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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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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RETURN (15) 

15.

바보같이도 나는 일말의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스물아홉의 그와 다른 엘카르트를 보며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도 모를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그 잔혹한 시간을 비켜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실망은 몇 배나 더 크게 다가와 나를 강타했다. 그리고 그것은 안일한 나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이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사방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마치 갈 곳을 잃은 내 마음과도 같은 빈곤함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나무그늘에 앉아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화창하던 하늘이 언제부터인가 뿌연 우윳빛으로 변해있음을 느끼고서야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도 없는 벌판에 서서 나는 한참을 양쪽 끝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달려온 터라 어느 쪽이 집으로 가는 

길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난 다시 말에 올라 아무 쪽으로나 방향을 잡았다

. 어쨌든 가다보면 끝에는 무언가 있기는 있을 터였다. 

도착한 곳은 마을이었다. 집과는 반대방향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편해지는 것 같았다.

 펍에 들어가 흑맥주라도 한 잔 마시고 갈까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돌렸다.

고급스러운 서점입구로 들어서자 외 알 안경을 쓴 주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이전에 내가 비싼 마법서를 사간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책은 들어왔습니까?” 

이전에 왔을 때 부탁해 놓은 마법서들에 대해 묻자 주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날 안쪽 테이블로 이끌었다.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려니 고급스러운 검은 가죽으로 된 책 한 권과 낡은 듯한 붉은 가죽으로 된 

책 한 권을 들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한 권은 전에 본 마법입문서의 뒤 권이었고

, 붉은 가죽 책은 새 책은 아니지만 시중에는 나오지 않는 희귀본을 우연찮게 구했다는 설명이었다. 

잠시 훑어본 나는 두 권 다 값을 지불했다.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혼자서 마법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는 여러 명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다양한 견해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훑어보던 붉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려던 순간이었다. 

[나의 가장 존경하는 대선배이자 스승이신 헤스티안님께 이 책을 바친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천둥이라도 친 듯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헤스티안. 나는 이 이름에 대해 좀 더 빨리 궁금해 했어야 했다. 

[말해라. 그건 어디에 숨겼지?] 

[헤스티안의 돌말이다. 헤스티안의 돌!]

죽기 전에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순간을 잊어버리려 했던 모양이다. 처음 열여덟의 

나로 눈을 뜨고서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다시 서른 살의 나로 돌아가 있는 꿈. 가족들은 모두 죽어있고, 나는 여전히 무력한 채 강간당해 쓰러져 있는 꿈.

 영원히 죽지 않는 저주에 걸려 잡을 수 없는 꿈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 생각하면서도 그 밤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두렵고 두려운 그 기억이 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져주길 바랐다. 

그렇기에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가족을 반역으로 몬 원인이 되는 물건인데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전대 마법사들을 기록해 놓은 인명록 같은 건 없을까요?” 

내 질문에 잠시 책장을 뒤적이던 서점 주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민하던 난 주인에게 구입한 책을 읽고 가도 괜찮은지 물었고, 

주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점 안엔 별로 손님이 많지 않았기에 구석진 소파에 앉아 나는 붉은 표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집에 가져가서 읽으려면 태자가 없는 시간을 골라야 했고,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내 인내심이 남아있질 않았다. 

책은 별로 두껍지 않았다. 초반엔 저자가 생각하는 마나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는데, 

전에 읽었던 책과는 달리 마나는 시전자의 ‘절대적인 바람’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상엔 인간이 사용하는 복잡한 마법식과 시동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마법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법이라고 되어 있었다. 

드래곤이라… 

사실 좀 허무맹랑한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고대사에는 드래곤이 있었다는 등의 언급이 있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의 것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고대사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 적당한 과장과 더불어 모든 것을 상징적, 신화적으로 기록해 놓기 마련이었다. 

저자는 또 여러 가지 예를 들어놓았는데, 간혹 자신의 원래 힘보다 초월적인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의 얘기였다.

 하긴, 아이를 안고 가던 여인이 마차에 치여 아이가 마차 밑에 깔렸는데 그걸 본 여인이 벌떡 일어나 

마차를 들어올리고 아이를 구했다는 얘기는 나도 들어본 적 있는 얘기였다. 

저자는 그것이 단순한 잠재능력의 발현이 아닌 ‘절대적인 바람’에 의한 마법의 사용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은 누구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평생 그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자도 있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적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고 있기에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며, 

자신이 가진 힘의 만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는 자가 태반이라는 것이 이 책을 지은 마법사의 의견이었다. 

반쯤은 수긍이 가기도 하고, 반쯤은 아닌 것 같기도 한 심정으로 나는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실습파트의 첫 번째 장을 접하며 나는 잠깐 멍해졌다. 

그가 첫 실습으로 적어놓은 마법은 4서클의 고위 마법사나 쓸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이었다. 

마법사는 모든 마법을 차근차근 배울 필요가 전혀 없으며 자신이 배울 수 있는 마법이 있고, 없

는 마법이 있을 거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모든 공부가 그렇듯 적성이란 게 마법에도 적용된다는 얘기였다. 

자신은 1서클의 파이어 볼은 사용할 수 없는 대신 4서클의 공간 이동과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었다. 

왠지 점점 현실성 떨어지는 내용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나는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마법식이 고대어로 적혀 있었다. 

하급 마법과는 달리 상위마법으로 갈수록 고대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어 부분은 내가 잘 아는 것이라 다행이기도 했고 말이다. 

다른 체계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이런 복잡한 마법식이 전혀 필요 없겠지만 저자는 자신 또한 인간의 한계에 얽매어

 있는 보통 사람에 불과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설명은 난해하지 않고,

 마법식의 근본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책에 적힌 대로 그것을 머릿속에서 형상화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걸려 겨우 마법식이 완성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시동어를 외웠다. 

“이동.” 

내가 생각한 장소는 서점 창문으로 보이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마침 길에는 사람도 없는 터라 골목길로 텔레포트하면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만에 하나 성공한다 하더라도 먼 거리를 이동할 능력도 없을 테고 말이다. 

‘…….’ 

잠시 기다리던 난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느끼고 피식 웃어버렸다. 

반쯤 장난삼아 해 본 것이긴 하지만 아마도 마법을 익히는 다른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1서클도 못 하는 자가 4서클이라니… 아무리 저자가 자신은 그랬다고 써 놓긴 했지만 그가 그렇다고 

2서클의 마법도 못하고 3서클의 마법도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는 불 속성 마법이 맞지 않아 1서클의 파이어 볼을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긴, 대지의 마법사 에루안은 대지의 마법만을 펼친 걸 보면 그 또한 비슷했을 것이다. 

개인에 따라 적성에 맞는 속성의 마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마법이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1서클의 모든 마법을 배우고 난 후 2서클의 마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는 것도 사실일 테고 말이다. 

책장을 덮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책을 끝까지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어느새 창밖은 눈부신 황혼이 내려앉고 있었다.

 겨우 공간이동 마법 하나를 읽어보고 실험해 본 것뿐이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즐겨 읽던 영웅소설을 두 권 더 산 뒤 책들은 표지가 보이지 않게 잘 포장해서

 내일 중으로 배달해 달라고 서점주인에게 부탁했다.

 물론, 지금 책을 들고 가면 편하겠지만 내가 직접 책을 들고 간다면 엘카르트의 주목을 받게 되기 십상일 것이다. 

말을 찾으려다 잠시 고민한 난 좀  이따 찾으러 오겠다고 

한 뒤 다시 거리로 나섰다. 아무래도 이대로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려니 

오늘 외출의 목적에 대해 엘카르트에게 추궁당할 것이 뻔했다.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나부터 찾는 엘카르트니… 

오늘이라고 그냥 넘어갔을 리가 없었다. 루카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왔고… 걱정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엘카르트 때문에 온통 정신이 없는 터라 세린에게도 너무 소홀하게 대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루카와 나와는 나이 차가 좀 있는 지라 소외감 비슷한 것을 느끼는 세린인데 엘카르트가 옆에 있다보니

 평소처럼 옆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게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태자에 대한 환상은 깨진 것 같아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 인간 같지 않은 외모야 세린도 보고 첫눈에 반했을 정도지만, 

며칠간 보다보니 그가 자신의 생각처럼 달콤한 황자님이 아니란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세린이 자주 가는 단골 인형 가게를 기억해 내고 난 빙긋이 미소를 띠었다.

 세린은 아니라고 하지만, 열셋의 나이에도 아직 인형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물다섯의 세린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잘 때면 껴안고 자는 아끼는 인형들이 있었다.

 잠들기 전에 인형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잘 자라고 인사까지 하는 것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내게 세린이 좋아할 만한 인형을 고르는 것은 정말 식은 죽 먹기의 일이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인형가게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새 것 같은 모습으로 고급스러운 간판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기억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젊은… 겨우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가게 주인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서른 살의 나야 물론 이곳에 와 본 기억이 없지만, 어린 시절에는 세린과 함께 종종 와 봤던 곳이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게주인의 이미지는 한 삼십 대 중반쯤 되는 온화한 부인이었던 

것 같은데 현실은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아

마도,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것과 서른 살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내가 보는 것에서 오는 차이인 모양이었다. 

“세린느양 선물을 사러 오셨나요?” 

단골인 탓에 주인은 세린의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빙긋이 미소를 띠며 세린이 좋아할 만한 인형들이 모인 진열장으로 날 안내했다. 

“그러고 보니, 세린느양의 생일이 얼마 안 남았네요.” 

스치듯 중얼거린 여인의 말에 난 순간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정말 세린의 생일이 보름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난 까맣게 잊고 있었고 말이다. 

내가 잠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여인은 상인 특유의 감으로 ‘호호’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모르셨나보네.’라고 중얼거렸다. 나쁜 성격인 것은 아니지만, 

약간 짓궂은 성격인 듯했다. 서른 살의 나로서도 묘하게 대하기가 어려운 타입이었다. 마치… 칼리아처럼. 

진열장을 빠르게 훑어본 나는 익숙한 곰 모양의 분홍색 인형을 발견하고 바로 마음을 정했다.

 당연히 그 인형은 세린이 밤마다 인사를 하는 아끼는 인형 중의 하나였으며,

 아직 세린의 인형리스트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어머, 세린느양의 취향을 정말 잘 아시네요.’라고 말하며 여인은 꽃무늬 종이에 인형을 포장해 주었다.

 어쩐지 칼리아가 자꾸 생각나는 느낌에 나는 여인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황급히 가게를 나왔다. 

샤이엔을 만났을 때는 애써 덮어놓고 있던 궁금증이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칼리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나면 그 앞에서는 차게 웃고, 뒤돌아서서는 엄청나게 단 음식들을 마구 먹어치우던 그녀의 버릇은 여전할까?

 물론, 여전…이라는 말에는 좀 어폐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저기, 길 좀 물읍시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지팡이를 짚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자라스 상점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자라스 상점이라면 좀 찾기가 어려운 구역이었다.

 지름길로 가면 빠르긴 한데, 그 길은 대로변에서는 벗어난 길이라 초보자가 가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제가 모셔다 드리죠.” 

그리 먼 거리는 아니기에 난 노파를 보며 앞장섰다. 

“허허, 고맙소. 젊은이.” 

노파는 뜻밖이라는 듯 나를 보며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가 노파를 이끌고 인적이 드문 지름길 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퍽-!!’하는 소리와 엄청난 통증에 뒤를 돌아보니 노파의 구부정하던 허리는 어느새 펴져 있었고 

내 머리를 강타한 것인 듯 지팡이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노인의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 머물러 있었다. ‘당했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대로 의식이 흐려졌다. 

*     *     *

나는 한참이나 눈앞의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려고 애썼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그것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구토가 일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그것을 보고서야 결국 그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더러운 나무 바닥 위로 흔들리는 것은 음습한 촛불의 그림자였다.

 그 위로 사내들의 두런두런하는 나직한 목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뒤통수에서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의 냄새에 비릿한 혈향이 섞인 것을 보아 아마도 피가 난 듯했지만,

 반사적으로 그것을 만져보려던 손은 뒤로 뒤틀려져 단단히 묶여 있었다. 

발목도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강하게 묶여 있어 온몸이 저릿했다. 시야가 어질어질하고, 

머리를 맞은 탓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사흘은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는 노파에게 길 안내를 하다가 잡혀 온 것 같았다. 노파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노파는 마치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길 가던 사람을 아무나 잡아서 납치를 했다 기 보다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대충 차려입고 나왔다고 해도 역시나 귀족의 옷차림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부유한 상인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뺏으려 했다면 기절시킨 후 돈 주머니만 빼 가면 될 일이었다.

 한데, 지금 이렇게 나를 묶어서 이상한 곳에 데려다 놓은 것을 보면 이들의 목적이 돈만은 아니라는 결론이 난다.

 그건 별로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냉철하게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이곳은 무슨 버려진 폐가 같아 보이는 낡은 방이었다. 얼기설기 판자로 막아 놓은 창틈으로 이미 검게 변한 밤하늘이 보였다.

 곧장 하늘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층이라기보다는 2, 3층 정도 되는 곳인 것 같았다. 

백 번 생각해도 나를 납치할 필요가 있을만한 곳은 후작부인 측에 관계된 세력 정도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화살에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방심한 탓이었을까…? 이렇게 곧바로 직접적인 공격을 해 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것도 곧장 죽이는 게 아니라 납치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통 때문인지 머릿속이 혼탁해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삐걱-하는 낡은 경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물론 내 쪽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위치였지만 말이다. 

일단은 깨어나지 않은 척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방으로 들어온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 안 깼나?” 

방안에서 얘기를 나누던 사내들은 그 질문에 건성으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듯 부산한 소리들을 냈다.

 아마도 새로 들어온 자가 두목격인 모양이었다. 

두목의 목소리는 일시 낯익은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사내의 목소리가 다 그렇듯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자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그

런 생각에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부분에 강렬한 통증이 작열했다 

“큭-!!” 

나는 반사적으로 신음성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그런 내 눈 앞에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자의 얼굴이 위치해 있었다. 퇴색한 회갈색의 눈동자가 내 눈을 보고 싱긋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이구나. 예쁜아.” 

남자의 한쪽 팔은 팔꿈치 아래에서 뭉텅 사라진 듯 긴 소매 아래쪽은 부피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의 다른 한 손이 경악으로 굳어진 내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네 동생은 잘 있겠지? 이 팔에 대한 복수는 충분히 해 줄 테니 마음껏 기대해도 좋다고 전해라.” 

‘아아, 그러고 보니 너는 이제 전해 줄 수가 없겠군.’

이라고 말하며 남자는 클클- 질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드래곤의 푸른 발톱’의 단장이었다. 

일시… 분노가 머릿속에 치솟았다. 루카가 그자를 죽이려 했을 때 말린 것이 잘못이었던 걸까? 

설마 이자가 내가 누구란 걸 알면서도 이런 짓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툭 중얼거렸다. 

“뭐… 의뢰인 측에서야 바로 죽이라고 했지만, 좀 즐기고 죽인다고 해도 나쁠 건 없겠지.” 

단장의 말을 듣고 난 잠시 멍해졌다. 

의뢰? 

그럼, 이들이 독자적으로 계획한 일이 아니란 얘긴데… 그렇다면 결국 후작부인 측에서 꾸민 일이란 걸까? 

그러나 내가 제대로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남자의 거친 손이 내 목덜미의 옷을 움켜쥐고 날 질질 끌었다.

 일시 숨이 막혀 컥컥거리던 난 더러운 낡은 시트가 덮인 침대 위에 던져지듯 내팽개쳐졌다.

 정신없이 숨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몸 위로 타고 올라오며 나를 뒤집었다. 

“발목의 줄만 풀어라. 이대로는 다리도 안 벌려지겠군.” 

내 위에 타고 있는 남자는 단장인 모양이었다. 단장의 명에 누군가 내 발목의 줄을 풀어내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더 묵직해진 무게감과 함께 단장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죽기 전에 천국을 경험하게 해주지. 뭐, 내 위에서 복상사로 죽어도 좋고 말이다. 큭큭큭-.” 

단장의 비릿한 농담에 주위의 사내들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내 상의 튜닉과 셔츠를 거칠게 걷어올리고 단장은 드러난 허리를 게걸스럽게 주물럭거렸다. 

바지는 제대로 벗기기가 귀찮았던지 칼로 뜯어내며 쫙, 쫙 찢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흠칫흠칫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흐흐… 귀족이라 그런가? 속살이 아주 곱군.” 

단장은 내 엉덩이의 맨살을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무어라도 대책을 생각해야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생각을 해낼 수가 없었다. 

이미 한 번 당한 적 있는 비슷한 상황 탓에 이들이 무엇을 하려는 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고 온몸은 덜덜 떨렸다. 너무도 두려워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뒤집혀 손이 등 뒤로 묶인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반항이 될 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한 사내가 내 머리통까지 짓누르고 있는 상태라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말이다. 

정말… 여기서 당하게 되는 걸까? 

농락한 뒤에는 죽인다고 했으니 그것을 걱정해야 했지만, 

나는 죽기보다 당하는 게 더 싫었다

 엘카르트가 내 몸을 유린했을 때처럼 영혼의 밑바닥까지 강간당하고 더럽혀지는 그 느낌을 절대로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원망이 가슴속을 휘몰아쳤다. 

고작… 고작 돌아와서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하려고 십이 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 온 것일까? 

말도 안 됐다. 아무리 운명이 나를 농락한다고 해도 절대로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치 기적처럼 누군가 저 문을 열고 나를 구하러 와준다면, 

그것이 설사 엘카르트라 하더라도 그에게 고마움을 가질 것 같았다. 아니… 고마움뿐이겠는가! 

어쩌면 그가 나에게 한 짓마저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순된 감정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랬다. 

“흐으~ 좁군. 처년가?” 

비릿한 웃음과 함께 단장의 손가락이 내 엉덩이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끝인 걸까? 곧 저 손가락처럼 혐오스럽고 끔찍한 사내들의 물건이 나를 꿰뚫을 테고

 엘카르트에게 당했을 때처럼 끔찍한 격통이 휘몰아칠 것이다. 

하… 자괴감이 치솟았다. 결국,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도 나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사내들의 손에 잡혀 범해지고, 짓밟히고 있었다. 

마법을 익히고, 힘을 가지겠다고 했지만 결국 난 이렇게 무력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아까 서점에서 보았던 4서클의 마법 ‘텔레포트’에 대한 구절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텔레포트.

어떤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 고위 서클이 되면 대륙 간의 이동까지도 가능함. 

내게는 지금 그런 마법이 필요했다. 나를 이곳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켜줄 힘. 이 순간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어떤 것. 

심장이 터질 듯 박동했다. 나는 절박하게 책 속에 적혀있던 마법식의 형태와 문장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다행히 한 번 시도해 봤던 것이라 대충은 그 형태가 기억나는 듯했다.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만약 잘못해서 틀린 마법식을 실행시키면 그 반작용으로 시전자에게 피해가 올 수도 있었지만

 이 순간에는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실패하든 아니든 시도해 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한순간 그 형식들이 머릿속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나는 시동어를 외웠다. 

[이동.]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폭풍과도 같은 거대한 무언가가 몸속을 휩쓸고 지나가며 몸 안의 

모든 생기를 강탈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광활한 바다, 성난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거침없는 외부의 힘에 휩쓸려갔다. 그 두려울 만큼의 힘. 나로서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너무나 강대해서 나는 본능적으로 굉장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한 순간, 그 모든 것이 환상처럼 정지하며 완전히 감각을 잃어버린 내 몸을 차가운 공간 속에 내동댕이쳤다. 

“큭-!!” 

마치 심해의 저 밑바닥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공기 중에 나온 것처럼 온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전신의 뼈가 모두 부서져버린 듯 늘어지는 몸의 감각은 죽을 듯한 무기력함을 선사했다. 

누군가에게 사흘 밤낮으로 맞기라도 한 듯 전신에 통증과도 닮은 복합적인 감각이 휘몰아쳤다.

그 감각이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나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누워있는 건지, 거꾸로 있는 건지조차 구분되지 않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는 느낌에 나는 죽을 듯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노력했다. 

쿨럭-. 

화끈한 통증과 함께 식도를 타고 비릿한 것이 솟아올랐다.

 울컥 솟아오르는 그것을 뱉어내고 보니 어둠 속에서 검붉은 그것이 마치 벌어진 속살처럼 그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냈다. 

한참만에야 나는 그것이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게 허용되지 않은 지나친 마법의 사용으로 인해 받게 되는 반작용이던가….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성공했다는 것, 그곳을 벗어났다는 걸 인식한 순간 나는 아무래도 다 좋았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닥은 차갑고 축축했다. 시야는 흐릿했지만 캄캄한 밤하늘이 보였다.

 습한 나무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쓰러져 있는 곳은 숲 속이었다. 머지않은 곳에 웬 집 한 채가 서 있었는데 주변에 보이는 민가라곤 그것 하나뿐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이 열리며 불빛들이 튀어나왔다. 

그쪽으로 가서 도움을 청할까 생각하던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에 심장이 쿵- 하고 곤두박질쳐 내렸다. 

낮은 욕설들과 함께 당황한 사내들의 음성이 바람결에 흘러왔다. 

“어디로 간 거냐?! 얼른 찾아-!!” 

“젠장 할-!! 마법사였을 줄은…” 

방금 자신들이 본 게 고위마법사나 쓴다는 공간이동 마법이 맞느냐고 하며 사내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몸 상태가 좋지 못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격려하는 단장의 목소리도 들렸다

. 거기까지 듣고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가 이동한 거리는 고작 20미드(미터의 개념) 정도였던 거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제대로 일어나지지도 않는 몸을 끌고 한 발 한 발 기다시피 전진했다

. 팔이 뒤로 묶여 있는 터라 더 힘이 들었다. 몇 걸음을 가지 않아 또 울컥하고 핏물이 솟았다.

 지독한 현기증에 또다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여기서 잡힐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가까워졌는지 추적하는 자들의 풀잎 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귓가를 울렸다. 

식은땀이 전신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그 소리들이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내 눈에는 기적적으로 다른 사람이 보였다. 

그는 도끼 같아 보이는 무기를 들고 장승처럼 눈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제대로 올려다보지는 못했지만, 꽤나 거구의 사내인 듯했다. 어두운 밤이라 그런지,

 토혈이 너무 심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운이 나쁘다면 추적대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도와주십…시오…. 저를 슈트…가르트 백작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적이든 아니든 나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내 쪽을 보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조차 나는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고작 서 있는 게 전부였던 내 몸은 점차 소리 없이 무너져 갔다.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바

닥에 쓰러지기 직전 나는 그제야 겨우 남자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의 무언가를 보았다.

 남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도끼에서 툭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진득한 액체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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