가 정지했다.
“맞아요, 아니에요? 대답해요. 당신이 그랬어요?”
시류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맞습니다.”
“왜요?”
“그건.”
“서주아를 위해서. 맞아요?”
“…….”
“지켜 주려고 대신 자기 손에 피를 묻힌 거 맞아요? 지켜 주겠다고 했던 거 맞아요?”
“…맞습니다.”
“반지 준 건요? 당신한테 가장 소중한 어머니의 유품을 서주아한테 준 건요. 그것도 맞아요?”
“맞습니다.”
지하가 눈을 깔았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러면 흐느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소름 끼칠 정도의 차분함으로 지하가 말을 이었다.
“됐어요. 알았어요.”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시류가 그런 지하의 손목을 확 잡아 돌려세웠다.
“지금 무슨 생각 하시는 겁니까?”
“놔요.”
“못 놔요. 듣는 것과 그 상황은 다른 겁니다.”
“뭐가 다른데요?”
지하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자신이 생각보다 폭발하지 않았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녀 나름대로 침착하고 차분하게 잘 대응하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니.
나이가 어려서, 생각이 짧아서, 철없어서 즉흥적인 분노가 먼저 터져 나갈까 봐 집에 오면서도 계속 가라앉혔었다. 하지만 너무 가라앉혔나? 이럴 땐 미친 듯 화를 내야 하는데, 나 왜 이러지?
이 지경에 와서도, 마녀 같은 미친 모습을 보여서 이 남자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다니. 이 남자가 서주아의 말이 다 사실이라고 할까 봐 그게 겁난다니.
“뭐가 달라요? 이럴 땐 틀려야 하는데 단지 다르대. 다 맞다면서 또 다르대. 참 이상하지? 난 다 알겠는데. 딴 여자한테 마음이고, 영혼이고 다 줘 놓고 껍데기는 나한테 주겠다, 난 그렇게밖에 안 들리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말은 쉽지. 나 정말 속이기 쉽죠? 세상 물정 몰라서 몇 마디 치장해서 말하면 홀랑 넘어오죠? 나 그렇게까지 순진하진 않은데 참 이상하지. 당신 말엔 홀랑 속아 넘어가 주고 싶으니.”
“그만하세요.”
“당신 팔에 있는 상처 자국. 그것도 그때의 흔적이죠? 서주아를 지켜 주려다 입은 상처.”
시류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하는 절망스러웠다. 그에게는 단지 물리적인 상처일지 몰라도 그건, 지하의 마음을 갈가리 찢는 상처였다. 그녀의 심장에 직접적으로 칼을 대고 그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 원래 뭘 참고 견디는 거 잘 못하게 컸으니까, 지저분하게 가지 말고 서로 깔끔하게 정리해요. 시끄러워지는 거 싫으니까.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말해라, 그 말 해 두길 참 잘한 거 같네. 이렇게 알아서 물러나 줄….”
순간 시류가 지하를 확 끌어안았다.
강하게 팔을 조이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지 마세요.”
지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지하의 몸이 허깨비처럼 흔들렸다. 시류가 강한 힘으로 조이고 있었지만 지하의 눈빛은 공허했다.
“그때의 일을, 내가 당신한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해 봐요. 나도 속아 주고 싶으니까. 그럼 이렇게 더러운 기분은 아니겠지.”
“한지하, 제발.”
시류가 지하의 목에서 얼굴을 뗐다.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아이는, 어린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 자체였어요.”
“나 자체? 그래서 그만큼 사랑했어요? 그 정도로 지켜 주고 싶었어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면 서주아가 거짓말한 거예요? 속인 게 있어요?”
하지만 시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핑, 하고 겨우 이성을 지탱하고 있던 줄이 일시에 끊어졌다. 지하가 미친 듯 시류를 가방으로 때렸다.
퍽퍽!
그의 가슴을, 팔을, 어깨를 마구 때리며 악을 썼다.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런 마음을 갖고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지켜 주고 싶은 여자가 있으면서 어떻게!”
시류는 그녀가 때리는 대로 모든 걸 받아들였다.
“내가 이 모든 걸 참아야 할 이유가 뭐야? 늘 햇빛만 쐬고 살았는데 당신은 내 유일한 어둠이야! 왜 날 사랑하게 만들었어!”
시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모르겠습니까? 사랑하는 것과 지켜 주는 건 다른 겁니다!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한다면 내가 왜 주아를 두고 당신을…!”
“왜겠어? 당신은 나만 가지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데! 마음 같은 거 그 여자한테 다 주고, 내 앞에선 날 사랑하는 척, 몇 년만 속이면 당신 마음을 괴롭히는 아버지에 대한 짐도 홀가분해지고 그 후엔 서주아한테 돌아갈 수 있는데!”
“한지하, 당신 그렇게 생각 짧은 여자야? 그렇게까지 자신감 없어? 그걸 스스로 믿으면서 말하는 거야?”
“몰라! 나한텐 그런 생각밖엔 안 들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 앤 단지 여동생이었어. 여동생을 사랑하는 남자는 없어!”
“지켜 주고 싶은 여동생이겠지. 이거 놔요. 내 몸 건드리지 마.”
그녀가 시류의 몸을 차갑게 털어냈다.
무슨 말도 안 통하는 그녀.
하지만 시류는 그녀의 오해를, 잘못된 생각의 방향을 돌릴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오해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당신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겁니까?”
“사실대로 말해 주는 것. 더 이상 기만하지 않는 것.”
“그 애의 아버지를 빼앗았기 때문에, 내가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앤 내가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하는 죄책감이었습니다. 아무리 악마 같은 인간이었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사람을 죽인 내가 온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도 그런데 나보다 어린 그 앤, 눈앞에서 믿고 있던 오빠가 자기 아버질 죽이는 장면을 봐 버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서주아를 끊어 내지 못했고. 그렇죠?”
“그래요. 내가 책임지고 지켜 주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그 애가 행복해지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욕심내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나도 어느 순간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책임감과 죄책감이 아닌,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하지만 지하의 눈동자는 식어 갔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하가 눈물을 후드득 쏟아 냈다. 흠뻑 젖은 얼굴로 그녀가 시류의 가슴에 툭 무너졌다. 오열이 터졌다.
시류는 너무도 아파 그런 그녀를 가슴에 꽉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지하는 그의 가슴을 꽉 틀어쥐었다.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금 그녀를 괴롭히는 영상. 서주아의 끝도 없는 당당함. 시류가 그녀를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대체… 왜 그랬어요? 왜….”
뺨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건 질문이 아닌 단지 원망.
“서주아를 지켜 줬으면 차라리 쭉 사랑하지. 그게 아니면, 오로지 나만 사랑하고 서주아를 끊어 냈어야지.”
“사랑은 두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당신을 괴롭혀서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 말이 논리적으론 이해가 가도, 감정이 안 받아들여져요. 왜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어요? 당신이 원망스러워. 서주아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이유는 당신밖에 없어요. 왜 지금껏 그 마음 하나 해결하지 않았어요! 그 오랜 세월 당신은 대체 뭘 했어? 왜 지금껏 정리를 하지 않은 거야!”
“그 애가, 아무리 성장해도, 어른이 되어도 내 눈엔 나처럼 학대를 당하던 어린애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날 얼마나 슬프게 하는지 알아요?”
“끊어 내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완전히 모질게 외면할 수도 없었겠죠. 아무리 해도 당신 가슴속에 있는 가엾은 서주아를 지울 수 없을 것 같아. 왜냐하면 스스로 지울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차라리 반지 따위 아무 의미 없으니까 너도 의미 갖지 말라고, 그냥 버려 버리라고, 그렇게 말했어도 서주아는 거기에 의미 부여하며 그것만 보고 살진 않았을 거예요. 모든 건 당신이 만든 결과예요. 방관한 죄. 꿈꾸게 한 죄.”
“……!”
시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반지를 보고 내 마음이 어땠을 거 같아요? 당신의 아내라고 하는 내 앞에서조차 뻔뻔스럽게 반지를 내미는 서주아도 미웠지만, 가장 미운 건 당신이었어요. 왜냐하면 서주아의 방종은 당신이 만든 결과니까. 당신이 그럴 권리를 서주아한테 줬으니까.”
시류는 지하를 잡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이건, 아무 의미 없는 싸움입니다. 제발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상처 주지 말아요.”
하지만 지하는 그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시간을 줄게요. 이번 기회에 자기감정을 한번 되돌아봐요. 정말 사랑하는 게 누군지. 실은 당신도 서주아한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닌지.”
“……!”
“정말 당신한테 서주아가 단지 여동생인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건지. 정말로, 지켜 주는 것과 사랑하는 건 별개인지. 그렇게나 절실하게 지켜 주고 싶었던 서주아인지, 나인지. 그럼 대답이 나올 테니까.”
지하가 돌아섰다. 시류가 그녀의 손목을 확 움켜쥐었다. 그때 지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동시에 시류의 휴대폰도 함께 진동했다. 한꺼번에 울린 두 개의 휴대폰. 지하의 화면에 뜨는 건 나영의 번호였고, 시류의 것은 경희였다.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안 좋은 예감.
지하의 몸이 떨렸다. 천천히 휴대폰을 귀에 댔다. 나쁜 예감은 늘 빗나가질 않는다. 어김없이 날아든 비보. 그건 정웅이 위급하다는 소식이었다.
***
임종은 가족 모두가 있는 가운데 조용히 치러졌다.
오전에 주아를 만나러 가기 전에 들렀을 때까지도 정웅은 피곤해서 잠들어 있었다. 다른 때와 같아서 별다른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다. 지하는 자신이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지하와 시류가 도착했을 때, 정웅은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지하는 정웅의 침대로 무너지듯 쓰러져 울고 또 울었다.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을 겨우 잡고 있는 정웅의 검은 얼굴, 그 파리한 얼굴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요, 아빠.”
정웅이 그런 지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 손은 쉽사리 힘을 잃고 말았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며 정웅이 지하에게 말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해. 우리 딸…. 아빠가 먼저 가서 미안하다.”
지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정웅의 손을 꼭 잡고 뺨에 비볐다.
“아빠….”
그때 정웅이 시류를 불렀다.
“시류야….”
시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눌러 참고 있었다. 그런 시류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정웅이 말했다.
지하의 옆에 나란히 선 시류를 바라보며.
“아버지… 라고 불러다오.”
시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지하는 눈물만 흘리며 그런 시류를 외면한 채 돌아보지 않았다.
“부탁이야. 이젠 내 사위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 가고 싶구나.”
시류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그 한 단어의 무게를 온몸으로 짊어진 채 낮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시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지하를… 구해 줘서 고맙다.”
지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은 정웅이 원망스러웠다.
‘구해 준 게 아냐, 아빠. 그런 게 아니라구.’
정웅이 말을 이었다.
“네 상처부터… 봤어야 하는데… 미안했다. 정말로 미안했어. 그날… 이후로… 널 내 아들로… 생각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지하는 귀 기울이려 했지만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드문드문 끊겨서, 마치 환각 속에서 몽롱하게 하는 말처럼.
그건 오직 시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 같았다. 실제로 시류는 알아들은 듯 단단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어 견디고 있었다. 꾹꾹 누르고 있기에 더욱 처절한 시류의 표정에 지하의 마음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그런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 그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하고 그를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아버지를 배웅해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 편하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건 강시류가 잘못한 거다.
정웅과 시류,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공간은 없었다. 지하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애정이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처럼 빠르게 걷혀 가는 게 느껴졌다. 지하는 두 사람을 더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영과 지하, 시류의 곁에서 정웅은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
그 지옥 같은 통증을 묵묵히 견뎌내 왔던 것처럼, 너무도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남겨진 사람을 위한 당신의 배려가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지하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정웅이 눈을 감는 순간 지하는 그 위로 쓰러져 미친 듯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빠! 싫어! 가지 말아요! 아빠!”
***
지하와 시류는 장례식을 말없이 지켰다. 적어도 부부로서, 남들 눈에 의심 살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대화는 없었다. 애증도, 분노도, 원망도 정웅의 죽음 앞에선 무의미했다.
시류는 겉으로 고요해 보였다. 친척들의 냉대 속에도 묵묵히 상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지하는 그런 시류에게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또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어느 순간 원망스러운 감정이 일었던 것이다. 한번 불신을 갖기 시작하니 모든 게 다 망가졌다.
하지만 마지막 날 새벽녘, 찾아올 손님들이 거의 오고 다들 피곤에 지쳐 여기저기 쓰러져 자고 있을 때, 지하는 목격하고 말았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홀로 무릎 꿇고서 소리도 없이 울고 있는 그 남자의 등을.
그 처절한 뒷모습을….
지하는 눈물이 훅 터지고 말았다. 숨죽인 채 울고 있는 그가 너무도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가 울지 못하니까 자신이 대신 울어 주고 싶었다. 그 아픔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남자. 유일하게 사랑한 어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폭력적인 친아버지 아래에서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지.
그런 그가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서주아를 외면할 수 있었을까? 자신과 겹쳐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구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가엾은 소녀를 살려 준 희망까지 빼앗는 건 너무 잔인한 짓 같았다. 만약 그 어린 소년이 없었으면 어린 주아는 너무도 무서웠을 것이다.
지하는 멍하니 그날의 시류를 떠올리며 자신의 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곧장 나영이 혼자 있을 집으로 왔다. 그 후로 계속 예전에 자신이 쓰던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니, 이제 그녀가 다시 살아가야 할 곳이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며 나영이 들어왔다.
쳐다보지도 않고서 창밖만 내다보는 딸을 말없이 쳐다보던 나영이 다가와 지하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또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면서? 먹어야지.”
“응….”
“시류 또 왔다가 갔다. 너 아플 거라면서 그냥 얼굴만 보여 주고 가더라.”
“응….”
“혼자 가게 하지 말고, 이제 같이 가야지.”
“응….”
“지하야.”
“허락받았어. 몸 추스를 때까지 여기 있어도 된대. 그냥 나 좀 잠깐만 혼자 있게 해 줘.”
나영이 한숨을 흘렸다.
지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를 피하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머리론 알고 있는데도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더 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결정 내려야 한다는 게 싫어서….
“엄마, 그 사람 친부모님에 대해 알아?”
“응? 아….”
“나 그 사람 친부모님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 없었던 거 있지. 이미 돌아가신 것도 몰랐었어. 그냥 우리 집 양자로 들어올 뻔한 사람이었으니까 돌아가셨겠거니…. 우리 집에 온 이후의 그 사람에 대해서만 알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있지, 글쎄. 근데 그 사람도 어린 시절이 있었어. 친부모님이 계셨어. 그치?”
“그렇구나. 그건 내 잘못도 큰 것 같다. 미리 얘기해 줬어야 하는 건데. 핑계일 수 있겠지만 아버지 뜻이 완강했어. 시류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때 일은 없었던 거라고 못 박고 싶어 하셨지. 그래도 결혼 후엔 말해 줬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좀 호전되면 그때 말해 준다고 차일피일 미룬 게 이렇게 돼 버렸다.”
“그 사람, 호적에 안 올린 이유가 뭐야? 그 사람이 부탁했단 거 맞아?”
“응. 아버진 자식으로 올리고 싶어 했는데, 시류가 거절했어. 아니, 부탁이라고 해야겠지. 그래도 돌아가신 친어머니의 아들로 있고 싶다고. 자기까지 배신하면 친어머니가 너무 가엾다고. 그 마음을 네 아버지가 이해해 주셨던 것 같아.”
지하의 가슴에 물이 고였다.
사실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서주아의 말엔 거짓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너무도 비참했다.
하나라도 거짓말이 나오지. 하나라도 속인 게 나오지. 서주아가 너무너무 강시류를 좋아한 끝에 거짓말이라는 아주 나쁜 수단을 쓴 거였다면. 그래서 오해한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해란 건 언젠가 풀리는 거지만, 아픈 진실은 영원히 풀 길이 없다.
자신이 그 진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그래도 호적에 안 올리길 잘했지? 그랬음 두 사람 남매가 됐을 텐데.”
“차라리 올리지.”
“뭐?”
“그럼 혹시 알아? 법적 남매끼리 사랑에 빠져서 신파 하나 찍었을지? 진짜 진부하고 가슴 시큰한 러브 스토리 하나 나왔을 텐데.”
“뭐라는 거야? 또 철없는 소리나 하고.”
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
“응?”
“나 참 철없지?”
“이제 알았어?”
“그럼 나 철없는 소리 하나만 더 할게.”
“대체 뭔데?”
“나 유학 갈래.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무, 무슨 소리야, 그게? 갑자기 왜 그러니? 응?”
“갑자기 아니잖아. 엄마가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우리 계속 서먹서먹하고, 사이 안 좋았던 거 알고 있었으면서.”
“그, 그야…. 그건 얼마 전까지지. 얼마 전부턴 두 사람 분위기도 부드러워지고 꽤 좋아 보여서 아버지랑 나랑 얼마나 안심하고 있었는데.”
“미안.”
“지하야.”
“감당 못 하겠어.”
“그러니까 대체 뭘? 혹시… 시류 친부모님 얘기 때문이니?”
“아니. 그런 거 아냐.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런데 왜 그러는데?”
“내 마음. 태어나서 누굴 이렇게 좋아하기도 처음이고, 미워하기도 처음이야. 너무너무 가슴이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엄마….”
지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영의 눈이 커졌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마음으로 다 해결될 줄 알았어. 근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 그래서 더 아픈 것도 있더라. 이래서 사랑은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건가 봐. 난 아직 누군가를 마음으로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엔 그릇이 너무 작아.”
“다들 그래. 그렇게 하나씩 배우면서 성장하는 거야.”
“나 누구 사랑한 것도, 기대고 싶었던 것도, 가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던 것도 다 첨이야. 근데 다 감수하고 이대로 살라고 하면, 너무 힘들 거 같아.”
“지하야.”
“이유는 묻지 말아 줘. 그냥, 이제 그만할래. 그렇게 하게 해 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우는 딸을 보며 나영은 너무도 의아한 한편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더 있었던 건지.
결국 강요해선 안 되는 거였나.
나영은 그렇게나 힘들어하는 지하를 더는 다그칠 수 없었다. 어차피 두 사람의 결혼도 정웅의 고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정웅이 없는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 강요할 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류에게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이 깊어서인 것 같은데. 아마도 딸이 처음으로 깊은 감정에 빠져 감당 못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사실 철부지 외동딸로 키운 지하에게 시류의 배경이 받아들이기 녹록한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선 한발 물러나 젊은 사람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영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하렴.”
헤어지든 이 기회로 더 단단해지든, 선택은 두 사람이 해야 할 몫이었다.
***
지하는 탈선 중이었다. 배꼽이 드러나는 야한 크롭 티와 다리에 착 달라붙는 스키니 진 차림으로 가방 하나 달랑 멘 채 친구들과 클럽으로 직행했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친구들과 진탕 마시며 조명 아래에서 미친 듯 춤을 췄다.
그전엔 때마다 하던 짓이었는데 오랜만에 하니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것 같았다.
“유부녀가 웬일이야? 그렇게 나오랄 땐 현모양처처럼 빼더니?”
“야, 아버지 때문이었잖아. 그치, 지하야?”
“응. 그럼!”
지하가 혀가 꼬여 대답했다. 사실 친구들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미친 듯 춤을 추고 있는 그녀의 주변으로 남자들이 접근했다. 그녀와 같은 또래. 시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녀석들 중 한 명과 사귀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애처럼만 보이고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들 저렇게 가벼워 보이는 건지.
다른 친구들은 바로 짝을 이뤄 헌팅을 즐겼지만 지하는 무작정 밀어내고 오로지 자기 혼자 몸을 흔들어 댔다.
그런 지하에게 또 한 남자가 접근했다. 지하는 신경질이 나서 그 남자를 확 쳐내며 소리쳤다.
“어우, 저리 꺼져. 난 지금 내 스트레스 날리러 온 거거든?”
“어머, 재욱 오빠! 야, 재욱 오빠잖아.”
그때 옆에서 친구들이 아는 체했다. 지하는 그제야 눈에 힘을 주고서 방금 밀어낸 남자를 헤롱헤롱 쳐다보았다.
어머나! 재욱이었다.
“어라? 서재욱? 오빠가 여긴 웬일이야? 춤추러 왔어?”
“잘한다.”
재욱이 혀를 끌끌 찼다.
“왜? 나 지금 되게 신나는데!”
“이리 와.”
재욱이 짜증 난단 눈으로 지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지하가 그런 재욱을 확 쳐냈다.
“저리 가!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또 혼자 미친 듯 춤추며 놀자 재욱이 한숨을 흘렸다. 친구들이 그냥 두라며 재욱에게 고개를 저었다.
“쟤 요즘 무슨 스트레스 받는 일 있나 봐요. 그동안 아빠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놀게 좀 두세요.”
친구 중 하나가 그렇게 재욱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재욱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기에 지하의 팔을 확 잡아서 플로어에서 끌고 나갔다.
“아, 뭐야? 나 놀 거야! 이거 안 놔? 서재욱!”
지하가 빽빽 소리쳤지만 재욱은 듣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그런 두 사람을 의아하게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욱이 바 옆에 지하를 세워 두곤 얼음물을 건넸다.
“마셔.”
“싫어. 갑자기 왜 나타나서 선생님처럼 난리야?”
“마셔. 술 좀 깨.”
“취하려고 마신 술을 왜 깨? 미쳤어?”
“주아 때문이지?”
지하가 멈칫했다.
“나 참, 술 깨는 소리 막 하네. 얼음물은 오빠가 마셔. 아까운 술 다 깼네. 짜증 나.”
“둘이 만났단 얘기 들었어.”
“당연히 들었겠지. 내 번호 가르쳐 준 거 오빠였다며? 치사하게 그걸 알려 주니?”
“친구라고 했잖아.”
“쳇. 그 언닌 좋겠다. 여기저기 말 들어주고 지켜 주는 흑기사들 널려 있어서.”
지하가 맥주를 더 마셨다.
“그만 마셔.”
재욱이 말렸지만 지하는 확 쳐냈다.
“왜 그렇게 그 언니 편이 많지? 내가 더 예쁜데. 안 그래? 내가 더 예쁘지?”
“그래. 네가 더 예뻐.”
“근데 왜 여기 와서 서주아 역성이야? 남의 번호나 흘리고 다니는 배신자 주제에!”
“그렇게 아프면 나랑 다시 시작하자.”
지하가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잠시 주춤했다. 취한 시야로 재욱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진지한 얼굴로 재욱이 말을 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진심이야.”
“왜?”
“뭐가.”
“왜 날 기다리는데?”
“좋아하니까. 이유 있어? 내가 지켜 줄게.”
순간 어떤 날카로운 섬광 하나가 찌르듯 그녀의 뇌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지켜 줄게.
지켜 줄게?
“아, 짜증 나! 내가 그 말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 지켜 주긴 뭘 지켜 줘?”
“한지하.”
“나 유부녀야. 유부녀라고! 오빠가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아? 자신도 없으면서 어디서 지켜 주겠대? 제발 여자들 지켜 주지 마. 자기 혼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지들이 뭔데 자꾸 지켜 주겠대?”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재욱 오빠. 재욱 오빠!”
“왜.”
“나 지금 딴 남자 만나고 싶은 거 아냐. 그 남잘 너무 사랑해서 그러지. 알아? 너무너무 사랑해서, 서주아가 내 남자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미운 거라고!”
재욱이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지하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그런 지하의 어깨 위로 뭔가가 내려앉았다. 지하의 눈이 커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감촉, 익숙한 느낌.
그건, 시류의 양복 재킷이었다.
재욱의 날 선 시선이 지하의 뒤쪽으로 날아갔다. 날카로운 얼굴로 시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뭡니까? 와이프가 탈선이라도 할까 봐 몰래 감시하는 거요? 사람이라도 붙였습니까? 남자가 쩨쩨하게.”
그때 지하의 친구가 재욱의 말을 막았다.
“아, 아니에요. 오빠. 내가 지하 몰래 전화했어요. 아무래도 지하 쟤 걱정돼서.”
재욱의 말이 쑥 들어갔다.
지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 지하의 앞으로 돌아온 시류가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는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입술을 삐죽였다.
뭐, 댁이 온다고 내가 좋아할 줄 알아?
그때 시류가 입을 열었다.
“가자, 지하야.”
순간 지하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올려다보자 시류의 깊은 눈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홀로 고요하게 빛을 발하는 남자.
너무도 멋진 내 남자여야 했는데….
“가자.”
지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가슴에 툭 안겼다.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취해서까지 자존심 세울 일이 뭐가 있을까? 취기 때문인 양 그냥 지금은 그에게 한없이 기대고 싶었다. 이게 정말 내 진심인가 보다.
지하가 아무 반항 없이 가슴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시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녀를 더없이 소중하게 감싸 안은 채 밖으로 나가는 시류를 친구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트라도 뿅뿅 나올 듯한 그 분위기에 재욱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겐 가시를 잔뜩 묻혀 경계하더니 시류가 나타나자마자 순한 양이 되어 몸을 맡긴 지하의 행동도.
재욱이 양주를 확 들이켰다. 독한 술이 식도를 태우듯 내려갔다.
지하는 그런 재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류의 품에 기대 있었다. 시류의 단단한 가슴. 그게 너무도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진짜 싫어…. 꺼져 버려요.”
마음과는 다른 말, 그건 바로 몸의 언어였다.
이 남자를 미치도록 버려 버리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죽어도 놓아주고 싶지 않다. 당장이라도 단칼에 잘라 버리고서 떠나고 싶은 마음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서주아가 준 충격, 그 반지의 영상도 모자란 건지.
자신은 언제까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굴 것인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취기로 의식이 몽롱했다. 그 와중에 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머스크 향만이 가득했다.
아, 이 와중에 이런 남성적인 향기는 뭐야? 페로몬과 같은 그 향수가 지하의 전신을 흔드는 것 같았다. 자연히 그와의 밤이 떠올랐다. 얼마나 소중하게 안아 줬었는데. 얼마나 기뻤었는데. 얼마나 행복했었는데….
차의 조수석에 지하를 앉힌 시류가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지하는 눈을 감은 채 쓰러지듯 시트에 몸을 묻었다.
찰칵.
벨트가 들어가는 소리, 재킷을 그녀의 목까지 조용히 끌어 덮어 준다. 그 포근함에 지하는 급속도로 잠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꿈인 듯 환각인 듯, 어떤 뜨거운 입술이 지하의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촉촉하게 입술을 누른 그 입술이 서서히 멀어졌다.
지하는 그 입술을 미친 듯 잡고 싶었다.
***
번쩍!
눈을 뜨니 낯익은 공간. 시류의 집 침실이었다. 지하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잘한다. 근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다 천천히 어젯밤 일들이 떠올랐다. 미친 듯 놀다가 강시류가 와서, 강시류한테 안겨서, 이곳으로 온 것 같았다. 그제야 모든 게 다 똑똑히 기억났다.
“잘하는 짓이지, 정말.”
지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잠깐 일탈 좀 하려던 거였는데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거기에 강시류가 올 건 뭐람.
그보다 그 남자한테 얌전히 폭 안길 건 또 뭐고.
“가자, 지하야.”
아마 그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장해제 되고 말았었다.
“지하야. 지하야….”
남들에겐 너무도 당연하게 듣는 호칭인데 그에게 불린 건 이상하게 특별했다.
“특별하긴 뭐가 특별해?”
지하는 자신에게 욕을 퍼부어 주곤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다 정면에 있는 아주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비틀거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충격.
마스카라는 떡칠에 머리는 산발에…. 그야말로 귀신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배꼽티 입은 귀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당연히 시류였다.
“꺄악!”
순간 지하가 자지러지듯 소리치며 확 돌아서서 얼굴을 가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이따가 들어와요!”
“아…. 그런데 왜요?”
“왜긴 왜겠어요? 얼굴이…!”
그러다 지하가 멈칫했다.
하긴, 무슨 상관이야? 다 끝낼 판에. 나 막 나가는 여자야!
지하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리고 휙 돌아섰다. 그것도 모자라 마스카라가 떡칠이 된 얼굴을 빳빳하게 휙 쳐들었다. 립스틱도 반쯤 뭉개져선, 잘났다고 턱을 세우고 있는 그녀를 시류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굴이 말이 아니시네요.”
젠장.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뭐, 뭐라는 거예요?”
지하는 기겁을 하곤 욕실로 도망쳤다. 문을 닫고 서는데 심장이 다 울렁거렸다.
“저 남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그나저나 다시 존댓말로 복귀네.”
지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자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 보니 시류가 식탁에 뭔가를 차리고 있었다.
해장국.
민망해서 원.
“나 그냥 집에 갈 거예요.”
“드세요.”
“그런 것 좀 하지 말아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소리쳤던 지하가 멈칫했다.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지하는 반성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시류와 눈빛이 부딪쳤다. 창피했다.
“제가 뭘,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이렇게 너무 잘해 주지 말아요.”
“그리고?”
“헤어져요.”
“그것만 빼고요.”
시류가 다가왔다. 지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휙 달아나려는 지하의 앞을 시류가 막아섰다. 그녀의 어깨를 꽉 쥐고서 시류가 말했다.
“도망가지 말아요.”
“놔요.”
“놓을 수 없습니다.”
“놔야 할걸요?”
“안 놓습니다.”
지하가 그를 노려보았다.
“날 왜 놔야 하는지 말해 줄까요?”
“하지 마세요.”
“날 사랑한단 당신 말이 거짓일 거란 생각은 안 하기로 했어요. 여동생처럼 서주아를 생각했단 말도 백번 양보하면 믿을 수 있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서주아 앞에서 자존심 상해 죽겠어요. 내 남자를 나눠 갖는 기분,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요? 얼마나 화나는지.”
지하의 눈이 슬퍼졌다.
“내가 서주아였으면 좋겠어요. 서주아를 질투하고 서주아 때문에 불안한 입장이 아니라 내가 서주아한테 질투받고 싶어요. 당당하게 내 거라고 말하는 서주아가… 부러워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지하의 눈에 눈물이 핑글 돌았다.
“그 아이는, 내가 지켜 주고 싶은 나와 닮은 불행한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를 지켜 주고자 했던 마음 자체는 인정하기에, 죄송합니다. 먼저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을 품고서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은, 그게 문제예요. 남을 위해 자길 희생하는 거. 그거 엄청난 장점이지만, 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애를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했다면, 그 자체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여자예요. 내 남자인데, 나한테만 유일하길 바라는 게 그렇게 욕심이에요?”
시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근데 당신의 절실한 상대가 나만이 아니었대요. 나뿐만이 아니었단 그 사실이… 한없이 날 건드려요. 당신의 그 다정한 마음을 이미 다른 사람이 한때 가졌고, 그 마음에 여전히 기대 살고 있단 사실이 너무 아파요.”
시류가 고개를 숙였다.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날 어쩔 수 없어요. 영원히 당신과 나 사이엔 서주아가 누워 있을 거예요. 무서워요.”
시류가 눈을 들었다. 그 눈이 너무도 아팠다.
지금이라도 그 아픔을 없애 주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영원히 그럴 수 있을까? 불가능한 걸 하려다 욕심내면 그와 자신 둘 다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도 용기다.
“당신 마음이 단지 동정이었다고, 사랑이 아니었다고 지금은 믿어도 평생은 안 될 거 같아요. 누가 봐도 그 희생은 특별한 건데, 실수로 일어난 사고였지만 두 사람이 그때 나눈 감정은, 그 기억은 실수가 아니잖아요. 정말 있었던 시간이잖아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서주아는 그렇게 믿고 살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당신이 사랑하는 건 자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단호함이 화나.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분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어.”
“미안합니다.”
“차라리 당신이 서주아를 사귄 거였으면 나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니까, 의심병이 자꾸만 날 툭툭 칠 거 같아서…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자신이 없어요.”
지하가 시류에게 다가섰다. 까치발을 들고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시류의 눈동자가 팽창했다. 하지만 예감한 듯, 그의 표정에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미안해요.”
지하가 천천히 발끝을 내리고 섰다. 그런 지하를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던 시류가 입을 열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상처가 될 시간을 없애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더라도 전, 그 애를 구해 줬을 겁니다. 실수였지만, 실수가 아니라도 그날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실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정말 내 힘으로 죽였을지도 모르죠. 내 판단으로….”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런 끔찍한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위험한 꼬마 악마였죠. 당신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제 진짜 모습.”
“그걸 탓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에요.”
“알아요. 그럼에도 부정하지 못하는 건, 그 애와 내가 겹쳐 보인 이상 제 선택은 하나였으리라는 거겠죠.”
“…….”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 애를 지켜 주고, 그 애가 불행하지 않길 원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아프게 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알겠습니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속으로 삼키며 그가 말을 이었다.
“헤어져 드릴게요. 놔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