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그녀의 언어 (5/12)

잠에서 깨어난 정웅을 만난 시류와 지하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먼저 나온 지하가 팔짱을 낀 채 싸늘한 얼굴로 뒤돌아서 있었다. 그런 지하의 뒤로 시류가 다가와 섰다.

지하는 사실 지금 그를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집으로 가실 거면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됐어요. 내가 알아서 가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하.

두 번 묻지도 않고?

저게 대체 정중이야, 무시야?

“강시류 상무님!”

시류가 돌아보았다.

“자기 처지를 망각한 거 아니에요? 내가 가라고 허락도 안 했는데 어딜 멋대로 가요?”

시류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플라스틱처럼 표정 없는 남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아무리 쉼 없이 잽을 날려도 주춤하는 것 하나 없으니 약 올라서 자꾸만 더 괴롭히고 싶지.

아까 전에도 그랬다. 응접실에서 마주쳤을 때.

“왔어요?”

적막을 깨며 그녀가 뒤늦은 인사를 했을 때, 그가 난데없이 사람을 쏘아보았다.

그런 식의 적극적인 감정적 표현은 처음인 남자라 지하가 갸웃했다.

왜, 왜 저러지? 내가 뭘 잘못했나?

하지만 금세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은 또 그저 정중하고 차분할 뿐이었다.

뭐냐구, 저 행태는?

“후우, 강 상무님.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사람을 보면 서걱서걱 모래 소리 나는 목례보다 자기 성대를 직접 써서 하는 평범한 대답 쪽이 백배는 낫다고….”

그때 나영이 병실 쪽에서 나오는 바람에 지하의 잔소리가 끊어졌다.

“음, 두 사람 다 왔구나. 잘됐다. 아버지 깨어나셨어.”

지하가 바로 발딱 일어났다. 날 잡은 양 따지려던 것도 잊어버린 채 그녀는 정웅을 볼 마음에 얼른 병실로 달려갔다. 시류가 천천히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지시를 내리세요.”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요.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짜증!

그건 무리라고 한마디만 들이받으면 간단할 것을. 어디 날뛰고 싶은 대로 날뛰어라 이건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데도 늘 흡족하지 않다. 하나도 기쁘지 않다. 뒤끝만 안 좋은 기분.

“여기 계속 서 있어요.”

“그러겠습니다.”

“아니, 지금 가요.”

“알겠습니다.”

“나가서 지금 당장 죽어 버려요!”

시류가 멈칫했다. 그러다 빤히 지하를 바라보았다.

“뭐가 또 불만이신가요?”

“이것도, 저것도, 다 불만이에요!”

그냥 마음 한 조각 봐 주기를 바랐던 거다.

이쪽이 변덕을 부려 가며 쓸데없이 트집 잡기에 여념이 없으면 먼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봐 주길 바랐다. 그냥 모든 보통 여자들이 그러하듯…. 딱딱한 집사처럼 제 할 일만 할 게 아니라 마음부터 봐 주길 원했다.

“공손하게 무시당하는 기분 같은 거 전혀 모르죠? 난 늘 당신만 보면 그런 걸 느껴요.”

“제가 아가씨를 무시한다는 건가요?”

“아니에요?”

“누구도 당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저는 더더욱.”

오늘 끝을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저 ‘당신’이란 호칭에 그나마 살짝 마음이 풀렸다. 지하는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옛날부터 ‘아가씨’라는 호칭이 싫었었다. 마치 그와 자신의 거리를 스스로 단정해 놓고서 일부러 거리를 벌려 놓으려는 듯한 그 호칭. 꼭 접근 금지 팻말 같아서 거슬렸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렇겠죠. 뭐가 또 당신을 건드린 건가요? 말씀하시면 고치겠습니다.”

“아빠 앞에서 당신의 태도요.”

물론 그는 정웅의 앞에서 완벽했다. 세심하게 그녀를 챙기며 서로 잘 지내는 양 아주 능숙하고 다정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게 분했던 건지.

이 결혼은 오로지 아빠만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야?

삐진 거다, 그냥.

딸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우니 정웅은 금세 눈치챘을 것이다. 실제로 시류가 아무리 잘 지내는 척해도 정웅의 표정엔 걱정스러움이 담겼다.

이 두 녀석 괜찮은 건가? 그런 표정.

“난 연기 못 해요. 당신처럼 그렇게 자유자재로 연기가 안 되는 사람이니까, 아니, 여기서 퍼붓기 시작하면 화낼 거 같으니까 차에 가서 얘기해요.”

지하가 먼저 앞섰다.

잠시 후, 차 안에 앉은 두 사람은 각자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할 말 없어요?”

“…없습니다.”

“우리 며칠 만에 본 건지는 알아요?”

“글쎄요.”

아, 정말!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평소보다 더 과묵한 것 같았다. 아니, 더 부정적인 것 같다.

“아빠 앞에선 그렇게 자상하시더니 금세 눈동자에 살얼음이 끼네요. 아빠한테만 잘 보이고 나한텐 잘 보일 필요 없다 이건가?”

“그런 적 없습니다.”

또또! 저렇게 말을 톡톡 끊어 버리니 연결이 안 되잖아!

원래 말 적고, 표정 적고, 반응 적은 남자였지만 오늘따라 더 모든 게 적었다. 병실을 나온 직후부터 저런 상태였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사실 평소엔 무표정한 거였지, 저렇게 냉한 기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까 내가 또 성깔 부려서 그래요?”

“별로 그런 것에 영향받진 않습니다.”

“니 성격 하루 이틀이냐, 그런 말로 들리네요.”

“비꼬지 마십시오. 한번 부정적으로 인식하면 끝이 없습니다.”

“훈계까지.”

“죄송합니다.”

“강 상무님을 모르겠어요.”

“무엇을 말인가요?”

“날 뭘로 생각하는 건지.”

시류가 멈칫했다.

“아 정말,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하고 있어야 하지? 이상하게 어느 순간 터닝 포인트가 된 거 같아. 매달리는 건 나고, 따지는 것도 나고, 꼭 집착하는 것처럼. 사람 우습게 만들고 있어요, 강 상무님이.”

“…….”

“같은 집에 사는데 숨바꼭질하듯 얼굴도 안 보여 주는 건 그렇다 쳐요. 아빠 앞에서랑 내 앞에서의 태도가 너무 다르잖아요. 아니면 그냥, 아빠 돌아가시기만 기다리는 거예요?”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그만하세요.”

시류가 마치 충고하듯 차갑게 끊었다. 이럴 때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한지하가 아니지.

“싫은데요?”

그녀는 뻗대는 걸 택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 한껏 비뚤어져 있었으니까.

“싫어도 자제해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이 꽁생원! 건어물! 짜증나는 초식남!”

그녀가 갑자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붓자 시류가 멍한 얼굴을 했다.

“지금 뭐라고….”

“꽁생원! 건어물! 짜증나는 초식남이라고 했어요. 왜요? 더 해 줄까요? 답답이! 벽창호! 개미똥구멍!”

“하….”

“화나요? 내가 뭐라고 한들 영향이나 받아요? 당신은 자기가 엄청 정도만 걷는 바른생활 남자 같죠? 내가 보기엔 그냥 심하게 재미없고, 지루하고, 답답한 일방통행 길이거든요? 거기로 가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는데 절대 들어갈 수 없어 뱅글뱅글 돌아야 하는 골치 아픈 표지판!”

시류가 낮게 혀를 찼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기막혀.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물론 아빠 앞에서 친해져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렇게 갑자기 자기 혼자 연기 들어가면 내 입장은 어떻겠어요? 미리 언급이라도 해 주든지, 큐 사인도 안 주고 난 들어가니까 너도 알아서 들어와라, 그거 정말 얼마나 당황스러운데.”

“…….”

“나한텐 내내 선만 그었던 주제에.”

지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왜 이렇게 나 혼자 안달해야 하는 거야? 나만 안달하는 거 같잖아. 누가 봐도 내가 저자세로 보이잖아.’

“연기보다 우리가 잘 지내 볼 기회를 가져 볼 생각은 없는 거예요? 난 그게 서운해요. 왜냐하면 난 그래 보고 싶으니까. 가식적인 연기 같은 거 싫단 말이에요. 아빠 돌아가시기 전이라도 편하게, 정말 잘 지내는 거 보여 주고 싶은데 뻣뻣한 남잔 기회도 안 주고.”

지하는 자꾸만 자신을 흔드는 바람.

어떻게든 버티려고 팔이고 다리고 사지를 지면에 꽁꽁 묶어 결박해 두고 있는데도, 그녀의 몇 마디에 속절없이 휘청거리고 만다.

그녀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자신은 그녀가 일으키는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만다.

“나도 알아요. 아빠 건강해지실 때까지만 잘 지내는 척하면 된단 거. 하지만….”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말씀하십시오.”

갑자기 시류가 한 말에 지하가 말허리가 잘린 채 굳어 버렸다.

“뭐라구요?”

‘난 연기를 잘 못하니 앞으론 집에서 서로 좀 아는 척도 하고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해 보자’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도 다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지하가 표정을 굳혔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이 결혼을 받아들인 건 회장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에겐 회장님의 병을 숨겨야 하는 임무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하지만 이미 모든 걸 알게 되셨으니 계약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가씨가 알게 된 시점에서 상황은 변한 겁니다. 당신을 비밀로부터 지켜야 할 제 방패로서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고 표현하면 옳을까요?”

시류가 낮은 웃음기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앞으론 아가씨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시면 됩니다.”

지하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되물었다.

“무슨 판단이요?”

“이 결혼을 언제까지 지속할지에 대한 판단.”

지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명치끝이 싸했다.

침묵. 아주 고요한 차 안.

시류는 불과 몇 시간 전 이 차 안에서, 이와 똑같은 침묵을 경험했다.

차 안에서 훔쳐본, 그녀가 재욱과 함께 있던 모습.

유치한 질투인가? 보기 싫은 분노인가? 뭐라고 해도 좋았다. 그때 그는 분명히 아팠었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 시류는 잠들어 있는 지하에게 다가갔었다. 곤히 자고 있어 그냥 둘까도 싶었지만 저녁을 먹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깨웠다.

그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을 때, 희미하게 눈꺼풀을 든 지하와 시류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겁먹은 얼굴. 꿈이라도 꾼 듯….

그 명백하게 두려워하는 눈빛을 보며, 무슨 꿈을 꾼 건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녀가 정신이 들었는지 곧 당황했다.

“미안해요. 왜 깨웠….”

“편하게 지내세요.”

시류가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을 잘랐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설마 자신이 그녀를 해치겠는가. 하지만 그건 자신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그녀만의 감정 상태. 누군들 그 사실을 알고 자신과 함께 있고 싶을까.

아마도 그녀는 평생 자신만 보면 저런 공포 속에서 뒤척이겠지. 씁쓸하단 몇 마디 말론 설명할 수 없는 괴로운 감정이 그를 휩쌌다. 나를 두려워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내내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눈은 자신이 너무도 원하는 사람의 눈이다. 그게 자신에겐 가장 끔찍한 공포란 걸 그녀는 알까.

“아, 저… 그게….”

시류의 표정 때문에 지하는 왠지 아주 미안해졌다. 그건 강시류라는 남자에게 처음으로 가진 미안함이란 감정이었다.

“거, 겁먹지 않아요. 충분히 편안히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둘러댔지만 이미 상처는 줘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두고두고 미안했다.

하필이면 또 그 꿈을 꾸어 버린 탓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

그 칼을 쥔 소년의 얼굴 위로 내리치는 번개.

그때 이후로 시류의 마음은 조금씩 더 흐려지고 있었다. 물웅덩이에 진흙이 섞이고, 조금씩 더 섞여 결국 완전히 흙탕물이 되었다. 잉크가 번지고 번지다 못해 완전히 까만 먹물이 되어 버린 것처럼.

‘사람을 죽인 주제에’

메마른 가슴으로 자신에게 조소를 흘렸다.

“난 키스하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걸 당신이 막고 있잖아.”

그래.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 권리가 있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 주려 한다. 언제든 그녀가 원하면 보내 줄 것이다.

사랑과 함께 배운 ‘포기’라는 감정. 한 뼘 마음이 깊어질 때마다 욕심을 버리는 법도 같이 배웠다.

더운 날이면 햇볕보다 더 뜨겁게, 맑은 날이면 바람보다 더 시원하게, 흐린 날이면 비보다 더 촉촉하게, 추운 날이면 눈보다 더 시리게, 일생이 그녀로 인해 울었다 웃었다 했었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진 냉랭한 한마디에 가슴이 베이고, 훔쳐 본 미소 한 자락에 괜스레 마음이 더워지곤 했었다.

그녀가 여섯 살 소녀였을 때부터 현재까지… 늘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그녀.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도 한 번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자리는 언제나 네 언저리였다. 그게 죽도록 싫었던, 비참하고 수치스러웠던 덩치만 큰 소년.

그게 바로 자신의 과거였다.

왜 넌 내 앞에 있었던 걸까? 대체 왜 그녀의 성장을 지켜봐야 했던 걸까. 정이 들고 애정이 깃들고 욕심이 자랐던 걸까.

“회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결혼을 유지하고 싶다면 전 그렇게 할 것이고, 아니라면 또 그 의견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 또 선을 긋는군요. 잘난 강시류 상무님.”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해요? 당신은 당신의 상식선에서 합리적으로 말한 것뿐인데. 정말이지 당신에 비하면 내 상식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네요.”

지하가 조소를 흘렸다.

“그럴 거면 왜 결혼했어요? 내가 아빠 병 알게 됐을 때 그냥 그만두지? 내가 결혼하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아마, 이렇게 심적으로 가까워질 줄 몰랐던 거 같습니다. 결혼은 그냥 표면적인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내가 꼬치꼬치 따지고 당신한테 심적으로 가까워지려고 욕심을 내던가요? 그래서 막 부담스러웠나요? 진짜 요령 좋은 남자네. 그때그때 말이 달라요~.”

지하가 호되게 비난하며 조롱했지만 시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심적으로 가까워질 줄 몰랐다.

단지 그녀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표면상 내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그녀에게 그렇게 화가 나리라곤. 이렇게 속이 뒤집힐 정도로 질투가 나리라곤.

피식.

내 사람이라고 생각이라도 했던 건가.

서로 사적인 관계는 터치하지 말자고 했던 그녀. 그 말을 뒤집고 독점권을 내세우고 싶었다. 그게 결혼이란 것의 함정이었다.

“좋아요.”

지하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자신만 안달복달 화내는 양상을 보이기 싫었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이 결혼의 유효 기간은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이에요.”

애초에 암묵적으로 그렇게 동의했던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보니, 문득 그동안 이 남자에게 했던 잔혹함 일색이었던 언행들이 하나씩 떠오르는 게 아닌가.

단지 1, 2년이 아니었다. 커 오는 내내 그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었다.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었다. 철없이 한 행동들. 모욕, 독설, 타박.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무슨 말을 해도 신경도 안 쓰는 그의 모습에 약 올라 건드렸었고. 그리고 그 다음엔….

어떤 일 때문에 그가 아주 싫어졌었다.

이후엔 그도 알다시피 결혼 때문에 부딪쳤었고. 그런 일들이 생각나자 지하는 무척 심란해졌다.

나 정말 어렸었구나.

“만약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자고 하면 어떡할래요? 아빠하곤 상관없이 지금 바로 끝내자고 하면?”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지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말씀드렸던 대로 아가씨가 회장님의 병을 모르길 바랐는데, 이미 알았기에 그 조건은 사라졌습니다.”

나 이 남자 한 대 날려 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아아, 그렇구나. 근데 그렇게 물러나도 괜찮겠어요? 회사는 어쩌고? 날 잃으면 회사까지 잃을 텐데?”

“회사엔 욕심 없습니다.”

지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회사도 안 되고.

“어, 엄만요? 엄만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회장님과 충분히 대화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엄마도 안 되고.

“그럼 내가 대체 당신을 뭘로 잡을 수 있는데?”

소리쳤던 지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말았다.

아… 나 지금 뭐 한 거야? 미쳤구나! 대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인 거야?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에 대한 경악으로 점점 더 벌어졌다. 머릿속에서나 할 법한 헛소리를, 그렇더라도 창피했을 그 말을 무려 밖으로 흘리고 말았다니!

시류의 표정이 묘했다.

못 알아들었겠지? 들었어도 다른 식으로 생각하겠지? 그냥 늘 그랬듯 철없는 아가씨가 세상모르고 떠든 욕심 가득한 말로 들렸겠지?

‘아빠, 나 저거 사 줘. 아빠, 나 비행기 사 줘. 아니, 아빠, 나 그냥 하늘 다 사 줘!’

제발 그래야 할 텐데.

피식.

그때 시류가 웃었다.

“역시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욕심을 애정으로 착각하지만 마세요.”

칫.

“강시류 씨야말로 욕심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잘난 척 말아요. 그렇게 점잖은 척해 봐야 자기한텐 하나도 안 남아요. 그렇게 계산 못 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계산 같은 거 상관없습니다. 회장님이 일구신 회사의 한 부품으로서 제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로봇이네, 완전 로봇이야. 말로만 들으면 안드로이드가 따로 없어.”

시류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결국 지하가 폭발했다.

“도대체 목적이 뭐예요? 내가 생각한 게 하나도 안 맞잖아!”

회사에도 욕심 없고, 그렇다고 지금껏 툭하면 자길 괴롭혔던 내게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가씨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가불해서라도, 외상을 해서라도 써야 하는 거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내가 원하는 게 그건데, 저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의미가 없겠죠. 제가 정한 제 역할이 그거니까요.”

지하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뭐, 이런 지겨울 정도로 순수한 남자가 다 있어? 그야말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인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몸의 모든 성분이 아빠에 대한 은혜를 갚는 세포로 이루어진 것처럼.

“난 시류가 좋다.”

“회사를 생각해서 나로선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류만 한 인재 없다.”

“시류는 그만한 믿음을 나한테 줬고. 그 어떤 면에서도 날 실망시킨 적 없다.”

“널 맡길 이유가 충분하니, 자격이 되니까 결정한 게야. 더 이상은 언급 마라.”

아빠의 그 믿음은 근거가 확실한 것이었다. 그 증거를 지금 이 남자가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그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둔했던 거겠지.

그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란 거. 또 안타까운 사람이란 거. 멋진 남자란 것도, 끌릴 만한 사람이란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다, 이미 너무 늦었다. 자긴 모르겠는데 저 남자가 늦었단다.

아니, 이 결혼은 처음부터 불완전했었다.

다 아는데도.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날 사랑해 보죠, 왜? 그게 날 가장 행복하게 할 길 같은데.”

“그건 아가씨를 가장 불행하게 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단정해도 되는 거예요? 왜요?”

“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 따위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하지 않아요.”

“거짓말.”

지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하는 누군가가 따로 있으면서….”

순간 시류가 의아한 눈을 했지만 지하는 외면했다.

자존심 상해서 정말.

허울 좋은 말로 보란 듯 방어벽을 치면서, 사실은 그런 게 아니잖아! 이유는 따로 있으면서.

그를 싫어하긴 했지만, 철없는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곤 했었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묘한 감정의 훈풍이 불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어느 순간 뒤바뀌었다.

아마도 그때 이후부터….

서주아.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가녀린 여자.

모든 남자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같은 여자인 지하가 봐도 정말로 예뻤던 여자. 유리알 같은 맑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한없이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자.

그 서주아가 선택한 남자, 강시류.

시류도 그녀를 대하던 모습만은 달랐었다. 언젠가 2층 창을 통해, 함께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봤었다. 아주 깊은 밤이었다. 그녀가 시류를 데려다준 것 같았다.

그때 주아가 까치발을 하고서 시류의 뺨에 살짝 키스했다. 지켜보는 지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시류가 주아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살살 흔들어 주었다. 자연스러운 태도. 그 거부하지 않는 모습에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쌍심지를 켜고 그에게 독하게 굴기 시작한 건.

깊은 증오와 드러나는 구박의 시작은,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이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강 상무님 말처럼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이 결혼 유지해요.”

***

시류는 회사로 가고, 지하는 병실을 좀 더 지키다가 돌아와 졸업 작품에 몰두했다.

신혼집은 시류가 살고 있는 고급 빌라였다. 주변 환경도 괜찮고 깨끗해서 신혼집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었다. 시류는 애초에 투자 전문가라 회사 보유 주식 말고도 자산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다.

소파와 벽면 모두 은은한 검은색이었다. 직사각형 형태로 거실의 길이가 긴 구조. 커다란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도 모던한 느낌의 블랙. 집은 마치 시류의 분위기처럼 차분하고 어두웠다.

그곳에서 지하는 마치 하숙생처럼 들어가 살고 있었다. 혼인신고도 아직 하지 않았고, 나중에 신혼집 정리를 할 필요도 없고, 짐 정리 할 것도 없고. 뜨악한 커플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암.”

한창 작업을 하던 지하가 기지개를 켰다. 몇 시간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목이 아팠다.

“몇 시지?”

시계를 보니 벌써 밤이었다. 지하는 거실로 나가서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다.

“다시 병원 갈까?”

할 일도 없고, 무료함에 이리저리 뒹굴며 나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지금 갈까? 엄마도 회사 일로 바쁠 텐데.」

「아빠 계속 주무시고 계셔. 걱정 말고 오늘은 그냥 집에서 푹 쉬어.」

「음…. 알았어.」

「앗! 지하야! 너 오늘 생일이지?」

소파에 누워 문자를 올려다보던 지하가 혀를 찼다.

“엄마란 사람이 참 빨리도 알아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사실 친구들한테 문자가 오기 전까지 자신도 잠깐 까먹고 있긴 했었다. 물론 다른 때처럼 따로 만나 파티도 못 했고 생일 챙겨 달라고 투정부리지도 못했지만, 지금이 생일 챙길 때인가 싶었다.

“생각해 보니까 나 아직 엄마한테 투정 부릴 나이인데. 나 아직 어린데. 남의 집에 덩그러니 갇혀서 유배 생활이나 하기엔 진짜 어린데.”

투덜거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어떡하니? 엄마가 정신이 없어서 네 생일을 다 놓쳤다.

“됐어. 신경 쓰지 마. 이 와중에 무슨 생일이야?”

- 정말 미안해. 갖고 싶은 거 있어? 엄마가 내일이라도 바로 사 줄게.

“음, 없어.”

하나 있다면, 어떤 얄미운 남자를 당장이라도 눈앞에 잡아다 놓고 물릴 때까지 사과를 받는 것. 하지만 그건 안 될 테니 다른 건 흥미도 안 갔다.

점점 욕구불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엄마 나 피곤해. 그만 쉴게.”

끊을 때까지 ‘미안해’를 외치는 나영과 통화를 마치고서 지하는 휴대폰을 툭 던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모로 휙 돌아누웠다.

배가 고팠지만 해 먹기 귀찮아 그냥 무시했다.

“그깟 생일이 뭐가 중요하다고.”

감기던 지하의 눈이 다시 반짝 떠졌다.

“흠.”

그대로 일어나 앉아 쿠션을 끌어안았다.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길들이지? 어떡하면 내 말을 고분고분 듣게 하지?”

마치 사악한 독약을 만드는 마녀처럼 지하는 입술을 꼭꼭 깨물며 궁리했다.

“영혼 없이 명령만 듣는 건 의미 없어. 진심으로 나한테 모든 걸 바치게 해야 해. 아빠한테 갈 충성을 모조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아빠가 아니라 나한테 충성하게….”

중얼거리던 지하가 자신의 머리에 딱! 알밤을 놓았다.

“진짜 못됐다. 이러니 너한테 누가 정을 붙이겠어? 내가 강 상무라도 더러워서 조용히 말 듣는 척하겠다.”

그녀가 한숨을 흘렸다.

“아니지? 그렇더라도 이대로 현실에 안주할 순 없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열정이 전혀 없잖아. 하지만 두고 봐. 아주 푹 빠지게 만들어 버리고 말 테니까. 그리고 아주 냉정하게 확 차 버릴 거야! 복수해 주겠어.”

그녀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려면 일단 얼굴을 봐야 하는데. 그래야 유혹이라도 할 텐데. 칫. 자기 집인데 들어오지도 않고. 사람한테 외로움이 얼마나 치명적인데. 차라리 혼자 살았음 이런 고독은 없었을 거 아냐.”

자신이 이렇게 불행한 여자의 일상을 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지하는 소파에 등을 툭 기댔다.

“강시류.”

뭐랄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 남자에 대한 가시 자체는 꽤 뽑힌 것 같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날 보게 하고, 나만 생각하게 만들고 싶어 병이 다 날 것 같다.

과연 이건 애정인가? 오기인가?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말씀하십시오.”

“이 결혼을 언제까지 지속할지에 대한 판단.”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금세 떠오르는 얄밉도록 건조한 말들.

“쳇!”

붙잡을 생각도 없고, 굳이 애써서 이 결혼을 더 유지할 의향도 없다는 뜻이다.

“나라고 뭐 잡고 싶은 줄 알아? 잘난 척하지 마시지. 그냥, 날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그 대범함을 벌주고 싶은 것뿐이라구. 절대 마음 있는 거 아냐.”

혼자 화내고 혼자 코웃음 치는 자신이 참, 돈 주고도 못 볼 구경거리지 싶었다.

입술을 꼭꼭 씹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헤어진 것 같더니, 여전히 서주아를 못 잊은 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주 어릴 땐 시류를 꽤 잘 따랐었다. 그러다 사춘기 때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당연히 마음이 확 멀어졌다. 하지만 사춘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그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는 희석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에게 약간 다른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언제부터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었다. 그냥 집을 오가는 그가 자꾸만 신경 쓰였고, 그가 오는 날이면 옷을 골라 입고 있었고, 그의 앞에선 괜히 더 도도한 척 콧대를 세우고 얌전을 떨었다.

그가 유학을 가서 한참 오지 않으면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었고, 잠깐 귀국하기라도 하면 어디도 안 나가고 턱을 받치곤 집에 오는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가 잠깐 맡아 준 과외 시간이 기다려졌었고, 아닌 척하면서도 그가 챙겨 준 생일 선물을 몇 번이고 열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모든 건 서주아와 함께 있는 그를 본 그 순간 달라졌다.

“좋아하라고 해. 내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계약 결혼인데 서주아를 만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둘이 알아서 하겠지. 질투 안 해. 투기 안 해. 쿨하게 축복이라도 해 줄 거야. 나 이런 여자야.”

어느 날 갑자기 서주아가 보이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녀가 모교인 쾰른 국립 음대가 있는 독일로 간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헤어진 거구나 했었다.

그 한 주 동안 지하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그냥 마음이 홀가분했다. 앓던 이가 빠진 양.

그땐 그냥, 자신이 되게 못돼 먹은 여자라고만 생각했었다.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전형적인 못된 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기분이 좋았던 건, 두 사람이 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떨까? 강시류는 아직도 서주아를 가슴에 품고 있을까? 만약 여전히 좋아하는 거라면?”

그래서 공손하게 자신을 대하면서도, 결국엔 정 하나 주지 않고서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거라면?

“아, 몰라! 사람을 뭘로 보고…. 근데 강시류, 나 외롭다…. 알아? 날 이렇게 막 대한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지하는 소파에 툭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일이 끝난 시류는 며칠 만에 집으로 왔다.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바닥에 놓인 지하의 단화가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작은 신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쿡 찌른 채 그 단화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 신발이 여기, 이곳에 놓이리라곤. 감정이 묘해졌다.

시류는 곧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향했다.

아직 이 집 옷장엔 그녀의 옷가지가 몇 개 없었다. 꼭 필요한 짐 외엔 대부분 자신의 드레스 룸에 두고 온 것 같았다. 필요한 건 따로 샀고, 요즘엔 정웅의 병간호로 저렇게 단화 종류만 몇 개 구입한 듯했다.

마치, 언제나 돌아갈 준비를 해 두는 듯.

거실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넥타이 매듭을 끌어내리며 거실을 지나치려던 시류가 순간 멈칫했다.

워낙 인테리어 자체가 어두워 일찍 발견하지 못했는데, 지하가 검은 가죽 소파에 모로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집 안이라 편하게 걸친 데님 원피스에 밝은 색 카디건. 편안하게 잠든 얼굴.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날 사랑해 보죠, 왜? 그게 날 가장 행복하게 할 길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선동하는 그녀.

정말 확 그래 볼까? 아무렇지 않게 널 가져 버릴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뜨거워지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괴롭히지 좀 마세요’

시류는 생각을 털듯 고개를 젓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담요를 갖고 나와 가만히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살짝 닿았는지 그녀가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눕자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소파에 풍성하게 흩어졌다.

시류는 소파에 살짝 걸터앉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저편으로 돌아가 있는 지하의 얼굴을 바로 했다.

예쁜 콧날과 얇은 눈꺼풀, 인형처럼 촘촘히 박힌 긴 속눈썹, 부드러운 핑크빛 입술과 뺨.

시류는 가만히 손을 움직여 그녀의 뺨을 쓸었다.

손끝으로 와 닿는 벨벳 같은 촉감이 더없이 매끄럽다.

네크라인 너머로 보이는 희디흰 쇄골. 가느다란 몸 선, 봉긋 솟아오른 부드러운 가슴 선.

결국 시류는 멈칫하고 말았다.

만지지 않는 이유. 그건 습관과도 같다. 한번 몸에 배면 끊지 못한다. 알기에 애초에 시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뭘 하는 거냐, 난.’

욕심이 욕심을 낳고, 그 배로 순식간에 불어날까 봐.

그녀에 한해서만은 감정을 굳히게 되었다. 그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게. 그 어떤 말에도 미워지지 않게….

아니, 그건 잘못된 표현.

사실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더군요. 제 마음이.’

“으음….”

그때 지하가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시류 쪽으로 돌아누웠다. 머리카락이 스르륵 뺨을 덮으며 떨어지자, 시류는 그 머리카락을 조용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야들야들 하얀 귓바퀴가 드러났다.

그녀가 그 어떤 독한 소리를 해도 미워지지 않는 이유.

모진 소리를 해도 야속하지 않은 이유.

그건 바로….

그가 처음 정웅의 집에 들어갔을 때, 적어도 지하만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었다. 정웅의 친지들 모두 시류를 벌레라도 보듯 천대하며 이리저리 피했었다. 그러다 남들 눈에 비칠 때만 한없이 상냥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만은 그 어떤 거부감도, 반감도 없이 생글생글 웃어 주었다.

“오빠!”

또랑또랑 귀여운 목소리로 도리어 그의 손을 덥석 잡았었다.

여섯 살 아이가 뭘 알았겠냐만 아무튼 그때의 지하에게 세상의 잣대 같은 건 없었다. 편견이라곤 없던 그저 즐겁고 마냥 행복한 공주님.

꼬옥 잡아 주던 그 고사리 같은 손. 보들보들 좋은 향기가 나던 소녀의 촉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기분 좋은 꿈은 무섭도록 빠르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마음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

시류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거 정말, 단지 회장님을 향한 충성입니까?”

시류의 손이 멀어지려는 그때였다. 지하가 갑자기 그 손을 덥석 잡았다.

“……!”

시류의 눈이 커졌다.

지하의 속눈썹이 서서히 들렸다. 곧 드러난 시냇물처럼 맑은 눈동자.

“아….”

몽롱한 검은 눈동자 안에 시류의 얼굴이 흐릿하게 담겼다.

시류의 심장이 살짝 아릿해졌다.

“왔다….”

지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눈가를 살짝 접고서 미소를 담은 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

왜 웃는지….

시류는 그야말로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찔하고 당황스러웠다.

“오늘도 어디로 가 버릴 줄 알았는데. 이상한 남자. 여긴 자기 집이면서….”

이상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그녀.

그렇게 사람을 있는 대로 찔러 대고 아프게 하더니 자신은 컨디션이 꽤 좋은 건가? 계속 화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나마 그건 다행이었다.

아니, 그 미소에 바늘처럼 찔리고 있으니 그리 다행이랄 수도 없나?

“내 결혼이 이렇게까지 불행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역시 미소는 슬픔을 숨기기 위한 가장이었나 보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꿈이라고 생각하는지 몽롱한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강 상무.”

“…….”

“나 외로워.”

시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되게 외로워. 그냥… 외로워. 내 마음 좀 알아주지, 그냥 같이 눈 보면서 말하고 싶은 건데. 손 좀 잡아 주지. 그냥 같이 좀 놀아 달란 건데, 옆에 좀 있어 주지. 그냥 좀 필요한 건데 이해 좀 해 주지. 이상하게 기다렸는데. 강 상무 당신이 보고 싶어지긴 처음이었는데….”

시류의 심장이 쿵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지하가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표정도 제정신으로 돌아가 있었다.

핫!

“나, 나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 맞죠?”

시류가 옅은 한숨을 흘렸다.

이번 꿈은 좀 더 행복했었다. 하지만 깨어나는 순간은 늘 그렇듯 명치가 아릿하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거짓말!”

지하가 입술을 꼭꼭 씹었다.

이럴 수는 없어!

아무래도 자신이 최소한 헛소리를 지껄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되게 반가워서, 비몽사몽간에 이상한 소리를 줄줄 흘린 것 같은데.

정말 꿈인 줄 알았단 말이야.

치가 떨릴 정도로 창피해서 지하는 도리어 현실을 당당하게 외면했다.

“뭘 들었든 당장 잊어요!”

자긴 하나도 잘못한 거 없는 것처럼 턱을 꼿꼿하게 세웠다. 하지만 그 순간 스커트가 돌돌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끄앗!

지하는 얼른 원피스를 끄집어 내렸다.

‘미쳐! 이건 또 언제부터 올라가 있었던 거야?’

지하는 얼굴이 홍시가 되어선 시류를 확 째려봤다.

“봐, 봤어요?”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대답 안 해? 본 거지? 그런 거지?

“봤어요, 안 봤어요?”

“안 봤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바보야? 보든지.”

일어나려던 시류의 몸에서 힘이 쪽 풀렸다.

“네?”

“왜요? 누가 뭐랬어요? 그냥 나도 모르게 나간 말이에요. 못 들은 척해요.”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실은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다.

“옆에 좀 있어 주지. 그냥 좀 필요한 건데 이해 좀 해 주지. 이상하게 기다렸는데. 강 상무 당신이 보고 싶어지긴 처음이었는데….”

마음이 그대로 허물어지는 것 같았었다. 만약 그녀가 깨지 않았다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몰랐다.

위험한 자극.

그걸 끝까지 견딜 정도로 자신은 강하지 않다.

“바보야? 보든지.”

그런데 또 그런 말로 자신을 어이없게 만든다.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시류가 일어섰다.

“여기서 주무시면 감기 걸리십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하지만 그 순간 시류의 넥타이가 확 잡혀 끌려갔다. 끌려간 시류의 얼굴이 지하의 얼굴 바로 위에서 정지했다. 지하가 쌕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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