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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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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RETURN (22) 

22.

루카와 내가 같이 묵고 있는 방에 아이를 내려놓고 나는 유모가 챙겨준 약 상자를 가져왔다. 상처를 소독하고 타박상에 바르는 약을 발라 주는 동안 벤이란 아이는 줄곧 루카를 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루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루카는 루카대로 그런 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어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주인에게 부탁한 따뜻한 우유를 벤과 소녀에게 건네주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보니 알렌이 좀 심각한 표정으로 다른 기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알렌은 짧은 한숨과 함께 사정을 털어놓았다. 

“식량과 로크스를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최근 이 마을에 종종 몬스터들이 들이닥쳐 사람과 가축을 공격하는 모양입니다.” 

마을에 들어올 때 보았던 두꺼운 목책을 기억해내고 나는 미간을 좁혔다. 

“경비대는요?” 

“경비대에 연락은 넣었지만 거리가 멀어서 이틀은 더 지나야 도착할 모양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밖에 돌아다니지 마시고, 여관 안에만 계십시오. 어디 외출하실 일이 있으면 항상 저희와 동행하시고요.” 

그런 사정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각박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알렌은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이었지만 왠지 미심쩍은 듯 문 앞에 보초를 세우겠다고 했다. 

보초를 세우는 건 물론 나와 루카를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한 일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굉장히 피곤하고 지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내가 고개를 젓는데, 문득 방 안쪽을 흘깃 보던 알렌은 소년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저 아이들은 누굽니까?” 

“아……” 

잠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해 망설이는 사이 소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렌은 그게 더 수상한지 내 쪽을 보며 마치 바람난 부인을 추궁하는 남편 같은 표정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않고는 물러나지 않을 듯한 알렌을 보며 나는 낮은 한숨과 함께 옆으로 물러섰다. 

“일단 들어오시죠.” 

*     *     *

설명을 대충 들은 알렌은 소년 쪽을 보며 명백히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아마도 몬스터 침입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이에 대한 소문도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보던 두려움이 깃든 표정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알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소년에 대한 소문은 저도 믿지 않습니다만… 아스텔님께서 저 아이와 함께 계시는 것에는 반대입니다. 치료가 끝났으면 어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알렌은 아마도 내가 소년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불이익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소년을 언제까지나 데리고 있을 형편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전에 먼저 알고 싶은 게 있었다. 

“그보다 우선 무슨 소문인지를 듣고 싶습니다만…” 

궁금해 하는 나를 보고 알렌은 말하기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저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만 이 마을에 몬스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게 저 아이가 이곳에 오고 얼마 안 있어서부터라 사람들이 아이가 몬스터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보다시피 정상인 아이도 아니니 더 불길하다고 여기고 있고요.” 

도시와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는 종종 말도 안 되는 미신도 진짜처럼 여겨지곤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정신적으로 이상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신에게 저주를 받았다거나, 악마를 영접해서 그렇다는 등의 근거 없는 낭설을 믿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그런 미신에 대한 믿음들은 묘하게도 신에 대한 바른 믿음이나, 도덕적 도리보다 강해서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고 말이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에 미간을 구기고 있는데 갑자기 붉은 머리의 소녀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벤을… 제발 도와주세요.” 

소녀의 초록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어서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세린 또래의 여자아이가 우니까 세린의 마지막 모습이 기억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꼬마, 무리한 부탁을 하지 마라. 우린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단호한 표정으로 알렌이 말하자 소녀는 일시 흠칫 굳어졌지만, 본능적으로 이곳의 결정권자가 누군지 아는 듯 내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벤을 도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일단 들어는 보자. 뭘 어떻게 하면 벤을 도울 수 있는 거지?” 

반쯤 희망적인 내 말에 소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 소녀의 행동에 일순 루카의 눈썹이 살짝 꺾여 올라갔다. 

“몬스터를 없애 주세요!” 

소녀는 마치 ‘저기 지나가는 벌레를 잡아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알렌은 ‘끄응’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     *     *

기사 하나를 딸려서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몬스터를 없애 달라…… 

소녀의 말에 의하면 마을을 습격하는 몬스터는 우리가 이곳에 오던 중에 보았던 하이울프들인 것 같았다. 하이울프라면 쉽게 없앨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더구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놈들이라 본격적으로 이곳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얼마만 한 숫자가 나올지도 알 수 없고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무리는 30마리에서 40마리를 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이상이 되면 일정지역에서 제대로 먹이사슬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테니 말이다. 하지만 도망치기로 작정하면 바람처럼 빠르게 도망치는 하이울프를 마지막 한 마리까지 잡아 씨를 말린다는 건 대충 생각해봐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고,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하이울프의 무리에는 항상 리더가 있었는데 그 리더를 없앨 경우 무리는 일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다음 대 리더를 뽑기 위해 후보라고 할 수 있는 수컷들이 서로 겨루며 난투를 벌이는데 그 기간이 빠르면 보름, 길면 한 달 정도 걸린다고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사냥을 한다고 하니 아마 마을을 습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경비대가 도착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일 테고 말이다. 

하지만 리더를 없애자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3, 40마리의 하이울프 떼를 모두 상대해야 할 수도 있었다. 

난감한 상황에 얼굴을 구기고 있는데 루카가 저녁을 가지고 올라왔다. 루카의 뒤에는 종업원 여자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발갛게 물든 얼굴로 루카의 모습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잠시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난 방안에 놓인 탁자에 차려지는 접시들을 보며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음식이었다. 여자가 아쉬운 눈빛으로 방을 나가고 나서 나는 탁자로 다가가며 루카에게 물었다. 

“누구 다른 사람 초대했어?” 

내 질문에 루카는 당치도 않다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게 2인분이야?” 

내가 조금 황당하다는 듯 말하자 루카는 무덤덤한 얼굴로 수긍했다. 하긴… 한참 성장기니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을 때기는 했다. 그런다고 루카가 나처럼 살이 찌는 체질도 아니고… 그런 생각에 나는 가볍게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양이 차서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였다. 루카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드십시오. 요즘 너무 말랐습니다.” 

마르긴 개뿔이… 라는 말이 튀어나갈 뻔했다. 내가 쓰러졌던 이후로 루카는 계속 말랐다느니, 수척하다느니 하며 나를 더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사실 내 몸은 빠른 속도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한참 아팠다지만 체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한 달 동안 병약해 보일 정도로 말랐던 몸은 원래의 건강 상태를 회복하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정상체중 정도로 보이는 몸이지만 힘든 여행에도 불구하고 식사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금세 살이 찌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거절의 말을 하고 식탁에서 일어서자 루카는 잠시 미간을 구기고 있다가 자신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가 음식을 더 먹지 않는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종업원을 불러 상을 치우고 루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내 옆에 앉았다. 

“위험한 일은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틀 후면 경비대가 도착해서 해결할 겁니다.” 

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짐작한 듯 루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내가 치기 어린 영웅심으로 경비대가 오기 전에 하이울프 떼를 습격하자고 제의하기라도 할까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진지한 루카의 얼굴을 보며 나는 빙긋이 웃었다. 

물론, 실제 열여덟의 나라면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 일행이 기사가 셋에 루카까지 있는 터라 좀 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이울프 떼 몇 십 마리에 둘러싸여도 여유로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누구 하나는 크게 다칠 수도 있었고, 그 누군가가 루카가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루카와 나를 알토나스까지 무사히 수행하는 것이지 영웅 심리에 들뜬 주군의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비운의 기사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혹시라도 경비대가 도착하기 전에 하이울프 떼가 마을을 습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우리도 휩쓸리게 될 테고,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상상해 보는 것은 샤이엔과 작전수행을 나갔을 때 매번 습관처럼 해보던 것이었다. 

걱정 말라는 의미를 담아 나는 루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느낌은 언제나 굉장히 기분 좋은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내가 멍하니 미소 짓자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인지 루카의 예쁜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온화한 미소만으로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걱정들이 일시에 모두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집을 떠나 타국인 알토나스까지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나는 왠지 별로 힘든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겨도 루카가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갑자기 나는 행복해지곤 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독히도 행복한 꿈. 깨어나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을 말이다. 

*     *     *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설핏 잠에서 깬 나는 무엇 때문에 깬 것인지를 몰라 잠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창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요란한 종소리를 듣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언제 일어났던지 곁으로 다가온 루카가 손목을 잡아왔다. 

걱정이 가득한 흑청색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괜찮아.” 

톡톡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재빨리 옷을 입고 망토를 어깨에 걸치는데 어느새 준비를 마친 루카가 다가와 망토 핀을 고정해 주었다. 

동작을 마치고 루카는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루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허리춤에 느껴지는 서늘한 검의 감각을 느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가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밖으로 나가자 비명 소리와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마을 주변에는 목책이 둘러져 있고, 자치 경비대가 밤새 경비를 보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마을 안으로 들어온 하이울프가 있는 모양이었다. 

알렌은 마부와 종자들을 보호할 기사 하나를 여관에 남겨두고 다른 한 명의 기사와 함께 나를 따라 나왔다. 

“여관 안에 계시는 게 좋습니다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말을 꺼내보는 알렌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기사라는 직책을 가진 자가 손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란 걸 아는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 그도 나와 루카를 보호해야 한다는 임무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검을 들고 밖으로 달려 나왔을 터였다. 

“상황이 어쩔 수 없는걸요. 여관 안에만 있다고 안전하지는 않을 겁니다.” 

괜찮다는 듯 내가 얘기하자 알렌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마을 중앙의 광장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우린 그쪽으로 달렸다. 광장에는 두 마리나 되는 커다란 하이울프가 사람들을 덮치고 있었다. 알렌이 검을 뽑아 한 마리에게 달려드는 걸 보며 나도 곧장 검을 뽑아 다른 쪽으로 달려갔다. 

자치 경비대로 보이는 어설픈 경갑을 입은 자에게 달려드는 하이울프의 등으로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검이 일으키는 바람소리만을 듣고도 공격을 파악한 하이울프는 교묘하게 몸을 틀어 겨우 스치는 정도로 검을 피하고 펄쩍 뛰어오르며 내 쪽으로 쇄도해왔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지척에서 하이울프의 목이 날아갔다. 내가 미처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어디선가 튀어나온 루카의 검이 울프의 목을 그대로 날려버린 것이다. 철퍽-하고 목을 잃은 몬스터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알렌 쪽을 보니 그쪽은 아직 싸우고 있었지만 위험해 보이는 광경은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경비대원이 놓친 횃불을 찾아 하이울프의 시체에 던졌다. 화륵-하고 금세 늑대의 은회색 갈기가 타오르며 불꽃이 일었다. 

나머지 하이울프를 해치우고 우린 마을 외곽의 목책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잠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책의 한 곳은 이미 반 이상 부서져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으며 무너진 목책 사이로 커다란 하이울프들이 휙휙 뛰어넘고 있었다. 경비대들이 분분히 창과 검을 들고 막아보려 하지만 벌써 다섯 마리는 넘게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망설일 여유도 없이 곧장 공격받고 있는 경비대원들에게 달려갔다. 

경비대원들의 숫자가 그래도 상대적으로 많은 터라 여기저기 늑대의 몸에 창을 박아 넣고 있었지만, 그 정도 상처는 우습다는 듯 금세 나아버리는 하이울프였다. 대신 하이울프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 스치는 사람들의 피부는 마치 종잇장처럼 뭉텅뭉텅 뜯겨나가고 있어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달려가는 내 속도를 추월해 앞으로 뛰쳐나간 루카는 빛과 같은 움직임으로 그대로 하이울프 한 마리의 몸통을 갈라버렸다. 막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있던 것을 베어버린 것이라 붉은 피가 비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경비대원은 넋이 나간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시체가 떨어져 내리는 즉시 경비대원이 들고 있던 횃불을 빼앗아 시체에 불을 놓았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루카의 눈부신 무위에 잠시 멍해진 사람들의 정신을 깨우려 큰 소리로 외치자, 그제야 사람들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창검을 들었다. 알렌도 막 늑대 하나를 죽이고 불을 붙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부상자가 많긴 했지만, 다섯 마리 정도의 하이울프는 시간만 있으면 모두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심코 목책 밖을 내다봤던 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책 밖에는 족히 백여 마리는 되어 보이는 하이울프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멍하니 굳어진 내 어깨를 루카가 감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루카를 바라보았다.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루카는 그런 내 얼굴에 미간을 구기더니 와락 내 몸을 끌어안았다. 

“제 옆에만 계십시오.” 

다짐받듯 속삭이는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너야말로…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마라. 알았지?” 

대답 대신 루카는 내 얼굴을 감싸더니 이마 위에 정중하게 입술을 내렸다. 

“전 걱정 마십시오.” 

희미한 웃음기가 루카의 눈가에 스쳤다. 그 미소는 왠지 굉장히 안심이 되게 하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우리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도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새롭게 들어오는 늑대들을 막기 위해 루카와 나는 곧장 검을 들고 부서진 목책 쪽으로 뛰어갔다. 

알렌이 구해낸 사람들은 모두 그쪽에 몰려 늑대들을 막고 있었지만 일반 늑대와는 달리 몸집도 크고, 힘도 무서울 만큼 센 하이울프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목책을 뛰어넘어왔다. 

루카와 나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도 내가 위험할 때마다 루카의 검이 어김없이 튀어나와 나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다 보니 그래도 더 이상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고 있었지만, 목책은 금세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다. 하이울프들이 지능적이게도 한 곳을 집중적으로 들이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반쯤 부서진 목책은 울프들의 엄청난 힘에 위태롭게 균열이 가고 있었다. 곧 무너질 것 같은 목책을 보며 나는 잠시 엄청나게 몰려있는 하이울프의 무리로 시선을 주었다. 

무리의 저 너머에 어렵지 않게 다른 늑대들보다 몸집이 큰 늑대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이울프 무리의 리더였다. 리더는 다른 울프들과 함께 몰려 있지 않고 홀로 고고하게 높은 바위 위에 서 있었다. 멋들어진 은회색 갈기 사이로 이마 위에 섬뜩한 붉은빛을 흘리는 혈석(血石)이 보였다. 

무리의 리더가 되면 보름 안에 자연적으로 생긴다는 일종의 마력을 가진 보석이었다. 그것으로 리더는 먼 거리에 있는 울프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무리를 제어하고, 자신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게 학계의 연구결과였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일시 공격이 멎었다. 나는 살짝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루카의 손을 잡으며 먼 거리에 있는 하이울프의 리더를 가리켰다. 

“보이지?” 

내가 가리킨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는 이마 위의 혈석을 깨버려야 완전히 죽일 수 있다고 들었어.” 

루카의 손을 잡은 내 손에서 진땀이 흘렀다. 일시 고요했던 늑대의 무리는 다시 과격하게 목책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목책의 틈을 막은 진흙들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목책이 부서지면 곧바로 가서 리더부터 죽여야 해. 내가 갈 테니 엄호해줘. 알았지?” 

일시 내 손을 잡은 루카의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마치 안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미처 루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어 오르며 목책의 일부분이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지금이야-! 루카!!” 

나는 루카의 손을 놓고 그대로 목책 아래로 뛰어내렸다. 

**오타, 비문 지적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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