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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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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RETURN (17) 

17.

꿈을 꿨다. 

행복한 꿈이었다. 

가족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고 난 훌륭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루카는 아직 살아서 나의 승진을 기뻐해 주었다. 어머니는 파티 준비를 한다고 정신이 없었고,

 세린은 약혼자도 초대해야겠다고 서둘러 서신을 보냈다.

 지그 녀석은 분명, 자기보다 내가 먼저 승진한 것을 알면 배가 아파 음식도 제대로 못 먹을 텐데 말이다. 

손님이 왔다는 하녀의 부름에 난 지그 녀석이 왔으려니…하는 생각에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이상하게 사방이 어두워졌다. 

“루카?” 

난 불안해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루카를 불렀다. 

“세린? 모두 어딨어?” 

현관에는 어떤 남자가 붉은 꽃을 가득 들고 서 있었다. 주위가 너무 어두운 탓에 그가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거기 누구? 루카?” 

내 부름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꽃잎이 바닥으로 산산이 흩어져 내렸다.

 창백한 플래티나 블론드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짙푸른 청록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 

거짓말…. 거짓말이다!! 

지독하게 잔인한 거짓말…….

그의 발아래에는 잔인하게 짓밟힌 세린과 가족들의 시체가 쓰레기처럼 널려 있었다. 

꿈인 줄 알고 있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정신 ……십시오!! 형님!!] 

[형님…!! 아…스…!!]

드문드문 끊겨서 들리는 소리에 난 천천히 늪 속에서 끌어올려졌다. 

바닥이 없는 늪의 진득한 괴물이 내 전신을 감싸고 있다가 루카가 부르는 소리에 의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루카……’ 

루카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은 밖으로 구출되었지만, 내

 발목은 아직도 바닥이 없는 늪 속에 잡혀 있었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는 루카의 얼굴은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굳어져 있었다.

 걱정과 분노로 얼룩진 흑청색 눈동자는 마치 금세라도 울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왜 저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손을 뻗어 저 미간에 잡힌 주름을 펴주고 싶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조차 제대로 인식되질 않았지만, 

루카의 얼굴을 보니 집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났다. 아마도 루카를 만난 후로 긴장감이 풀려 그대로 기절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제야 눈에 보이지 않던 가족들의 얼굴도 하나둘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언뜻 

새하얀 은색의 블론드를 본 듯도 싶었다. 

하지만, 루카와는 달리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그들의 얼굴은 이내 흐릿한 잔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혼탁하고 끈적끈적한 부유물들을 가득 부어놓은 양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았다. 

나를 구해준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화살을 몇 대나 맞은 것 같은데 혹시 부상이 심각한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전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어지럽고 토기가 치밀었다.

 마치 내부의 장기가 하나하나 모두 탈장 되기라도 한 양 몸속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자 다시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 밀려왔다. 루카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다시 눈을 뜰 수는 없었다. 

*     *     *

문득 정신을 차린 건 창 밖에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새벽녘이었다. 

어둑한 방안엔 작은 촛불 두 개가 흔들리고 있었고, 캄캄한 밤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몸은 백만 년 동안 늪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건져진 것처럼 무거웠지만 머릿속만은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멍하니 창밖의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한참만에야 침대 옆에 엎드려 기절한 듯 잠이 든 루카를 발견했다. 

새카만 머리칼이 사르르 흘러내려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있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 스물넷의 마지막 모습처럼 건장하지는 않은 어깨가 오늘따라 한결 왜소해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들어 있는 루카의 모습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절대로 힘이 들어갈 것 같지 않은 팔을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관절에서 버석-하고 메마른 소리라도 날 것만 같았지만, 

루카를 제대로 자리에 눕히고 싶었다. 생각보다 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나는 미간을 구겼다.

 지칠 만큼 여러 번 시도해서야 겨우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렵사리 어깨를 부축해 올리자 루카의 늘어진 몸이 저항 없이 내게 기대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고작 이 정도 움직인 것 가지고 팔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루카를 침대 위로 들어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겨우 루카의 몸이 침대에 반쯤 걸쳐졌다 싶을 때, 갑자기 다소곳이 내리 감겨 있던 루카의 눈꺼풀이 번쩍 뜨여졌다. 

코앞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루카는 잠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루카의 모습이 귀여워 내가 슬며시 웃자,

 그제야 루카의 검푸른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올라와서 자라.” 

지독하게 잠겨있는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가자 루카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내게 기대어 축 늘어져 있던 루카의 무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금은 건조하게 느껴지는 크고 따스한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쌌다. 

“…일어난……겁니까…?” 

불안한 듯 흔들리는 흑청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얼마나 잤어?” 

눈이 오는 걸 보면 시간이 한참 지난 거 같아 묻자 루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아… 

나는 잠시 놀랐다. 

중간에 잠깐 잠깐씩 꿈인지 생신지 모르게 눈을 떴던 기억은 있지만,

 온전히 정신을 차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한 달이라니…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신에 힘이 없고 나른한 것만을 빼면 이제 잠들기 전처럼 통증이 느껴지는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루카의 조금 거친 손이 내 얼굴을 엄청나게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잘못 만지면 깨지는 유리잔을 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귓가를 힘겹게 더듬던 손이 이마 위로 올라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그 느낌이 간지러워 나는 무심코 웃어버렸지만, 루카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져 웃음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다시…… 잠들면 안 됩니다.” 

다짐하듯 루카는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다시… 그렇게 오랫동안…… 잠들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그게 소원이야?” 

예전에 말한 것이 기억나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루카는 그런 내 장난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을 해버렸다. 

“네. 소원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흔들림 없는 흑청색 눈동자가, 살짝 떨림을 담은 간청하는 듯한 목소리가 기묘하게도 심장 한구석을 자극해왔다.  

“응, 알았어. 소원이라면.” 

내가 선심이라도 쓰듯 우쭐한 표정으로 말하자 루카는 그제야 설핏 미소를 띠며 내 어깨에 쓰러지듯 기대왔다.

 아니, 내 어깨에 고개를 묻긴 했지만, 나를 끌어안은 상태가 되어서 오히려 기댄 것은 내 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다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마십시오. 위험한 곳엔 가지도 말고, 위험한 일도 하지 말고… 

언제까지나 제 눈앞에 계십시오. 그게 제 소원입니다.” 

어쩐지 처음보다는 구체적이 되어버린 소원이었지만 난 루카의 등을 끌어안은 채 ‘

그래.’라고 작게 속삭였다. 루카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잠들기 전의 부서질 것 같던 그 표정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지? 여기서 자.” 

내가 품에서 물러나며 옆자리를 두드리자 루카는 왠지 기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고 있던 겉옷과 바지를 벗고, 루카는 내 옆자리에 누웠다. 잠시 그런 루카를 마주보던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나는 따뜻함에 루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잘 자.” 

루카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해 주자 루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도 나에게 다가와 이마 위에 정중하게 입맞추었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루카의 입술은 멀어지지 않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눈꺼풀 위로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뭐야?” 

피식 웃으며 반문했지만, 루카는 멈추지 않고 다시 내 볼에 살짝 입맞춤했다. 

흑청색 눈동자에 반짝반짝 빛이 날 듯 예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뭐라고 항의하려던 

난 그 미소가 너무 예뻐 그만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좋은 꿈꾸십시오.” 

귓가에 떨어지는 목소리는 지독히도 감미로웠다. 잠겨있는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를 것 같이 근사했다.

루카의 짧은 인사에 나는 어쩐지 이번에는 정말로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눈을 감았다.

 잠이 들 무렵 루카의 팔이 다가와 내 허리를 휘감는 게 느껴졌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나는 그냥 쿡쿡 웃으며 내버려두었다. 

*     *     *

“마법사?” 

침대에 누워 뒹굴 거리고 있던 난 루카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루카는 열심히 껍질을 벗긴 오렌지를 내 앞에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의 손에 들린 오렌지를 덥석 받아먹으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루카는 지금 내게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지독한 행운이구나…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루카와 엘카르트가 

그 시간에 그곳으로 나를 찾으러 왔다는 게 단순한 행운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루카가 해준 말은 바로 ‘마법사’라는 답이었다. 

내가 말을 타고 밖으로 나갔다는 샤이엔의 말에 엘카르트와 루카는 곧장 나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서점에 처박혀 있을 때 엇갈린 건지 아니면 인형가게에 들어갔을 때 엇갈린 건지 어쨌든 두 사람은 나를 찾지 못했고 말이다.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인형가게 주인이었다

. 그녀는 밤이 되어 가게를 정리하고 나오다가 한적한 길모퉁이에 자신이 판 분홍 곰 인형이 떨어진 것을 본 것이다.

 꽃무늬 포장지는 특별히 주문제작한 것이라 그녀는 단번에 그것이 내가 사간 인형이란 걸 깨달았다고 한다.

 마침 그 즈음에는 루카와 엘카르트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아버지의 기사들까지 모두 동원해서 

나를 찾고 있던 중이었고 그래서 그녀의 증언을 들은 모양이었다. 

목격자는 없고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터라 엘카르트는 곧장 근위기사 중 한 사람을 보내 황궁 마법사를 데려오라고

 했고 불려온 마법사는 대지의 기억을 읽는 마법을 써서 내가 실려 간 마차의 모양을 알아냈다.

 그 뒤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성문에 기별을 넣어 그런 마차가 지나갔는지를 알아냈고, 

서문으로 저녁 무렵 그런 마차가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추격한 모양이었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기에 이미 지나간 마차를 찾기는 요원했다. 하지만 서문 쪽으로 나가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게 바로 내가 잡혀갔던 리프의 숲이었기에 그리로 향했고, 마법사는 여러가지 탐지마법으로 나를 찾아냈다. 

광범위한 지역을 탐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마법사가 거의 혼절할 지경이 되어서야 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정말 행운이라고 할 정도로 시간 맞춰 와주었고 말이다. 마법사의 놀라운 능력에 나는 새삼 감탄했다.

 대지의 기억을 읽는 마법도, 탐지마법도 3서클 이상의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확실히 황궁 마법사다운 능력이었다. 

“혹시 그 마법사 어떻게 생겼는지 봤어?” 

혹시나 내가 아는 마법사 중의 한 사람일까 싶어 루카에게 물었다. 

대지의 기억을 읽는 마법을 쓴 걸로 보아 어쩌면 에루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그냥 마법사같이 생겼습니다.” 

주저 없이 흘러나온 대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법사같이 생겼다는 게 대체 어떻게 생긴 거란 말인가……. 그

런 내 의문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던지 루카는 설명을 덧붙였다. 

“흰 수염이 길게 나고, 하얀 로브에 지팡이를 들고, 나이는 한 50대 정도로 보였습니다만…”

루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설핏 웃어버렸다. 루카가 생각하는 마법사의 이미지란 그런 것이었나 보다.

 왠지 어린아이들이 동화책을 읽고 상상할 법한 마법사의 이미지와 비슷하달까? 하

긴 아직 기사단에 들어가서 정식 마법사를 접하지 못한 루카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열일곱 소년답게 순진한 그 생각에 내가 웃고 있자 루카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루카의 손은 열심히 껍질을 벗긴 오렌지를 내 앞에 들이밀고 있는 채였다. 

웃음을 멈추고 내가 무심코 루카의 손에 들린 오렌지를 받아먹으려 다가간 참이었다.

 갑자기 내밀어졌던 손이 뒤로 확 빠졌다. 루카가 그럴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던 난 순간 뒤로 빠지는 오렌지를 따라가려다

 균형을 잃고 그대로 루카의 허벅지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윽…!” 

허벅지에 고스란히 얼굴을 박은 난 놀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루카도 당황한건지 흑청색 눈동자가

 조금 커져 있었다. 서서히 끌어 오르는 분노에 아마 내 얼굴이 일그러진 모양이었다.

 루카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는 게 보였다. 그런 루카의 손에 멍하니 들려있는 오렌지를 보며 나는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빠르게 손 채로 잡아 내 입속에 넣어버렸다. 

상큼한 향이 나는 과일을 덥석 깨물며 루카의 손가락도 깨물어버렸다. 

“아……!”

루카는 그런 나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 힘주어 깨물어버리려다가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 거의 힘을 빼버렸는데도 

생각보다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괜스레 미안해진 난 루카의 손가락을 놓아주며 이빨 자국이 난 곳을 혀로 살짝 핥아 주었다. 

“많이… 아프냐?” 

민망함에 조심스레 묻자 일순 루카의 눈빛이 번쩍 빛을 토해냈다.

 엉? 하는 순간 빙글 시야가 돌며 루카가 내 위로 덮쳐왔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윽…!!” 

연한 목덜미 살을 한 움큼 깨물며 루카는 세게 빨아들였다. 

“야, 뭐 하는……!!” 

마치 온몸의 피가 빨려나가는 기분이었다. 

한참만에야 루카는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루카의 눈빛은 평소보다 굉장히 짙어져 무서울 정도로 진지해 보였다. 

새카만 검은 원 안에 깊은 심해의 빛처럼 일렁이는 푸른빛은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깊고 끝이 없어 보였다.

 섬세하고 예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복. 숩. 니. 다.”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나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렸다.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대로 루카에게 내리쳤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린 베개에서 새하얀 깃털들이 

천천히 루카의 머리칼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일시 헛숨을 들이켰다. 

깃털과 솜밖에 들지 않은 것이라 전혀 아프진 않겠지만 예상외로 너무 세게 친 모양이었다. 

피렌호수에서 내가 물을 뿌렸을 때처럼 루카는 깃털 범벅이 되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내 눈에는 일시 흑청색 눈동자에서 화르륵 불길이 치솟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루카는 양손에 베개를 하나씩 잡았다. 

“헉…!! 바, 반칙이야-!!” 

내가 다급히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처절한 복수뿐이었다.

 나도 얼른 다른 베개를 잡고 대응했지만 금세 열세가 되어 루카의 공격 아래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손에 든 베개도 놓쳐버리고 어쩌다 보니 침대에 쓰러져 버린 난 반사적으로 팔을 올리며 눈을 꾹 감았다. 

분명 무자비한 점령군처럼 루카의 베개공격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상하게 다음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 것에 의아해 살짝 눈을 떠보니 어느새 베개를 내린 루카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청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예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독심술을 배운 것도 아닌데 마치 굉장히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뚱하니 쳐다보자 접시 위에 까놓은 오렌지를 하나 집어 루카가 내 입에 쑥 넣어주었다. 

입안에 들어오는 향긋한 과일 향이 너무 좋아서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아… 정말 서른 살의 내 이성은 어디로 가버린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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