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직도 둘이 투닥거린대요.”
“이안이랑 레토도 참 대단하네요. 아직도 그러고 있다니.”
“어쩌겠어요? 결국 넬이 선택해야 할 일인데.”
요즘 이안과 레토, 그리고 넬의 근황을 전해들은 카일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든 그 셋도 잘 지낸다고 하니 다행이다.
“아, 맞아! 축하해요, 카일!”
“축하해요!!”
네 명의 여인들이 대뜸 카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카일은 두 눈을 껌뻑거리다가 아하! 하고 탄성을 흘렸다.
“설마 조카 태어났다고 이러는 거예요?”
“그렇죠! 드디어 카일도 조카가 생긴 거잖아요!”
얼마 전 리어가 드디어 아빠가 되었다.
제갈소연을 닮은 굉장히 예쁜 여아라고 했던가.
혼인은 카일보다 더 일찍 했음에도 아이는 몇 년이나 늦게 가졌다.
덕분에 막내 포지션이던 헥터는 비로소 동생이 생겼다고 좋아라 했다던가.
“그게 그렇게 축하 받을 일인가요?”
카일이 그렇게 묻자 티샤와 엘가가 가장 먼저 나서서 그렇죠! 하고 운을 뗀다.
“아주버님이랑 형님께서 타니아랑 헥터를 얼마나 예뻐해주셨는데요.”
“티샤 말이 맞아요. 조카 사랑이 극진했던 분들이니 이제 카일이 조카 사랑을 보여줘야죠!”
“두 사람의 말에 동의. 에르도 큰아빠랑 고모를 굉장히 따르잖아.”
“요한도 그래요.”
같은 존 나센에 대한 애정은 모든 존 나센 사람들의 공통점.
특히나 리어와 레아는 애지중지하던 막내 동생의 아이들을 굉장히 사랑했다.
오죽하면 조카 때문에 아이를 안 보는 거냐고 남작부인이 잔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각 아이들의 엄마들이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세상 누구라도, 어떤 엄마라도 그런 시댁들은 좋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아이를 그리도 끔찍이 사랑해주는 이들이라면 당연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드디어 리어가 아이를 보았다.
당연히 여인들의 보답에 대한 의지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아주버님은 그렇다고 하고, 형님은요? 얼마 전에 또 건너가셨잖아요.”
“누님 딴에는 그냥저냥이라는데 아닌 것 같죠?”
“당연하죠. 여자 마음에 정말로 그냥저냥이면 절대 그렇게 안 만나러 가요.”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하고 엘가가 여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에 티샤도, 힐데도, 그리고 황녀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거 조만간 또 좋은 소식이 들리겠네요. 혹시 돌아오실 때 아예 짊어지고 오시는 거 아닐까, 그 생각이 들 정도예요.”
“나도 그래. 그 분이라면 어깨에 메고서 그냥 존 나센 순간이동 몇 번으로 해서 여기까지 오실 것 같아. 그리곤 우리 결혼해요! 라고 하실걸.”
호록-.
그리 말한 황녀가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신다.
원래라면 한창 제 딸에게 이리저리 시달리고 있어야 할 터인데.
오늘은 그런 에르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황녀였다.
왜냐하면, 오늘은 카일과 네 여자들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날.
자식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 맡기고 잠깐 쉬는 날.
그러니까 일종의 육아 치팅데이, 라고 보면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난 말이지, 성녀님이 너무 부러워.”
“이젠 성녀가 아니라니까요. 황녀님.”
“알아. 아는데, 이게 습관이 되어서. 이해해줘.”
카일이 뭐가 부럽다는 거냐고 슬쩍 말을 받는다.
그러자 황녀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르랑 요한이랑 너무 다르잖아. 만약 에르가 요한 같았다면 난 둘째도 생각했을 거야.”
“푸웁! 쿨럭, 쿨럭!!”
한창 차를 마시고 있던 카일이 사례가 들린 듯 마구 쿨럭거린다.
그러더니 이건 갑자기 무슨 무시무시한 소리냐는 눈빛을 한다.
둘째라니. 지금도 아이가 넷이어서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서 누구 하나가 둘째라도 낳는 순간 너도 나도 그러겠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넷이었던 애들이 갑자기 여덟이 되는 마법이 펼쳐질 터.
‘존 나센을 두 배로 감당하라고? 그건 절대 못해. 진짜 죽어도 못해.’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점. 부모님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었다는 거다.
리어, 레아, 그리고 카일 자신까지. 존 나센 셋을 낳고 또 길러낸 분들.
그 과정이 얼마나 대단하고 또 고된 일인지는 이번에 아주 제대로 깨달았다.
그나마 요한과 타니아가 얌전한 편이어서 버틸 수 있었다.
상상해보라. 만약 요한과 타니아도 에르와 같았다면.
헥터가 리토리오보다 존 나센 쪽 사상을 더 중하게 생각했다면.
카일 입장에선 리어와 레아 같은 아들딸이 넷이었다는 것이다.
“절대 안 됩니다. 모두 약속했잖아요.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그렇게 약속했죠. 그리고 당시에는 정말로 그 약속이 맞았다고 생각했고요.”
“으으. 말도 마요. 헥터 그 녀석, 아직도 힘없는 외교는 없다고 다니고 있어요. 그러더니 대뜸 기사들을 존 나센 분들처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자꾸 그러고 있다고요.”
제국에서 ‘무력’ 부분을 의미하는 대공가는 슈렐리츠 가문이다.
당연히 휘하 기사단은 황실 기사단에 버금가는 최고의 기사단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고.
한데 요즘 들어서 헥터의 난입으로 리토리오가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헥터인데, 육체는 이미 아이의 것을 뛰어넘었다.
그 아이가 ‘힘없는 외교는 없다!’ 하고 리토리오의 무력을 키워내려고 한다.
당연히 리토리오 대공인 엘가 입장에선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에르도 똑같아. 와아… 저번에 황실에서 항상 나가는 몬스터 토벌 있잖아. 거기서 혼자 트롤들 모가지 따서는 헤헤! 하고 웃는데 엄마인 내가 다 무서울 지경이었어.”
황녀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카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안 그래도 아이들 모두가 존 나센 본능과 존 나센 의지를 받아서 힘든데.
거기에 에르는 엄마의 기질까지 전부 물려받아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했다.
이건 뭐 농담 하나 안 보태고 존 나센의 피가 섞인 황녀 버전2 라고 해야 할 판.
이러니 그 황녀조차도 제 딸을 감당하기 굉장히 힘들어했다.
거기에 또 하필이면 에르가 한창 사고를 칠 나이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카일과 황녀, 둘 모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부럽다, 성녀님.”
“부러워요, 티샤.”
황녀와 엘가가 각각 힐데와 티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힐데와 티샤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손을 내젓는다.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에르랑 헥터에 비해서 조금 얌전하다 할 뿐이지, 타니아도 은근히 그렇다니까요? 저번에는 무게가 성에 안 찬다고 근육을 힘들게 하는 주술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걸 억지로 말렸다고요!”
육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주술은 자칫 악용될 수 있다.
해서 티샤는 그게 단련을 위한 것임에도 타니아를, 제 딸을 뜯어 말렸다.
다행히도 잘 따라주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큰일이 났을 수도 있다.
“요한은 또 어떻고요.”
이번에는 힐데의 차례. 정말 어지간해선 한숨을 내뱉지 않는 그녀임에도.
지금은 그것조차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자매님들이 요한더러 너무 듬직하고 또 상냥하다고 하는데. 물론 그렇죠. 그런데 가끔 얘가 갑자기 돌변할 때가 있어요. 갑자기 두 눈에 이상한 안광이 돌 때라고 해야 하나. 그럴 때면 봉이 끊어질 듯 원판을 더하고선 으아아아!! 하고 고함을 막 내질러요.”
“아. 그 이야기 들었어. 에르가 그 모습 보고 처음으로 겁을 먹었다고 했어.”
참고로 황녀의 딸, 에르는 힐데의 아들인 요한을 굉장히 잘 따랐다.
오죽하면 엄마보다 요한 오빠가 더 좋다는 말까지 하고 있을까.
한데 그 에르의 입에서 ‘요한 오빠 무섭다.’ 라는 평가가 나왔단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요한의 또 다른 모습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이거 진짜, 우리 애들 괜찮은 거겠죠?”
엘가가 운을 떼자 다른 여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카일을 바라본다.
“…미안합니다….”
아빠가 존 나센이라서 미안해. 남편이 존 나센이라서 미안해.
하지만 걱정은 마.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어떻게든 존 나센 의지를 제어할 수 있을 테니까.
본인도 그런 식으로 안에서 날뛰는 이 존 나센을 잘 추스르고 있지 않은가!
“아뇨, 카일. 사과할 건 없어요.”
“맞아. 오히려 카일이라서 이 정도에서 끝나는 거잖아.”
“장난이긴 하지만, 만약 헥터가 아주버님이나 형님을 닮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때는 리토리오 반파 아닐까요? 아니, 완파이려나?”
모두가 깔깔거리며 맞다고 맞장구를 친다.
그 사이에서 카일 또한 결국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아아… 시간 참, 금방이네요. 엊그제만 해도 처음 카일을 만났던 것 같은데.”
“저도 그래요. 아직도 눈에 선한 걸요. 카일이랑 같이 아카데미에 가던 게.”
“생각해보면 참 다행이었어요. 그 때 카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전 어찌 되었을까.”
“일단 성녀님은 허약한 몸 때문에 크게 고생 한 번 했을 거야.”
예전에는 워낙 허약해서 가벼운 운동조차 버거웠던 힐데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체력으로 압도할 수준이다.
그건 티샤나 엘가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건강함’ 수준을 넘어섰다.
지금은 거의 준 황녀 급으로 폭풍 성장했다고 해야 할까.
아, 참고로 황녀는 제국 10강의 리더 격에 오르고야 말았다.
“혹시 말이에요.”
카일이 슬그머니 입을 열자 여인들이 제 남편을 바라본다.
“저 만난 거. 저랑 같이 보낸 시간들.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는 걸 약속한 거. 혹시, 그것들 중에서 후회가 된다는 분은… 없겠죠?”
“헤에. 뭐에요. 그 자신감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자신감 봐. 카일. 정말로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혹시 있다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카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여인들의 대답.
덕분에 카일이 히익, 하고 헛숨을 들이마신다.
“호, 혹시 후회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진심으로 죄송….”
“있을 리가 없잖아요. 카일 형제님.”
힐데가 살그머니 옆으로 다가와선 카일의 손을 붙잡는다.
그러자 황녀가 카일의 뒤에서 그를 가볍게 끌어안는다.
“후회 안 해. 설령 해도, 그때로 돌아가면 같은 선택을 할 거야.”
티샤가 카일에게로 다가와선 무릎 위에 턱을 괸다.
“행복했어요. 그리고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엘가가 카일의 또 다른 손을 꼭 붙잡아준다.
“고마워요. 이렇게, 내 곁에. 우리 곁에 있어줘서.”
카일은 여인들의 말을 모두 가슴 속 깊이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