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뭘 하시는 건지?”
시류가 상반신을 벗은 채 인상을 살짝 쓰며 물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쭉 훑었다.
아무래도 작품의 테마를 바꿔야겠다.
‘슈트 안에 숨어 있는 성난 근육. 남성다움의 극치….’
두근거림을 감추며 지하가 턱을 치켜든 채 되바라지게 대답했다.
“본능에 충실하고 있었어요.”
“…네?”
미쳐. 이 말이 아니잖아!
“마, 말이 잘못 튀어나갔어요. 남자 몸 구경하고 있었어요.”
또!
“장난이에요. 어디 있나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시류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나가 계세요. 금방 입고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세요.”
물론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강렬한 시선으로 시류의 등 근육에 박힌 시선을 좀처럼 떼질 못했다. 이게 정희 이모가 말하던 그 성적 흥분의 정체인가? 욕구불만. 허니문 비염.
그 멋진 등이 검은 니트에 가려지는 걸 아쉬워하며 지하는 연필을 주웠다. 하지만 허리를 펴는 그 순간 바로 앞에 와 있는 그림자에 움찔했다. 시류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지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왜요?”
“제가 묻고 싶군요. 왜 아직도 이곳에 계시는 건지.”
“그, 그럼 안 돼요?”
거리가 너무 가깝다!
허리를 펴고 선 지하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왜 또 이럴 때 얼굴이 빨개지는 거야? 목소리는 왜 떨리는 거고!
그때 지하의 턱이 들렸다. 시류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하는… 멍했다. 그 손을 쳐내야 한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 남자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단 생각이 들다니. 확 밀려든 향기에 시신경조차 긴장했는지 눈 깜빡거림마저 없었다.
아, 이 남자를 갖고 싶다.
순간 시류의 매끈한 입술 선이 곡선을 그리며 끌려 올라갔다.
“왜 그렇게 멍한 표정이신 거죠?”
“내, 내가 언제….”
“그런 여자 같은 표정 하시면 위험합니다. 조심하세요.”
시류가 손을 놓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바람 끝에 묻은 애프터 셰이브 로션의 향기.
몸을 떨리게 하는 스킨 톤.
두근.
‘나 지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그제야 정신이 들자 지하는 고개를 휙 돌리고서 시류가 나간 방향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냥 갈 수 있지?”
그 정도로 신호를 보냈는데도 그렇게 가 버리는 게 가능해?
지하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에 이를 뽀도독 갈았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게이일 게야. 아니라면 절대 이럴 순 없는 거다!
***
다음 날, 지하는 옷장을 확 열고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입을 만한 옷이 없네.”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죄다 병간호하기 편한 스포티한 옷들뿐이니.
“갖고 올까? 아님 살까?”
그중 가장 여자 같은 옷을 꺼내 입어 보았다. 밝은 색의 화사한 미니 원피스.
“이 정도면 뭐 나쁘진 않네.”
스타킹도 꼼꼼히 신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몇 시간 내내 옷장 앞에서 고민한 이유가 뭘까? 설마 강시류 때문은 아니겠지?
“내가 왜?”
지하는 어이가 없었다.
“벗어 버려!”
다시 간편한 티와 스키니 진을 찾았지만, 결국 갈아입진 않고 그대로 나갔다.
시류는 거실에 서서 통화 중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자 또 그날 근육이 멋지게 박혀 있던 남자다운 등이 생각났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땐 근육에 정신 팔려서 지나쳤었는데, 팔뚝에 일자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다. 꽤 오래전의 상처인지 이제 자국만 희미했었다.
그건 언제 난 상처일까? 어릴 때 무시무시한 반항아였다더니 그때 입은 상처인가? 궁금한 얼굴로 탐색하듯 쳐다보고 있는 그때 시류가 통화를 끝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하를 발견한 시류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레몬색의 미니 원피스. 그 아래로 쪽 뻗은 다리. 하얀 목과 가느다란 팔. 반짝이는 눈동자와 코끝에 난 점. 우윳빛 피부.
그 눈빛에 지하는 그제야 만족감이 일었다.
당연하지. 저 정도의 반응은 있어 줘야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지하는 더욱 도도하게 코끝을 세워 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류는 헛기침을 하곤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가시죠.”
“어때요?”
시류가 멈칫했다.
“예쁘죠? 칭찬 정돈 하는 거예요.”
“예쁘시네요.”
“엎드려 절 받는 기분. 담부턴 먼저 말해 주는 거예요?”
“그러죠.”
시류가 돌아섰다. 지하는 목석같은 강시류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뭔가 전기가 좀 통한 줄 알았더니, 정말 내가 매력이 없는 거야? 어떻게? 말이 안 되잖아!
지하는 저 남자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 안 예뻐요? 정말 안 예뻐?’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도무지 저런 고요한 반응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동안 그를 째려보다가 현관으로 가서 구두를 꺼내 신었다. 그런데 문을 열려고 팔을 뻗는 순간, 등 뒤에서 먼저 뻗어 온 팔이 지하를 지나쳐 문을 열어 주었다. 순간 팔이 부딪쳐 지하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그 손을 확 접었다.
봐. 난 이렇게 설레어 주고 있는데.
자신을 감싸듯 등 뒤에 선 시류의 느낌이 선명하도록 인식이 되었다. 그에게서 풍겨 온 낮은 향기에 감정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이 전부 동요하는 것 같다.
차라리 이런 식의 행동이나 하지 말든지. 이 남자 일부러 내 반응 보고 있는 거 아냐? 내가 무너져 내리길 기다리는 거 아냐? 사실은 아주 능숙한 바람둥이 아냐?
“지하 씨.”
지하가 멈칫했다.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아달란 요구를 그가 들어준 건 기분이 좋았지만, 갑자기 불러서 좀 당황했다.
“왜, 왜요?”
“어디 아프세요?”
어느새 앞으로 온 그가 지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이마를 만지려는 순간 지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확 밀었다.
아…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내 맘대로 안 되니까 짜증이 났나 보다. 난 한없이 동요하는데 저 남잔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그런데도 자꾸만 심장 떨어질 행동을 하니까 신경질 났나 보다. 불공평하게 나만 흔들리니까.
“아, 아픈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이지 혼자 의식하고 혼자 까칠하게 굴고,
바보 같아.
목소리도 떨리고, 몸도 떨리고, 마음도 떨린다. 남자를 앞에 두고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 자신의 인생에선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순간 시류가 갑자기 큭 웃었다.
지하가 고개를 들었다.
의아했던 건, 그 웃음소리가 왠지 시니컬했기에. 마치 조소처럼….
지하가 눈을 치켜떴다. 설마 지금 날, 비웃은 건가?
“왜 웃어요?”
아니나 다를까, 시류는 입술 끝을 끌어 올린 채 약간의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 비웃었어요?”
“뭔가 착각하고 계신 거 같습니다.”
지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누, 눈치챈 건가! 정말로 날 테스트하려고 일부러 뒤에서 짓궂은 행동을 하고 내 반응을 본 거야? 그런 거라면… 가만 안 두겠어!
지하가 이를 갈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착각했단 건데요?”
“함께 지내다 보니 절 좋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요.”
시류의 눈매가 싸늘했다. 지하의 눈이 커졌다.
들킨 건 아니다. 하지만….
“강박관념이라고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 감정이 좀 이상하더라도 오해하지 마세요. 지하 씬 그냥, 결혼 상대에게 의지하고 가까워지고 싶은 여자로서의 자연스러운 마음을… 끌리는 걸로 착각하고 계신 것뿐입니다.”
화난다.
“제 손이 닿아도 놀라지 마세요. 지하 씨가 그럴수록 제가 더 부자연스럽습니다.”
정말 화난다.
***
‘망할 남자 같으니!’
정말이지 화나서 미칠 것 같았다. 지하는 정웅의 병실에 앉아 입술을 꼭꼭 씹어 대고 있었다.
“둔한 강시류!”
바로 시원하게 쏘아붙여 주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여자였기에.
그렇게 접근 금지 팻말을 붙인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며, 한다 해도 무슨 만족감이 있을까? 자존심만 더 일그러지지.
“지하야.”
팔짱을 낀 채 씩씩거리며 어딘가를 노려보는 딸을 정웅이 의아한 얼굴로 불렀다.
“무슨 속상한 일 있었어?”
순간 지하는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 이런!
아빠 앞에서 살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머리맡의 각도를 높여 침대에 기대듯 누워 있는 정웅의 얼굴은 전에 비해 말할 수 없이 수척했다.
바로 잠시 전까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을 호소해 지하와 나영이 달려와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호전되었지만, 기력이 쇠퇴해 예전의 정웅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였다. 하루하루 죽어 가는 사람 같았다.
“아, 아냐. 그냥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 있어서.”
“혹시, 시류 문제냐?”
지하가 움찔했다.
“으, 응?”
“두 사람, 내 강요에 못 이겨 결혼했지만 좋지는 않은 거지?”
“그, 그런 거 아냐.”
“아니다. 내내 내 마음이 안 좋다. 과연 내 욕심만 부리는 게 옳은 일이었나,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너무 강제적이었다. 네 인생인데, 네가 행복해야 하는 건데…. 난 시류가 여전히 좋다만, 그 애를 좋아하는 건 나지 네가 아니었거든.”
“아, 아빠….”
“두 사람, 내 앞에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단 거 다 안다.”
지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가, 약해지는 것 같다.
“지하야.”
“응….”
“오해 말고 들어라. 정 안 되겠으면, 헤어져도 돼.”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결혼식 다 올리고 이런 소리 하는 아비가 어이없겠지만, 내 말은 나 때문에 도저히 안 될 거 같은데 애쓰지는 말란 소리야. 시류 의견, 네 의견, 두 사람 선택 다 존중할 테니까….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져도 돼.”
“왜 헤어져? 이미 결혼했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나부터 말할게. 세상 사람들 다 우리가 부부란 거 아는데 내가 여기서 끝내면 뭐가 되겠어? 나 참, 아빤 이제 와서 딸 이혼녀 만들겠단 소리가 나와?”
“…미안하다.”
“아빠가 밀어붙였지만 결국 선택한 건 나야. 그거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지하야.”
“솔직히 강 상무 엄청 둔해! 진짜 답답해! 다른 일은 귀신처럼 날카로운 남자가 너무 당연한 건 바보처럼 못 알아차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얄미워!”
“허….”
“근데 일 되게 열심히 해. 밥도 잘해 줘. 꼬박꼬박 챙겨 줘. 내가 한 말은 그냥 안 지나치고 묵묵히 들어 줘. 외롭다고 한 말 듣고 집에서 재택근무도 해. 되게 바쁜 거 아는데도 꼬박꼬박 저녁 시간을 나랑 보내려고 해. 손도 엄청 예쁘고, 그 손으로 문도 잘 열어 줘. 어떨 땐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면들은 다 좋아. 햇볕 쐬어 주고 물 잘 주고 잘 가꿔 주면 곧 모든 게 좋아질 것도 같아. 아주아주, 좋아질 것 같아.”
한참 칭찬하던 지하가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깜빡거리자, 정웅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아빠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결혼 상대치곤 괜찮다고. 뭐, 딱 그 정도야, 그 정도. 내가 뭐 그 남자가 막 좋아졌다거나 미련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적어도 결혼한 걸 후회하진 않을 정도? 딱 그 정도야.”
줄줄이 변명을 늘어놓는 딸을 보고 있던 정웅이 곧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하는 여전히 정웅의 시선을 피하며 긴 변명을 줄줄 더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하, 그런 건가.’
적어도 자신의 선택이 딸을 불행하게 만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뭔가가 시작되려는 건가? 딸의 반응을 자신이 모를 리가 없으니.
만족감.
그가 지하 몰래 씩 웃었다.
***
“어서 누우세요.”
지하는 경희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 이만하니 천만다행이지 어쩔 뻔하셨어요? 말에서 떨어지다니, 아가씨답지 않게.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 혹시 전화는 아직 안 했죠?”
“당연히 드렸죠. 그런데 지금 사모님 회의 중이시라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
“그, 그래요? 근데 엄마 말고 그 사람한텐….”
“당연히 연락드렸죠. 곧 오실 거예요.”
지하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저, 전화를 했다구요? 왜요!”
“네? 당연히 아가씨가 다치셨으니까….”
내가 미쳐!
지하는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
기분 전환하러 어릴 때부터 해 온 승마를 하러 간 게 문제였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한눈을 팔다가 낙마하고 말았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인데.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엉덩이와 팔 쪽에 타박상을 입었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집에 온 길이었다. 당연히 정신없을 나영에겐 말하기 뭣해서 경희를 부른 거였는데 이런 사고를 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입단속 해 둘걸.
“전 당연히 상무님이 아셔야 하는 줄 알고….”
집안 사정에 빤한 경희가 뭔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지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큰일이다. 강 상무와의 불화를 확인시켜 줘서 좋을 건 없는데. 안 그래도 분명 그와 자신 사이가 안 좋을 거라고 말들이 많을 텐데.
“아, 걱정하실까 봐 그러시는구나!”
“마, 맞아요! 걱정할까 봐. 일하느라 바쁜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하하….”
이 정도 말로 눈치 빤한 경희의 의심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하는 대충 그 정도로 둘러댔다.
그때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지하가 돌아보자, 달려온 건지 호흡이 잔뜩 헝클어진 시류가 서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 괘, 괜찮아요.”
“치료는 다 한 건가요?”
그가 바로 경희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저런 상태로 들어선 것에 약간 흠칫해서 서 있던 경희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필요한 치료는 끝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 말씀이 약간의 타박상 정도라고 하셨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아마도 뭔가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 정략결혼인 만큼 서로 소 닭 보듯 냉랭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을 거라 확신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저렇듯 뭔가 예상과 빗나간 듯 깜짝 놀란 얼굴이겠지.
경희 앞에서 체면치레는 한 것 같아 지하는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정말 전속력으로 달려와 준 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러려고 다친 건 아니었지만 일종의 전화위복이랄까. 시류의 앞 머리카락이 땀에 살짝 젖어 있다. 그게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경희가 나가자 시류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는 숨이 막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지하가 낙마했다는 전화에 약속도 취소한 채 달려오고 말았다. 아주 중요한 미팅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다니까요. 일하던 중 아니었어요?”
“놀고 있진 않았습니다.”
“별로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오긴 왜 와요?”
와서 좋으면서, 여자들의 언어는 왜 이 모양일까? 모조리 다 반어 아니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아주 다 엉망이다.
진짜 뜻은, ‘내가 이렇게 다쳤는데, 사실 그렇게 대단히 다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쳤단 소리에 그렇게 열 일 다 제친 표정으로 달려와 준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만약 안 왔으면 그땐 국물도 없었을 거다. 아주 그냥 서운하고 속상해서 다 끝냈을걸?’이었는데 말이다.
“왜 치료받기 전에 연락하지 않으셨어요?”
“뭐, 일하다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놀다 다친 건데 부산스럽게….”
“어쩌다 다치셨는데요?”
지하가 움찔했다.
“그, 그냥 좀 한눈팔다가…. 더 이상 묻지 말아요. 여섯 살 때부터 탔는데 떨어져서 창피해 죽겠으니까.”
시류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그 표정 보니 정말 믿는 것 같지? 사실 더 물으면 곤란할 뻔했다.
낙마한 이유, 그건 한눈을 팔아서가 맞았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환시를 봤었다. 말을 타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 같아 넋을 잃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시류인 줄 알았었다. 뒷모습이 정말 닮아서…. 그러다 떨어졌다.
그러니 그걸 창피해서 어떻게 말해?
“아, 암튼 무사한 거 봤으니까 그만 가요.”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그럼 회사는요?”
“지시 내려 두고 왔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다친 사람을 두고 가 버릴 만큼 매정하진 않아서요.”
지하가 피식 웃었다.
“누가 들으면 엄청 다정한 사람인 줄 알겠네. 대단히 큰일도 아닌데….”
“아내가 다치면 남편에겐 그게 가장 큰 일입니다.”
지하가 멈칫했다. 시류가 말을 이었다.
“유부남 직원들이 대개 그렇다더군요.”
머쓱한 표정으로 말이다.
처음으로 강시류란 남자가 귀여울 수도 있단 걸 발견했다.
지하가 씩 웃었다.
역시 전화위복.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건가? 이걸로 이 남자를 하루 종일 차지할 수도 있단 사실에 괜히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지하는 어떻게 하면 이걸 기회로 굳힐까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시류가 다시 나타났다. 검은 스웨터, 검은 바지. 저 남자는 검은색이 참 잘 어울린다. 머리카락이 조금 긴 듯, 날카로운 눈빛이 결 좋은 머리카락으로 약간은 부드럽게 중화가 되었다.
옷을 걸치고 있으면 늘씬한 몸.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쫀쫀한 근육들을 자신은 알고 있다.
그 근육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보고 싶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강한 팔에 안기고 싶단 생각에 자주 넋을 잃게 된다.
그래서 작전 돌입!
“근데 나 좀 답답한데 창가로 옮겨 줄래요?”
그러면서 지하가 양팔을 나란히 벌렸다. 순간 다가오려던 시류가 주춤했다. 하지만 지하는 빤빤한 얼굴로 말끄러미 시류를 쳐다볼 뿐이었다.
“뭐 해요? 안아 줘야지.”
“…….”
“왜요? 설마 나더러 걸어가란 거예요? 아니면 나 안아 주기 싫어요?”
시류가 낮게 한숨을 삼키더니 지하에게 다가왔다. 덜렁 안아 들자 지하는 씩 웃으며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 좋다….
촉감.
이 남자와 닿는 촉감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다.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다운 목덜미도 느꼈다. 뺨을 실크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간질였다.
하지만 호시절은 금세 끝났다.
창가의 의자에 그녀의 몸이 가만히 내려앉혀지자, 곧 시류의 품이 멀어졌다.
앗! 놔주지 말걸!
“여기 좀 춥다. 소파로 갈래요.”
“아니다. 아까 그 창가가 낫겠어요.”
“아, 나 물! 주방에 데려다줘요.”
“서재가 좋겠다. 그냥 있으면 뭐해요? 책이라도 읽어야지.”
“아까 창가!”
결국 몇 번 같은 짓을 반복했다가 강시류에게 된통 혼났다.
“재미있는 놀이는 여기서 끝입니다.”
그가 애초에 그녀가 주문했던 창가에 앉혀 주며 차갑게 말했다. 하긴,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너무 과했나?
“앉아 계세요. 무릎 담요 가져올게요.”
그녀를 앉혀 준 시류가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하는 그의 목에 감겨 있는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 시류가 허리를 굽힌 그대로 정지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지척에서 마주쳤다. 이 남자의 깊은 바다처럼 검푸른 눈동자. 그 빨려 들 듯한 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지하가 말했다.
“내가 왜… 이곳저곳 옮겨 달라고 한 거 같아요? 단지 심심해서 그런 거 같아요?”
“심심해서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어떤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는 이 남자. 오히려 침착하게 공격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 태도가 분했다.
“머리 좋으면서 그 정도밖에 생각 못 하겠어요? 내가 왜 당신한테 이런 빤히 보이는 이상한 짓을 하는지 조금만 생각하면 알 텐데.”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
“지하 씨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왜요? 왜 생각도 안 하려 드는데요?”
“그건.”
“그건요?”
지하가 절실하다 싶은 눈으로 물었다. 시류는 마치 원망하듯, 그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어질까 봐, 입니다.”
지하의 눈이 커졌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조금 지친 듯, 시류가 지하의 팔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지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힘을 주며.
“나랑 잘래요?”
순간 시류가 정지했다. 하지만 금세 얼음처럼 싸늘한 얼굴을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왜요? 그냥 유혹 좀 한 건데. 아내가 남편 유혹하는 게 그렇게 차가워질 일인가?”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확인하니까 역시 속상하긴 하네요. 내 가치가 왜 이렇게 떨어졌을까 자괴감도 들고.”
지하가 팔을 풀었다.
“못 들은 걸로 해요. 그렇게 싫으면.”
멀어지는 지하의 손을 시류가 확 잡았다. 지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시류는 지하의 손을 꽉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타오를 듯 뜨거운 눈동자. 호흡도 함께 뜨거워졌다. 지하의 숨소리도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건 분명 어떤 화학작용.
남녀 간에만 생길 수 있는, 설명할 수 없는 공기의 흐름. 심장이 마구 펌프질을 하면서 눈 주변이 화끈거릴 정도로 더워졌다. 숨이 가빠지고 잡힌 손목이 불에 덴 듯 뜨겁다. 인두로 지진 듯 그 손목은 점점 더 화상을 입을 것처럼 화끈거렸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당신과 자고 싶습니다.”
“……!”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습니다.”
“…….”
“그래서 그렇게 하면 즐거울까요? 그럼 당신은 평생 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게, 뭐가 잘못된 건데요?”
“이끌림과 사랑을 착각하지 마세요. 순간적인 혼란에 자신을 맡기지 마세요. 당신이 후회하는 거, 전 보지 못합니다. 차라리 욕심을 누르겠습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지하의 손이 흔들의자의 팔걸이로 툭 떨어졌다.
돌아서는 시류를 향해 지하가 소리쳤다.
“내가 후회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후회하는 거겠죠!”
시류가 멈칫했다.
“강시류한테 한지하의 의미는 그저 은인의 딸. 근데 정말 그거뿐이에요? 욕심을 누르겠다구요? 그 말은 당신 자신이 이미 순간적인 혼란에 자길 맡겼단 거 아니에요? 나한테 여러 가지 감정이 드는 게 아니냐구요! 아니면 이미 날 좋아하고 있었다든지.”
그가 움찔했다.
“근데 은인의 딸에게 진지한 감정을 갖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왜냐하면 그건 은혜를 저버리는 거니까. 절대 해선 안 될 일이라고 자기 자신을 계속 속이고, 막고 있는 거니까. 내 말이 맞죠? 그렇죠?”
그의 등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부정하고 있지 않다.
“당신도 날 좋아하고 있어요. 혹,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한테 끌리고 있어요. 내가 아프면 싫죠? 내가 힘들면 아프죠? 그런 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아한다고 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 감정을 은인의 딸한테 앞세울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속상한 거고. 내 말이 맞아요. 그렇잖아요! 대답해요!”
그가 답답하고 또 미웠다. 지하는 그를 한없이 노려보았다.
“쉬십시오.”
하지만 시류는 결국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은 해 주지 않은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하는 이를 뽀도독 갈며 그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화나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무릎 담요는 왜 안 주고 가는데? 젠장. 담요는 받고 말할걸!”
시류는 상념 짙은 표정으로 서재로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을 탕 치고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확 감았다.
틀린 것 하나 없는 그녀의 말. 가슴에서 무언가가 팔팔 끓어 넘친다.
그건 욕심, 욕망.
뜨겁다.
뜨거워서 미칠 것 같다.
***
지하는 부스스 눈을 떴다. 깨어나고 보니 침대였다.
“이상하다. 창가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정웅의 병실을 오가느라, 졸업 작품 준비하느라 꽤 피곤했었나 보다. 어제 흔들의자에서 책을 보며 좀 쉬었는데 꼬박꼬박 졸다가 어느새 잠든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뜨니 침대라서 이상했다.
“설마 강 상무가 옮겼나?”
원인은 그것밖에 없을 듯했다. 하지만 옆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 있어 줄 줄 알았더니 휭 가 버렸어? 이 워커홀릭. 아님 쫌 건드렸다고 삐진 거 아냐?”
문득 어제 자신이 쏟아낸 말들이 떠올랐다.
“당신도 날 좋아하고 있어요. 혹,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한테 끌리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 감정을 은인의 딸한테 앞세울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에요. 내 말이 맞아요. 대답해요.”
너무 단정적으로 몰아붙였나. 하지만 그 말을 한 걸 후회하진 않았다.
“아, 뼈가 삐끗거려.”
아직도 타박상의 흔적이 남아 여기저기 좀 아팠다. 그런데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게 왠지 문득 확 서러웠다.
괜찮아. 아플 땐 다 그렇다니까.
그때 침실 문이 열리자, 인상을 쓰고 있던 지하의 고개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하지만 들어선 건 경희였다.
“좀 주무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아…. 그냥 약간 쑤시는 것 빼곤.”
“하긴,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하네요. 그렇게 걱정해 주시는 분이 옆에 있으니 금방 나으실 거예요. 부러워요, 아가씨.”
지하가 갸웃했다.
사랑의 힘? 걱정해 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고? 어디에? 왜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거지?
지하가 꽤 멀뚱한 표정을 했는지 경희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모르셨어요? 상무님께서 밤새 옆을 지키셨는데. 한숨도 안 주무시고 방금 전에 출근하셨어요.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가시더라구요.”
“…정말이요?”
“네. 혹시 몰라서 제가 어젯밤에 왔었거든요. 제가 있겠다고 했는데도 극구 본인이 계시겠다고 하셔선. 출근할 때 보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시던데. 아무튼 열 오르지 않게 조심해라, 음식은 당분간 유동식으로 드려라, 이것저것 당부하고 가셨어요.”
“그, 그랬어요?”
“네.”
“그럼 진작 좀 말해 주지.”
괜히 욕했잖아.
“네?”
“아니에요.”
지하가 시치미를 떼며 생글 웃었다. 기분이 확 좋아졌다.
칫.
하지만 강시류 자체한텐 불만이 있다. 물론 생각지 않았던 일에 놀라고 고맙긴 했지만, 차라리 깨어 있을 때 좀 잘해 주지, 잠들었을 때 백번 옆을 지키면 뭐해? 정신 말짱할 땐 못된 말이나 퍼붓고, 차갑게 튕겨 내기나 하고.
알아야 고맙단 말이라도 하지. 눈 뜨고 있어야 당신이 나한테 해 준 걸 알지.
정말이지 계산도 못 하는 남자다. 주야장천 손해만 볼 남자다.
지하는 경희에게 부탁해 휴대폰을 받았다.
‘전화해 볼까? 고맙단 말쯤은 해도 되잖아? 아, 그치만 왠지 어색해!’
화면만 쳐다보며 내내 고민만 했다. 그러다 손가락을 잘못 터치해 인터넷 창이 열렸다.
“쯧쯧.”
혀를 차며 창을 닫으려던 지하가 멈칫했다.
화면에 뜬 기사가 있었다.
세계 음악계에 화제를 몰고 온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서주아의 귀국 초청 독주회!
세계 최정상 아티스트들이 참가하는 스위스 메뉴힌 페스티벌, 독일 크론베르크 페스티벌에서 초청 리사이틀.
독주자로서 우수한 기량 발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