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살아가기, 그리고 사랑하기 (4/12)

“네가 오빠로서, 그 아이의 결혼을 신경 써 줬으면 좋겠구나.”

시류는 운전하면서 정웅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 줄 거지? 우리 지하의 뒤를 좀 지켜봐다오.”

시류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을 잘 정리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목을 꽉 채우고 메아리쳤지만, 단지 그는 조용히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것이 자신이 지켜야 할 인간으로서의 길.

은혜를 외면해서야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간이길 포기한다면, 수년 전부터 가슴을 팔팔 끓이며 괴롭혀 오던 이 욕심에 영혼을 팔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다.

정웅이 그것을 원한다면 자신은 그리해야 했다. 평생 먼 거리에서 떠돌며, 그녀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또, 그녀를 지키라면 자신은 금욕적으로 살지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오빠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하지만 뒤이은 정웅의 말에 시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무슨….”

“그 말 그대로다. 네가 우리 지하를 받아 달라는 소리야. 연인으로, 아내로 그 애가 행복할 수 있도록 지켜 주렴. 시류 너에게라면 우리 지하를 맡길 수 있다.”

시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시에 뭔가가 시류를 확 찔렀다.

그건 어떤 예감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허허. 그런가? 네 눈엔 내 모습이 이상하기도 할 테지. 갑자기 망령이 났나 싶을 거야.”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단, 비밀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절대 누구한테도 말해선 안 된다는 약속을 꼭 지킨다는 전제하에, 말해 주마.”

그렇게 알게 된 사실.

바로 정웅의 시한부 선고였다. 말기 뇌종양. 앞으로 남은 시간이 3개월일지, 1개월일지, 혹은 그조차도 용납되지 않을지….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라고 했다. 수술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5퍼센트 미만.

그날따라 왜 그렇게 마지막 정리를 하듯 굴었던 건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스스로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떠나기 위해서….

시류는 쓴 물이라도 삼킨 듯 괴로웠다.

“사람의 뇌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하는구나. 돌아가고 싶은 복원 지점이란 게. 과연 나한텐 그게 언제일까? 우리 영하가 죽었을 때? 지하가 태어났을 때? 아니, 널 만났던 그 순간이었다.”

시류의 가슴이 콰르릉! 울렸다.

“널 만나서 내 자식으로 받아들였던 건, 누가 뭐라 해도 나한텐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넌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은 그 반대야. 영하가 없는 시간을 네가 채워 주었지.”

시류는 울고 싶었다.

“오늘따라 영하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네가 영하 대신 날 지켜 주었기에, 내게 그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기에 우리 지하도 맡길 수 있었어. 그래도 좋다고 내가 판단했다. 실은 내 회사를 앞으로도 잘 운영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

정웅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다소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 적임자가 너 외에 누가 있겠냐? 나로선 인재를 묶어 두는 거지.”

“회장님.”

“왜? 우리 지하가 마음에 안 드는 게야?”

정웅이 짓궂은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시류는 괴롭기만 했다.

“그런 것, 아닙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누구나 올 때가 있으면 갈 때도 있는 법. 떠날 때가 되어서 떠나는 것뿐이다. 지하는 네게 맡겼으니 이제 편하게 우리 영하 만나러 갈 수 있겠구나.”

뜨거운 것이 안에서 치받쳐 시류의 눈시울을 덥혔다.

“안사람도 내 뜻에 동의했다. 누구보다 널 사위로 받아들이는 것에 기뻐하더구나.”

시류가 이를 악물었다.

그런 시류를 정웅이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비통할지. 그 진심을 알기에 정웅은 시류를 보기가 미안했다. 본의 아니게 모든 짐을 시류에게 떠안기게 되었으니.

“전, 부족합니다.”

“그렇지 않아.”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무슨 주제로 감히…. 전 지하를 욕심낼 수 없습니다.”

“도와다오.”

시류가 멈칫했다.

“감히, 라는 말은 쓰는 거 아니다. 너만은 그런 말에서 놓여날 자격이 있어. 너라서 부탁하는 거다. 그 녀석 두곤 제대로 눈도 못 감을 것 같아. 네가 곁에 있어 준다면, 그제야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내 마지막 부탁이다.”

시류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떨렸다.

결국 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고맙다.”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짓는 정웅.

“알겠지? 내 병에 대해선 아직은 너만 알고 있어. 힘들겠지만 절대 지하한테도 말해선 안 돼.”

“그건 지하가 괴로울 겁니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알려지면 안 된다. 지하한테 올 혼란도 그렇지만, 회사에 올 파장 때문이라도 더더욱. 아직은 때가 아니야. 식 올리고 정식으로 후계 구도 밟고, 타격 없을 때 밝히는 게 여러모로 혼란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너도 알다시피 수많은 직원들의 삶이 달려 있지 않니. 명심해라. 아직은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돼.”

시류는 비통했다. 어쩌면 당신과 가장 어울리는 마지막. 그 모든 걸 신중하게, 묵묵히, 혼자서 착착 준비했던 것이다.

“괴롭습니다. 제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게… 죽고 싶을 정도로 비통합니다.”

“아니. 그 말은 틀렸다. 들었지 않니? 네게 가장 큰 부탁을 하고 가는데. 마지막까지 짐을 떠안겨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나. 대신이라고 하기 뭐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시류가 고개를 들었다.

“내 사후에라도 이 회사를 더 키워서 적어도 1년에 한 명씩 제2의 강시류를 만들어 내다오. 꼭 찾아내서 지원하고 도와주렴.”

시류의 눈동자가 파동 쳤다.

“그 정도의 기업으로만 성장시켜 주면, 그걸로 나한텐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 이상의 기쁨은 나한테 없다.”

그게 정웅의 조건이었다. 더없이 숭고한 조건. 그리고 시류는 약속을 했다. 지하에겐 결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끌어안고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를 속인다는 게 괴로워지고 있었다. 핸들을 돌리며 시류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

“내가 이 결혼을 원한다, 얘야.”

정웅이 지하에게 말했다. 지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런 정웅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렇게나 많은 주름이 있다는 걸 지하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냥 그걸 이유로 해 주면 안 되겠냐?”

심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정웅과 시류 사이에 오갔던 말. 갑자기 결혼시키려고 나선 정웅. 그 요구를 수락한 시류.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던 너무도 기막힌 비밀.

머리가 조이는 것처럼 딱딱거렸다.

아빠가 원하는 것. 그토록 절실하게 바라는 것. 그건 바로 시류와 자신의 결혼. 당신이 믿는 남자에게 딸을 맡기고서 편한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서 자신은 지금까지 투정만 부리고 있었다. 아빠의 심정이 어땠을지.

“수술받아요.”

지하는 가타부타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먼저 수술받으세요, 제발.”

하지만 정웅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10%도 보장받지 못하는 성공 확률. 그대로 머리를 연 채로 사망할 수도 있단 두려움에, 정웅은 딸의 결혼식만은 참석하겠다는 의지를 끝끝내 꺾지 않았다.

그런 정웅이 야속하고 속상했다. 한시라도 빨리 수술받게 하고 싶다. 그를 살리고 싶은 욕심에 지하는 미칠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터졌다.

“결혼 따위가 뭐라고. 내 인생은 내가 잘 살 수 있는데! 내가 더 걱정되는 건 아빤데, 왜 아빤 내 걱정만 하는 거예요? 왜 날 믿어 주지 않고 남자한테만 맡기려고 드는 거예요? 그 남자도 알고 있는 사실을 나한테만 숨기고…. 대체 난 아빠한테 뭐예요? 강시류, 그 남자는 또 대체 뭐냐구!”

미친 듯 소리치는 지하의 어깨를 정웅이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미안하다.”

지하는 정웅이 너무도 미웠다. 그리고 시류가 미웠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고스란히 그 화살은 애꿎은 시류에게 향했다.

지하는 다음 날 집으로 찾아온 시류에게 자신도 모르게 독한 감정을 퍼부었다.

“왜 말 안 했어요? 아빠가 아니면 강 상무님이라도 말해 줬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당신은 늘 그래. 세상에서 뚝 떨어진 양 혼자 고고하게 내 말 따윈 귓등으로도 안 듣지. 내 의견은 무시하고서 그냥 아빠 말만 들으면 되는 거야? 뭐가 먼저인지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그걸 몰라요? 그냥 결혼하라면 하고, 말하지 말라면 안 하고. 당신 인생은 아빠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예요?”

언제나처럼 비난하면 비난을, 조롱하면 조롱을 받았다.

그래서 더 자신의 인격만 깎여 내려가는 것 같은 고통.

이 남자에게 화를 내면 그만큼 고스란히 자신이 아프곤 했었다. 죄책감을 조장하는 남자.

단순히 무시할 수도 없는 존재. 차라리 마음껏 외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체 얼마나 은혜를 갚고 싶은 건데요? 어떻게 하면 시킨다고 결혼할 수 있어요? 정말 이해가 안 가. 당신이 아빠를 믿으면 믿는 거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서 이래요? 날 책임지라고 하면 책임지고, 날 사랑하라 하면 사랑까지 할 거예요? 그래요? 이 나쁜 자식아!”

그의 가슴을 팡팡 쳤다. 한참을 묵묵히 지하의 울분을 받아 내던 시류가 천천히 손을 들어 지하의 손목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당신 같은 남자 정말 싫어. 절대 좋아하지 않아. 좋아할 리 없어. 그러니까 당신도 절대 나 좋아하지 말아요. 사랑하지 마. 아무 감정도 갖지 말아요. 알았어요?”

왜 이 남자가 더 미운 걸까? 그렇게 퍼부어대면서도 스스로 감정을 제어할 수 있길 수없이 바랐다.

그때 시류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

지하의 젖은 눈동자에 실소가 돌았다.

“하….”

도대체 자신은 뭘 기대한 걸까? 이 남자가 위로라도 해 주길, 마음을 이해해 주며 다독여 주길 바랐던 걸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대체 뭘까.

“서로 곤란해질 길은 절대 선택하지 않습니다.”

시류는 냉정했다. 지하가 허탈하게 웃었다.

절대. 절대라.

“하아… 진짜 미치겠다.”

이렇게 잔인한 남자를 두고 난….

“위선자. 그 정도 마음 갖고, 남을 위해 자기 인생까지 걸어요?”

“왜요. 제 말이 억울하셨습니까? 그럼 끝내 아가씨를 사랑해야 만족하실 건가요?”

화난 것처럼 그가 오히려 강한 어조로 그녀를 내리눌렀다.

마치 원망이라도 하듯.

어이가 없었다.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날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설령 죽으라고 하면, 죽어요. 나한테 오고 싶으면 모든 걸 바칠 각오를 하고 와요. 아무리 내가 당신을 무시하고 짓밟고 괴롭히더라도 당신은 날 숭배하고 떠받들고 사랑해요! 그렇게 노예처럼 살아요. 알았어요?”

“잔인한 게… 누군지 모르시는군요.”

지하가 멈칫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상념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래. 난 정말 이 남자한테 잔인하다. 알고 있는데도.

“하지만 당신이 원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설령 죽으라고 하더라도, 죽겠습니다.”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보 같은 남자.”

애증.

이중적인 감정.

저 남자가 아프고, 저 남자가 슬프고, 저 남자 때문에 속상하다. 왜 사람을 한 가지 감정으로만 두게 하지 않는 걸까? 수만 가지 감정이 얽힌다. 저 남자 앞에만 있으면….

마음속 나뭇가지가 흔들흔들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뿌리까지 흔들려 뽑힐까 봐 겁났다.

이런 식의 강렬한 감정이 생소했다.

지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해가 안 가요. 그렇게 절실할 이유 없잖아. 별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부족할 것도 없으면서.”

속이 탔다.

하지만 나오는 말은 비난의 말.

“왜 이렇게까지 해요? 속상하지도 않아요? 화나지도 않아요?”

지하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누가 보면 백만 명분의 것을 합친 순애보, 혹은 충성. 현실은 절대 날 사랑하지 않겠다는 남자일 뿐인데.

“정말로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거예요?”

그때 갑자기 시류가 서글프게 웃었다.

“왜 아가씨가 죄책감을 갖는 거죠?”

“뭐, 뭐예요?”

“아가씬 그냥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죄책감 갖지 마세요.”

지하의 눈두덩이 뜨거워졌다. 마음이 그대로 들킨 기분.

“죄책감 따위, 누가 그딴 거…. 내가 그렇게 양심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나 양심 따위 없어요. 착하지도 않고.”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 탓 아닙니다.”

뭐가 아니야. 저렇게 착하게 말하는데, 세상 어떤 사람이 뻔뻔하게 끝까지 독할 수 있을까.

정말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만 쉬세요. 마음도 힘드실 텐데.”

글썽.

이상하게 지하의 눈동자가 젖어 올랐다. 이 남자가 너무 싫은데도 그냥 눈물이 났다.

저렇게까지 맹목적인 것. 연기든 가식이든 도저히 자신이라면 못 할 것 같기에. 누구라도, 어떤 다른 남자도 저렇겐 못 해 줄 것 같기에.

그냥 가슴이 아팠다.

이, 감정 한 조각 안 내주면서도 헤픈 남자 때문에.

그때 그가 아무 말 없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순간 그의 손등이 그녀의 뺨을 살짝 스쳤다. 지하는 이상하게 그 접촉이 전처럼 그렇게 진저리쳐지도록 싫지 않았다.

나 드디어 미친 건가.

그가 말했다.

“충고하는데, 끝까지 독하지 못할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 마세요. 마음도 약하면서.”

“누, 누가 약해요? 설마 이 정도로 다 끝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설마요. 마음 풀리실 때까지 뭐든 하세요. 얼마든지 견디겠습니다.”

이 남자는 정말….

“미안합니다. 말하지 않아서.”

“……!”

“서운함도, 서러움도, 원망, 두려움, 슬픔까지 다 저한테 쏟아 부으세요. 감당하겠습니다.”

무겁다.

자신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그가 안쓰러운 걸 떠나서 이젠 버겁기까지 했다.

그도 알고 있고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 자신은 그냥 화풀이 대상이, 원망을 퍼부을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아빠가 죽는다는 걸, 그 절망감을 어디든 전가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 남자에게.

그가 내 감정을 받아 주는 하수구도 아닌데, 늘 그랬듯 악랄한 투정을 부렸다.

결국은 이렇게 받아 주리란 걸 알고서.

“아가씨가 상처받길 원한 건 아닙니다.”

지하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훌쩍훌쩍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제야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현실로 인정해야 한단 걸 깨달았다.

시류는 그녀가 울도록 기다려 주었다. 묵묵히 그녀의 눈물을 지켜 주고 있었다.

한참이나 후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낸 지하가 시류에게 말했다.

“손 좀 줘 봐요.”

다른 방법이 없다.

당신이 내 마음과 다르더라도….

하지만 시류는 손을 내 주기는커녕 그 요구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손 잠깐만 줘 봐요.”

시류가 낮은 한숨을 삼키더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아주 크고 섬세한 그 손을 지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확 잡았다.

“손 한 번 잡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무슨….”

시류의 심장이 쿵! 했다.

“그냥 그대로 있어요. 잠시만, 움직이지 말고.”

그녀는 시류의 손을 잡은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을 빤히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시류의 심장이 북처럼 울렸다.

그 손을 자신 쪽에서 확 끌어당겨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 싶었다. 안아서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하염없이 뺨을 만지고 싶다.

만약 당신과 내가 다른 식으로 만났다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안개꽃 한 다발 안겨 줄 수 있었을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다 전해지는 그런 평범한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그때 지하가 입을 열었다.

“난 여전히 강 상무님한테 유감 많아요. 다 용서하지도 않았고.”

“알고 있습니다.”

“됐어요, 그럼.”

“네.”

“우리 결혼해요.”

시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더 방법 없으니까. 이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그러니까 해 버려요, 이 결혼!”

***

“아니, 제깟 게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언감생심 욕심을 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왜 아니야? 사람 취급해 주니 이젠 머리 위로 기어올라? 안 그래요?”

그건 마치, 강시류라는 남자의 가치가 손상되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지하는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그 말들을 듣고 있었다. 결혼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친척들이 우르르 지하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정웅이 굳이 수술을 결혼식 뒤로 미룬 또 다른 이유, 그건 바로 사실이 알려지면 일게 될 파장 때문이었다. 회사는 쑥대밭이 되고 친척들의 욕심은 도를 넘어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반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거셌다. 한꺼번에 밀려든 그들은 욕심을 숨기지 않고 시류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걸 하나라도 빼앗길까 봐. 바로 강시류에게.’

지하와 정웅, 나영 그리고 시류의 주식을 합치면 무리 없이 시류가 대표직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초조해진 그들이 공격할 수단은 강시류의 출신, 단지 그 하나였다.

“강 상무가 도대체 무슨 권한이 있어?”

“출신도 모르는 그런 놈이랑 지하를 결혼시킨다니. 형님, 제정신이세요?”

“그래서 그렇게 회사에 충실한 거였어. 형수님, 정신 차리세요. 집안 말아먹는 꼴 보실 생각이세요?”

“오빠, 이건 아니잖아요. 물론 능력은 인정해요. 하지만 집안 격이 떨어지잖아요, 격이!”

“그러니까. 대체 어떤 놈인 줄 알고. 과거에 저지른 짓이 있는데 인간 본성이 어디 가?”

“절대 용납 못 해요!”

하나씩 뿌려 대는 독을 묻힌 말들. 정웅의 병도 모르면서, 그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에만 혈안이 된 눈들.

그들을 바라보며 지하는 깨달았다.

자신이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얼마나 곡해하고 의심하고 공격했던가.

시류의 어릴 적 얘기, 그 사건에 대해서 들은 것도 바로 친척들에 의해서였다. 아무렇지 않게 어린 지하의 앞에서 그 일을 떠들어 댔었다. 물론 밖으로는 새어 나가지 않은 비밀이었지만, 어린 지하에게 당시의 충격은 정말로 대단했었다.

살인자. 누군가를 죽인 사람.

강시류라는 인간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뀌고 그가 섬뜩해졌다. 눈만 마주쳐도 흠칫 놀라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 도망 다녔고,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날 미워해. 계속 내 죄책감을 건드려. 자존심을 뭉개도 좋아. 하지만, 이 결혼은 받아들여. 그렇게 해. 그게 나중에 네 눈물을 줄일 방법이니까.”

처음부터 그 남자는 정웅의 뇌종양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런 말들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비꼬고 공격하고 무시했는데도 그 비난을 다 감수하고서 묵묵히 참아냈던 건, 정웅을 위해서였다. 아니, 이 결혼 자체가 정웅을 위해서였다. 그 대가가 이렇게 모진 것이었는데도.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는 어떤 걸 지키기 위해서, 그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딸도 하지 못한 것. 바로 아버지를 위해 제 인생을 거는 것.

“다들 그만하세요.”

그때 지금껏 조용하던 지하가 나섰다.

“지하야! 너도 싫지? 고작 그런 남자와 결혼하려고…!”

“말조심하세요. 강시류 상무님이 어딜 봐서 고작인가요?”

따끔하고 냉정한 지하의 태도에 모두가 움찔했다. 그때 지하와 정웅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웅의 믿음이 담긴 부드러운 시선.

‘아빠, 나 그렇게 보지 말아요. 난 마지막까지 아빠 때문에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지 화냈었어. 나도 이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요.’

그때 고모가 따갑게 소리쳤다.

“너 말버릇이 그게 뭐야? 어디 어른들 앞에서!”

“제 말버릇이 뭐가 어떤데요? 정작 당사자 앞에선 한 마디도 못 하면서.”

“어, 어머! 쟤 말하는 거 좀 봐!”

“다들 이 회사 덕에, 올라간 주식 덕에 그동안 꽤 즐거우셨죠? 그게 다 누구 덕인가요? 아버지 이상으로 잘한 사람이 강 상무님 아니던가요?”

갑자기 거실 안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 말엔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했다. 다들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느라 바빴다.

인정하기 싫겠지. 하지만 반발할 수도 없겠지.

“그동안은 단지 아빠의 오른팔 정도로만 봤겠죠. 전혀 당신들을 위협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 그 사람이 아무리 회사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크더라도 그저 일꾼 정도로 생각하고 신경 쓰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저랑 결혼하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신 거 아닌가요?”

회사의 이익이 아닌 100% 자신들의 이익만을 반영한 이기적인 논리. 속내는 그렇게 시커멨다.

모두 지하의 말에 반박하고 싶어 입가가 실룩거렸지만 대놓고 말하진 못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과 결혼할 거구요. 무슨 권리로 제 결정을 비난하고 참견하시는 건가요? 다만 절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해 주실 건 그저 축하해 주는 거예요. 잇속 챙기기는 다른 곳에서 하세요.”

별로 그의 편을 들어준 건 아니었다.

‘나도 이 사람들이랑 똑같은데 무슨 성인인 것처럼 폼 잡겠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서고 싶었다.

‘그 남자를 공격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당신들은 아냐.’

아빠가 지키고자 했던 걸 지키겠다. 이 회사의 현재와 미래. 그러기 위해선 그가 꼭 필요하다. 다들 실패한 사업조차 그는 보란 듯 성공시켰다.

그래서 일단 그를 믿어 보겠다.

“제 사람이에요. 앞으론 부디 조심해 주세요.”

무조건적으로.

***

“시류가 요즘 많이 바쁘지? 아빠 자리 채우느라 더 바쁜 것 같던데. 얼굴 볼 시간도 별로 없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정웅의 병실 한쪽의 응접실에서 나영이 괜히 지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하는 왠지 웃음이 났다.

내 눈치 볼 게 뭐가 있다고.

서로 독립적으로 사는 것, 나쁠 것도 없는데.

“응. 그런 것 같더라.”

“뭐니,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뭐가? 그럼 뭐, 아빠 대신 일하느라 바쁜 사람한테 투정이라도 부려? 뒤에서 흉이라도 볼까? 내가 그 정도로 미숙하진 않거든.”

“쯧. 그냥 시류도 걱정되고 너도 걱정되고 해서 한 말이었어.”

“강 상무는 몰라도 난 걱정 마세요. 지금은 이게 더 좋으니까. 당분간은 서로 각자의 자리를 충실히 지키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 난 딸의 역할, 강 상무는 상무로서의 역할. 아주 어른스럽지?”

“쯧. 강 상무, 강 상무, 호칭이 그게 뭐야?”

“강 상무를 강 상무라 그러지 그럼 뭐라 그래? 자기? 여보? 으아! 괜히 입에 올렸네. 닭살 돋아.”

“쯧쯧, 철없는 것. 설마 결혼까지 했으면서 아직 데면데면한 거 아니지? 너 계속 시류한테 틱틱대는 거 아냐?”

지하가 갑자기 입을 꼭 다물었다.

물론 툭툭거리는 거 같다고 100% 확신하는 바였지만, 그것도 사람이 보여야 하지.

그러고 보니 신혼여행 땐 어땠더라?

실은 신혼여행 자체를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들 눈이 있으니 다녀오라는 나영의 말을 지하는 얌전하게 따랐다. 그래서 식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일주일 일정으로 발리로 떠났다.

물론 여행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풀 빌라에서 시류는 마치 일에 미친 사람처럼 잔뜩 싸 갖고 간 일만 했고, 지하는 지하대로 아빠 걱정으로 지쳐 있었다. 오히려 그런 적당한 무관심이 더 좋았다.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정웅의 건강이었다. 1분 1초가 아까워 애간장이 탔다.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수술이 잡혀 있었다. 그 걱정으로 지하는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지금이라도 바로 수술하면 얼마나 좋아? 하여튼 아빠 고집쟁이!’

초조해서 매일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 지하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시류는 공기처럼 조용히 그녀의 반경 안에서 머물렀다.

고마웠다.

하지만 그 바람에 결국 신혼여행은 그냥 여행이 되고 말았다. 며칠 내내 뚝 떨어져서 잠도 따로 자고 밥도 따로 먹었다. 당연히 떠올릴 만한 기억 같은 것도 딱히 없었다. 그나마 시류의 배려로 일주일 예정이었던 일정도 닷새로 축소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시류는 바로 해외로 장기 출장을 떠났다. 근 3주 정도의 출장, 그리고 돌아와서도 새벽에 잠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갔다. 덕분에 지하는 남편이란 사람의 얼굴을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런 부부 있음 나와 보라고 해. 이건 동지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참 묘한 관계랄까.’

그런데 어떤 면에선 그게 또 편했다. 막상 얼굴을 대하면 마주할 복잡 미묘함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버지의 간호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여태껏 경황없어 체크하지 못했는데 신혼여행 때 좀 가까워지긴 한 거지?”

“당연하지. 걱정 마. 잘 지내고 있어.”

지하는 시치미를 뚝 뗐다.

결혼하면 친정 엄마 걱정 안 시키게 거짓말을 술술 한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엄마한테 들어간 정보는 아빠한테 고스란히 전달될 테니까 어떻게든 사이좋은 부부 흉내를 낼 수밖에 없어’

정웅은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에서 좀 일찍 돌아오자 안 그래도 걱정이었던 나영은 일정을 앞당겨 수술을 감행했다.

다행히 애초에 비관적이었던 수술 결과는 의외로 좋았다. 기적적으로 정웅이 깨어났지만 수술이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단지 증세를 약간 지연시킨 것뿐 결국 종양을 완벽하게 떼어 내는 것에는 실패했다. 몇 번의 수술을 더 남긴 상태.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도박이었다. 지하는 내내 그런 정웅의 옆에서 머물렀다.

“그럼 엄마 속는 셈치고 믿어 본다?”

“믿어. 믿어.”

“시류한테 잘해. 아빠 상태 외부에 알려졌는데도 이나마 회사가 유지되는 건 다 시류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 주는 덕이니까.”

지하는 이견이 없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의 말처럼 시류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회사의 현상 유지를 위해 분투했다.

“애초에 흔들릴 거라 생각한 주가도 큰 영향 없고, 수출 건이 잘 진행돼 오히려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역시 리더가 중요한 건가.”

“말이라고 하니?”

“근데 엄만 괜찮아? 아빠 말이야… 처음 듣고 많이 힘들지 않았어?”

“힘들었지. 왜 안 힘들었겠니.”

나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하지만 받아들였어. 엄마가 흔들리면 아빠가 더 괴롭잖아. 아빨 최대한 덜 괴롭게 하는 거, 그게 내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

지하는 내심 감탄하며 나영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나영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단단해 보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과연 같은 상황이었다면 난 엄마처럼 의연할 수 있었을까?’

“너도 있고, 시류도 있고, 엄만 다행이지.”

“엄만 강 상무가 좋아?”

나영이 웃었다.

“왜 그런 걸 물어?”

“아무튼.”

“글쎄. 처음 나한테 왔던 그대로였다면 아마도 좋다고 할 순 없었겠지. 하지만 아니잖니? 우리한테 보여 준 감동이 너 못지않았어.”

“…….”

“넌 모를 거야. 그 애가 아빠한테 준 기쁨, 든든함. 아마 그 양반 혼자였다면 이렇게 못 버텼어. 영하가 먼저 갔을 때 딱 그 애가 와 주었고, 회사가 어려워져 휘청거리던 시기에 그 애가 유학 끝나고 돌아와 돕기 시작했지. 우린 영하 대신 와 준 거라고 믿어.”

지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마음만 생각하느라 네 마음 고려해 주지 않은 건 미안하지만, 그 덕에 시류를 완전한 아들로 얻은 기분이야. 널 다른 집에 빼앗긴 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 지하는 문득 뭔가가 궁금해졌다.

시류의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 건 알고 있었지만….

“근데 엄마 아빤 그렇게 강 상무를 믿고 좋아했으면서 왜 호적엔 안 올렸어?”

“음, 그 얘길 안 해 줬었나? 그건….”

그때 서 박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나영이 말을 미루고 정웅의 병실로 향했다. 지하도 나영과 함께 정웅을 만나고 나왔다. 그 바람에 나영에게 질문했던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엄마 회사 들어가 봐야 하는데 넌 어쩔 거니?”

“난 여기 있을게.”

“엄마가 다시 올 거야. 넌 들어가. 그리고 너, 시류한테 잘해! 아, 이제 강 서방이지 참. 내가 이렇다. 정신이 없어.”

헉!

“까, 깜짝이야. 무슨 가, 강 서방이야? 징그럽게.”

“결혼했으면 강 서방이지.”

“악! 듣기 싫어. 그만해!”

“철없는 것. 저걸 강 서방이 언제 키워서 사람 구실을 시킬지. 곧 아기도 가져야 할 텐데 엄마 노릇이나 제대로 할지.”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아기?”

“그게 뭐? 뭐 틀린 말 했니? 결혼했으면 아기를 가져야지. 나 닮아 난임일까 봐 걱정인데 시간 되면 엄마랑 미향이한테 가 보자.”

“내, 내가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서 뭐 하게?”

“뭐 하긴. 검사받아야지. 아기집은 튼튼한지,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지. 간 김에 한약도 좀 짓고. 음, 시류도 먹일까?”

지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기집이라니. 임신이라니! 무늬만 부부인 플라스틱 커플에게 이 무슨 무서운 소리요?

다행히 그때 전화가 와서 지하는 바로 도망 나왔다. 거기 더 있다가는 기절할 것 같았다.

***

재욱은 병원 앞 커피숍 야외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한 사람은 재욱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라 지하는 웃으며 재욱의 앞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재욱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성난 듯 싸늘한 눈빛으로 지하가 앉자마자 공격하듯 다그쳤다.

“너 뭐야?”

“…응? 왜 그래, 갑자기? 무서운 표정 하고. 그러고 보니 오빠 내 결혼식에도 안 왔었지? 의리 없게.”

“의리? 하, 어이없어서.”

지하는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오빠 그 태도? 오랜만에 만나서 터무니없이 무례하게 굴고 있단 거 알아?”

“내가 무례해? 네 태도는?”

“그러니까 뭐가?”

“그 결혼식, 내가 왜 안 갔을 거 같아?”

지하의 말문이 막혔다.

뭐지, 이 분위기는?

“왜 안 왔는데?”

“왜? 정말 이유를 몰라? 뒤통수 맞은 것처럼, 며칠 전까지 만났던 애가 갑자기 결혼한다는데 누가 그걸 좋게 받아들일 수 있어? 내가 겨우 너한테 그 정도였어?”

지하는 당황했다.

“사람 이렇게 서운하게 하는 거 아니야, 너.”

“그, 그날 내가 말하지 않았었어? 선봤었다고.”

“격렬히 반항하는 중이라고 했었지.”

“아, 그랬지. 근데 그게… 미안. 여러 가지로 내가 정신이 좀 없었어. 결혼식 앞두면 다들 그런다잖아.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에이, 오빠 서운했어?”

“까불지 마. 지금 그럴 기분 아냐.”

분위기를 풀고자 그녀 나름대로 애교까지 부려 보았건만 안 통했다. 재욱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계속 저기압이었다. 그러니 되게 죽을 짓을 한 것 같은 분위기가 속속 형성되었다.

“사과도 안 통하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차라리 말을 해 줘. 그럼 그렇게 해 볼 테니까.”

“그럼 대답해 봐. 너 왜 그런 결혼 했어?”

“그런… 결혼이라니?”

“강시류. HC 그룹 상무, 지금은 HC를 대표하는 젊은 얼굴. 겉으로 보이는 스펙이나 능력은 아주 대단한 것 같지만 떠도는 소문은 좀 아니더군.”

지하는 왠지 피로해졌다.

하지만 좀 의아했다. 아무리 세상엔 비밀이 없다지만, 그래도 시류의 과거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채 가족들만 아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대체 어느 가벼운 입이 떠들어 댄 거야?

“부모도 없이 네 아버지가 거두어 키운 흙수저, 아니야?”

지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음, 거기까지만 아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그만해. 오빠도 그런 세상의 유치한 잣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었어?”

“단지 그것만은 아냐.”

“그, 그럼 뭔데? 잠깐만. 오빠랑 내가 왜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해?”

“서주아.”

순간 지하의 눈동자가 충격이라도 받은 듯 벌어졌다.

“너도 알고 있는 이름이지? 내 친구고 강시류의….”

“알아!”

순간 지하가 재욱의 말을 날카롭게 끊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갖고 온 재욱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애써 그쪽으론 생각 끊고 있었는데 생각나게 해 버렸다.

“아무리 친해도 이건 아니지. 아무 말도 하지 마.”

“듣기 싫어? 그러니까 넌 왜 그런 결혼을 했는데?”

“어떤 결혼이었든 내가 설명할 이유가 있어? 그냥 내 선택이야.”

“웃기지 마. 난 대충 알겠는데. 넌 강시류를 사랑하지 않아. 네 아버지의 필요에 의해 정략으로 떠밀려 한 결혼일 뿐. 그날 선봤다던 남자가 강시류였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처음부터 그 사람한테 미묘한 감정은 있었어. 그날은 결혼 전이라 약간 마음이 어수선했던 것뿐이고. 여자들은 결혼 앞두고 다들 그래.”

“어이없네. 왜 이렇게 고집을 피워?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걸 굳이 숨기려고 하는 게 더 수상해. 넌 그냥 네 아버지 병환 때문에 떠밀리듯 선택한 거야. 마음에도 들지 않는 남자를….”

순간 지하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재욱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 오빠가 정말…. 변호사 대신 탐정 사무실이라도 개업하려고?”

“웃지 마. 심각하게 묻고 있는 거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사랑? 그래, 아직은 이른 말이지만 좀 늦다고 불가능해지는 건 아니잖아? 오빠도 어차피 감정 다 갖고 결혼할 순 없는 처지이니 더 잘 알겠지.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 순 없단 거.”

“알아. 아니까 화나는 거야.”

“뭐가? 조건만 보고 결혼한 거? 그게 뭐 어때서? 이유가 뭐가 됐든 난 이미 선택했고, 선택한 건 끌림이 조금이라도 있었기 때문이야. 그 정도도 없이 내 인생을 맡기진 않아. 아무리 아빠 명령이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정도로 부모 말 잘 듣는 착한 애도 아니고.”

세상 결혼이 다 서로 좋아해서만 이루어지나? 이런 이유가 있으면 다른 이유도 있는 거겠지.

자신의 이유는, 그들과 좀 더 다르지만 좀 더 특별하긴 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좋아해서 한 결혼이라고 생각하고서 살면 그뿐.

산다. 살아간다. 살아남는다.

살아가는 게 더 어려울까? 사랑하는 게 더 어려울까?

지금으로선 둘 다 어려운 것 같았다.

***

신혼여행 첫날, 욕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 지하는 왠지 쭈뼛거렸다.

“난 저쪽 방에서 잘게요.”

그 말을 하는 것도 상당히 민망했다. 게다가 분위기가 엄청 가라앉은 것 같아 더 그와의 대화가 불편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여기 도착해서 한 번도 웃지 않았구나.

지하는 이 비무장지대 같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얼른 덧붙였다.

“설마 나 잠든 사이에 나쁜 짓 하는 건 아니겠죠?”

“회장님이 편찮으신 걸, 사내의 욕망을 채울 기회로 삼진 않습니다.”

아주 건조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남자. 장난삼아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뻗대기 시작한 건.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보네요. 아, 역시 안에서 새는 바가진 밖에서도 샌다더니.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어쨌거나 난 손난로도 되어 주고, 결혼하자고도 내가 먼저 말했고,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네요. 아니, 오히려 한발 후퇴했나?”

“…….”

“좋아요. 어차피 그렇게 선 긋는 거, 희미하게 긋지 말고 제대로 한번 선명하게 그어 보죠. 앞으로 서로 사적인 건 일체 터치하지 말아요. 겉모습만 부부. 상대방의 남자, 혹은 여자관계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 부부가 사는 방법이다. 어때요? 혼인 서약서치고 아주 매정하고 좋아 보이는데.”

“하….”

시류가 웃었다.

그런즉, 겨우 지은 첫 번째 미소가 바로 냉소란 소리였다.

“한마디 했다가 백배로 당하는군요.”

“백배 정도예요? 난 천 배, 만 배 정도의 충격이길 바라고서 한 말인데.”

지하가 코웃음을 쳤다.

핏!

두고 봐. 내 투정이 사람 잡는 투정이란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때 시류가 대답했다.

“아무튼 아가씨 뜻이 그렇다면,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머! 대놓고 그러자고 할 줄 알았더니 웬일? 아니면 설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 아냐?

“아! 나 말실수했어요. 하나 수정할래요.”

“하세요.”

“상대방의 남자, 혹은 여자관계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그 부분 좀 이상하죠? 그래서 ‘상대방의 ‘남자관계’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로 바꿀래요. 그 말인즉, 난 어떤 남자를 만나도 되지만 강 상무님은 절대 안 된다는 거죠.”

지하가 큰 걸 하나 날렸다. 하지만 시류는 물끄러미 지하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지하는 약이 바짝 오르고 말았다. 뭐냐고, 저 태도는?

“대답 안 하고 가는 거예요?”

“다 정해 놓고 제 대답이 필요하십니까? 아가씨에게 제 말의 힘이 강한 적이 있었던가요? 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 잠시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시류는 밖으로 나갔다. 또 저 혼자 고고한 척하며 사라진 것이다.

“기막혀! 그럴 땐 ‘어떤 놈이든 만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한마디면 되는 걸! 아, 속 타! 정말 모르는 거야? 알면서도 하기 싫은 거야?”

아무튼 두 사람은 그런 관계였다.

바짝 마른 마늘 바게트에 별 필요도, 의미도 없는 후추가 뿌려진 느낌.

“에취!”

결국 또 재채기가 일었다.

***

“그러니까 남은 간섭하지 마.”

“남이라.”

재욱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너한테 남이었구나. 참 냉정하다, 한지하. 진짜 서운하네.”

지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나 참 냉정하네.

도대체 왜 자신이 서운하단 말까지 들어 가며 그런 건조한 남자를 보호해 주려고 애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하는 재욱의 앞에서 시류와의 감정 없는 결혼을 인정하는 게 싫었다. 자존심 상했다.

“미안해. 결혼도 결혼이지만, 아빠 일 때문에 경황이 없었어.”

지하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재욱이 결국 낮은 한숨을 흘렸다.

“됐다. 그만하자. 어쩌다 보니 다그치는 것처럼 됐네.”

“…….”

“수술 결과는, 괜찮아?”

“응….”

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다 금세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아. 얼마나 더 버텨 주실지 모르겠어. 결국 종양은 다 제거하지도 못했고,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될지 전혀 모르겠어. 차라리 간이나 콩팥 같은 게 필요하면 내 걸 떼어 내 드릴 수라도 있는데, 뇌종양은 방법이 없잖아.”

말하다 보니 지하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햇볕 한 줌 없는 흐린 하늘 아래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정웅이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어 먼저 떠날까 봐 하루하루가 겁났고,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재욱은 괜히 말을 꺼내 지하를 속상하게 한 것 같아 한풀 꺾인 얼굴로 주저했다.

“미안하다.”

“아냐.”

지하가 얼른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붉어진 눈시울을 눌렀다.

“요즘 내가 이래. 무슨 소리만 들어도 연속극 보다가 우는 중년 아줌마처럼…. 병원이란 곳도 싫고, 아픈 사람만 보이는 것 같고.”

“많이 힘들지?”

“내가 힘든 건 괜찮아. 그냥 아빠가 빨리 일어나셨으면 좋겠어.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어.”

재욱이 낮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다 손을 뻗어 지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웃어, 인마. 그래야 아저씨도 벌떡 일어나시지.”

“응. 그렇겠지?”

재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째깍째깍.

손목시계에서 나는 초침 소리만이 고요한 차 안에서 울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시류는 한 손으로 핸들을 꽉 쥔 채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사이드미러. 거기에 비친 지하와 어떤 남자의 모습.

무언가의 일로 우는 지하와 그런 지하를 위로해 주는 그 남자.

“아….”

건조한 얼굴로 시류가 낮은 소리를 흘렸다.

“서재욱.”

그도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유력 정치가의 아들, 촉망받는 젊은 인재.

정웅과 비밀 사교 클럽에 들렀다가, 몇 번 자신의 부친과 동행한 재욱을 만난 적이 있었다. 활기차고 직선적이고 자신만만한 태도. 몇 마디 말을 나누었지만 그리 거슬리지는 않는 남자였다. 대화도 꽤 지루하지 않게 흘러갔었고.

얼마 전, 집 앞에서 지하와 동행했던 남자도 그였다.

피식.

시류는 바로 기어를 넣고서 차를 출발시켰다.

“참, 쉽지가 않군요.”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

지하는 별생각 없이 병실로 들어섰다가 멈칫했다. 응접실에 시류가 있어 잠깐 당황했다.

이게 참, 얼마 만인지.

그녀가 곧 걸음을 옮겨 소파로 가서 앉았다.

하필이면 나영도 없어서 실내가 더 고요했다. 시류는 그녀가 들어왔을 때 잠깐 목례를 했을 뿐, 다른 곳만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

또 저 사람 잡을 무관심.

지하는 머쓱해서 바지 위에 손바닥을 얹은 채 살살 문질렀다. 이럴 이유도 없는데 왜 이렇게 어색하고 서먹한 건지.

그녀가 적막을 깨며 뒤늦은 인사를 했다.

“왔어요?”

순간 시류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