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맞부딪치는 불꽃 (3/12)

으드득!

스케치 연필을 쥔 지하의 손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 시류는 저녁이 되자 결국 지하를 해방시켜 주었다. 꼼짝 없이 하루 동안은 갇혀 있을 줄 알았더니 갑자기 미련 없이 내보내 준 것이다.

“에취!”

계속 이상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시류가 갑자기 그녀의 뒷머리를 확 끌어당겼다. 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신사인 척하더니 냉큼 야수로 돌변해 날뛰는 건가 싶어 그 짧은 찰나에도 지하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하지만 지하의 입술 바로 위에서 정지한 그의 입술.

조금만 움직여도 맞닿을 그 거리에서 그의 입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의 심장이 뭔가를 했다. 미묘하고 아찔한 그 남자의 눈동자. 막상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가슴이 쿵쿵 뛴 것이다.

이 미친 심장 같으니라고!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원초적인 유혹의 순간.

이건 성적으로 긴장한 건가?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그의 날카로운 턱을 만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이율배반적으로 일었다. 단단한 턱을 물어뜯고 목을 할퀴면서 이 남자에게 키스하고 싶다. 강렬하게 이는 식욕과도 같은 미친 욕구.

싫지만 갖고 싶다.

갖고 싶지만 또 뺨을 날리고 싶다.

상반된 두 개의 극단적인 감정.

활활 타오르는 지하의 욕심. 반면 불꽃도 꺼뜨릴 것 같은 서늘한 시류의 온도. 둘의 눈에서 전혀 다른 의미의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지하의 눈빛은 당당한 거부였고, 시류의 눈빛은… 모든 걸 꼭꼭 숨긴 애증이었다.

지하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눈길. 하지만 그가 곧 시선을 떼고서 낮게 말했다.

“그 거부반응은 아마 이런 충격요법으로 치료될 겁니다. 또 한 번 재채기하면 그땐 정말 키스하겠습니다.”

까드득!

어느새 연필을 물어뜯고 있었는지 치아가 긁히는 기이한 소리가 났다.

“아, 열 받아.”

다시 생각해도 분노 게이지 상승.

“그러니까 재채기 멈추게 하려고 그딴 기막힌 짓을 벌였단 거지? 젠장, 낚였어.”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그 이후엔 두 번 다시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내 위험 감지 센서도 정말 대단해. 혹시라도 정말 키스할까 봐 자중했던 건가?”

아무튼 말짱할 정도로 지하가 재채기를 하지 않자 그 남자가 비웃듯 말했었다.

“제가 아가씨를 싫어한다고 하셨던가요?”

더없이 정중하게 사람을 ‘디스’ 한 것이다. 당한 기분이라 지하는 연필을 더욱 이로 깨물었다.

겨우 키스 하나로 농락당한 기분.

“한 대 먹여 줬어야 했는데…. 내가 정말 겁났던 게 뭔지 알아? 댁이 키스하는 순간 이성이고 뭐고 다 벗어던지고 달려들어서 댁을 씹어 먹을 거 같아서였어. 아그작아그작. 오도독오도독. 정말 맛있게 먹어 줬을 거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선 안 되지. 당연히.”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잡아당긴 순간 일었던 그 감정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훅 했어. 그게 더 기분 나빠.”

지하는 약속이 있어 카페에 앉아 있었다. 기다리기 지루해 졸업 작품 스케치를 손보고 있었는데 문득 어제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시류가 놓아주자마자 바로 대판 싸우기 위해 회사로 쳐들어갔었다. 사무실로 들이닥치자 정웅이 혀를 끌끌 찼다.

“회사에 아무 때나 드나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설명해 주세요.”

“뭘?”

“알면서 왜 그러세요? 제가 왜 갑자기 강시류씨랑 결혼해야 하는 건데요?”

“설명할 이유 없어. 긴말 필요 없다. 내 말대로 결혼해.”

“싫어요. 아무리 아빠라도 저한테 이럴 권리 없어요. 대체 이런 월권이 어디 있어요?”

“내가 너한테 그 정도 권리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못난 아비였단 거냐?”

“그,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

“아빠의 권리가 있다면 저도 제 뜻을 표현할 자유가 있어요. 이건 폭력이에요. 학대예요. 내 의견은 하나도 봐주지 않는 만행이에요. 저 아직 결혼할 나이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사람 좋아하지도 않아요. 저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다른 녀석 있냐? 있으면 데리고 와 봐.”

“그럼 취소해 줄 거예요?”

“난 시류가 좋다.”

지하가 파들파들 떨었다. 정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요?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일 잘해서? 아빠 회사에 없어선 안 될 인재니까? 그게 대체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렇게 소중하고 좋음 그냥 아빠가 데리고 살아요. 왜 저한테까지 이래요?”

“하, 그 녀석 고약하긴. 대체 넌 왜 그렇게 시류가 싫으냐?”

“그야…!”

정웅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시류의 과거를 알고 있단 걸. 그래서 그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신하고 있단 걸. 그런데 고작 그런 남자가 자꾸만 자신을 한없이 건드린다. 그 이중적인 감정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냐고!

“몰라요. 그냥 세상에서 가장 싫어요. 받아들여지다가도 밉고, 평온해졌다가도 마음이 막 뒤죽박죽 뒤바뀌고. 아무튼 그래요.”

“사람 그렇게 함부로 평가하는 거 아니다. 시류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니? 내가 모르는 실수라도 한 게야?”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그런 말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거라. 경솔해 보인다.”

“아빠한테 정말 서운해요.”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장난이 아냐. 회사를 생각해서 나로선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류만 한 인재 없다.”

“결국 그거였군요.”

설마, 설마 했는데 바로 그 이유였다니, 지하는 정웅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또한 자신을 성공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그 남자도, 증오스럽도록 미웠다.

“결국 아빠랑 그 남자가 절 두고 체스를 두신 거죠? 내 의견은 하나도 반영하지 않고서!”

“너한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래요. 제가 아빠 딸로 태어난 이상 회사를 위한 최소한의 희생, 그거 해야겠죠. 하지만 희생을 왜 꼭 결혼이란 방식으로 해야 해요? 왜 절 믿지 않으셨어요? 대학도 경영대가 아닌 디자인 쪽으로 선택하게 하고, 저한테 회사 맡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게 그렇게 서운했었냐?”

“저도 아빠 도와서 회사 일 하고 싶었어요. 벌써 몇 번이나 말했었잖아요. 무엇보다, 그렇게 벌써부터 후계자를 정할 것까진 없잖아요. 아직까진 아빠도 계시고, 엄마도 계열사 맡고 있는데. 그리고 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대학만 졸업하면….”

“그래. 너도 열심히 했지. 네 노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지금 전공 쪽으로 나갈 수도 있고, 언젠가 이 회사에 들어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때의 널 받쳐 줄 사람이 필요한 건 사실이야. 네 곁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다.”

지하의 입술이 떨렸다.

“강 상무가 그렇게 완벽한 사람 같아요? 그 남자는 뭐, 사람 아니래요? 욕심보다 의리가 더 중요하고, 욕망보다 인의를 더 지키는 그런 완벽한 인간이래요? 단지 은인의 딸이라서, 날 아껴 주고 배신 없이 끝까지 지켜 줄 거라고 아빤 그런 착각을 하시는 거예요?”

“지하야.”

“강 상무도 사람이에요. 그 남자도 인간이라구요. 은혜를 입은 건 입은 거고,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원하기도 하고…. 암튼 자기 욕망도, 하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있는 사람이에요. 그 남자도 자기감정 정돈 있다구요!”

“후우.”

“그거 아세요? 그렇게 떠밀지만 않았으면 언젠가 저도 강 상무를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근데 아빠가 그걸 막았어요.”

“네 감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시류의 감정을, 은인이니 은혜니 그런 쪽으로만 몰고 가진 마라.”

“하지만…!”

“난 그 녀석을 자식으로 키웠을 뿐이야. 그리고 시류는 그만한 믿음을 나한테 줬고. 그 어떤 면에서도 날 실망시킨 적 없다. 물론 시류도 욕심도, 욕망도 있겠지. 한 번쯤 자기 가슴을 쳤던 여자를 만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그러냐? 남자가 욕심도, 욕망도 없이, 사랑 한 번 안 해 보고 무슨 일을 해?”

“하…. 미치겠다, 정말.”

“그 이상으로 널 맡길 이유가 충분하니, 자격이 되니까 결정한 게야. 더 이상은 언급 마라.”

“정말 너무해요. 이럴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처음부터 강 상무랑 개인적으로 알아 갈 시간을 좀 주든지, 적어도 한 번쯤은 제 의향을 물어보셨어야죠. 눈에 안 차는 딸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류가 싫은 거냐?”

“좋을 이유도 없잖아요. 아니, 싫어요. 아가씨라 꼬박꼬박 부르는 것도,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잘난 것도, 그걸 인정하는 것도 다 싫어요.”

정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하니 지하의 마음도 안 좋았다.

“아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설령 내가 강 상무님을 죽도록 좋아했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라구요. 꼭 그렇게 떠넘기는 것처럼 호텔에 몰아넣고. 아빠답지 않아요. 아무튼 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렇게 아세요.”

지하는 그렇게 회장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막 타려던 시류와 다시 마주쳤다. 다들 퇴근하는데 이 남자는 그 와중에도 일하려고 다시 회사로 직행했나 보다.

재미없는 남자.

“후우.”

이렇게 대단하고 완벽한 남자를 대체 자신이 어떻게 이기겠는가? 어디서도 느껴 본 적 없는 열등감을 이 남자만 보면 느낀다.

그가 흘끗 엘리베이터를 보더니 지하에게 다시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그뿐, 냉정할 정도로 깍듯하게 목례를 하고서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게 아닌가!

바로 저런 면이 싫다는 거다!

“이봐요, 강시류 상무님.”

닫히는 문 너머로 차갑게 그를 불렀지만, 그는 내리깐 시선을 슬쩍 다시 들었을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문이 닫혔다.

“이 남자가 정말.”

지하는 그대로 옆 엘리베이터에 올라 상무실로 직행했다.

지하를 발견한 비서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지만 쌩하고 지나쳤다.

“용건 있어서 왔으니까 들어갈게요!”

그대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시류는 막 재킷을 벗고 있었다.

“잠깐 봐요.”

멈칫했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여 재킷을 옷걸이에 툭 걸었다. 넓은 등을 보이며 잠시 서 있던 그가 곧 지하 쪽으로 돌아섰다.

눈부시게 하얀 셔츠 때문인가. 어깨도, 가슴도 훨씬 넓어 보였다. 저 정도면 잽을 먹여도 충분히 버틸 순 있겠다. 하지만 지성인이 냅다 주먹질부터 할 순 없고.

“말씀하십시오.”

“왜 사람 무시해요?”

“무시라.”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 적 없지만,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머나! 그러세요? 사과했으니까 전 그만 가 봐야겠네요. 이럴 줄 알았죠?”

그가 큭 웃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대체?”

“웃지 말아요.”

“참고로 변명을 좀 하자면, 회장님 만나 뵙고 나오시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저기압이실 테니 고이 보내 드린 거고요.”

“하, 그렇게 깊은 뜻이 있으셨군요. 강 상무님 짐작대로 아빠 만났어요. 물론 한판 했구요!”

“그러게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옆에 놓인 책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엷게 웃었다. 책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아주 길고 섬세했다.

“강 상무님은 이 상황이 재미있어요?”

“글쎄요. 아가씨만큼 화나진 않네요.”

지하가 이를 뽀드득 갈았다.

“아빠한테도 말했지만, 강 상무님이 미치도록 싫어서 이 결혼을 반대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아빠가 다른 때와 달리 서두르는 거, 마치 한 우리에 넣어서 교배라도 시키듯 강요한다는 거. 알았어요? 처음부터 이 모양이었기 때문에 난 이 결혼 절대 찬성할 수 없어요.”

“사람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무슨 뜻이에요?”

“하지만 아가씨의 생각도 이해는 됩니다.”

“그럼 취소해 줄 거예요?”

“말씀드렸을 텐데요. 난 아가씨를 갖고 싶다고.”

지하가 멈칫했다.

또, 또 왜 이래. 이 남자는?

그가 위험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순간 당연히 피하려던 지하는 낮의 일이 떠오르자 그냥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섰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또 그때처럼 위협하는 척만 하겠지. 어차피 이 남자는 자신을 만지지도 못한다.

하지만 마음을 놓는 그 순간, 그가 지하의 턱을 들어 올렸다.

“……!”

지하의 눈이 커졌다.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이제 아가씨를 두고 ‘감히’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무슨….”

“그렇게 싫어하신다면 아가씨라는 호칭도 그만두죠. 경어도 그만 쓰고, 깍듯한 예의도 내던지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아가씨가 한지하가 되는 그 순간부터, 난 남자로서의 내 욕심을 채울 겁니다.”

“이 뻔뻔한…. 지금 뭐라고!”

확 올라간 지하의 팔을 시류가 낚아챘다. 지하는 당황스러웠다. 수세에 밀리고, 말발에 밀리고, 힘에서까지 밀리다니! 젠장, 마음에 안 들어! 말장난 같은 저 말들에 흔들리는 자신이 가장 짜증 났다.

지금껏 한 번도 제 팔을 잡은 그의 손에서 힘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강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정말 협박이라도 하듯, 전기처럼 찌르르한 감각이 지하의 전신을 훑었다. 손목부터 얼굴까지 모든 곳에서 강렬한 화학작용이 일었다.

이 남자가….

지하는 아주 제대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악! 비명을 지르며 깡충깡충 뛰어도 모자랄 그 남자는 무쇠라도 되는 양 꿈쩍도 안 했다.

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무슨 합금 로봇이라도 되는 거야?

“정말이지 버릇없는 아가씨로군요.”

“그래서요? 한 대 때리기라도 할래요?”

피식.

하지만 뭘 하기는커녕 그는 그저 웃었다. 지하의 팔을 아래로 얌전히 끌어내리곤 그가 인터폰을 눌렀다.

“손님 가시겠답니다. 보내 드려요.”

지하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뭐? 손님? 보내 드려? 지하가 시류의 손을 탁 치고 인터폰의 버튼을 다시 눌렀다. 그리고 들으란 듯 또박또박 말했다.

“아뇨. 지금 들어오지 말아요. 우리 지금 연애하고 있거든요.”

시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러면서 그녀가 보란 듯 생긋 웃자, 시류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차갑게 노려보며 그가 말했다.

“일 치는 데 선수시군요.”

“특기라서요. 아…! 어떡하지? 우리 연애 중이라고 쫙 소문나겠네? 강 상무님 입장이 참 곤란하겠어요?”

“잘됐군요. 어차피 결혼할 텐데 연애결혼이면 더 낫겠죠.”

젠장. 그렇게 되는군.

화가 나서 뒷일까진 생각 못 했다. 이런 경솔한 사고를 치다니! 어떻게든 결혼을 피해야 할 판에 쓸데없는 연애 소문까지 덧얹어지게 생겼다.

하지만 뭐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쩌겠어?

지하가 시류를 쏘아보며 다그쳤다.

“사람이 그렇게 하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죠? 그게 대체 뭔데요?”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말해요.”

그 순간 시류가 지하의 팔을 확 낚아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지하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자꾸 절 도발하지 마세요.”

“누가요? 강 상무님 참 보기보다 궁핍한가 보다. 이게 도발로 보였어요?”

“네. 아가씨의 모든 행동이 제겐 도발로 보입니다.”

“미쳤구나.”

“가세요.”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시류의 커다란 손이 지하의 목으로 움직였다. 지하는 흠칫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오기를 부리며 꿈쩍도 안 했다.

검지로 그녀의 목선을 그리듯 만져 내려가며 시류가 말했다.

“그럼, 정말 연애라도 해 볼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지하의 목에서 전기 같은 자극이 쫘아악 일었다. 발가락 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느낌.

“호, 혼날래요?”

“전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시는군요. 지금 이 방 안엔, 아가씨가 스스로 연애 상대로 인정한 한 남자와 연약한 당신 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언제라도 당신과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소리죠.”

“여, 연애라니. 강 상무님은 연애를 이런 식으로 해요?”

“네. 제가 원하는 건 이런 식입니다.”

그의 손이 이번엔 지하의 쇄골로 내려갔다. 지하의 심장이 그야말로 펄떡펄떡 뛰었다. 그 반응이 스스로 용납 안 돼 지하는 그대로 시류의 가슴을 들이받으려 했다. 하지만 시류가 빨랐다. 그가 지하의 양 손을 들어 벽에 꽉 붙이고서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꽉 눌렀다. 지하의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다, 당장 저리 꺼져. 당신 그만 살고 싶지?”

“아뇨. 괜찮다면 조금쯤 더 살고 싶습니다. 물론 당신과 함께.”

그가 피식 웃었다. 지하도 조소를 머금었다.

“웃겨.”

시류의 진회색 눈동자가 지척에서 빛을 발했다. 그 타는 듯 강렬한 눈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죠. 가라고 할 때 가세요. 내보내 줄 때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안 그럼 정말 위험한 인간을 보게 될 테니까.”

“내가 그딴 말에 겁먹을 줄 알아요?”

“겁먹지 마세요.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그럴 당신도 아니니까.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세고, 생각도 많은 사람이죠. 하지만 지금은, 지금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캐내려 하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고 그냥 제 말을 들으세요. 마지막 충고, 아니, 조언입니다. 자, 연애는 여기까지. 이제 그만 일 좀 하게 나가 주시죠.”

***

“약 올라.”

다시 생각해도 자존심 상해 투덜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올려다보니 오늘 만나기로 한 재욱이었다.

단정한 정장에 스니커즈를 매치해 캐주얼한 느낌. 밝은 미소를 머금은 그가 앞자리에 앉았다.

“표정이 왜 그래? 오랜만에 신경질 난 분위긴데?”

로스쿨 출신. 현재 내로라하는 법무법인을 두고 저울질 중인 능력 있는 남자. 유력 정치인의 아들. 작은아버지는 부장검사, 누나는 판사.

화려한 이력만 들으면 딱딱한 도련님 같지만 오히려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미소로 점철된 즐거운 남자였다.

“오빤 얼굴 좋아졌네?”

“응. 좀 놀다 왔거든. 오랜만에 자유를 좀 즐겼지.”

“핏. 그런데 왜 만나자고 했어?”

“왜냐면 영국서 너 줄 선물 하나 샀거든.”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지하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열어 보니 케이스 안에 담긴 건 예쁜 목걸이였다.

“설마 이미 컬렉션 안에 있는 건 아니지?”

“없어. 고마워. 예쁘다.”

“겨우 그 정도 반응? 실망인데.”

“와우! 미치도록 예뻐! 진짜 고마워!”

지하의 너스레에 재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사람 혀 차게 만드는 데 뭐 있어, 너.”

“그래서. 영국 미녀들이랑은 잘 놀다 온 거야?”

“시끄러워. 나 요즘 금욕 중이야. 얌전하게 일만 보고 왔어.”

“잘했네.”

“내가 걸어 줄까?”

“아니. 암튼 이건 오빠가 작년 내 생일에 취해서 한 실수 만회용으로 칠게.”

“저 마녀.”

“어머머! 마녀라니?”

“너 말야. 여자로 보인다는 말이 어떻게 실수냐? 취해서 보니까 꽤 예뻐 보여서 한 소린데.”

“취해서 고백한 건 다 실수야. 진심이라면 맨정신에 했어야지.”

“그래서 맨정신에도 했잖아.”

“안 했거든?”

“안 했었나?”

재욱이 갸웃거리며 자기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지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좀 믿지 그랬어?”

“여자라면 한 번씩 건드려 보는 바람둥이 말을? 됐습니다. 본인 노력 10%, 인물 준수한 거 30%, 집안 빵빵한 거 60% 해서 여자들이 끊이질 않는 주제에.”

“어허, 사람을 카사노바처럼 몰아붙이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억울하지.”

“웃겨. 내가 오빠 알고 지낸 게 벌써 20년이다. 그동안 내가 본 여자만도 셀 수가 없을 정도야.”

“그래, 인정. 대신 인물 준수한 걸 90%로 해 줘라.”

저렇듯 세상이 즐겁고 고민 없는 재욱을 보고 있자니 문득 시류가 엄청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강시류란 남자는 늘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에 반해 이 오빠는….

“엇? 다크서클! 우리 지하, 역시 무슨 일 있었지?”

잘 논다, 정말.

그나저나 내가 왜 그 남자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자연스럽게 시류를 떠올렸던 지하는 불에 덴 듯 흠칫하고 말았다.

그만! 생각 그만해!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넘겨짚지 마. 그런 거 없어.”

“어젠 왜 전화 안 받았어?”

“아, 선봤어.”

재욱이 깜짝 놀랐다.

“뭐?”

“농담.”

“농담도 정도가 있지, 난 주변에서 선본 사람들 보면 경기 일으켜. 나 요즘 모친한테 떠밀려서 미친 듯이 선보고 다니잖아.”

“웃겨. 자기도 좋으면서.”

“아닌데? 난 일편단심 한지하라서.”

“그래? 그럼 나랑 결혼할래?”

“그럴까?”

“그러지 뭐. 어차피 오빠도 선보고 있고 나도 결혼이란 걸 해야 한다면 아는 사람이랑 하는 게 낫지 않나?”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아닌데?”

순간 재욱이 조용해졌다. 그가 가뭄에 콩 나듯 아주 가끔만 보인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 정말 선봤냐?”

“그렇게 됐어.”

“결혼할 거야?”

“결혼이 그렇게 쉬워? 격렬하게 반항하고 있는 중이야.”

“네가 벌써, 결혼할 나이가 됐구나.”

“정확히 말해서 결혼할 나이는 아니지. 암튼 나도 이렇게 일찍 결혼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서. 할 거야?”

“그럴 리 있어?”

재욱이 낮은 한숨을 흘렸다. 안도의 한숨이었지만, 지하는 그때 문자가 오는 바람에 휴대폰을 확인하느라 보지 못했다.

“누구야?”

“응, 친구. 졸업 작품 때문에. 아, 무슨 얘기 하고 있었더라?”

“격렬하게 반항하고 있는 중이라며.”

“어… 뭐, 그건 됐고. 오빠, 뭐 마실래? 선물 받았으니까 내가 쏠게.”

“너 결혼 결정은 신중하게 하는 거야. 떠밀리듯 하지 말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해.”

“뭐야, 엄마처럼 잔소리는.”

“상대는 누군데?”

“있어. 그런 사람.”

“내가 아는 사람?”

“음, 알 수도 있고….”

“궁금하네. 어떤 남잔데?”

“어떤 남자냐면, 세상에서 가장 정중하면서도 또 가장 시건방진 남자.”

재욱이 피식 웃었다.

“뭐야, 그 신선한 타입은?”

“암튼…. 평생 감정이라곤 모르는 것처럼 얼굴이 굳은 남자. 그냥 확 나 좋아하게 만들어 볼까?”

“…….”

“근데 그럴 주변머리도 없는 남자야. 너무 올곧다고 해야 하나, 정직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과거에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남자가 결코 은혜를 입은 사람의 딸을 사랑할 리 없단 건 확실했다. 그런 선택은 절대 하지 않을 남자였다. 그러니 더더욱 이 결혼이 암담하단 거.

나 왜 끝이 빤히 보이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걸까?

“어어, 한지하. 그 여자여자한 표정은 뭐야? 그 남잘 좋아하는 삘이야.”

생각에 빠져 있던 지하의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끌려 올라갔다.

“뭐?”

“솔직히 말해. 조금은 마음 있는 거 아냐? 심각한 표정인데.”

“우, 웃겨. 그럴 리 있어? 완전 싫거든? 세상 남자 다 좋아해도 그 남자만은 절대 안 좋아할 거야!”

그런데 나 왜 이렇게 강조하는 거지? 누가 봐도 이건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잖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데, 아, 얼굴 화끈거려.

“암튼 그 얘긴 그만해.”

날 선 지하를 물끄러미 보던 재욱이 벌떡 일어났다.

“마시는 건 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뭐야, 갑자기.”

“빨랑 일어나. 나 바쁜 사람이야.”

“흠….”

별로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다른 생각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지하는 재욱을 따라 일어섰다.

***

재욱의 차가 지하의 집 앞에 섰다.

“일부러 시간 내서 맛있는 저녁도 사 주고, 수다도 떨어 주고, 바래다주기까지 했으니 나 아주 괜찮은 남자지?”

“오늘은 왜 자화자찬 안 하나 했다.”

지하가 고개를 저으며 안전벨트를 풀려는데, 재욱이 먼저 다가와 풀어 주었다.

달칵.

“이거까지 점수에 넣어라?”

갸웃.

“무슨 점수?”

“그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의심스러워. 또 무슨 부탁 하려고? 설마 또 내 친구 소개해 달란 건 아니지?”

“음… 여자 소개해 달란 건 맞아.”

“됐거든?”

지하가 내리자 재욱이 따라 내려서 지하의 앞으로 왔다.

“엇! 다크서클!”

그러더니 또 지하의 눈 밑을 쿡 누르며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지하는 그 손을 딱! 소리 날 정도로 맵게 쳤다.

유치하긴.

“가, 오빠.”

“먼저 들어가, 얼른.”

“응.”

그때 대문을 향하려던 지하가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재욱의 팔짱을 쏙 끼곤 웃었다.

“오빠!”

“왜, 왜 이래, 갑자기? 사람 당황스럽게.”

“그치? 당황스럽지? 그래도 그냥 5초만 이렇게 있자.”

“미쳤냐?”

“5초마안.”

“나 참.”

하지만 재욱은 아무 말 없이 5초를 있어 주었다. 지하가 정확히 5초 후 재욱의 팔을 놓았다.

“아, 됐다. 오늘 기분 꿀꿀했는데 오빠 덕에 좀 풀렸다.”

“내 팔에 좀 치유의 힘이 있지.”

“응. 가.”

재욱이 큭 웃더니 차에 올라타 ‘바이바이’ 손을 흔들곤 사라졌다. 차 후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지하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섰다.

방금 전 재욱에게 이상 행동을 했던 것, 그건 바로 저 앞쪽에 누군가가 있단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바로 시류의 미끈한 애마가 어둠 속에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풀 속에 숨어 호시탐탐 때를 노리는 표범처럼. 바로 그 남자처럼….

“쯧. 유치하지, 나도.”

그런 식으로라도 저 남자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건가?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렇게 해 달라고.

어른스럽진 않았던 행동. 하지만 반사적으로 그런 악마적인 생각이 든 걸 어떡해?

저 남자의 반응을 보고 싶다. 그런 악의적인 부추김.

“뭐, 좀 후련하네.”

지하는 그의 차 쪽을 확 쏘아봐 주고는 대문으로 걸어갔다. 하루를 저 남자 얼굴을 보는 걸로 마감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얼른 도망갈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그 순간 차 문이 달칵 열리며 시류가 차에서 내렸다.

시류는 방금 전까지 차 안에서, 이쪽을 쏘아보는 지하를 물끄러미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그녀의 착 올라간 눈에서 쏟아지는 섬광을 맞받아 주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지하가 벨을 누르려다 말고 시류를 돌아보았다.

“어머, 거기 있었어요?”

깜찍하게 연기를 하고 있다. 괘씸한 장난을 쳐 놓고서 아무렇지 않은 듯 시치미를 뚝 떼는 저 천방지축 아가씨. 말 안 듣는 고양이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

“언제 왔어요?”

“한 시간쯤 된 것 같군요.”

“어머, 오래 기다리셨네요. 설마 나 기다린 거예요?”

“그렇겠죠.”

“왜요? 회사에선 짐짝처럼 쫓아내더니, 이제 와서 언제 들어오는지 체크라도 하게요?”

“대충 그렇다고 해 두죠.”

“아… 그럼 어쩌나? 나 방금 전에 누구랑 같이 왔었는데 혹시 못 봤어요? 그 오빠 꽤 괜찮은 남자거든요.”

어차피 자신의 의도적인 장난질을 저 눈치 빠른 남자가 모를 리 없겠고, 지하는 얄밉게 그를 선동했다.

한없이 비뚤어지고 싶다. 할 수 있는 모든 반항은 다 할 테다. 먼저 철회해 주지 않는 한 댁은 아주 많이 피곤해질 거야.

“만나세요.”

그 순간 시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하의 눈빛이 멈칫했다.

“…뭐라구요?”

“하지만 너무 늦게 다니는 건 보기 안 좋습니다.”

헐, 선생이야?

이 남잔 대체 뭐지? 최소한의 질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내가, 날 두고 질투하는 남자를 보는 걸 원래부터 즐기긴 하지만, 이건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적어도 기분 나빠하는 정돈 해야지.

그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지!

지하는 몹시도 자존심 상했다. 태어나기를 재력가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정략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눈곱만큼도 나에 대한 애정이 없는 남자와 결혼할 생각을 하니 참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거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거야? 난 그저, 날 미치도록 갈구하고 나 없으면 죽고 싶을 정도로 나한테 집착하고 나 없인 세상 끝날 것처럼 절절하게 구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뿐이라고! 얼마나 사소한 욕심이야?

성난 지하가 시류 쪽으로 성큼 다가가 섰다.

“당신, 정말 나쁜 남자야.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괜찮고, 그 남자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데 이 결혼을 하겠다고?”

살면서 이렇게 자존감이 짓밟히는 일이 또 있었던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그거랑 뭐가 달라요?”

“다릅니다.”

“그럼 보여 줘요. 나한테 키스해 봐요.”

“……!”

시종일관 여유롭던 시류의 표정이 순간 정지했다. 그 잘난 얼굴에 약간이나마 균열이 인 게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지하는 여세를 몰아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왜 아무 말 없어요? 해 봐요.”

보란 듯 도발하는 그녀.

“나랑 한집에서 살고 한 침대에서 자고 필요하면 잉꼬 부부 흉내도 내야 할 테고, 쇼윈도 부부라도 스킨십 정돈 해야겠죠. 그게 부부예요. 난 강 상무님이랑 키스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가는데, 당신은 할 수 있어요?”

한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나랑 키스할 수 있냐구요.”

“아뇨.”

지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바위 같은 둔탁한 것에 쿵 부딪친 기분.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 살기를 꾹꾹 눌러 담아 미친 듯 노려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통곡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하…. 질투도 안 하고, 키스도 싫으면서 결혼은 하겠다고? 당신은 회사 하나만 가지면 돼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눈물이 올라오려 하다니, 눈물 너 참 헤프구나.

“난 키스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 대단한 사랑을 바라지도 않아. 대단히 헌신적인 남자도, 신데렐라 남편을 바라지도 않아. 열두 시 땡 되기 전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고, 나만 바라보며 오로지 나한테만 잘해 주는 남자가 아니어도 돼. 내가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면 되고 내가 나한테 잘해 주면 되니까.”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입술.

“하지만 최소한 날 좋아하는 남자랑 같이 살고 싶어요. 그 정도면 철없이 사랑 타령만 하는 것도 아닌데, 최소한의 최소한으로 줄인 욕심인데, 그걸 지금 당신이 막고 있잖아요.”

지하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시류의 심장엔 텅 빈 바람이 불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자신이란 사실이 참 씁쓸했다.

시류의 입가에 서글픈 웃음기가 잠깐 돌았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죄송합니다.”

“정말 화나. 그렇게 아니면서 왜 계속 고집 부리는데요? 아빠한테 싫다는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요. 나랑 결혼까지 하지 않아도 회사쯤 당신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질 수 있잖아. 다 못 가지면 반만 가지면 되잖아.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랑 살면 되잖아.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데요?”

“단지 회사 때문에 이런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하지만 시류가 주춤했다.

경솔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지하의 앞에서만은 이렇게 가볍게 감정을 노출시키고 만다.

너무도 야속 일로로 흘러가는 그녀의 독한 말들에 순간 서운해져서 방어하고 싶었던 건가.

미숙하구나, 강시류.

그가 입을 꾹 다물자 지하는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뭔데요? 말해요. 아빠랑 주고받은 조건이 있는 거죠?”

“없습니다, 그런 거.”

“있어.”

“없습니다.”

“웃기지 말아요. 지금 그 반응으로 알았어요. 댁도 그렇고 아빠 분위기도 그렇고, 뭔가 두 사람만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정확한 말. 하지만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해 줄 수 없었다. 정웅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그래서 그녀가 비록 답답하더라도, 아픈 것보단 낫다. 난 당신이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더 늦게 알았으면 좋겠다.

“절 의심하는 건 당연합니다. 저는 아가씨에게 적이니, 아가씨는 아가씨대로 촉을 세우고 계시겠죠. 설령 절 못 믿어서라고 하더라도, 그런 믿음을 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런 말로… 늘 욕도 더 못 하게 만들지. 당신은 그렇게 날 화나게 해요. 가 버려요.”

젖은 눈으로 노려보던 지하가 그대로 돌아섰다. 시류는 자신도 모르게 그 팔을 확 낚아챘다.

“놔요!”

미친 듯 뿌리치는 지하를 그대로 구석으로 몰았다. 지하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키스 같은 거, 못 하는 놈도 있습니까?”

순간 지하의 심장이 덜컹했다. 가방으로 후려치려고 했던 마음도 일순 멈칫하고 말았다. 그의 눈동자에 아주 깊은 어둠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건 정말 가슴 아픈 표정이라서.

“저도 남잡니다. 저도 사냅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겁도 없이 그렇게 선동해도 안전하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드, 듣기 싫어요.”

지하가 회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류가 고집스럽게 그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눈빛이 탁해져 있었다. 그대로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지하는 숨이 탁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 두근두근 자맥질 치는 그때, 결국 시류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허공을 타고 내려가 멀어졌다. 손도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하….

지하는 맥이 빠지고 말았다. 이 남자는 대체….

손 닿았던 것도 떼고, 키스는 더더욱 하지도 않고.

왜 이래, 정말?

동의 없이 키스하는 것보다 더 싫은 건, 더 자존심 상하는 건, 하던 걸 멈추는 것.

내가 그 정도로 매력 없는 여자야? 이 정도까지 온도가 정점을 찍었으면 누구라도 소득 없이 물러서진 않을 거다. 실제로, 짧게 짧게 사귀었던 그 어떤 남자 친구도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난 적은 없었다.

그랬는데.

내가 대체 왜,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독수공방하는 심정을 겪어야 하는 거냐구?

“진짜 자존심 상하게 하네요. 내가 하나만 가르쳐 줄게요. 이럴 땐 뺨을 맞더라도 차라리 큰맘 먹고 밀어붙이는 게 남자예요. 밥 먹고 옷 입으라고만 손이 있는 거 같아요? 결혼하겠다고 나선 여자가 힘들어하면 보듬어 주라고 있는 게 손이에요. 나랑 결혼하자고 남자답게 프러포즈하는 게 입술이에요. 그렇게 몸 쓰는 게 아까워요?”

시류가 잠깐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꽤 직접적인 말에 좀 놀랐나 보다. 그러다 그가 피식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난 지금 심각한데 농담한 거 같아요? 욕 한번 고상하게 먹어 볼래요?”

“한지하.”

그때 시류가 지하를 불렀다.

“왜요?”

“이제 그만해.”

낮은 그의 목소리.

“난 아프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 같지?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인간이니, 난 기본적인 감정도 없어야 하고, 상대방에 대한 기대도 없을 것 같지? 욕망도, 사심도 없을 것 같지?”

지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물처럼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그, 그럼 있어요?”

“있어. 차고 넘칠 만큼….”

그 말과 함께 그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며 가는 목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 지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확 물러나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순간 이상한 생각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목이 졸리는 상상을 하다니.

휴… 역시 낙인이란 건 무서운 거야. 자신이 찍어 버린 이 남자에 대한 낙인.

지하의 그런 태도를 바라보는 시류의 눈동자에 건조한 조소가 돌았다.

“봐. 만지려고 하면 두려워하면서.”

“…….”

지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넌 내가 두렵지? 싫어하는 건지, 무서워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지?”

가시 같은 차가움이 뚝뚝 떨어졌다. 지하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날 때려도 좋아. 뺨 따위 얼마든지 맞아 주지. 더한 것도 견딜 수 있어. 내가 가장 두려운 건, 날 후벼 파는 네 그 냉소적인 시선이다.”

지하의 심장이 울렁울렁했다.

“날 미워해. 계속 내 죄책감을 건드려. 자존심을 뭉개도 좋아. 하지만 이 결혼은 받아들여. 그게 나중에 네 눈물을 줄일 방법이니까.”

***

지하가 온갖 성질을 내며 들어가 버린 후 시류는 대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정신병자니, 짜증 난다느니, 미친 거 아니냐는 둥, 할 수 있는 악담은 모조리 퍼붓고서 대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 게 벌써 한참 전이었다.

그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려고 했었건만 결국 끝은 욕이라니.

한참을 지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시류가 천천히 돌아섰다.

“나한테 키스해 봐요.”

“왜 아무 말 없어요? 해 봐요.”

그녀는 가끔 너무도 악랄하게 제 심장을 짓밟는다.

“재수 없는 자식.”

“아빠한테 싫다는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 나랑 결혼까지 하지 않아도 회사쯤 당신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질 수 있잖아. 다 못 가지면 반만 가지면 되잖아.”

하지만 그녀가 인식하고 있는 자신은 겨우 그 정도.

키스 따위.

“왜 하기 싫겠습니까.”

욕망에 눈이 멀어 허덕이는 꼴을 봐야 만족하겠다는 건지. 거기까진 추락하고 싶지 않다는 한 조각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차를 타고 왔어도, 보란 듯 그 남자와 팔짱을 끼며 웃었어도, 그래서 타들어 갈 듯 질투가 났더라도 참았다.

“병신처럼 아무 말 못 하는 이런 비참한 모습으론 만족이 안 되는 겁니까?”

후우….

그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이 결혼의 배경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가 받아야 할 고통, 그건 자신이 지금 견디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내가 대체, 참는 것 이상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녀가 선택한, 강시류를 쳐내는 또 다른 방법.

“나랑 키스할 수 있냐구요!”

야무지게 꼭꼭 그를 짓밟는 방법. 그 잠깐의 선동이 이쪽에게 미칠 파장 같은 건 전혀 모르고서….

그러니 순간 일었던 타들어 갈 듯한 갈증 따위, 그래서 홀로 열을 식혀야 하는 이런 감정 따위 아마도 그녀는 전혀 모르겠지.

***

“웃기고 있어! 눈물을 줄일 방법이라니, 이젠 별소릴 다.”

씻고 나온 지하는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빗으며 투덜거렸다.

“난 아프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 같지?”

순간 빗을 쥔 지하의 손이 서서히 정지했다.

“넌 내가 두렵지? 싫어하는 건지, 무서워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지?”

“내가 가장 두려운 건, 날 후벼 파는 네 그 냉소적인 시선이다.”

“날 미워해. 계속 내 죄책감을 건드려.”

지하는 속이 뒤집혀 짜증스럽게 빗을 내던졌다.

“죄책감을 건드리는 건 당신 쪽이잖아! 왜 그런 말들은 해선! 애초에 전투욕에 기름을 콸콸 들이부은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나만 독한 마녀로 만드는 거야?”

멀리서 엮일 일 별로 없이 차갑게 견제하기만 했던 때의 그와 자꾸만 부딪치면서 감정이 뒤섞이고 있는 지금의 그와는 아주 많이 달랐다.

그때 그는 그저 필요 이상의 정중함, 그리고 그 매너를 무색하게 하는 시니컬함으로 단지 아주 재수 없는 남자였는데… 자꾸만 그를 알게 되는 것 같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흔들리는 것 같아 이상하다. 점점 그로 인해 가슴에 인이 박이는 것 같다.

그라는 남자가 가진 비참함, 처절함, 절절함 그리고 진지함.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키스 같은 거, 못 하는 놈도 있습니까?”

그 말을 하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 서려 있던 따가운 질책의 빛.

두근!

두근두근!

“아! 이거 대체 뭐야? 왜 이래?”

지하는 자신의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강제적으로라도 울렁거리는 심장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 깊은 안에서 홀로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고 있는 기관을 도통 막을 수가 없었다.

갈수록 자신이 비정상이 되는 것 같다.

“이러다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정리할 사람은 아빠뿐이야.”

만나기만 하면 부딪침만 더 늘어 간다.

“키스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아뇨’라고 바로 대답할 수 있는 남자야. 하긴, 한편으론 정말 대단한 남자지. 그렇게 솔직할 수 있다니. 하…. 성격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 늘 혼자 고고하시지. 쓸데없는 생각 마. 어차피 네 환상이야. 위험한 남자에게 끌리는 건 효율적인 면에서 완전 제로야!”

벌떡 일어난 지하는 정웅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대부분 침실보다 서재에 계신 편이라 그녀는 정웅이 좋아하는 작설차를 준비해 얌전히 서재로 향했다.

그때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 지하가 갸웃했다. 목소리는 서재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엄마도 계시네? 두 잔 준비할걸.’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

“지하도 갑작스러운 결정을 받아들이긴 힘들 거예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잘 설득해 볼게요.”

“그래 줘요.”

지하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엄마도 아군이 아니었구나.”

“수술은 정말 지하 결혼한 뒤에 받을 거예요? 서 박사님 소견은 하루라도 앞당기는 게 좋다고 하는데.”

“내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어차피 가망 없다면 적어도 딸자식 결혼은 보고 가고 싶소, 그렇게 하게 해 줘요.”

쾅!

순간 문이 세차게 열렸다. 지하가 쟁반을 든 채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가 바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수술이라니… 지금 두 분, 무슨 말이에요?”

정웅과 나영이 멈칫했다. 두 사람 다 생각지 못한 일에 놀란 듯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건 지하였다. 지금 들은 말을 도저히 정리할 수가 없었다.

“아빠 수술해요? 엄마, 지금 이거 무슨 소리야? 가망 없다니, 내 결혼은 보고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구!”

“지하야….”

“엄마…. 아빠!”

그때 정웅이 나영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의 뜻을 읽은 나영이 낮은 한숨과 함께 딸을 바라보았다.

“지하야, 놀라지 마. 아빠… 뇌종양이야. 그 수술을 말하는 거였어.”

쨍그랑!

쟁반이 발치로 떨어졌다. 찻잔이 깨지며 뜨거운 차가 튀었는데도 지하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렁그렁 맺혀 눈동자를 꽉 채운 눈물 너머로 정웅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흐윽! 말도 안 돼. 거짓말…. 거짓말이지? 그치?”

하지만 두 사람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절망적인 정웅의 표정. 나영도 다르지 않았다. 지하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아… 아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에 지하가 결국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꺄아악!”

귀를 막고서 발작하듯 소리치자, 나영이 안타까움에 눈물을 찍었다. 감정을 꾹 누른 채 뒤돌아선 정웅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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