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315화 (315/318)

“왔느냐, 막내야.”

“예,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아내가 넷이 생겨도, 그 밑의 자식들이 또 여럿 생겨도.

여전히 카일은 존 나센 막내였다. 그리고 자신도 그걸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막내라는 말이 이제는 안도와 안정을 동시에 주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카일을 따라 간만에 존 나센을 방문한 티샤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따라서, 옆에 서있던 꼬마아이가 티샤를 똑같이 따라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서 오거라. 티샤. 그리고 타니아.”

존 나센 남작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는 배꼽 인사를 했던 꼬마아이를 품안으로 번쩍 안아든다.

“으음. 우리 타니아, 더 많이 먹어야겠다. 아직 너무 가벼워.”

“저 많이 먹고 있어요! 진짜 많이 먹어요, 할아버지!”

“그러느냐. 하지만 여전히 이 할애비에겐 너무 가볍구나.”

여전히 미소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존 나센 남작.

나이를 먹어도, 부모에서 조부모가 되어도, 그 험악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그를 봤다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바로 울음을 터트렸을 거다.

“헤헤! 저 운동도 많이 했어요! 엄마랑 같이! 이렇게! 히얍!”

하지만 타니아는 그런 할아버지가 굉장히 좋은 모양이다.

품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무언가 하는 몸짓을 하기까지 했다.

“둘은 가서 좀 쉬거라. 나는 우리 손녀랑 좀 있으련다.”

“그러세요. 아, 그렇다고 또 단련장으로 가지는 마시고요. 좀 같이 놀아주세요.”

“나도 그러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 오늘은 무슨 기구 만질 거예요?!”

이러는데 내가 어쩌냐. 라고 말하듯 존 나센 남작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겉보기에는 항상 공부만 하고, 책을 탐닉할 것 같은 학자형 스타일의 타니아.

하지만 그 안은 누가 존 나센의 피가 없다고 할까, 굉장히 활동적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티샤의 학문 능력에 카일의 행동 능력이 합쳐진 수준?

“어머. 우리 손녀는 할아버지만 보이고 이 할머니는 안 보이는 모양이네.”

“에? 아, 아니에요! 내, 내려주세요. 할아버지! 아니에요, 할머니!”

두 팔을 파닥거리며 존 나센 남작의 품에서 타니아가 바동거린다.

그러자 남작은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손녀를 내려주었다.

직후 타니아는 폴짝! 하고 날아올라서 마리아 남작 부인에게로 안겨들었다.

“할머니도 좋아요! 할아버지만 좋은 거 아니에요!”

“아이고. 우리 타니아. 그래야지. 이 할머니가 우리 타니아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저도요! 아, 할머니! 제가 저번에 약속했던 거! 다 했어요!”

타니아의 말에 남작부인이 오호! 하고 탄성을 흘린다.

이 할머니를 위해서 무언가 준비하겠다고 했었는데 이리 금방할 줄이야.

“이거 보세요! 히얍!”

품에 안겨있던 타니아가 갑자기 남작부인의 손을 붙잡는다.

그러자 분홍빛의 희미한 기운이 그 손에 감도는가 싶더니 곧 사라졌다.

“이게 뭘까, 우리 손녀?”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주술이에요! 제가 혼자 만들었어요!”

“어머나. 타니아가 혼자 만들었다고? 정말로?”

“네! 혼자서요! 엄마 도움도 안 받았어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핫! 하고!”

남작부인이 카일과 티샤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정말로 이걸 타니아 혼자서 했냐고 확인하듯이.

그에 부부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할머니는 정말 감동이구나. 이런 고마운 일까지 해주다니.”

“히히! 이제 봉 만지실 때 탄마 가루 말고 이걸로 하세요!”

“그래야겠구나. 사실 그 하얀 가루가 영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되었네.”

타니아가 다행이라고 하자 남작부인이 손녀의 볼을 만지작거린다.

그리곤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눈웃음을 짓는다.

“아이고, 우리 예쁜 것! 할머니랑 할아버지 생각해서 벌써부터 이런 것까지 준비하고!”

“좋으시면 다행이에요! 걱정했는데!”

“좋고말고. 다 좋단다. 우리 손녀가 뭘 준비하든. 그냥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로도 다 좋단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자 존 나센 남작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형님이랑 누님은요.”

티샤와 함께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카일.

그러다가 응당 보여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음에 질문을 던진다.

“네 형은 며칠 전에 북해로 갔단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시기군요.”

매년 돌아오는 존 나센의 북해 수영.

중요하면서 또 은근히 위험하기에 숙련된 이들이 무조건 따라붙는다.

원래는 존 나센 남작이 매년 갔었으나 요즘은 리어가 대신 가고 있다.

차기 존 나센 남작이니 이제 슬슬 업무를 분담하고 있는 모양.

“그런데, 설마 형수도 데리고 갔어요?”

“그렇지 않겠니? 네 형 성격에 가만히 둘 리가 없잖니. 가서 몸이나 한 번 담그라고 할 텐데. 에휴. 손주 좀 보게 해달라니까 제 아내 단련시키는 거에 푹 빠져서.”

남작부인이 머리가 다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누른다.

아닌 게 아니라, 막내 내외들은 벌써 귀여운 손주들을 봤는데.

그보다 먼저 혼인을 한 리어 내외는 아직도 소식이 없다.

둘이 사이가 좋지 않으냐? 그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좋다.

문제는 이 둘의 사이가 워낙 좋아서,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

덤으로 리어는 제 아내의 단련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고 말이다.

“뭐, 그거야 형님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않습니까. 누님은요?”

“네 누나라면 지금쯤 다른 아가한테 가있을 거다.”

“다른 아가라면… 아, 설마 지금 헥터한테 갔으려나요?”

“그럴 거다. 조카 예쁘다고 어찌나 그러는지. 거기에 또 헥터는 한창 아가일 때잖니.”

남작부인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일곱 살이 된 요한이나 여섯 살의 에르, 다섯 살의 타니아와는 다르게.

헥터는 이제 세 살이 되었으니 한창 귀여울 때는 맞았다.

누구는 미운 세 살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녀석은 아니었다.

*

“고모.”

“아이구! 이젠 말도 잘 하네. 우리 헥터 천재 아니야, 올케?”

“에이. 세 살이면 다들 말은 곧잘 해요. 오히려 전 헥터가 늦은 건 아닐까 걱정하는데요.”

“조기 교육 너무 세게 할 필요는 없어. 알아서 잘 할 거야!”

레아가 깔깔거리며 안겨있던 남자아이를 위로 번쩍 들어준다.

그러자 헥터다 히야앙! 하고 웃으면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며 레아도 즐거워서 마구 웃다가 아! 하고 탄식을 흘린다.

“어. 미안. 혹시 너무 위험한 짓이었나?”

“전혀요. 오히려 카일보다는 나으세요. 그 사람은 한 손으로 헥터를 하도 들어줘서.”

“한 손은 위험하지. 아무리 우리 헥터가 존 나센의 피를 받았다지만 아가 때는 조심해야 해!”

그러자 엘가가 아하하! 하고 난감한 웃음을 흘리고 만다.

아가라. 그 세 살짜리 아가가 벌써 운동을 하고 있는데요.

심지어 얼마 전에는 제 아빠 따라서 봉까지 다루고 있던데.

한쪽은 리토리오의 피가 흘러도 다른 한쪽은 존 나센의 피가 흘러서 그런가.

벌써부터 무지막지한 존 나센의 낌새가 슬슬 느껴지는 헥터였다.

“카일이랑 티샤는 타니아 데리고 우리집 갔다며.”

“네. 저도 가고 싶긴 한데, 아시잖아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는 거.”

대공가의 후계자였다면 또 모를까. 이제는 리토리오 대공이 된 엘가다.

제국에 단 셋이 있는 대공이다. 일단 움직이면 주변 일대가 아주 난리가 난다.

황제와 그 후계자를 빼면 그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아니던가.

“우리 올케 심심하겠네. 오라버니는 한창 집안일로 바쁘니 나라도 이렇게 계속 와줄게.”

“감사드려요. 이렇게 형님이 와주시니 시댁 분들이랑 계속 닿아있는 것 같아 안심이에요.”

웃으면서 그리 말하던 엘가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는다.

“그러고 보니 카일한테 들었어요.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릴 것도 같다던데요.”

“뭐야. 카일이 벌써 다 말했어? 내가 직접 말해주려고 했는데.”

“축하드려요. 그리고 엄청 궁금하네요. 반려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말해줘?”

레아의 말에 엘가가 네! 하고 앞으로 살짝 다가온다.

남의 연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법이니까.

“첫 만남은 살짝 그랬었지? 저번에 사절단으로 갔었을 때 운동 방법 좀 보여주다가 일이 좀 터졌거든. 난 솔직히 살살 한다고 한 건데 기둥이 그렇게 쑥! 하고 뽑힐 줄이야.”

“그래서요? 그 다음에는요.”

“다른 놈들은 다 도망가는데 그 사람만 달려들어서 무너지는 기둥을 받치려고 하더라고. 정작 그들 중에선 가장 약해보였는데 말이야. 비록 강하지는 않지만 용기는 있던 거지.”

그 때부터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 그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고.

이후로 한 번 더 그쪽 대륙을 방문했을 때 좀 더 강해진 걸 보고 진심으로 즐거웠다고.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고, 레아는 그렇게 말했다.

툭툭!―

이 때, 옆에 있던 헥터가 슬그머니 레아의 가랑이를 잡아당긴다.

“아, 왜 그러니. 우리 조카?”

“알려주세요.”

“응? 뭐를? 고모한테 뭐가 알고 싶은 걸까?”

자애롭게 웃으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는 레아.

그런데 다음 돌아온 헥터의 말은, 굉장히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어떻게 때려 부순 거예요?”

“…으응?”

“아빠한테 들었어요. 고모가, 아카데미를 부순 적이 있다고.”

“어, 어머. 카일이. 네 아빠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궁금해요. 어떻게 하셨어요? 알려주세요.”

두 눈을 반짝거리며 계속 알고 싶다 하는 헥터.

덕분에 레아는 난처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우리 조카. 우리 헥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

그러자 헥터가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먹을 강하게 틀어쥔다.

“힘없는 외교는 없대요. 그래서 강해져야 해요.”

“어머. 얘 좀 봐.”

“헥터!”

까르르 웃는 레아와 놀라서 헥터를 붙잡는 엘가.

분명 아이 앞에서 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당최 이 아이가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놔둬, 올케. 우리 조카가 어디 사람인지 잊었어? 반은 리토리오. 반은 존 나센. 그러니까 이러지. 힘없는 외교는 없다. 이야, 누가 두 집안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 아니랄까 둘 모두를 꿰차려고 하는 것 봐!”

다시 한 번 헥터를 번쩍 안은 채 레아가 또 다시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엘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