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 말 그대로 혼인을 ‘약속’ 하는 것.
이루어지면 정말 어지간해서는 부서지지 않는 게 결혼이지만.
약혼은 어디까지나 약속인지라 언제든 깨질 가능성을 지닌다.
결혼을 무르는 것은 사교계에서 굉장한 실례다.
하지만 약혼은 각 가문의 사정에 따라 충분히 깨질 수 있다.
물론 실례가 아닌 건 아니지만, 결혼에 비할 건 못된다.
그렇기에, 약혼은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행사이다.
굳이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커다란 연회를 베풀 필요가 없다는 것.
“…그래도 물 한 그릇 떠 놓고서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반년에 가까운 경쟁 끝에 첫 번째 약혼자 자리를 차지한 티샤.
그리고 그 약혼식이 열리는 자리에 초대를 받은 다른 여인들.
그렇기에 엘가는 더더욱 지금 눈앞에 비친 모습을 보고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난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적당한 파티 정도는 열 줄 알았어요.”
“저한테 오실 줄 알고 일부러 예배당도 비워두었는데요!”
성녀도 엘가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오직 황녀만이 ‘본인 의사는 존중해야지.’ 하고 중얼거릴 뿐.
“아하하… 전 이게 편해서요. 그리고 이 다음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가 없거든요!”
“이 다음이요? 이 다음이 뭔데요?”
그러자 티샤는 헤헤! 웃으면서 슬그머니 손등을 들었다.
카일 또한 그녀가 하는 대로 역시나 손등을 보였고 말이다.
“간단한 주술을 걸 건데, 부정을 타지 않으려면 사람이 적은 게 좋아서요!”
“주술이요? 어… 뭘 하려는 건데요. 혹시 막, 나중에도 첫 번째가 되겠다는 건….”
엘가의 의심이 짙어지려고 하자 티샤가 ‘그런 건 없어요!’ 하고 급히 말을 잘라냈다.
덤으로 존 나센의 가족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냐고도 하고.
“이건 일종의 축복 같은 거예요. 약혼을 하면서, 함께 서로의 시간을 거는 것이고, 그러는 동안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해주는. 뭐 그런 거라고 할까요?”
“…이야기만 들으면 절대 부정을 타서는 안 될 것 같아.”
황녀가 그리 말하자 성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그러면 카일? 슬슬 준비해주세요.”
알겠다고 답한 카일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린다.
잠시 후 그가 꺼내든 것은 여러 개의 마법 통신구들이었다.
하나의 값만 따져도 어마어마할 텐데, 그걸 왜 저리 많이 들고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그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대신하였다.
[ 아아. 아! 들려, 카일?! ]
[ 레아. 막내 놀라겠다. 조금만 작게 말하렴. ]
[ 살짝 흐릿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 보이는구나. ]
통신구 너머로 보이는 건 존 나센 남작, 남작부인, 그리고 레아.
셋 모두가 한창 사이좋게 중량을 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 이쪽도 잘 보이네. 사위. ]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리토리오 대공.
맡고 있던 업무 중 일부를 엘가에게 넘겨서 그런 것일까?
이전에 봤을 때보단 얼굴빛도 확실히 좋아진 상태였다.
[ 어허허! 정말로 물 한 잔만 떠놓고 끝인 건가? ]
한창 교단의 일로 바쁠 텐데도 굳이 얼굴을 비춰준 교황.
원래는 추기경이 대신하려고 했으나 굳이 본인이 나섰다고 한다.
이래야 나중에 성녀의 약혼 때 면이 선다고 했던가.
[ …마음에 드는군, 매제. 허례허식 따위는 없어서 아주 좋아. 황실이 티샤 양에 대한 지원을 한 건 역시나 현명한 결정이었어. ]
마지막으로, 정말 굳이 얼굴을 보일 이유가 없는 황태자.
다만 황녀가 황태자 정도는 나와야 본인 면이 선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막내 여동생의 성화에 못이긴 오빠로서 결국 얼굴을 비추고 말았다.
[ 이동 중이라서 그런지 화질이 좀 별로인 걸 이해해주거라, 막내야. ]
[ 카일 님! 티샤 님! 약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현재 막 제국 국경을 넘어서서 유목 부족들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리어와 넬.
그 옆에는 의도치 않게 이 장면을 보게 된 제갈소연과 검선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빨리들 다녀요. 이 대단한 자리에 초대를 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이안과 레토. 이 둘까지 전부 자리에 모였다.
결혼이 아니기에 하객들은 하나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가족들, 그리고 가족 같은 정말 친한 이들만 부른 자리.
이렇게 조촐한 약혼이 될 거라곤 예상을 못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자, 그러면.”
티샤가 자신을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는 듯, 먼저 물잔을 집어 든다.
그리고 그 위로 가볍게 ‘후우.’ 하고 숨결 한 번을 불어넣는다.
사아아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이 티샤가 준비한 잔 위로 스며든다.
그러자 순간 물결이 찰랑거리는가 싶더니 푸른 줄기 하나가 맴돌다 사라진다.
다음 차례라는 듯 티샤가 물잔을 카일에게로 넘겨준다.
카일은 그걸 받아들고서 티샤와 똑같이 행동했다.
숨결 한 번을 불어넣자, 이번에는 붉은 줄기 하나가 시작된다.
그 붉은 줄기는 물 안에서 푸른 줄기와 한 번 얽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서로 섞여 완전히 사라졌다. 물은, 여전히 투명한 상태였다.
“저와 카일. 마침내 사랑과 신뢰의 증표로서 부부의 연을 맺기 전까지. 이 자리를 빛내준 모든 분들에게 안녕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저와 티샤. 비로소 애정과 동행의 약속으로서 반려의 연을 맺기 전까지. 이 자리를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번영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직후 분명 아무 것도 없던 물에서 다시금 두 기운이 조용히 한 차례 더 얽힌다.
“…이걸로 된 건가요, 티샤?”
“네. 아직은 결혼이 아닌 약혼이니까요. 지금은 우리 미래보다, 축하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축복을 빌어주는 게 더 강하거든요. 음, 너무 아무 것도 없어 보였나요?”
티샤의 말에 카일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던 약혼보다 훨씬 더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냥 ‘우리 약혼합니다! 반지 교환하고! 끝!’ 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티샤의 약혼은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기억에 남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인들이 알게 모르게 경계심을 살 만큼!
‘그냥 적당하게 반지 교환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그리고 작은 파티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뜻깊은 자리를 만들어버리면 경쟁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고요, 티샤.’
‘저런 방식으로 하는 것도 괜찮군요. 역시 티샤 자매님. 첫 번째 순서로서 많은 걸 알려주시네요! 나중에 예배당에서 약혼을 할 때 참고해야겠어요!’
‘연구 발표회 때 당장 준비해야 할 게… 교수 이놈, 나중에 반드시 죽여… 아니지. 죽이면 학위 취득이 문제니까 다 끝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을….’
*
첫 번째였던 티샤를 시작으로 나머지 약혼들이 진행되었다.
비교적 조용한 것을 원했던 티샤와는 다르게, 셋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소란스러웠다.
각자 차기 대공, 얼마 전까지 교단의 성녀였던 인물, 그리고 현 황녀이기에.
아무리 약혼이라지만 소리 소문 없이 그냥 지나치기엔 무리가 많았다.
그리고 그 말인 즉, 카일 또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야 한다는 것.
“어차피 반지야 나중에 질리도록 껴야 할 테니 패스고….”
약혼반지가 보편적이라고 하지만 굳이 반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결혼을 하면 어차피 갈아타야할 반지, 괜히 고가로 사봤자 환불도 안 된다.
그렇기에 요즘은 적당하게 악세사리로 끝내는 게 유행이라고 했던가.
해서 카일은 엘가와의 약혼 때는 일단 목걸이를 준비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니 루비가 박힌 것으로.
다행히도 엘가는 그 물건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약혼 선물이 너무 예쁘네요. 나중에 결혼식에도 끼고 들어가야겠어요.”
나쁘지 않다. 약혼 이후 버림을 받으면 목걸이만 슬픈 일.
엘가의 그 말에 카일은 웃으면서 목에 제 선물을 걸어주었다.
약혼식에 초대를 받은 이들이 박수를 치며 부디 약속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 녀석. 이 애비가 비슷한 거 선물하면 잘 웃지도 않더니. ]
어쩔 수 없이 서운한 감정이 들었는지, 리토리오 대공이 투덜거린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교황이 위로를 건네는 웃긴 그림도 그려졌었고.
다음 약혼식은 성녀가 원하던 대로 예배당에서 이루어졌다.
이번에 카일이 준비한 것은 성녀와 잘 어울리는 은색 팔찌.
일부러 교단에 찾아가서 괜찮은 문구까지 새겨 넣는 수고를 했다.
- 두 사람이 맺어지니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
성녀는 그 문구를 보자마자 어머! 하고 웃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공을 들일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성녀의 약혼식 때는 엘가 때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오히려 티샤의 약혼 때처럼 정말 있어야 할 이들만 부른 수준.
그럼에도 오히려 꽉 찬 느낌을 주는 건, 비단 착각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황녀와의 약혼식 때는….
“대체 저보고 왜 이걸 대신 전달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대박. 나한텐 이게 최고의 약혼 선물인 것 같아.”
연구 발표회 이후 황녀가 내놓은 논문 합격을 알리는 통지서.
원래는 교수가 주어야 할 걸 희한하게도 카일이 전달하는 모습.
그것도 약혼식에서 굳이 이래야 하나 싶었는데, 황녀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 카일. 학위만 따면 이제 끝이야.”
“…그 다음부터 얼마나 대련하자고 조르려고요.”
“밤새도록 대련해야지. 지금도 얼마나 하고 싶은데.”
내 팔자야. 카일은 고개를 내저으며 황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