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312화 (312/318)

“부인.”

“음… 이 복장은 너무 과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괜히 무섭게 생각할 수도 있고.”

“부인?”

“이건 어때요. 차라리 이렇게 걸치고 가면 덩치는 좀 커보여도 위압적인 분위기는 얼추 가려줄 거예요. 저번에 큰 애가 동쪽으로 갈 때도 이러고 갔었는데.”

“그, 부인.”

존 나센 남작이 몇 번이나 불러도 남작부인은 제 할 일에만 몰두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 듯 하다.

잠시 남작부인을 바라보던 존 나센 남작은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럴 법도 하다. 저렇게 정신이 완전히 다른 곳에 가있을 만하다.

당장 남작 본인도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이 들고 있으니.

‘막내의 결혼식. 제국 황녀와의 혼인.’

예전에는 딱히 자식들이 결혼을 해도 그냥 그럴 것 같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건 그저 아무 것도 모르던 과거 자신의 헛된 생각이었다.

자식이 결혼을 한다고 하니, 이리 마음이 뒤숭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과거 자신의 부모 또한 알게 모르게 이런 감정이었을까.

존 나센 남작은 그리 생각하며 한창 자신에게 옷을 입히던 남작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조금 전보다는 나은 것 같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하지만 그걸 솔직히 말했다간 바로 바가지를 엄청 긁힐 것이다.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자신이라도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그런가요? 후후후. 다행이네요. 자, 어떤가요!”

남작부인이 존 나센 남작을 거울 앞으로 들이민다.

생각 외로 그녀의 패션 감각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검은 정장에 그 뒤로 걸친 하얀색 케이프가 썩 잘 어울린다.

원래부터 워낙 덩치가 커서 과하게 위압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그걸 최대한 화려하고 좋은 원단의 옷으로 가려내는 데에 성공했다.

똑똑-.

“아버지, 어머니. 준비 다 되었습니다.”

“이쪽도 다 되었단다, 리어.”

그 말과 함께 존 나센 남작 내외가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선다.

그곳에는 이미 예복을 갖춰 입은 리어와 레아. 그리고….

“아버님, 어머님.”

역시나 이쪽 예복으로 갈아입은 제갈소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저쪽 세상에 있을 때 그쪽에서의 방법으로 혼인을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남작부인이 ‘그러면 여기서도 결혼식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하고 웃으면서 말해준 후론 두 번째 결혼식도 준비 중이었고 말이다.

“이제 레아, 너만 좋은 남자를 만나면 되겠구나.”

“그게 쉽냐고요. 그래도 카일이나 오라버니는 다 좋은 여자들을 만난 것 같은데. 어떻게 제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냐고! 오라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도 그 동쪽으로 가볼까요?!”

“아서라. 가봤는데 영 마음에 드는 놈이 없더구나. 검선, 그 영감님만 생각하고 기대했던 내가 조금은 한심스러울 정도로.”

리어의 그 말에 제갈소연은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저게 오만함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건 아직도 무섭다.

분명 정말 선하고, 든든하며, 무엇보다 마음이 확 가는사내인데.

가끔은 강호에서 보여주던 그 무시무시한 모습이 떠오른다.

맹은 물론이고 마교, 사파할 것 없이 공평하게 때려 부수던 리어.

이 남자의 손아귀에 검을 부러트리고 중이 된 인물만 열이 넘는다.

오죽하면 마교에서 맹으로 이런 서신을 보냈을까.

‘저런 놈 데리고 정마대전 일으키는 건 선 넘었다.’ 라는 내용으로.

“에이. 전 그냥 결혼도 못하고 늙을 운명 같아요!”

“그러지 말고 차라리 바다 건너 그곳을 다시 가보는 건 어떠냐.”

하나 있는 딸이 노처녀로 늙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

해서 존 나센 남작이 그런 의견까지 내놓기도 했다.

“슬슬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닐 영감이 존 나센 일가를 재촉한다.

기껏 제도까지 와서 지각이라도 하면 카일을 볼 낯이 없다.

해서 존 나센 일가는 바로 바깥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아! 저기 오시네요!”

“아버님! 어머님!”

한쪽에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여인들.

티샤와 엘가, 그리고 성녀가 존 나센 남작 내외 곁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주는 드레스를 걸쳤다.

티샤는 연보랏빛의 드레스를, 엘가는 연한 느낌을 주는 붉은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성녀는 물빛의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다.

“잘들 어울리네요. 그래도, 너무 과하게 힘을 주면 안 된답니다? 오늘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남작부인의 말에 세 여자가 맞다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오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여인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사람.

성녀가 순번을 양보하며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된 황녀였다.

현 황제의 여식이 한 남자를 반려로 맞이하는 날이다.

응당 제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장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황실 결혼과는 다르게, 오늘 식은 많이 간소화되었다.

겉으로는 너무 많은 세금을 쓰지 않고자 한다는 황실의 의지가 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연을 맺는 곳이 ‘존 나센’ 이기에 그러한 부분이 크다.

물론, 제도 전체가 축제가 되는 건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세 대공 가문에서 모두 직접적으로 사람을 보내왔어요. 이렇게 세 곳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던데.”

“교단에서도 보냈답니다! 아예 식의 주례까지 교단에서 맡기로 했거든요!”

“동쪽의 유목 부족들도 특별히 축하의 뜻을 보내왔다. 늑대의 후예들이 보내는 초원의 축복이라나 뭐라나. 이상한 말들은 여전히 줄지를 않았단 말이지.”

“아아! 그렇게 보면 남쪽 섬의 독립 영주들이랑 그 바다 건너 사람들도 축하의 뜻을 보냈어요! 특히나 바다 건너에서는 결혼 선물로 새로이 발명한 뭔가를 보낸다고 하는데요?!”

“왕국 연합에서는 아예 축하 서신이 아니라 사람들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하객 수준들만 보면 거의 제국의 황태자가 혼인이라도 하는 느낌이다.

실상은 그냥 막내 황녀와 남작가의 자제가 연을 맺는 것인데 말이다.

“카일이 잘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으음. 저는 오히려 카일이 대기실에서도 운동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어? 아하하! 그러네요. 분명 그럴 것 같아요!”

*

“…이보게, 매제.”

“예, 황태자 전하.”

“자네 오늘 결혼식일세. 긴장도 안 되는 것인가?”

그러자 카일은 ‘당연히 긴장되죠! 되고말고요!’ 하고 답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느껴진다.

이제까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는데 당일이 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이 결혼을 세 번은 더 해야 하니 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그래도 ‘결혼을 한다.’ 라는 건 쉽사리 적응이 되는 게 아니지 않나.

“…한데, 그 긴장이 되는 사람이 신랑 대기실에서 운동은 왜 하고 있는 겐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황태자가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 정장까지 차려입은 카일은 그 사이를 못참고 또 운동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혹 옷이 찢어질까 과하게 움직이진 않는 중이랄까.

“이거 말입니까? 결혼 후에 며칠은 황녀님에게 집중하려고 미리 운동을 하는 겁니다.”

“…그냥 쉬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냥 쉬어도 됩니다만, 그거 제 가족들이 알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으음.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가는군. 열심히 하게. 매제.”

존 나센 남작이 실망이라니. 그래서는 안 되지! 아암!

황태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카일을 응원했다.

심지어 카일을 축하하기 위해 들어오는 이들을 자신이 일부 상대해주기도 했다.

아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카일이 이렇게 계속 단련하는 이유.

존 나센에서의 결혼식은 축하를 받는 자리이자 하나의 시험장이기 때문이다.

제국의 예법을 최대한 따르지만 존 나센의 것 또한 분명 이 결혼식장에 있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근육을 당겨놓는 게 유리했다.

“카일 존 나센!”

그리고 그 존 나센의 예법은, 머지않아 식 중간에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이제까지는 정말 평범하게 진행되던 결혼식의 와중에.

갑작스레 보고만 있어도 절로 으스스해지는 존 나센 남자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멀찍이 보고 있던 황제가 당황하든 말든, 대공 쪽 사람들이 황당해하든 말든.

온 사방에서 축하의 뜻을 보내온 이들이 이게 뭔 일이야, 하고 놀라든 말든.

이들은 오로지 카일을 바라보며 ‘존 나센 예법’을 실시해나갔다.

“신부를 안고서 스쿼트 500회를 실시한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카일과 에엥? 하고 당황한 모습의 황녀.

그러는 사이 카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황녀를 품에 안았다.

이후 하객들이 경악하든 말든 엄청난 빠르기로, 정자세를 유지한 채.

“내 팔자야!!”

라고 외치며 첫 번째 시련을 이겨내는 데에 성공했다.

“다음! 신부를 등 위에 얹고 푸시업 300회! 빨리 합니다, 빨리!”

“황녀 저하! 카일 도련님께 업히세요! 그리고 도련님! 그 상태로 한 손 턱걸이 들어가겠습니다! 개수요? 당연히 황녀 저하를 사랑하는 만큼! 못해도 100개는 채웁니다!”

“카일 도련님을 사랑하십니까, 황녀 저하?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만큼 봉에 원판을 끼우시면 되겠습니다! 카일 도련님! 황녀 저하의 사랑을 받아서! 자, 갑시다!!”

“등판 위에 원판을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황녀 저하! 이 플랭크 자세는 카일 도련님이 황녀 저하께 바치는 사랑만큼이나 무겁고 귀한 것입니다!!”

“크아아아아아!!”

알겠으니까 좀 적당히 좀 해줘요, 고향 사람들아!

당신들은 첫 결혼이 마지막이니 한 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빌어먹을! 나는 이거 아직 세 번이나 더 해야 한다고!

*

“공녀님! 부족합니다! 카일 도련님을 사랑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더 올리세요!”

뭐지, 시바. 데자뷰인가. 이거 한 달 전에 겪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됩니다! 밑에 깔린 도련님은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티샤 양! 가장의 무게를 견뎌내는 도련님께 미안해할지언정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겁니다! 다시 올라가세요!”

이상하네. 이거 분명 한 달, 그리고 두 달 전에 했었는데 말이야.

“잘 하고 계십니다, 성녀님. 자, 저희가 원판을 좀 더 드릴 테니 끼워주시지요!”

마지막 결혼식까지 치르며 카일은 아아, 하고 비로소 결심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 존 나센에 걸맞게 튼튼하게 키워야지. 나만 당할 수는… 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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