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 이번 약혼 순서는 내가 마지막으로 할게. …미친 거 아니냐고? 응. 살짝 그럴지도. 실은 그 전까지는 연구 발표회가 있어서. 시간을 못 낼 것 같아.”
세상에. 대학원생들이여. 대체 그대들은 어떤 싸움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며칠 전 카일을 찾아온 황녀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황녀를 꼭 안아주고 말았다.
그렇게나 1등을 탐내던 황녀가 스스로 ‘이번은 포기.’ 라고 할 정도라니.
결혼식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사교계에서 약혼은 꽤나 무게를 갖는데.
거기서 황녀가 제일 끝으로 밀리는 게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될지 알면서도.
‘이건 나중에 어머니께 무조건 말씀을 드려야겠다. 황녀님이 진짜, 엄청 고생했다고.’
물론 티샤나 엘가, 그리고 성녀의 노력을 가벼이 여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좀 그렇잖아. 지금 황녀가 밟고 있는 과정이 대학원생 과정이라는데.
그쪽이 요만큼. 그래도 아주 요만큼은 더 힘들다는 게 카일의 속내였다.
아무튼, 이번 대선… 아니지, 약혼에서 황녀는 자동적으로 네 번째 확정.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세 자리를 어떻게 채우느냐, 가 더 중요해진다.
‘아직까지는 티샤가 단독 선두. 그 뒤를 엘가님이 바짝 쫓고, 성녀님은 차기 성녀님 건도 있고 추기경단 투표도 있어서 주춤하신 상태… 으으음, 이거. 세 번째도 정해진 거 같은데 말이지.’
설마 이런 식으로 외부 요인으로 인해 결판이 날 줄이야.
황녀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서, 성녀는 교단 내부의 일로 인해서.
이러면 결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고 해도 좀 싱거운 느낌이 없잖아 있다.
“으으으음….”
크게 고민할 건 없다. 약혼 순서가 절대적인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결혼 순서는 별개고, 그 다음 있을 모든 것도 전부 별개의 경쟁이다.
존 나센의 일원이 되기로 했다니 응당 그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의 말씀이 있으셨으니 모두 따라야만 한다.
심지어 그 존 나센 남작조차 ‘집안일은 네 엄마 말을 들어라.’ 라고 했을 정도다.
- 티샤
- 엘가
이 둘 중 하나를 고르고, 하나를 고르지 않아야 하는데.
무언가 확실한 이유라도 있는 두 여자와는 다르게, 이 둘은 서로 너무 비슷하다.
일단 학업 부분은 근소하게 티샤가 좀 더 우위에 있다.
원래부터 머리도 좋았고, 또 성적 우수로 교수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났다.
하지만 단련 부분으로 보자면, 반대로 엘가가 우위를 점한다.
단순히 혼자 단련하는 티샤와는 다르게, 엘가는 가문의 기사들과 훈련을 병행했다.
그 결과 기사들조차도 박수를 보낼 정도로 수준이 올랐다고 했던가.
‘기한은 1학기 여름방학 전이라고 했지만… 이렇게 된 거 빨리 정하는 게 좋지.’
정해진 시일까지 딱 맞추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기에.
이번 주 안으로 확답을 정해서 알리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 카일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도착하실 때가 되었는데.”
시간을 확인한 카일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심부름꾼이 달려와선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카일 존 나센 공자님. 지금 막 제도 방향으로 동쪽 손님 분들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쪽에서 온 손님들, 정확히는 무협 세상에서 온 이들.
카일은 그들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제갈소연도, 그리고 표국 사람들도.
검선 정도라면 또 모르겠다. 전에는 한바탕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이미 마지막 한 방울까지 고향에서 쪽쪽 빨렸을 터.
나이가 있으시니 몸 관리는 해야지. 적어도 고향 가는 길 평온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카일이 그들을 보러 가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일행들에 뜬금없게도 제 형, 리어 존 나센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냐고. 거기는 외공에 크게 관심이 없을 텐데.’
무협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껄끄럽게 여겼던 부분이다.
많이 알지는 못 하지만, 적어도 외공과 내공 정도는 카일도 안다.
그리고 존 나센이 극한의 외공 단련이라면, 무협의 고수들은 극한의 내공 단련가들.
서로 반목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은근히 대립할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다.
리어도 그걸 어렴풋이 눈치 챘을 텐데, 대체 왜 동쪽으로 가려는 것인지.
‘설마 거기까지 가서 존 나센 헬스장이라도 열려는 건가?’
…아무래도 확답은, 형을 직접 만나서 들어봐야 할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카일은 제도 쪽 이동 마법진을 향해 이동했다.
*
“…형님.”
“왜 그러니, 막내야.”
“혹시 이거… 시체는 아니죠?”
그러자 리어가 ‘그럴 리가 있느냐.’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전투광이라지만, 그래도 정말 훌륭한 상대인데.
왜 그런 인물을 해쳐서 언젠가 또 있을지 모를 즐거움을 없애겠냐고.
“…그런데 이 노인장은 왜 이러고 계신답니까?”
쿡쿡-.
카일은 리어가 손수 끌고 온 수레 위에 누워있는 검선을 누르며 그리 말했다.
일단 호흡은 하고 있는 걸 보니 리어의 말대로 시체는 아닌 것 같은데.
나름 한쪽 세계관의 최강자가 왜 두 발이 아니라 누워서 실려 간단 말인가.
“노인장은 놔둬라. 아버지하고 사흘 밤낮. 다시 어머니하고 이틀 밤낮. 마지막으로 누이하고 하루 종일. 딱 거기까지 하고 후련하다는 말과 함께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이야…. 정말요? 정말 아버지하고 싸우고, 쉬지 않고 어머니에 누님까지 상대했다고요?”
“그렇다. 뭐, 마지막엔 나도 좀 할까 했는데 너무 깊게 잠이 들어서 깨우기 미안하더구나. 사실 누이도 떠나야 하는 그 직전까지 싸운 거니까, 적당히 해야지.”
설마 리어의 입에서 ‘적당히 해야지.’ 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만큼 검선이 보여준 강호 최강자의 위용이 대단했다는 뜻이었다.
만약 영 그랬다면 리어가 멱살을 쥐고서 흔들어 깨웠을 테니까.
“것보다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정말로 가시려는 겁니까?”
“흥미가 생겨서.”
“무슨 흥미 말입니까? 혹시 거기 세상에만 있다는 초식, 뭐 그런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고향에서 부모님 다음으로 움직이지 않는 게 바로 제 형과 누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카일이기에, 자리를 비운다는 게 꽤나 놀라웠다.
‘그렇다고 저번 남쪽 대륙마냥 가서 운동기구를 잔뜩 들여오는 것도 아니고.’
듣자하니 남쪽 항구에 기어코 그곳에서 보낸 배들이 도착했다고 한다.
하나 같이 운동기구들을 아주 잔뜩 실어서는 말이다.
식민지 운운하던 세상을 운동기구 만드는 식민지로 만들고 왔다니.
새삼 제 형과 누나의 무력 또한 압도적임을 카일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예?”
리어의 답을 기다리던 카일이 놀라서는 큰 목소리로 반문한다.
아니, 정말로 내공이니 초식이니 뭐 그런 거에 관심이 있던 건가?!
설마 가서 당대의 천마가 된다거나, 혹은 고금제일인이 된다는….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좀 들어서 말이다.”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는 건데요.”
“그쪽 세상에 내부의 기를 순환시키는 게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육체의 단련까지도 꾀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런 흥미로운 이야기.”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그곳에선 육체 단련만큼 내공 단련도 중요하니까.
“허면 그걸 이용해서, 몸이 받는 과부하를 혹 더 늘릴 수 있지는 않을까?”
“….”
“기구만으로 최고 효율을 뽑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런 상황에 특정한 방법으로 육체에 과부하를 줄 수 있다면… 분명 단련을 하는 맛도, 느껴지는 총량도 달라질 거 아니냐.”
“… ….”
그래, 그러면 그렇지. 대체 내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카일은 이제는 일일이 반응하기도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형님의 뜻은 충분히 잘 알았습니다. 부디, 잘 다녀오시길 기원합니다.”
“막내,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참으로 기분이 좋구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리어가 갑자기 고개를 슬쩍 숙인다.
“그리고 실은 말이다.”
“네, 형님.”
“이번에 이 형이 노인장과 한 판 하지 않은 이유는, 가서 다른 이들과 하려고 한다.”
“…아.”
그러니까 고향에서는 최고 중의 최고 별미를 가족들에게 완벽 양보하고.
육체 과부하를 더 많이, 더 강하게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하면서.
혼자 가서 그만큼의 별미를 모조리 먹어치우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이렇게 보면, 형님도 은근히 머리가 잘 굴러가는 부분이 있단 말이야. 아, 하기야. 우리 형님도 생각해보면 아무 문제없이 아카데미 졸업까지 하신 분이지.’
라고 생각하던 카일은 문득, 리어의 옆에 선 제갈소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 고향은 좀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에? 아, 네! 저, 정말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무쪼록 잘 돌아가세요.”
“감사드립니다. 그,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뭘 또 뵙기까지야. 그쪽이랑 한 번 더 같이 있는 거 여자들 눈에 보이면 나 죽어요.
‘아, 맞아.’
잊을 뻔한 사실을 떠올린 카일은 리어에게로 다가갔다.
“형님. 그, 약혼 순서 말입니다. 얼추 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냐? 제수씨들한테는 말했고?”
“아직요. 일단 형님께서 먼저 오셨고, 또 멀리 가신다고 하니 알려드리려고 하는데요.”
“그러면 되었다. 그런 건 제수씨들한테 먼저 알려주거라.”
라고 말한 리어는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냐?’ 라고 물었다.
날짜를 대강 알아야 본인도 돌아올 시기를 계산할 수 있다면서.
“음… 글쎄요. 늦어도 이번 년도 안으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겠다. 그러면 몇 달 내로 다 끝내고 와야겠구나.”
저 말이 ‘몇 달 내로 강호 평정하겠다.’ 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
카일은 리어의 말에 그저 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